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고린도서

[고전1;18] 종려주일에 생각하는 십자가의 능력

'코이네' 2016. 4. 6. 19:13

 

십자가의 능력

성 경: 고전1:18-25

 

 

오늘 종려주일을 맞이해서 십자가의 능력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중국의 신학자 C.S. 송은 기독교의 상징인 십자가와 불교의 상징인 연꽃을 다음과 같이 비교하여 설명을 했습니다. 연꽃은 물 위에 떠 있으면서 물결에 따라서 흔들리는 갈대와 같습니다. 자연의 변화에 자신을 순응하면서 적응시키되, 결코 거역하거나 충돌함이 없습니다. 매우 유동적이고 가변적입니다. 그러나 이에 비해서 십자가는 땅위에 서 있습니다. 반석 위에 서 있으면서 땅이 갈라지고 지진이 일어나도 결코 흔들림이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연꽃처럼 환경에 의해서 흔들리거나 어떤 환경에 휩싸여서 따라가거나 변질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환경이 어떻게 변하든,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거기에 적응하고 순응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고고하게 십자가의 진리를 굳게 붙잡고 흔들림이 없이 하나님을 섬겨 나가는 것이 바로 기독교인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에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십자가라고 하면 실패와 희생과 죽음을 의미하는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얼핏 보기에 십자가란 실패를 의미하는 것 같지만, 잠시 후에는 반드시 성공을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란 자신을 희생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마는 희생 이후에 반드시 축복이 뒤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죽음을 의미하지마는 죽음으로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는 부활의 영광이 반드시 뒤따라 오는 것입니다. 십자가야말로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입니다.

 

오늘 현대를 가리켜서 `실력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이 실력, 힘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먼저 `무력'이라는 힘이 있습니다. 현대식 무기, 핵의 힘이라는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력의 힘을 두려워하고 핵의 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또 `기술'이라는 힘도 있습니다. 이라크전에서 일본 첨단기술의 힘은 대단했습니다. 최신 첨단무기의 첨단 부품은 다 일제였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기술혁명을 일으켜서 첨단무기들을 개발해내고 있는 것입니다. `경제'라는 힘도 있습니다. 무력보다도 더 큰 힘이 경제력인것 같습니다. 제가 광화문을 지나다 보니까 인도에 현수막이 걸려있는데, `경제는 힘이다''라고 쓰여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경제도 힘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북한을 무력으로 제재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원조를 중단해 버리므로, 김일성이 손을 들지 않겠느냐는 계산에서 경제적인 제재를 취할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경제력보다 더 큰 힘이 있습니다. 그것은 `도덕''이라는 힘입니다. 도덕성이 없이는 경제나 기술이나 무력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오래전에 새마을운동이 일어났을 적에 `잘 살아 보세, 잘 살아 보세, 우리도 한번 잘 살아 보세' 그런 노래를 불렀습니다. 물론 잘사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마는 그때에 그 노래를 `바로 살아 보세, 바로 살아 보세, 우리도 한번 바로 살아 보세'그렇게 작사를 해서 불렀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한국의 어떤 기업가가 일본의 기업가를 만나서 점심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조용한 시간에 일본의 기업가에게 물어보았습니다. "한국의 문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이에 대한 대답은 이러합니다. "한국의 기업인들은 애국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일본의 기업가는 아무리 좋은 물건이라 할지라도, 아무리 돈을 벌 수 있는 물건이라 할지라도 국익에 손해가 가면 절대로 수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기업가들은 국익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돈을 벌 수 있는 물건이라고 하면 무엇이든지 수입 해 들이는 것 같습니다." 이 얼마나 따끔한 이야기입니까? 왜 공산세계가 무너졌습니까? 인간성이 무너지고, 도덕성이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공산주의 사상이 결국 게으른 백성을 만들어 냈고, 거짓말하는 백성을 만들어 냈고, 무책임한 백성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도덕성이 무너지면 국가도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견고한 나라를 건설하려면 도덕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나라에서 신한국을 건설하자고 운동을 일으키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잃어버린 이 '도덕성'을 되찾자고 하는 것입니다. 도덕이란 힘은 대단히 큰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보다 더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할렐루야! 십자가란 예수님 이전에는 로마사람들이 죄인을 처형하던 사형도구였습니다. 죄 많은 사람들이 못 박혀 죽는 십자가는 고통스러운 것이요, 또 부끄러운 치욕의 상징이요, 저주의 상징이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십자가에서 죽어 주셨습니다.

 

죽음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보통 죽음'이 있습니다. 나이가 많아서 세상을 떠난 죽음이라든지, 부산 열차사건같은 불의의 사고로 인한 죽음이라든지, 병에 걸려서 죽는 죽음같은 평범하고 일반적인 죽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믿는 신앙의 진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순교자의 죽음'이 있습니다. 또는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순국의 죽음'이 있는 겁니다. 그러나 이러한 죽음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죽음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대속의 죽음"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주신 죽음은 보통죽음도, 순교자의 죽음도 아닙니다. 더군다나 순국의 죽음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죽음은 온 인류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해 내시기 위하여 우리를 대신해서 죽어주신 대속의 죽음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죽음은 가장 고상한 죽음이요, 가장 위대한 죽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주셨는데, 이 십자가에는 위대한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첫째로 구원의 능력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어 주심으로 온 인류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 해 주신 것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다"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하심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의롭다함을 얻은 자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생활을 하다가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러자 불뱀이 나타나서 사람들을 물어죽였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부르짖으매 하나님께서 장대에 구리뱀을 매달으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불뱀에 물려 죽으면서, 구리뱀을 쳐다보는 자는 기적적으로 다 고침을 받고 살아났습니다. 이 구리뱀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모형입니다. 오늘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믿기만 하면 구원받게 될 줄로 믿습니다.

미국 네바다주에 '죽음의 골짜기(The Valley of Death)'라는 골짜기가 있습니다. 폭이 10마일 내지 35마일 정도 되고, 길이가 150마일입니다. 우리나라 휴전선 길이와 비슷합니다. 해면보다 낮은 곳인 고로 여름철에는 풀 한포기 자라나지 않습니다. 곤충도, 화초도 살 수가 없습니다. 사람도 그곳에 가서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곳을 일컬어 죽음의 골짜기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1930년 5월에 놀라운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19일 동안 폭우가 쏟아졌는데, 그 결과 10년, 혹은 수십년간 죽은듯이 묻혀있던 씨앗이 싹이 나고 움이 돋아서 온 골짜기를 푸른 초원으로, 아름다운 화원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와같은 광경을 바라 본 사람들이 "죽음의 골짜기가 생명의 골짜기로 바뀌어 졌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이 세상은 아담이 범죄한 이후 죽음의 골짜기로 바뀌어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갈보리 십자가 언덕에서 피흘려 주심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골짜기를 생명의 골짜기로 바꾸어 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하려 하심이니라"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라 오직 흠없고 점없는 어린 양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피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양이나 염소의 피로 우리를 구속 해 주신 것이 아니라, 무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우리를 구속 해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죄와 사망에서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는 과거에 죽기를 무서워함으로 일평생 전전긍긍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구원받은 다음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죽음아 오너라!" 기다리고 있다가 죽음을 통과해서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둘째로 십자가는 화목케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아르헨티나와 칠레 두 나라 국경선에 안데스 산맥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나라가 서로 그 산을 차지하기 위해서 오랜 동안 전쟁을 한 결과, 경제는 피폐해지고 엄청난 인명피해를 보게 되자, 쌍방이 휴전을 원하던 중에 영국왕 에드워드가 중재에 나서서 화목을 시켜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두 나라 사람들은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안데스 산상에 예수님상을 세워 놓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전쟁을 그치게 해 주시고 평화를 허락하여 주셨다고 하는 상징입니다. 골로새서 1장 20절에 보면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하나되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아침 조간신문 사회면 기사를 보았습니다. 맹노인이라는 66세 노인이 자녀 6명을 두고 잘 키웠는데, 6남매 중 아버지 한분을 모실만한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노인은 비관을 하여 분신자살로 인생을 끝마쳐 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너무나도 가슴 아픈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부모는 자식들을 위해서 일생을 희생하며 살아오는데, 자녀들은 부모님들을 외면해 버리고 노년에 이르러서 박대를 하니, 이래서야 되겠느냐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부모님께 효도하고,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고, 형제우애하며, 성도들끼리 뜨겁게 사랑하면서 화목하면서 살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셋째로 십자가는 치료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사야 53장 5절에 보면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마태가 인용하면서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라고 옮겨 놓았습니다.

 

콘스탄틴 황제의 모친인 헤레나가 예수님을 믿은 다음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골고다 언덕을 가 보기를 소원해서 종들을 데리고 골고다 언덕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이교도들이 십자가에 처형된 흔적을 없애버리기 위해서 갖은 애를 쓴 사실이 발견되었습니다. 갈보리 산은 돌과 흙 무더기로 덮어 놓았고, 한쪽 모퉁이엔 미의 여신 비너스상을 세워 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헤레나는 수행원들에게 삽과 괭이를 들고 이 흙더미를 파헤쳐보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열심히 파헤친 결과, 그곳에서 3개의 십자가를 발견하게 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인지 분별하기 어려웠습니다. 똑같았기 때문입니다. 때마침 함께 동석했던 예루살렘 주교가 많은 병자들을 데리고 와서 그 십자가 하나하나에 손을 대 보게 했습니다. 첫번째 십자가는 손을 대어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두번째 십자가에 환자들이 손을 대자, 몸을 와들와들 떨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병세가 더 악화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세번째 십자가에 환자들이 손을 대자, 순간적으로 병이 깨끗하게 나았습니다. 손을 댔을 때 아무렇지도 않았던 첫번째 십

자가는 회개한 강도 디스마의 것이었고, 두번째의 것은 예수님을 저주한 왼편 강도가 매달린 것이었고, 세번째의 것이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것임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황후 헤레나는 감격에 넘쳐 십자가를 부여안고 입을 맞추며 눈물을 흘리며 할렐루야 찬송을 불렸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물론 교회안에도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강단에 매달아 놓은 십자가는 예수님의 죽으신 십자가를 상징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이 못 박히신 십자가는 우리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는 엄연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영안을 떠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화목할 수 있는 능력을 받습니다. 신유의 기적을 체험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십자가는 승리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패배의 상징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승리하는 능력입니다. 골로새서 2장 15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세상 권세에게 패배를 당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 세상 권세를 깨뜨리시고 승리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보좌에 올라가셔서 그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며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승리자가 되셨고, 최후의 승리자가 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탄 마귀를 십자가로 정복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예수님이 승리하셨으므로 주님의 십자가를 믿는 우리들도 환란을 이기고 역경을 이기고 고난을 이기고 승리하게 되어질 줄로 믿습니다. 십자가는 최고, 최대의 능력입니다. 무력보다도, 경제력보다도, 기술의 힘보다도, 어떤 도덕의 힘보다도 가장 위대한 힘이 바로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십자가에는 구원의 능력이 있습니다. 화목케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신유의 능력이 있습니다. 승리케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날 아침 우리는 십자가를 붙들고 살아가십시다. 십자가를 질질 끌고 다니는 사람이 될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고 주의 길을 따라 가십시다. 그리하여 십자가의 능력을 통해서 우리 모두가 승리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by 코이네자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