설교자료/창세기

[창26:26] 하나님을 보여주는 사람

'코이네' 2016. 6. 4. 20:39

 하나님을 보여주는 사람

 

창세기26:26-35

 

서 론

저는 요사이 깊은 고민 한가지가 제 마음을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은 믿는 자들의 타인에 대한 실망을 주는 삶입니다. 많은 경우 직접적으로 듣기도 하였고 간접적으로 남을 통하여 듣기도 하는 소리가 "왜 예수를 안 믿느냐?", "아무개 아무개가 예수를 믿는데 그 사람을 보니 믿어도 별거 없을 것같아 안 믿는다" 또는 "당신의 남편은 왜 교회에 안 나오시지요?", "시골에서 교회 다니다가 먼저 믿는 사람들에게 크게 상처를 받고 그만 두게 되었습니다." 혹은 오래된 집사들 중에도 "나는 교회를 다니지만 내 남편이나 내 주변의 믿는다는 사람들을 볼 때 신앙생활에 의미를 못 느낌입니다. 저는 지금 그냥 나가고 있는 것이니 큰 기대하지 마십시오"

 

미국에서 복음을 전하러 오신 목사님이 공항에서 택시를 탔습니다. 늘 하던 대로 기사에게 전도를 했는데 그 기사는 고개를 설래 설래 흔들며 예수님 이야기하지도 말라고 합니다. 교회에서 나오는 여자들 태우면 뒤에 앉아 '목사님이 어떻고 ,아무개 집사가 어떻고' 하면서 험담을 하며 비웃으며 별 소리 다 하다가 이 골목 저 골목 들어가자고 하고 내릴 때는 거스름돈 500원 300원까지 꼭 받아간다며 예수님 소리 들으면 거부 반응이 나니 예수 소리는 하지도 못하게 하더라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정중하게 "죄송합니다. 제가 그분들을 대신해서 용서를 빕니다. 그분들이 교회는 나가지만 아직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것 같군요"하며 사과를 드리자 그 기사는 목사님을 힐끗 쳐다보며 얼굴이 좀 풀리더라는 것입니다. 건축을 하는 분, 집집을 방문하며 전자기기를 손을 봐주는 분, 이런 분들이 믿는 분들을 많이 만납니다. 그런데 "집사님, 권사님"하며 야단을 떠는데 더 인색하고 담배도 더 잘 피우고 찬장에는 양주병이 놓여 있고 인상도 더 잘 쓰는데 자기는 교회에 나가지는 않지만 부인이 집사요, 충실한 교인이므로 늘 교회와 예수님에 대하여 호기심과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데 "저 사람들이 믿는 예수님하고 내 아내가 믿는 예수님하고 좀 다른가 보다 어찌 창피도 모를까?"하는 소리를 듣기도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 러분의 신앙생활은 어떠합니까?

 

{1} 먼저 여러분의 신앙생활의 현주소를 진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다음 몇 가지 중의 한 사람일 것입니다. 첫째로 여러분도 다른 신자들의 형편없는 인격과 삶을 보고 실망을 하고 마음속으로 '언젠가 신앙생활을 그만 두어야지, 별것 없네,' 또는 자기도 신자이면서 앉기만 하면 '믿는 사람들이 더 나쁘다, 욕심이 더 많다, 교회가 사랑이 없다'하며 비판만 하는 신자가 있는데 이런 사람들을 "부정적 신자"라고 합니다. 둘째로는 교회는 다니지만 세상에 나가서는 아예 예수 믿는다는 소리를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실수를 하여 교회와 예수님과 믿는 사람에게 욕을 먹일까 봐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들어 와서는 믿는 사람이지요. 그러나 교회밖 세계로 나가서는 불신자예요, 무슨 짓이나 해도 괜찮아요, 왜냐하면 자신을 믿는 사람이라고 밝히지 않았으니까, 신바람나게 세상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지요. 이런 사람들을 비겁 신자, 동굴 신자라고 합니다. 셋째로는 오병이어신자가 있습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예수님이 배고파하는 5천명의 무리들에게 오병이어로 배불리 먹이고 12광주리나 남겨 주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을 왕 삼으라고 좇아 다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을 떠나 버립니다.

 

기억하세요. 하나님과 예수님을 통하여 정치, 경제, 자녀 교육, 결혼 문제, 직장 문제, 건강 문제, 그 밖에 어떤 인간 문제를 해결하는데 이용하기에만 급급한 신자들은 구원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말입니다. 교회를 왜 다닙니까? "아, 저 교회에는 청년 프로그램이 좋구나", "아,저 교회는 유치원 프로그램이 좋구나", "아, 저 교회는 노인 프로그램이 좋구나", "아,저 교회는 주차장과 친교 시설이 좋구나"하면서 교회를 다닙니다. 이런 사람들은 구원과 하나님의 사랑과 주안에서 구원받은 성도들과의 사랑의 생명적 교제와 자신을 자녀같이 사랑하고 아끼며 새벽마다 시간마다 염려하며 걱정하며 기도하고 돌보는 목자들의 마음을 이해 못합니다. 오직 자신과 자기 가족의 유익을 따라 교회를 수시로 바꿉니다. 자신과 가족의 욕구 충족에 필요하면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 교회도 열심히 다닙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이나 교회가 자신들의 욕구에 만족을 못 주는구나 생각이 들면 예수님도 교회도 얼마든지 바꿉니다. 요한 복음 6장에 보면 오병이어 기적의 떡과 고기를 얻어먹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영원한 생명과 생명수의 이야기를 하자 이해가 안됩니다. 더 이상 떡을 만들어 줄 기미가 안보이자 다 떠나고 12 제자만 남았습니다.

 

그러므로 나를 구원하시고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신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행복과 만족이 있음을 모르며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뗄레야 뗄 수 없는 가족 공동체가 되어 사랑과 은혜를 나누며 피차 합력하여 서로 키워 주며 주의 사역을 실천함는 것을 소중히 여길 줄 모르는 사람들을 "오병이어 신자" 혹은 "표적 신자, 구문 신자"라고 합니다. "표적 신자"는 자기의 필요와 소원을 채워 주는 그 무엇이 보일 때면 열심 내고 따라 다니다가 그게 안보이면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문 신자"란 표적 신자와 같은 의미인데, 아홉 "구"와 문둥이 "문"입니다. 10명의 문둥이 중에 9명은 문둥 병이 낫기까지만 예수님을 따르고 부르짖다가 병이 다 낫자 예수님을 다시는 안 찾아요, 가버렸습니다. 이런 사람을 구문 신자 라합니다.

 

자, 여러분은 어디에 속하십니까? 이 모든 것에 속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만일 양심에 걸림이 있다면 이 시간 진심으로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을 떠나 버리십니다. 이런 사람들의 왕노릇은 결코 안하십니다. 넷째로 이 남하 목사님의 별난 교회란 책을 보시면 콩알 신자가 있다는 말씀을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콩알은 생명은 있습니다. 예수님을 진심으로 믿습니다. 그래서 천국에 들어갈 소망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콩알은 다른 콩알하고 언제나 합해지지 않습니다. 혼자 놀아요, 그런데 가끔은 다른 콩알하고 어울리는데 그것은 콩자루에 담아 놓을 때만 다른 콩들과 부딛치고 어울립니다. 그러나 합해지지는 않아요, 말을 하고 일을 하고 모이기는 하였는데 콩알이 빤질빤질하며 안 합해지듯이 마음을 열고 서로 진심으로 합해지지가 않습니다. 희생도 관심도 협력도 친절한 말, 그 어떤 따뜻한 반응도 없어요, 거저 빤질빤질입니다. 그리고 남하고 잘 부닥쳐요, 왜 그런가요, 혼자 잘난 줄 아니까 그래요, 그러면 콩자루는 무엇입니까? 예배 모임입니다. 큰 콩자루는 주일날 낮 예배와 오후 예배이고요, 작은 콩자루는 수요 예배와 금요 저녁 기도회이겠지요, 또 아주 작은 콩자루는 새벽 콩자루, 여 전도회 콩자루, 형제회 콩자루, 청년회 콩자루, 성가대 콩자루 등등입니다. 그런데 이 콩들이 자루에서 빠져나가면 모두가 다 개인적이고 제멋대로 입니다. 즉 교회의 모임만 끝나면 모두가 세상으로 돌아가 다 제멋대로 합니다. 물론 속에는 콩알의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생명은 자기 홀로 가진 생명입니다. 그 홀로된 콩알 생명력으로는 마귀와 세상의 유혹과 온갖 육체의 욕구들을 결단코 막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콩알은 한 주간 내내 자기 마음대로 콩콩콩 하며 굴러다니다가 가끔 가끔 콩자루 속으로 들어옵니다. 그런데 어떤 콩알은 자루 속에도 안 들어와요, 그러면 어느 날엔가 마귀라는 새들이 콱 쪼아먹어 버립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끝이 납니다. 여러분 콩알 신자는 위험합니다. 그리고 아무런데도 못 씁니다.

 

콩알은 자기를 솥에 넣고 푹 삶고 절구로 가루가 되도록 쩌야합니다. 그래서 메주가 될 때에야 크게 쓰임 받습니다. 모든 콩알이 하나로 뭉친 것입니다. 그제서야 간장이, 된장이, 고추장이 나옵니다. 신자들도 이러합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의 사랑의 솥에 넣어져 푹 삶아져야 합니다. "주님, 저는 콩알 신자였습니다. 저 혼자 잘 난줄 알고 떠버리며 잘 난 체하며 제멋대로 살아온 이 죄를 용서합소서, 다른 신자들과 연합하지 못한 죄, 주님의 사랑의 솥단지 속으로 들어가기를 힘쓰지 않은 죄를 회개합니다."하며 참회를 할 때 뜨거운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의 용서로 푹 쪄집니다. 그리고 이어서 하나님의 말씀의 절구공으로 쪼아져야 합니다. 권면의 절구공, 가르침의 절구공, 책망의 절구공, 경고의 절구공의 말씀으로 곱게 곱게 우리의 자아와 욕망이 다 부서져야 합니다. 그러한 신자들은 서로 서로 마음과 뜻과 정성과 물질이 예수님의 사랑으로 하나로 합해져 어마어마한 맛을 냅니다. 믿음의 간장, 소망의 고추장, 사랑의 된장이 되어 많은 신자들과 불신자들을 "아, 참 맛있구나!"하듯이 "정말 정말 진실한 신자들이구나" 할 수밖에 없도록 되어집니다. 이런 성도들을 메주 덩어리 신자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콩알 신자입니까? 메주 덩어리 신자입니까?

 

{2} 성경은 이런 메주 덩어리 신자들을 하나님을 보여 주는 사람들이라고 부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 창26:26 이하를 보십시오 "블레셋 왕 아비멜렉과 그의 친구 아훗삿과 군대 장관 비골을 데리고 이삭에게 화해를 신청하러" 왔습니다. 그들은 이삭을 자기 지역에서 추방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왜 '왕도 아니요, 두려워 할 만한 특별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아닌 이삭에게 화해를 신청하러 왔느냐?'입니다. 그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28절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음으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의 사이에 맹세를 세워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그리고 29절에서는 "우리를 해하지 말라,...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 할렐루야! 이것이 이삭을 두려워하며 부러워하며 화해를 신청한 이유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런 소리를 듣는 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권사님, 집사님 당신들을 보니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분명히 함께 하시는군요, 우리와 가까이 해주세요, 우리 한번 깊이 사귀어 봅시다, 당신들은 하나님께 복을 받은 분들입니다. 어쩌면 그렇게도 행복하게 기쁘게 사십니까? 우리도 그렇게 살 수 있는 길을 알려 주세요. 당신들과 같은 복을 받게 해주세요." 여러분 이삭은 하나님을 보여 주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방 나라 불레셋의 왕과 군대 장관이 알 정도로 그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소문이 그리고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 보여졌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총입니까? 그러면 이삭은 어떻게 믿었기에 하나님을 보여 주는 사람이 되었습니까? 그와 우리의 신앙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한가지입니다. 그는 매 순간 순간마다 하나님과 그의 행동을 같이 하였습니다. 무슨 일을 할 때마다 하나님과 동역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약속을 의심치 않고 굳게 믿으면서 어떠한 일이 발생 할 때마다 자기와 함께 동역 하시는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두 가지 사건만을 찾아보시겠습니다.

 

1. 첫째로 창26:1-13에 보면 이삭이 사는 지역에 흉년이 찾아 왔습니다. 이 때에 이삭은 일단 1차 남방의 그랄 땅으로 내러 갑니다. 그 다음은 자기 아버지가 흉년 만났을 때 찾아갔던 애굽으로 내려갈 참입니다. 그런데 2절 이하에서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내가 너와 함께 한다,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 내가 복을 준다, 그것도 자손 대까지 그리고 그 자손으로 인하여 천하 만민도 복을 받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때 이삭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흉년든 그 땅을 그대로 고수하며 애굽으로 내려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냥 버팁니다. 그리고 양을 치던 목자인데 12절에 보면 그 흉년이든 땅에서 농사를 집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해에 백배나 얻었더라"고 하였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이삭은 어떻게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하심을 보여 드렸습니까? 하나님께 대한 순종입니다. 애굽으로 내려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하나님도 예배도 진리도 없는 타협주의 세상으로 들어가지 말라는 하나님의 분부를 거역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는 비결은 흉년의 때가 더 좋은 법입니다. 어려울 때 말씀을 순종하면서 "하나님 아버지, 순종합니다. 명령대로 살렵니다. 메주 덩어리로 살렵니다. 이 어려움을 통하여 하나님이 나와, 우리와 함께 계심을 저 세상의 사람들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들어내시사 저들도 예수 믿고 구원받게 하옵소서"하며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결과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어느 큰 병원의 유명한 한 외과 의사가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에 항상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의 놀라운 의술과 수술에 대한 꼭 필요한 침착성은 많은 젊은 의사들로 하여금 '이 외과 의사의 성공적인 수술과 어떤 관련이 있지 않나'하고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어느 날 한 수련의가 용기를 내어 그 외과 의사에게 이 사실에 대하여 물어 보았습니다. 그 외과 의사는 "그렇다네. 이 두 가지 사이엔 분명한 관계가 있다네. 내가 아주 까다로운 수술을 집도 할 때도 많고, 수술 후에도 환자의 상태가 예상 못할 지경에 빠질때도 수없이 많은데, 이럴 때 나는 어찌해야 될지를 모른다네. 그렇지만, 나는 곧 주님의 도움을 간구하게 되며 주님께서는 내게 수술을 성공하도록 필요한 지혜를 주신다네. 나는 먼저 주님의 도움을 간구하지 않고 수술 칼을 손에 들어본 적이 없다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후부터 "주님과 함께 수술하는 의사"라는 말이 이 병원 직원들과 환자들 사이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궁극적으로 모든 치료는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 생명의 귀중함을 아시고, 겸손한 의사들을 통하여 자신의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겸손한 순종과 기도와 노력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보여 드리는 길입니다.

 

2. 둘째로 창26:12-24절의 말씀을 보면 이삭의 희생적인 삶이 나옵니다.

12절과 13절에서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복을 주심으로 거부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블레셋 사람들이 시기가 나서 이삭을 그 땅에서 축출하였습니다. 이삭은 순순히 그 땅을 떠났고 가는 곳마다 목축을 하는 그는 우물을 파서 물을 공급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물을 팔 때마다 블레셋 사람들이 달려들어 우물을 빼앗습니다. 그때마다 이삭은 그들과 다투거나 분노하거나 그 어떤 시시비비를 가리지 아니하고 손해 곧 희생을 하고 맙니다. 그런데 그렇게 계속하여 희생하며 양보하는 이삭에게 다시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것이 24절입니다.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 말라. 내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을 번성케하리라" 블레셋사람들은 이삭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삭의 아버지가 아브라함인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창21장에서는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찾아와 화친을 한 사실이 있습니다. 21:22절을 보면 그 때에도 그들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알고 두려워서 화해를 신청한 것입니다. 그들은 '설마 이삭에게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랴'하는 식으로 이삭을 무시하며 내어쫓고 우물을 빼앗고 야단입니다. 그런데 여기 24절에서 "하나님은 두려워 말라 너는 희생을 당한다 그러나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복을 준다."하시며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얼마 안 있다가 블레셋왕이 화해를 신청하러 왔고 아브라함 때보다 더 강력한 표현 "너에게 하나님이 함께 함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다"라는 "분명히"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삭은 아브라함보다 더욱 더 분명하게 하나님이 자신에게 함께 하심을 보여주었다라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신앙입니까?

 

성도 여러분 우리와 이삭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이삭은 어떠한 어려움에도 순종과 노력의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역 하였고 일마다 사건마다 희생을 당하면서 하나님의 이름과 아버지 아브라함의 신앙의 줄기를 지켜 왔습니다. 즐거울 때나 어려울 때나 제단을 쌓고 감격적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부릅니다. 26:25를 보세요. "이삭이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라"고 했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에게 함께 하심을 모든 사람이 보게 된 것입니다. 성도들이여 우리는 어떠합니까? 순종과 희생과 예배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을 행복으로 아십니까? 이러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다른 사람이 보도록 할 수 있습니다.

 

중앙 아프리카에서 선교를 하던 죠지 아틀레이라고 하는 젊은 선교사는 원주민들의 창과 몽둥이에 맞아 죽어 가면서도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영국 제윈체스트 연발총의 방아쇠를 끝까지 당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대로 쏘면 저들을 죽이고 자기는 살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젊은 선교사는 자기를 죽이러 오는 사람들인 줄을 알면서도 끝까지 총을 쏘지 않았습니다. 손가락 하나로 방아쇠 한번 잡아당기면 끝날 일이겠으나 그는 결코 그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내가 저 사람들을 죽이게 되면 이 마을에서의 하나님의 선교는 영영 끝이 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을 죽인 자가 전하는 예수를 누구인들 믿고자 하겠느냐 말입니다. 그 때문에 그는 끝까지 방아쇠를 당기지 않고 총을 든 그대로 개처럼 끌려가서 사지를 찢기며 비참하게 죽게 됩니다. 이렇게 죽은 다음에 보니 그에게는 그런 놀라운 총이 있었고 탄환도 열 발이나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알게 된 그 원주민들은 뒤늦게나마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이삭처럼 순종과 희생과 기도로서 메주 덩어리가 됩시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교회 안에서 그리고 저 세상의 요소 요소에서 보여 드립시다.

 

"주님, 부정적이었던 우리의 신앙을 용서하옵소서, 동굴 속에 숨어 믿던 비겁한 신앙을 용서합소서, 표적 신앙을 구문 신앙을, 그리고 콩알 신앙의 생활을 용서하옵소서, 이제 우리 모두는 순종과 희생으로 녹아지고 뭉쳐진 메주 덩어리로 살겠사오니 도와주옵소서. 그리하여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보여주게 하옵소서. 아멘"

 

 


by 코이네자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