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고린도서

[고전 1:10] 십자가를 떠난 실패 _로이드존스

'코이네' 2024. 2. 28. 21:11

십자가를 떠난 실패

(고전 1:10-17)

설교 :로이드존스 

 

 

오늘 저는 십자가에 대해 두 번째로 증거하기 위해서 이 강단에 섰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십자가가 기독교의 핵심 진리라는 사실에 대해 말씀 드렸습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대신해서 그리스도께서 못 박히신 곳이므로 구원을 얻은 우리는 마땅히 이 십자가를 자랑해야 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십자가는 무한한 하나님의 지혜의 보고입니다. 십자가를 잠시 생각하고 금방 이해함으로 완전해 깨달을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은 생각이 얕은 사람입니다. 믿음의 비밀을 가진 사람이라면 십자가라는 주제가 얼마나 무한한 신앙의 보물 창고인지 이해가 갈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십자가의 진리를 묵상할수록 우리는 십자가가 뿜어내는 눈부신 진리의 빗줄기 속에서 자신조차 잃어 버리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제가 오늘 이 십자가를 통해 여러분들에게 증거하고자 하는 또 한 가지의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오직 이 십자가로 말미암아서만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설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첫 번째 편지 속에서 이 같은 사실을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고린도시는 지금의 그리스 남단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항구 도시였습니다. 선박들이 많이 드나드는 항구 도시였습니다. 여러 민족이 모이고 또 흩어지며 활발한 무역이 벌어지던 이 도시는 타락의 대명사였습니다. 이 고린도 교회가 처음으로 복음에 접하게 된 것은 주 후 50년경 바울의 두 번째 전도 여행 때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회당에서 열심히 그리스도를 전했으나, 유대인들의 심한 핍박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그는 심히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면서도"(고전 2:3)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주님께서 여러 고린도 사람들을 회심시켜 세례 받게 하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며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 18:10) 고 하시면서 바울을 격려하셨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1 6개월을 머물며 복음을 전함으로 고린도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떠난 지 얼마 안되어 고린도 교회는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에 빠져버리게 되었습니다.  중에서도 오늘 1장에서 문안과 함께 바울을 근심케 하고 있는 것은 교회의 분열 현상이었니다. 고린도 교회의 어떤 이들은 그 교회를 설립한 바울에게 속한 것을 자랑하였고, 어떤 사람들은 성경에 능통한 아볼로에게 속한 것을 뽐냈으며 또 어떤 사람들은 열두 사도 중 수제자인 베드로에게 속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심지어 그들 중에는 자신들이 그리스도파라고 주장함으로써 마치 예수님께서 교회의 일파의 우두머리가 되실 수 있는 분인 것처럼 그릇 행했습니다. 이때 바울은 다시 한번 자신의 정체를 밝히면서 그리스도에게로 그들의 신앙과 관심을 돌이켜 주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

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전 1:17)

 

그러면서 바울은 1:18 - 2:16절까지 무려 3 절에 걸쳐서 갑자기 십자가의 도에 대해서 말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분쟁의 문제를 다루기 전에 문득 십자가에 대해 이야기를 꺼냅니다. 바울의 이 심정을 이해하십니까? 바울은 불신자를 전도하기 위해서 고린도전서를 쓰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된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이처럼 긴 시간을 할애하면서 "십자가의 도"에 대해 설명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본문 29절은 말합니다.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이어서 31절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이들은 그리스도안에서 거룩하여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성도라 불려지는 무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었으며 (1:2), 그들은 세례를 받은 이들이었으며 (1:13),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1:4) 자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 고린도 교회는 부끄러운 실패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심각한 파당이 생기고 (1:11), 계모와 근친상간에까지 이르는 패륜의 물결이 넘실대고 있었습니다 (5:1-2). 이 모든 문제는 이들이 육체를 자랑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필을 들 때마다 애타는 심경으로 "육체를 자랑치 말라,” "자랑하는 자는 주안에서 자랑하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의 문제는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한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육체를 자랑하는"데 있었습니다. 육체와 및 그 육체에 속한 것들이 그들의 자랑거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그리스도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의 무리로 불려지는 고린도 교회가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며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비참한 신앙의 실패를 경험하게 되었니까? 그들이 그리스도인이면서 비기독교인들처럼 육체를 자랑하는 사람들이 된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어째서 이들은 한 성령 안에서 같은 세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나뉘어져 분쟁합니까? 빛의 자녀로 부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처럼 음란하고 죄악 된 타락과 부패한 탈선으로 어둠의 자식들처럼 살아가고 있니까? 그들은 한때 바울이 전하는 그리스도의 복음 앞에 "수다한 무리"가 되어 ( 18:7) 빈손 들고 나아가 믿어 세례를 받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그 소중한 복음의 경험을 가진 고린도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을 이처럼 무지하고 패역하고 음란한 죄악에 빠져 있게 만들었니까? 무엇이 이들을 이처럼 다양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탈선하여 살아가도록 만들었을까요?

 

이들의 실패는 십자가에 있었습니다. 십자가를 한때 믿었으나 지금은 더 이상 십자가의 정신이 고린도 교회를 지배하고 있지 않았니다. 한때는 그 십자가를 이해했으나 지금은 더 이상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다루기에 앞서 그처럼 길게 (1:18 - 2:16) 십자가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상기시키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는 부패한 고린도 교회의 문제들을 다루기에 앞서 자신의 개인적인 결단을 상기시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2:1-2)

 

이 세상에는 크게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잇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비웃고 조롱하며 배척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바울 사도의 표현대로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 3:19) 사람들 입니다. 성경은 이들의 운명과 그 실체에 대하여 말하기를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 3:10-19)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십자가를 자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아와 세상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입니다. 십자가를 자랑하는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 바울은 이들에 관해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 3:20-21)

 

그러나 오늘 본문 성경은 이 같은 두 부류의 사람들 사이에 제 3의 사람들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고린도 교회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그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십자가를 자랑하지 아니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십자가가 아닌 육체를 자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이들은 어떤 사람들처럼 십자가를 비웃거나 배척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못 박히신 십자가의 사건을 인정합니다. 그 십자가를 통해 자신들이 구원받은 사실에 대해 고개는 끄덕입니다. 십자가가 기독교의 표시가 되는 줄도 알고 있습니다. 이들은 교회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결코 십자가가 자랑거리라고 믿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어떻게 십자가를 자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고린도 교회가 처한 형편을 차례대로 살펴 봄으로써  답변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오늘 고린도전서를 시작하면서 대단히 의미 심장한 표현을 적고 있습니다. 그것은 1:2 첫머리에 기록된 자신의 편지를 받는 수신자의 명칭입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THE CHURCH OF GOD WHICH IS AT CORINTH)라는 문구입니다. 이 문구는 양립할 수 없는 두 단어를 모아 놓은 것입니다. 이 문구에는 마치 서로 반대되는 형상을 담은 두 폭의 그림이 겹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교회,” 이것은 하나님의 일에 협력하고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공경하며 주님의 뜻에 의해 지배되는 공동체를 표현한 말입니다. 그러나 "고린도"라는 말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 자아가 주인 노릇하며 하나님을 대항하는 가장 타락한 도시의 대명사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제멋대로 방탕하게 사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마치 고린도에서 사는 것처럼 살아간다" (THEY LIVE AS THEY LIVE AT CORINTH)이라는 속담을 지어낼 정도였습니다. 오죽하면 당시 헬라어로 "고린디아조마이" (KORINTHIAZOMAI)라고 하는 동사가 생겨나서 "매춘하다, 동성연애하다"라는 뜻까지 가지게 되었겠습니까?

 

고린도 교회가 자리잡고 세워져 있는 이 도시 고린도는 몇 가지 특징이 있었습니다.

첫째로 이 도시는 학문이 많이 교류되는 곳이었습니다. 다양한 식견들이 이 도시에 있었습니다. 의견이 많으면 말이 많은 법입니다. 각 학파들은 자기의 주장을 고집했으며 파당을 형성케 갔습니다. 논쟁하는 정신이 교회에 파고들어 오게 되어 교회를 바울파, 게바파, 아볼로파, 그리스도파로 갈라놓게 되었습니다. 

둘째로는 도덕적인 방만, 특별히 음란이었습니다. 이 도시에는 아프로디테라는 사랑의 여신을 섬기는 신전이 있었는데 이 신전에만 약 천여 명의 매춘부들이 몸을 팔고 있었습니다. 도시는 온통 이 같은 도덕적 불결에 발목을 잠그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5장에서 지적하고 있는 죄악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었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 (5:1) 이 죄악은 바로 고린도시의 불결한 방탕의 물결이 교회 속으로 흘러 들어온 것을 가리킵니다. 

째로는 이 고린도시는 저마다 자기만을 위하는 이욕에 사로잡힌 상업도시였습니다. 바울이 그토록 간절한 호소로 사랑의 장, 고린도전서 13장을 쓰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도 바로 이처럼 그 도시의 정신이 교회를 침몰시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고 불러 주실 때 그것은 어떤 뜻을 가지고 있을까요? 교회가 이 같은 고린도시의 교만하여 분쟁하고, 육체로 방탕하며, 자기만을 위하는 이기심에 물들어 가는 대신 교회가 나뉘어지는 고린도시를 복음 안에서 하나되게 하며, 방탕하고 음란한 그들이 순결한 삶을 살도록 변화시키며, 자기만을 위하는 도시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도록 심대한 영향을 끼치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일찍이 개인적으로 이런 일들을 경험한 적이 있었습니다. 바울의 복음을 들고 예수 앞에 나아간 적이 있었니다 ( 18:7). 세상을 거스려 살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려고 결심하며 많은 사람이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받았던 적도 있었습니다 ( 18:10-11). 그러나 이들은 지금 완전히 실패하였습니다. 교회는 도시를 하나되게 하는 대신 도시의 영향을 받아 분열하고 있었고, 고린도시에 그리스도인의 순결을 가르쳐 보여주는 대신 그 도시로부터 자신만을 위하는 이기심을 배웠습니다. 오늘 고린도 교회가 육체를 자랑거리로 삼고 있는 (1:29,31) 이유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이미 십자가를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교회는 도시 한복판에 우뚝 서 있었으나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향해 외치며 자랑할 십자가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이여! 오늘 이 고린도 교회의 실패를 통해서 우리의 삶을 들여다 봅시다. 그들의 교회 속에서 십자가가 중심이 되지 않을 때 그들은 비록 성도라 불리던 (1:2) 무리들이었으나, 고린도시의 교만한 말재간꾼들과 다름없이 분쟁하게 되었습니다.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입으로는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었지만 (1:2) 그들의 삶의 중심에서 십자가가 사라지자 그들은 거룩한 교회 안에서까지 방탕한 고린도시의 음행이 재현되는 부끄러운 일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1:2,4). 그러나 그들이 온 심령으로 십자가를 붙잡는 일에 실패하자, 삭막한 도시 속에서 사랑을 베푸는 작은 예수가 되는 대신 이기심을 배워 교회에 채기를 남기는 작은 사단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실패는 고린도 교회가 십자가를 견고히 붙잡고 있는데 실패한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의 가슴 속에는 마땅히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숨쉬고 계셔야 했습니다. 그들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 (벧전 3:15)들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고린도 교회의 잘못을 지적하다가 갑자기 십자가 이야기를 하는 이유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부패와 타락 그리고 신앙의 실를 십자가를 통해 말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은 마땅히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아가는 세상, 고린도시를 십자가에 못박고, 그 죄악의 낙을 쫓기 원하는 자신들의 육체의 욕심도 더불어 십자가에 매달아야 했습니다. 세상은 그 도시의 정신을 따라가며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 살아도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그러나 내게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나니..."( 6:14)라고 담대히 자랑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이 일에 실패하자 고린도 교회는 밀려드는 세속의 죄악에 모래성처럼 무너져나가는 신앙의 침몰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삶과 신앙의 중심에 십자를 세워두는 일에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붙드는 일에 실패하자 성도의 이름은 더럽혀졌고, 세례는 무색하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은혜는 져버리게 되었고, 교회는 세상 향해 외칠 구원의 목소리를 잃어 버리게 되었습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도시의 불신앙과 부패와 싸우기보다는 오히려 투항하여 죄악의 낙을 즐기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이여! 오늘 고린도 교회의 실패가 우리들에게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했고, 그 십자가에서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대속의 피를 흘리셨니다. 창 끝에 찔림으로 그의 심장은 터졌고, 그분의 찢어진 심장으로부터 흘러나온 물과 피로 말미암아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하나님의 품에 안길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2,000 전 피로 물들어 갈보리 언덕에 선 그 보혈의 십자가를 통해 회개하는 여러분들을 당신의 품에 안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버지께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처참한 고난을 통해서 당신과 우리 사이에 높은 담을 무너뜨리셨습니다. 무너진 담장의 잔해 위에서 탕자와 같은 우리들을 용납하시고 화목케 하셨던 것입니다.

 

주는 평화

막힌 담을 모두 허셨네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우리가 이런 사랑을 입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를 위해 자신을 버려 화목 제물이 되신 예수님의 희생에 대해 말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2:6-9) 그가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자기를 버리신 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에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요일 4:9-10)

 

아직 거듭나지 못한 형제 자매들에게 내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말합니다. 당신을 위한 하나님의 이 사랑을 받아들이십시. 그분께서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으신 것은 여러분들을 사망의 죄악에서 건져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서 버림받아 십자가에 죽게 하신 것은 바로 당신을 멸망할 지옥의 위험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니다. 그분 외에는 아무도 당신을 구원할 자가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여러분을 죄악의 사슬에서 끊어 영원을 향해 자유롭게 날아 가도록 만들 것입니다.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인생의 절망스러운 모퉁이 길에서 빌립보 감옥의 간수가 묻던 질문이 오늘 당신의 심령 속에 동일하게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오늘 성경은 당신의 복된 질문에 응답합니다. "주 예수(의 십자가)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16:30-31)

 

구원받았으나 마치 오늘 고린도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처럼 실패한 채 육체를 자랑하는 형제 자매들에게 동일한 사랑으로 증언합니다. 여러분의 마음 한 구석에 밀쳐진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다시 한 번 심령 한 가운에 우뚝 서게 되도록 하나님 앞에 마음을 다해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고린도 교회는 십자가가 성도들의 삶 중심에 서게 하는 데 실패했고,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의 의미를 새기며 그것을 끝까지 붙드는데 실패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졌습니다. 이제 그들은 그리스를 믿으면서도 세상 사람들처럼 육체를 자랑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십자가는 더 이상 자랑거리가 아니었습니다. 십자가가 우리들의 믿음과 삶 가운데 굳건히 세워지는 일 없이는 결코 우리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설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이여! 여러분의 삶이 온전히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이 될 때,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자랑스러운 존재들이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자신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지 갈라디아서 2:20에서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 2:20)

 

이 편지를 쓸 때 바울은 이 그리스도를 만난  3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후였습니다. 젊음과 패기가 넘치던 청년 시절도 지나고, 검고 윤기 있던 머리칼은 이미 반 백발이 되었을 때입니다. 인생의 황혼 길에 선 반백발의 노사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슴 속에는 여전히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뚝 서 있었고, 30 전에 못박은 사울이 여전히 달려 있었습니다.  사람은 후패해졌으나 그의 속 사람은 십자가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는 육체 가운데 사나 육체를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자랑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6:14) 뿐이었습니다. 그는 이제 세상이나 세상이 줄 수 있는 것들을 위해 사는 고린도 교회 같은 길을 걷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의 삶의 중심에 십자가가 우뚝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별을 위한 순교의 종소리가 서서히 들려오는 인생의 석양에서 조용히 비껴오는 노을을 받으며 그는 다시  번 확신에 찬 음성으로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노라"( 6:14). 여러분의 자랑은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