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자료

가증한 기도도 있다

'코이네' 2022. 10. 1. 15:01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않음(2)

시편 119105-112, 잠언 289

 

 

 

 

지난 주일에 잠언 289절에 있는 말씀의 뜻을 생각했는데, 그 말은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 기도도 가증하니라하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그 율법에 대하여 귀를 돌이키는 상태가 무엇이냐 하는 것을 귀를 돌이킨다는 말과 율법이라는 말을 해석해서 실상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거룩한 길과 교훈과, 생활해서 나가라고 준거(準據)해야 할 표준을 그 말씀에 의해서 계시하시고 알게 하셨는데, 거기에 대해서 착목(着目)하고 늘 집중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생각에다가 귀를 돌이키고 다른 생각에 자기 마음을 기울이고 있다 할 것 같으면 그것이 아무리 자기에게는 유리한 것 같을지라도 첫째는 하나님께서 그와 교통을 하시지 않고 들어 주시지 않는다 하는 점을 생각했습니다. 이런 것은 또한 하나님 앞에 가증스러운 일이니라 하는 말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이 율법, -라라 하는 말이 포함하고 있는 그 거룩한 뜻들을 생각할 때에 거기에 대해서 귀를 돌이킨다든지 듣지 않는다든지 혹은 마음을 거기 집중하지 않는다는 사실들이 어떻게 발생하는가 하는 문제를 주의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며는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않는 일이 발생하느냐 할 때, 보통으로 성경 말씀을 주의해서 읽지 아니하면 안 된다 하는 말과 같이 얼른 쉽게 생각하게 되는데, 성경 말씀을 그냥 읽는다 하는 것은 그것대로 필요한 일입니다마는 율법에 귀를 기울여서 바로 그것을 들은 일이라고 곧 말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경에 있는 것을 다 믿지마는 그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는지 그것을 모르는 일이 허다한 것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우리가 교회에서 지도하는 대로 정통 운동도 하고 또 성경을 보라면 보기도 하지마는 그것이 우리에게 현실 생활에서 무엇인지를 가르치고 인도하고 하는 것을 받지 못하고 그냥 자기의 선입관과 좁은 식견에서 말씀을 관견(管見)하고 있으면 사실상 거기에 대해서 주의해서 그것이 우리에게 가르친 바를 깨달은 소위(所爲)가 아닙니다.

 

지난 번에도 말씀했습니다만 성경 말씀을 읽을 때 어느 말이든지 그 말이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하는가, 우리 현실 생활에 어떠한 적용(適用)이 있는가를 볼 때 흔히는 무리한 일을 하기가 쉽습니다. 첫째는 그것이 도덕적인 것을 가르치는 것으로만 간취(看取)하기가 쉬운 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성경에 있는 어떤 부분의 이야기를 읽을 때 특별히 도덕적으로 너는 선하라든지, 너는 어떻게 하라든지, 너는 무엇을 하라든지 그렇게 소위 윤리적 교훈(倫理的敎訓)을 정확하게 볼 수 없는 장면도 많이 있는 것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서 마태복음 1장에 있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系譜)라는 것을 볼 때 거기서 우리 보고 어떻게 하라는 말인지 도덕적인 교훈을 인출(引出)해 내기가 어렵습니다. 또 그 뿐더러 레위기에 있는 여러 가지 제사법을 보든지 혹은 모세의 백성에게 성전을 즉 성막(聖幕)을 어떻게 건축하라는 양식(樣式), 식양(式樣)을 보이는 것이라든지 우리에게 도덕적으로 어떠한 선을 행하라, 어떠한 일은 하지 말라 하는 무슨 특별한 명료한 교훈하는 글들은 아닙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성경의 역사에 있는 여러 가지 내용을 볼 때 거기서 어떤 도덕적인 교훈을 인출(引出)하는 것으로써 우리의 현실 생활에 적용을 하려고만 할 것 같으면 그것들이 가지는 의미의 대부분은 없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삼손의 생활 가운데서 도덕적인 생활만을 인출해 낸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물론 삼손이 기생같은 여자에게 마음이 혹해 가지고 하나님과의 진실한 서약을 한 사실을 쉽게 토로(吐露)해서 머리를 빡빡 깎이게 되어 나중에는 눈도 빠지고 쇠사슬에 얽매여 가지고 큰 연자매같은 맷돌을 돌리는 노역를 하는 데로 보내졌습니다. 마치 이솝의 우화든지 그 여타의 다른 간단한 우화 가운데서 나타낸 간단하고 평이한 도덕적인 교훈을 어떤 이야기체로 전해준 것같은 정도로만 삼손의 이야기나 그 여타의 이야기를 다룰 것 같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가지고 있는 그 풍부한 여타의 계시의 내용, 차라리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계시의 내용을 바로 깨닫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도덕적인 것을 안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고도(高度)의 도덕(道德)을 가르치지마는, 그러나 그것도 이 세상 윤리 교과서나 혹은 윤리적(倫理的)인 서적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그런 식으로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의 윤리의 교훈은 사람이라는 그 기본을 전제로 하고 이 사람이 어떻게 해야 하겠다, 이 사람이 어떻게 선해야겠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친 윤리의 풍성한 교훈은 너라는 사람이 너 있는 자리에서부터 어떻게 선해야겠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 있는 너로서는 못한다하는 것을 첫째 가르치고, “그런고로 너는 그것을 할 수 있는 위치로 올라가야 하는데 네가 스스로도 못 올라온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다 준비하시사 너희에게 주시는 것이다. 그것을 믿고 받아라. 그래서 받은 다음에 그 차원(次元)에 올라가서 성신님이 속에서 역사할 때 비로소 하늘같이 높은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드러내고 조화있는 성격을 드러내는 데서 필연적이고 윤리적인 행동이 거기서 파생하는 것이다고 이렇게 가르치는 것이지 어떤 윤리적인 행동 하나를 목표로 하고 그것을 하고저 발붙이고 있는 땅에서 노력하고 애를 써서 마치 산에 올라가듯이 올라가려고 가르치는 것은 성경의 윤리적인 교훈이 아닌 것을 우리는 늘 주의해야 합니다. 그런 까닭에 도덕적인 교훈을 인출하려는 이 생각은 성경 자체의 기본적으로 가르치는 것을 바로 깨닫지 못하고 무시하고 나오는 데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기본적으로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우리의 도덕적인 행동의 요구가 있기 전에 하나님의 마련해 놓으신, 준비해 놓으신 복음적 사실이 먼저 앞서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의 형벌에서 면죄하는 속죄(贖罪)의 사실뿐 아니라 죄()의 권세(權勢)에서 우리를 벗겨주신, ()의 노예시장(奴隸市場)에서 우리를 사내오사 자유를 주셨다는 사실, 보혜사(保惠師) 즉 다른 보혜사가 또한 우리의 모든 것을,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거하신 사실에서 승천하신 이후에는 우리의 이 현실 세계에서 행해야 할 모든 것을 친히 맡아서 보호하시고 주장하시고 인도하시고 힘 주시고 가르치신다는 이 큰 사실을 먼저 가르쳐 놓고, 거기에 의지해서 믿어야 할 사실 즉 하나님의 약속들을 우리에게 주사 그 하나님의 언약이나 또 그 어떤 부분 부분적인 약속에 우리가 의지하고 나가서, 또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에게 행하시는가를 가르치는 여러 가지 말씀들을 우리에게 깨닫게 하심으로 거기 의지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비로소 우리는 어떠한 도덕적인 생활, 즉 결과에 있어서 이 세상 사람의 눈으로 볼 때 윤리적이다, 도덕적이다 하는 말로서 표현할 수밖에 없는 어떤 고귀한 품성을 드러내고 어떠한 고귀한 목표를 향한 매일매일 생활 경영을 전진을 해나감으로 무엇을 이루어 놓는 것입니다. 그냥 좋은 사람만 되라 하는 아야기가 아닙니다.

 

그러면 이런 것이 다 하나님 말씀의 크신 도리로서 이런 사실들을 무시하고 성경에 있는 어떤 이야기에서든지 거기에 몇가지 미미하게나마라도 도덕적인 교훈을 끄집어내서 그 이야기 전체의 의미는 거기에나 있는 것 같이 다루는 것은, 아까도 말한 것과 같이 마치 성경에 있는 역사와 거룩한 지시의 내용들을 한개의 우화로 돌리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솝의 우화와 같이 이야기 자체는 그다지 중요치 않고 궁극적으로 거기 간단한 것, 평이하게 표시되어 있는 어떤 도덕적 사실을 그냥 이야기하는 것으로만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본다면서 그 말씀의 적용이라는 것은 어떤 도덕적인 적용이다 하는 점에만 국한해 가지고 생각하고 있으면 아니 됩니다. 그래 가지고 성경이 우리에게 계시(啓示)하려고 하는 것을 깨달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않는다고 그 기도조차 가증하게 여기시는 그 사실을 우리가 좀 더 비춰서, 신자들의 생활 가운데 있는 이러한 몇가지 이상한 생활 즉 성경의 내용을 안 읽는 것은 아니지만 읽으면서도 거기서 얻으려고 하는 것은 어떤 도덕적인 교훈에 불과하다며는 그것은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않는 사람과 효과에 있어서 크게 다를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않는 사실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하신 생각을 우리가 가만히 엎드려서 생각해 보면, 왜 하나님께서는 귀를 돌이켜 율법을 듣지 않는 자의 기도를 가증히 여기시는가 할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전달하시는 그 말씀을 그는 깨닫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서 항상 자기 자신의 세계에 그대로 주저앉아서 하나님 앞에 무엇을 구하니까 기도할 수 있는 세계, 하나님과 거룩한 교통을 할 수 있는 차원(次元)으로 올라온 다음에 하나님과 교통을 함으로써 그 기도도 응낙(應諾)이 되고 하나님께서 계시하는 바도 더 알게 될 것인데 도저히 그런 것은 아무런 관계 없이 자기의 차원에 그냥 주저앉아 있는 것이니까 그와 같은 태도를 하면서 하나님 앞에 자꾸 구하고 달라고 하면 그것을 가증히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알 수 없는 기계를 다른 사람이 그것을 잘 이용하는 것을 보고 우리도 이런 기계를 하나 사다가 잘 보자고 또는 쓰자고 사다가 놓았다고 합시다. 그 기계가 여러 가지로 정밀하게 만들어져서 그것을 스스로는 어떻게 어떻게 해야 일이 잘 가동해 가지고 우리가 바라던 그 결과를 낼는지 알 수 없으며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알 수 없는 사람은 그 방면에 소양도 없고 특별한 지식을 안 가지고 그것이 또 특별히 어떤 특수한 방면에서 나타난 정교(精巧)한 기계라면, 가령 어떤 전자제품이라고 하면, 그것을 어떻게 쓰는지를 전연 모르는 것을 갖다 놓고 어떤 효과를 내려고 하는데 도무지 가동(稼動)을 않으면 덮어놓고 여기저기 때려보고 두드려보고 그래서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럴 때는 반드시 설명서를 봐야 해요. 정밀한 사진 기계를 놓고 그 사진 기계를 가장 잘 효과있게 쓰려고 할 때 어떻게 쓰는지 어떻게 맞추는지 어떻게 돌리는지 정밀하게 모두 해 놓은 것을 어떻게 손을 대는지를 알지 못하며는 그것 어떻게 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설명서를 봐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거룩한 교통을 하게 될 때에도 가령 예를 들면 하나님 나라에 필요한 어떤 것을 기도해서 구하면 그것을 가령 그가 가졌다고 하더라도 그 다음에 하나님이 가르쳐 주셔서 그것은 이렇게 해야 하고 이것은 이렇게 하고 이것은 이렇게 해야 한다하는 것을 가르쳐 주심으로 비로소 하나님 나라의 그 큰 은혜의 사실을 가장 정당하게 이용(利用)해 가지고 효과를 낼 것인데, 그것을 이용하는 방법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고 알 만큼 하나님의 교통을 받을 자리를 안 가지고 있을 것 같으며는 그것은 도저히 어떻게 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고 그 어떤 은혜를 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실 수 있고 주셔서 그가 은혜를 헛되이 쓰지 아니하고 은혜롭게 쓸 수 있는 위치에 올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올라가지 아니하면 구해도 남용을 하거나 부수거나 오히려 파기하고 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자기의 받아야 할 자리를 가지지 아니하고 항상 무식한 그 자리, 애매한 그 자리에서 자꾸 구하는 것은 은혜가 될 수가 없고 은혜를 파괴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도리를 깨달은 사람만이 바르게 쓸 수 있는 은혜를 자꾸 구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사실들, 예를 들면 명예(名譽)라고 하십시다. 그 사람이 원하고 명예욕이 있어서 자꾸 바라고 남 앞에 존귀히 여김을 받기를 원하고 그렇게 함으로 그의 이유가, “많은 사람이 그를 주목하게 되어서 이 주목하는 것을 잘 이용해서 하나님의 영광과 말씀을 잘 전파(傳播)하겠습니다”. 가장 그럴듯한 이유를 가지고 명예를 구하지마는 만일 그에게 명예를 준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는 그 명예로 말미암아서 교만해지고 품성(品性)이 악화되고 오히려 무명무색(無名無色)했던 때는 제가 아무 것도 아닌 줄을 알고 이 세상 대중 가운데 그저 하나에 불과하다. 중생(衆生)의 하나다생각하고 그 마음 가운데 허심(虛心)으로 지내던 사람이 명예가 그 뒤에 풍부하게 내리면 내가 아무개다. 내가 무엇이다해서 사실상 자기에게 그럴 능력이 없고 그것을 잘 받아서 선용할 만한 인품과 인격, 품성이 아직 없는데 그런 것을 요구한다며는 그것을 가졌을 때 그는 악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도 그렇고 권력(權力)도 그렇고 모두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위해서 가장 선용할 수 있는 것들이지마는 사람이 그것을 받아서 바로 누리고 바로 써서 그것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땅 위에다가 드릴 만한 인품과 능력이 없는 사람이 그런 것들을 구하면 그것들은 오히려 칼과 같이 자기를 해하고 남을 해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단순히 물질적인 것 뿐 아니라 모든 정신적인 신령한 세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일입니다.

 

그런 까닭에 그런 것을 참으로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먼저 그것을 받아서 남용하지 않고 남을 해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지 아니하고 바르게 쓸 수 있는 위치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30:7) 하고 구한 그 한 가지가,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 함이니이다”(30:8-9). 얼마나 자기를 알고 얼마나 주의한 사람입니까? “내가 부해서 하나님이 누구냐, 하나님이 없어도 나는 산다, 모든 것이 다 있는데...” 마치 부자 농부의 비유 가운데 나타나는 것 같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12:19). 이렇게 그가 충분히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쓸 만한 자격이 없는데 그것이 쏟아지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왕왕이 이 세상에서 우리는 그런 예를 많이 보는 것입니다. 그러며는그것으로 자기를 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어떠한 사실을 하나님 앞에 진실되이 구할지라도 그 구한 그것들을 가장 선용할 수 있는 지혜와 지식이 그에게 내릴 만큼 하나님께 지근(至近)한 위치에 있지 아니하면서 그것만을 구하는 것은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도 욕되게 하고 자기를 해하고 사람도 상하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서 그것을 바로 깨닫지 아니하고서 덮어놓고 어떠한 은혜를, 가령 구체적으로 그게 부가 됐든지, ()가 됐든지, 권력이 됐든지 무엇을 자꾸 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오히려 가증히 여기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조금 전에 한 말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주신 바 은혜를 선용할수 있기 위해서라도 그에게 필요한 것은 그 거룩한 말씀의 뜻을 바르게 깨달을 수 있는 위치에 서 있어야 하고 그렇게 거룩한 말씀의 심오(深奧)한 것들을 간단한 몇 마디의 도덕적 교훈으로 혹은 자기가 늘 알고 있는 아주 천편일률적(千篇一律的)인 몇 가지의 사실로 그렇거니 하고 넘겨버리거나 그렇지 아니한데 종래에 다른 사람들이 잘못 해석하고 잘못 보아서 그렇다 하고 떠들어대는 거기에 그냥 혹해 가지고 그런 유파(流派)의 가르침에 그냥 뒤따라 나가는 이런 상태라며는 그 사람이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깨달을 수는 없는 것이고, 바로 깨닫지 못하고서 즉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깨닫는 처지와 그런 위치에서 계시를 받고 인도를 받고 가르침을 받아 가지고 은혜를 바르게 쓰고 은혜를 바르게 누리고 나아가야 할 사람이 그러지 못한 위치에서 자꾸 무엇을 기도하며는 하나님은 그것을 들어주시지 아니하실 뿐더러 가증히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자기가 다음에 순결함을 가지고 정직함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자기를 반성하면서 하나님이 가르치시는 바를 다른 빛깔로 칠하지 아니하고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하는 그런 진실성이 없이 항상 자기의 고집과 선입관 가운데 갇혀 가지고 모든 것을 끌어 잡아당겨다가 거기에다 집어 넣으려고 하는, 거룩한 말씀의 뜻도 끌어 잡아당겨다가 자기 식으로만 둘러 놓으려고 하는 이런 위치에 있을 때는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않는 사람과 결과에 있어서 실질에 있어서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않는다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박차버리고 나가는 사람으로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결국 왜 그런 말씀으로 우리에게 가르치는가, 하나님의 거룩한 본의(本意)를 생각해 보면 요컨대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정당하게 비취어야 할 터인데 비취지 않는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이라 말입니다. 비췰 위치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받을 자리에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차단(遮斷)해 놓은 그런 저 아래 세계, 마치 깜깜한 지하실에 있는 사람과 같은 그런 세계에 서있으면서 욕심만을 부리고 있는 이런 것은 하나님께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가 자기를 해하고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사람을 해하는 그러한 것이 될 여러 가지 상태를 그냥 포기하지 않고 있으면서 은혜만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신다 하는 것입니다. 이런 예가 허다한 것을 우리는 주의해야 해요.

 

여기도 볼 것 같으면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119:105) 했는데, 주의 말씀이 나의 발 앞에는 등불로 한발 인도해 나아가는 것이 과연 되는가, 내 길을 비춰서 ! 지금 저것이 길이다하고 막막한 광야 같은 세상에서 반듯하게 길을 보여 주는가, 그러지 않고 암중(暗中)에 모색(模索)하듯이 캄캄한 데서 어디로 갈지 모르고 이리 갔다 저리 갔다 도로 (徒勞)와 낭비(浪費)가운데 방황하고 헛 애만 쓰고 사는 것인가 우리가 그것을 주의를 해야 할 것입니다. 큰 평야에 나가서 그 한 가운데다가 놓고 깜깜한 한밤중에 자 어데로 가겠는가할 때, 아무 빛도 없으면 어디로 가야 가당(可當)한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인생의 길 가운데서 어디로 가야할지 하도 갈림길도 많고 유혹도 많고 이리 가야 하는지 저리 가야 하는지 너무도 현란스럽고 우리의 눈을 끄는 것이 많은 까닭에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다며는 참말로 방황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길에서 이렇게 방황하는 사람이 참으로 많은 것을 우리가 다 보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의 말씀이 과연 그에게 멀리서부터 비취는 빛이 되고 길을 비취는 빛이 되고 가까이에서 한걸음씩 거기에 위험이 있나 혹은 발을 상할 것이 있는가 해서 등불과 같이 비춰서 한걸음씩 바로 가게 과연 실질상 그렇게 하는가, 말씀이 그렇게 우리에게 실용되어 가지고 있느냐, 그렇지 아니하고 성경 말씀이란 종교경전(宗敎經典)으로 그냥 늘 쳐져있고 남아있고 마느냐에 따라서 귀를 기울여서 율법을 듣고 그것을 즐거워하는 사람의 생활을 하는 것인가, 그렇지 아니하면 맹신(盲信)하는 생활 태도 가운데 있어서 마치 많은 신자가 정통(正統)이라 해 가지고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라고 모시고 살면서 그 안에 있는 것을 잘 모르는 그런 생활을 하는가 우리는 이런 데 참 주의를 해야 할 것입니다. 같이 기도하십시다.

 

기 도

 

거룩하신 주여, 주의 말씀에 저희가 늘 착목을 한다는 것은 결과로 주님의 거룩하신 계시를 우리가 바로 받아서 그대로 나아가는 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이요 그것이 없이는 사실상 말씀에 착목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인 것을 이제 다시 생각했나이다. 사람들이 그릇된 선입관에 젖어가지고 말씀을 보기는 보지마는 항상 자기의 좁은 생각에 가두어 놓고 마치 무슨 관을 통해서 쳐다보듯이 말씀을 관견(官見)하는 악습이나 폐단 가운데 빠져들어가는 일이 많사오나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사 그런데서 건져 주시고 말씀이 평명(平明)하게 우리에게 가르치며 말씀이 분명하게 우리에게 보이려고 하는 사실들을 성경에 있는 여러 가지 역사의 기록과 시의 기록과 또는 직접적인 교훈과 또 여러 가지 제도를 보이신 것 등에서 바로 깨달아 알게 하시옵소서. 주님이여, 항상 그 그릇된 편중한 성경에서 벗어나서 공정하게 그 말씀이 우리에게 어떠한 것을 연결케 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이런 오묘를 어떻게 가르쳐 주는가를 바로 깨달아서 바른 지식의 내용을 포함하게 하시고 모든 것을 몇가지의 윤리적인 사항으로만 귀결(歸結)지으려는 그릇된 습관이 도무지 저희에게 붙지 않도록 주의케 보존하여 주시며 그 말씀이 우리에게 진정으로 효과있게 작용할 수 있는 거룩한 위치에 서서 비로소 아버님 앞에 기도하고 은혜를 구하고 받게 하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