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자료

하나님께 귀를 가려버린 기도

'코이네' 2022. 10. 1. 15:12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않음(1)

시편 1191-8

 

 

 

 

오늘도 그동안 우리가 생각해 나오는 신앙의 기본 신령한 생활과 기도라는 문제를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기도에 대한 것을 이전에 우리는 시편 6618절을 가지고 거기에 있는 말의 뜻, 특별히 죄라고 하는 말뜻을 그동안 생각해 왔는데 이제 다시 또 하나의 기도에 대한 중요한 문제를 신령한 생활과 기도에 대한 중요한 문제를 생각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하려고 하는 것은 이미 전에 한번 성경 구절을 말씀드린 바 잠언 289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즉 율법(律法)을 듣는 데로부터 귀를 돌이키는 자는 그 기도도 가증하니라, 이 말씀의 가르침과 또 그 가르침에 의해서 우리의 생활을 어떻게 하나님 앞에 늘 신령하고 바르게 보존(保存)하고 나가는가를 생각해 나가는 것입니다.

 

9절 말씀에서 우리가 얼른 생각하는 중요한 문제는 대체 율법이라는 것은 무엇이기에 이처럼 존중하게 하나님께서 대접하셔서 만일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않는다면 그의 기도를 듣지 아니하실 뿐 아니라 기도를 가증(可憎)한 것으로 여긴다 하셨는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의 그 율법에 대한 태도를 늘 보시고 계시다가 그 사람이 율법을 귀 기울여 듣지 아니할 때는 하나님께서도 기도를 듣지 아니하실 뿐더러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무엇을 고하고 찬송하고 감사하고 도고(稻告)하고 간구하고 하는 것들에 대해서 다 가증한 일이다. 미운 일이다고 오히려 그것을 몹시 타매(墮罵)하시고 싫어해 버리시느냐? 율법이라는 것이 그토록 중요한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거나 아니 들어주시는 문제를 결정하는 것이 거기에 관련(關聯)되어 있다. 즉 율법에 대한 그 사람의 태도 여하에 또한 달려있는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율법이란 대체 무엇이냐 하는 것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는 것이 이런 구절을 우리가 바로 깨닫는 데에 중요한 도움이 됩니다.

 

둘째로 이 구절 말씀에서 또한 생각해야 할 말은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않는다는 태도는 대체 어떤 정도의 태도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면 먼저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않는다는 태도를 보면 그것은 분명히 자기가 자발적으로 혹은 자의적으로, 고의로 그 하나님의 율법을 안 들으려고 한다는 그런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귀를 돌이키는 것은 아이! 그것 듣기 싫다하는 것입니다. 듣기 싫다는 것은 그 말에 대해서 처음에 좀 들어보다가 에이, 그것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런 것 가지고 내가 주의할 필요도 없고 시간 보낼 필요도 없다하는 이런 태도입니다. 듣기는 들어도 자기에게는 의미가 없다고 평가하는 데서 흔히 그런 태도가 나오고 그렇지 아니하며는 그것에 대해서 어떤 적의나 악의, 반의, 즉 반항하는 의사 이런 것들이 있을 때는 당연히 귀를 돌이키고 안 듣겠다 하고서는 부주의할 것입니다. 그 쪽에다가 주의 않는 것입니다.

 

귀를 막았다는 말보다 돌이킨다할 때 이렇게 회전(回轉)한다는 것은 거기다 대고 주의 않고는 다른 것을 차라리 듣지 그것은 듣지 않겠다.” 거기에다 자기의 주의를 집중할 의사가 없다는 표시입니다. 전연 안 듣겠다. 그 까짓것 뭔가. 전연 나하고 상관없다고 무시했다는 말보다도 귀를 돌이키고 듣지 않는다는 것은 거기에 대해서 주의를 집중하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의 의사에 의해서 주의 집중을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런고로 먼저 이 의미를 우리가 주의해서 파악(把握)하고 가져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에 대해서 귀를 기울여서 주의를 집중하지 않고 그것을 들어서 무엇인가 알아보려고 하지를 않는다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들릴지라도 좌우간 그 쪽에다가 주의를 집중 않고 귀를 딴 데로 자꾸 몰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주 평범한 일입니다. 쉬운 말입니다. 알아 듣기, 깨닫기 쉬운 말입니다.

 

그러나 여기 율법이라는 말을 우리가 생각을 할 때, 율법이라는 것이 대체 뭐냐 하는 문제입니다. 율법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 첫째는 그 도덕적인 규범(規範)으로서의 의미를 가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어떠한 품성을 가져야 할 것인가. 어떠한 성격을 가져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하나님의 거룩한 계시의 표준에 의해서 우리가 깨달아 알 수 있게 한 것이 곧 율법이라 말입니다.

 

여기서 쓴 율법이란 말, -(Torah, הרות)는 단순히 모세가 지키라고 명령한 613조의 그 구약 법전만을 의미하고 그것 이상 다른 아무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잠언에 있는 말씀인데, 이 잠언을 언제 썼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좌우간 솔로몬의 잠언이라해서 솔로몬 시대에 썼다며는 그 시대에도 다윗도 많은 시를 썼고 솔로몬도 많은 시가 즉 시적인 구절들을 써서 그것을 혹은 잠언으로 혹은 전도서로 혹은 아가로 이렇게 편집해서 나온 것입니다. 그때에 그들에게 공통으로 받아들인 것은 기술적인 용어로서의 토-라인 것보다도 무릇 하나님의 교훈과 가르침을 의미하는 권위 있는, 숭상할, 또 의거할 그 계시 내용을 토-라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가 나중에 선지자(先知者)들이 나타나서 --선지자의 많은 말들이 있으니까-- 그것을 특별하게 특성을 지적하기 위해서는 선지자들’(מיאיבנ)이라 하는 말을 써서 가령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상, 열왕기상하 같은 이런 역사서도 역사라고 부르지 않고, 그 속에 있는 내용, 재료를 가지고 말하지 않고 그것이 가지고 있는 권위와 하나님 나라 사이의 의미를 가지고 그것을 불렀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느비임(מיאיבנ), ‘선지자들이라는 말로 불렀고 거기에 속하지 아니한 다른 여러 책들은 가령 다니엘서도 그것이 선지자의 글이지마는 후대에 편집할 때에는 선지자들의 속에다가 넣지 아니하고 그것은 거룩한 기록, 케투빔(מיבותכ)이라 하는 속에다가 집어 넣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오늘날 우리가 보는 구약 39권이 이스라엘 사람들 손에서 --예수님 당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계시라는 권위로서-- 완전히 승인되어 있었고 우리 주님도 성경을 항상 그렇게 하나님의 권위의 계시라고 승인을 했는데 그것을 대별해서 토-라라는 말이 후대에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그 산업, 에코노미(economy)에 주신 바 계시의 내용 전체를 토-라라는 말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잠언을 기록했을 때 율법이라는 말을 쓸 때에는 아직 자기가 말하는 이 잠언 자체가 나중에 케투빔 가운데 포함 되리라는 것을 다 알고 있는 때가 아니고 성실하게 하나님의 성신의 감동함을 받고 영감을 받아서 거룩한 교훈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아주 단언적(斷言的)으로, 선언적(宣言的)으로 해 나가는 것입니다.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 기도도 가증하니라.” 가증하게 보겠다고 사람들이 비판한다는 말이 아니라 가증한 것이라고 선언해 놓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신적인 권위를 가지고 말을 한 태도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신적 권위를 차용을 해서 거짓말이든지 그렇지 아니하면 신적 권위가 진정으로 그 말에 있든지 둘 중에 하나 되게 말을 권위적으로 정언적(政言的)으로 이야기를 해 나가는 것입니다. 결코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하는 철학자적 용어를 쓰지 않았습니다.

 

이런 점에서 그것이 하나님의 신적 권위를 오늘날 우리에게 보이는 글이 된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가 누가 됐든지 그 사람이라는 그릇을 쓰시사 계시함으로 사람들이 마땅히 깨달아야 할 중요한 도리를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하나님의 권위 있는 말로서 그런 의미에 있어서는 토-라라는 말 자체도 어떤 기술적인 용어로 한 군데 한정된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가르치시려고 주신 말씀이라는 것을 당연히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느냐 할 때 그 토-라 자체의 말뜻이 벌써 그런 의미에서 형성된 것입니다.

오늘날 말한 기술적인 율법, 노모스(νόμος), 이런 말로써 처음부터 형성된 것이 아니고 야라(Yarah, הרע)라는 말에서 나왔을 때, 야라의 첫째의 뜻은 던지다든지 궁사(弓師)가 활을 쏘듯이 쏜다는 말인데,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 가운데 혹은 사람의 사회에 사람의 세계에 그 거룩한 계시, 그 거룩한 뜻과 또 사람이 의거하고 지키고 살아야 할 거룩한 교훈을 던져주셨다 하는 말뜻으로 나중에 이것이 교훈이라는 말로도 쓰이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죄라는 말뜻의 하나가, 그리고 가장 많이 널리 쓰이는 말, 구약에서나 신약에서 가장 죄를 대표적으로 쓰는 말이 실적(失的)이라, 과녁을 못 맞추었다 하는 뜻이라고했지요?! 다같이 토-라라 할 때 하나님이 계시하시고 가르치시는 것은 마치 활을 쏘듯이 쏜다는 말을 썼고 그 쏘는 것과 다 상관이 있습니다. 그리고 죄는 쏘았는데 과녁을 못 맞춘 것이다 하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죄라는 것은 장차 못 맞추게 된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고 이미 과녁을 못 맞춘 상태를 가르쳐서 하타(Chataah, התח)혹은 헤 하마르티아(ή άμαρτια)라고 죄라는 말을 쓰는 것처럼 거기에서 죄의 성격이라는 것이 매일매일 생활에서 우리는 맞춰야 할 과녁이 있고 그것을 적중시키지 못하고 빗나가는 생활을 하는 그것 자체를, 그와 같은 것을 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거룩한 교훈을 갖다가 쓰실 때에는 하나님께서 쓰신 이 거룩한 교훈, 사람에게 이렇게 탁 쏘아진 교훈이라는 것은 당연히 가장 잘 맞고 정확한 것이므로 토-라야말로 사람에게 가장 어떻게 쏘아야 할 것과 어디로 가야할 것을 가장 잘 지시하시는 것이라는 의미가 거기 붙어있습니다. 하나님이 쏘신 것이고 하나님이 세우신 과녁인 까닭에 말할 수 없이 잘맞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토-라는 쏘아놓은 것입니다. 그것은 그렇게 나아가거라 하는 표시입니다. 여기서 죄와는 아주 대척적인 위치에서 가장 과녁을 잘 맞히고 정확하게 적중해 나가는 일입니다. 거기서부터 시작해서 이것은 죄라는 말과 대조해서 하는 말이고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마땅히 의거하고 살아가야 할 거룩한 표준으로, 지표(指慓), 과녁으로 또 사람이 어떻게 쏘고 나가는가 어떻게 그리로 향해서 바르게 나아가는가 하는 것을 보이시는 것으로 주신 것이 곧 토-라입니다.

 

이런 말에서부터 모세에게 주신 율법들은 그와 같은 의미를 가진 것이다 해서 토-라라는 말이 오히려 그말들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지 그말들이 가지고 있는 성격만을 모아서 토-라라는 말로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맨 처음에 나온 가장 권위적인 것은 모세의 율법인데 이스라엘 백성의 민족 형성에서 가장 권위있는 중요한 지표로 이미 존재했던 것인 까닭에 그것이 가령 어떤 역사를 서술한 것이든지 창세기같이 민수기의 어떤 부분 같이, 그것이 어떤 행동의 규범을 보인 것이라든지 그것이 어떠한 종교적인 제의(祭儀), 종교적인 제사 의식을 가르치는 것이라든지 그것이 어떤 대강령인 계명(戒命)을 보인 것이라든지 그것이 어떤 역사를 서술하는 것이든지 전체로(가령 신명기 어떤 부분에도 나오는 것같이) 이것이 다같이 토-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들에게 마땅히 깨닫고 알아서 그로 말미암아 자기 인생의 길을 바로 잡고 행보(行步)하도록 하신 거룩한 교훈이요 지시입니다.

 

이와 같이 토-라를 보이신까닭에 귀를 돌이키고 이런 토-라를 듣지 않는 자는 그 기도도 가증하니라하였습니다. 그런데 아까 말한 것과 같이 첫째는 그 도덕적인 규범(規範)을 보이는 성격을 우리가 거기서 간취(看取)할 수가 있지마는 토-라가 그 도덕적인 규범만을 우리에게 보이는 것으로 전부를 삼지 않는 것을 우리가 알 것입니다.

 

율법이라는 것이 이름이 율법이니까 법률(法律)이라는 말과 그저 글자만 뒤집어 놓은 것이니까 같은 뜻이라고 생각하겠지마는 오늘날 소위 협의(狹義)로 말하는 바 법률이라는 말과는 반드시 꼭 같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보다 광의(), 더 큰 의미로 사용된 것입니다. 거기에 무엇이 있느냐 하면 사람이 의거하고 살아가야 할 어떠한 바른 표준이다 하는 의미가 있는 까닭에 그런 의미에 있어서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바 정당한 생활의 기준이요 생활의 지표(指慓)가 된다 하는 것이 거기 있습니다. 생활의 기준이라는 것은, 너는 이렇게 살아라하는 것이지만 생활의 지표는 너는 이리로 가거라하는 문제입니다. -라에는 이렇게 살아라하는 말, 이렇게 가거라하는 말이 거기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토-라를 광의로 볼 때에는 거기에는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무엇을 하시겠다는 뜻을 보임으로 따라서 너는 그렇게 해야겠다하는 말이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할 것이냐? 내가 너희에게 대해서 그렇게 하려고 이것을 하고 있으니까 너는 그렇게 해야겠다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우리의 행동의 규범, 우리의 생활의 규범을 주시기 전에 그 근거로서 먼저 주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는 너를 위해서 이렇게 한다는 것이 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토-라 가운데서 우리가 좀더 다른 말로 명확하게 표현하며는 기쁜 소식, 복된 소식, 복음(福音)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행하시는 일을 보이시고 그것을 왜 하신다, 즉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의, 이런 것을 보이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어떻게 큰 사랑으로 어떻게 그 큰 자비로 그러나 그 거룩하심으로 그 의로 우리에게 일을 행하신다는 것을 알게 하시고, 따라서 내가 이렇게 하니 너도 이렇게 해야겠다하시는 것입니다.

 

가령 예를 들면, 내가 거룩하니 너희는 거룩해야겠다”. 왜냐, “내가 너를 특별히 때어서 특별한 백성으로 천하 만국에 너희를 내 보물로 삼고 또 너희를 왕과 같은 제사장을 삼고, 거룩한 나라를 내가 너희에게 이루게 했으니까 내가 거룩한 것과 같이 너도 거룩해야 할 것 아니냐? 그리고 인류를 향해서는 내가 너희를 향해서 이렇게 너희 죄를 말할 모든 방법을 다 비치해 놓고 너희가 온전히 거기 의지하기만 내가 기다리고 있다. 그러므로 죽고자 하지 말고 돌이키고 돌이켜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참조 레 11:45, 19:6, 벧전 2:9). 이렇게 말씀하시고 이렇게 해서 복음을 받도록 하신 것입니다. 복음을 받아라하는 것은 명령이지만 받아야 할 복음의 내용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은혜로 비치해 놓은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토-라 안에다가 넣어 놓고 우리에게 그 토-라를 주의해서 배워라 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의 생활에서 이 세상을 지내나갈 때에 많은 적이 있고, 많은 분간해야 할 일들이 있고, 많은 비신국적(非神國的)인 사실들과 현상들이 있는 그 속에서 어떻게 바로 걸어가야 할 것을 가르치되 사람에게 대해서 세계에 대해서 역사에 대해서 너는 어떻게 생각하면서 가거라. 왜냐하며는 너희에게는 생각할 수 있고 깨달을 수 있고 또한 논리해 나갈 수 있고 느낄수 있는 영혼의 거룩한 기능의 작용을 내린 고귀한 인간인 까닭에, 동물이 아니고 기계가 아닌 까닭에 가장 고귀하게 피조된 본상대로 살아야겠다.” 이 피조된 본상대로 살려면 사람은 바로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생각이라는 것은 사람에게 기본적으로 사람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어떤 철학자도 말한 것 같이 내가 생각하니 내가 존재한다하듯이, 그것은 문제가 좀 다르지마는, 어쨌든지 생각이라는 것은 그 사람 자신이 사람이 된 가장 본질적인 중요한 기능이고 또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생각을 하려며는 사람은 분간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전제(前堤)가 있어야 해요. 또한 의거해서 판단할 척도(尺度)가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의거해서 판단할 척도(尺度)라든지 생각의 전제가 되는 것들은 주신 바 이 선험적(先驗的)인 논식(論式)에 의하여 바로 사고(思考)하고 추리(推理)하게 하셨는데 이렇게 전제가 되는 것들과 혹은 우리의 그 생각을 전진시켜 가기에 필요한 표준이 되는 것들은 토-라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라의 소용과 구실은 또한 그러한 거룩한 바른 사상과 바른 세계를 우리에게 알려 주심으로 거기 비춰서 그릇된 것이 어떻게 옳지 못하여 하나님께 어그러지는 것인가를 깨달아 알고 그것을 대적하고 그것을 제척(除斥)하고 온전히 바른 세계를 향해서 들어오도록 만든 것입니다. 이것은 비판의 크라이테리아(criteria)로서 중요한 임무를 하기는 하지마는 비판의 크라이테리아 혹은 적을 향해서 싸우는 거기에다가 주력(注力)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바른 세계를 주신 데에, 바른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내용을 풍부하게 우리에게 주시고 그런 세계에 네가 있고 그런 것을 네가 가지고 살아야 할 것이다 하는 이 적극적인 교훈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이 세상의 악에 대해서 악이 어떻게 생겼다 하고 흑암을 일일이 비판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영광의 내용은 어떻게 생겼다하고 가르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라는 그런고로 그렇게 적극적으로 건설적으로 늘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악과 또 인류 사회 전체의 진전이나 역사나 또는 세계의 모든 사물과 현상들을 바르게 보고 비판하려며는 그것보다 먼저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의 거룩한 내용, 내가 지금 담어있는 바 은혜의 거룩한 왕국이 어떠한 것이냐를 모르면서 이 세상만을 비판하려면 그의 비판의 척도나 입각지가 어디에 있어야 할 터인데 어디에 있겠는가? 희미하게 자기가 느낀 바 어떤 의()라는, 어떤 선()이라는 위치에서 이러고 저러고 이야기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 불신자들의 평론가(評論家)가 많고 사회 바판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의 나머지가 희미하게 남아라도 있어서 일반적인, 자연적인 선이라든지 의의 입각지에서 하기는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본원적인 것, 참된 내용이 풍부하게 이미 주어진 사람들인 까닭에 믿지 않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그런 희미한 위치에서 희미한 윤리(倫理) 관념, 희미한 정의의 사상에 근거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밝고 높은 위치에서 밝히 보고 이야기해야 하는 까닭에 마땅히 깊이 믿고 토-라를 묵상하고 깨달은 사람의 안목은 이 세상의 일반적인 사람의 안목보다도 예리하고 깊고 바르게 보아야만 할 것입니다.

 

이래서 토-, 율법 안에는 이러한 것들을 또한 포함한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어떤 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 그래서 그로 인하여 세계관이나 사관이나 인생관에 대한 바른 비판, 바른 평가를 할 수 있는 크라이테리아(criteria)를 공급해 주는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겠느냐 하는 문제, 즉 도덕적인 규범이 거기 있고, 그러나 또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인가 할 때 인생의 길을 가르쳐 주는, 그 사람이 일생 동안 무엇을 하면서 어떤 목적을 향해 가는 길로서의 지시가 거기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 이 시편 119장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 즉 토-라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거룩한 그 계시의 정묘(精妙)한 것과 용()에 대해서 아름답게 꾸민 시()입니다. 여러분 그전에 혹은 들으셔서 아시겠지마는 이 시가 총 176절이 있어요. 그것을 8절씩 8절씩 나누었습니다. 8절에서 떨어지게 했는데 8절씩 나누어서 176절을 떼어놓고 보며는 이것이 22개의 부분으로 된 것입니다. 22개의 시구(時句)로 연()으로 되어 있습니다. 22연으로서 만들어진 시입니다. 22개라는 수는 히브리 알파벹의 글자 수 아닙니까? 처음에는 알렢(א), 그 다음에는 베트(ב), -(ג), -(ד) 이런 순서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를 쓸 때 원래 이 제일 처음 연은 그 22자의 글자에 의해서 알렢이라는 글자로 시작하는 말을 맨 처음에다 놓고 시작합니다. 제둘째 연, 9절부터는 베트라는 글자를 두()문자를 가지고 있는 단어를 맨 앞에다 놓고서 시작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독특한 시구들을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 22자음(子音)이 하나씩 하나씩 전부 각연의 첫 단어의 첫머리 글자로 나타납니다. 교묘하게 물론 만들었지요. 교묘하게 만들었지마는 그것이 뭐 신기한 이야기보다도 그렇게 했을지언정 가지고 있는 이 시의 내용이 우리에게 풍성한 것을 특별히 율법이 어떠한 것인가, 율법에 대해서 어떠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이는 점에 있어서 참으로 좋은 표준입니다.

 

우리는 8절까지만 읽었지만 가령 9절을 읽어 볼지라도 이 시구가 도덕적인 성격을 어떻게 가져야 하느냐는 문제를 금방 가르친 것입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또 우리가 잘 아는 것을 보자면 내려가서 105절에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그가 어디로 가는 것을 전제로 하고 말씀이 어떻게 비춰서 이끌고 가는가를 가르쳤습니다. 간단한 예이지마는 이것이 이와 같이 중요한 말입니다.

 

성경에 주의 율법이라는 말은 총체적인 용어가 되고 율법이라는 말을 좀더 다른 말로 표현할 때 전체적인 성격을 조금 표시하기 위해서는 주께서 우리에게 경계하신 말씀이다해서 계명(戒命)이라는 말이 있는데 계명은 꼭 10계명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율법 전체에 대한 일반적인 성격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이 계명이라는 말이 또 많이 쓰입니다. 그 다음에 또 하나 중요히 쓰이는 것은 증거(證據)라는 말입니다. 이 계명(戒命)과 증거(證據)라는 말은 율법의 전체적인 성격을 각각 그 독특한 면을 표시하는 말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시편 1191절로부터 8절에서 율법에 대해서 율례(律例)라 혹은 규례(規例)라는 말 혹은 법도(法度)라 하는 말도 거기서 나오는 것을 보는데, 이렇게 율례라 법도라 혹은 규례라 이런 말들은 좀더 제한된 의미로서 어떤 것들을 표시하는 말입니다. 그런고로 시편뿐 아니라 성경을 읽으면서 그런 말들이 나올 때는 그런 말이 표시하는 독특한 의미들을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규례(規例)라 하는 말, 율례(律例)라 하는말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어디 적용하느냐 하는 것보다도 그것의 성립 성격을 이야기 하는 것인데 이 세상의 법에도 유럽 대륙에서 주로 생각해 가지고 만들어서 시행(施行)하던 하나의 법의 성격이 있고 영국(英國)과 미국(美國)같은 나라가 (카나다도 비슷합니다마는) 주로 가지고서 준거(準據)해서 살던 법의 성격이 있습니다. 그 작성 성격이 있어요. 말하자면 그 법을 만들어내 가는 성격이 있는데, 이 법률 제정 성격으로 보아서 전부를 명문화(文化)해 가지고 그 명문화한 그 안에서 적용하고 명문화 되어있지 아니할 때에는 비록 우리의 심증(心證)에 의해서나 뻔히 일반 상식에 의해서나 법률적으로 다루어야 할 중요한 문제라도, 가령 범죄가 성립한다든지 비위(非違)가 성립하는 일이라도 법의 명문이 없으므로 다루지 못하는 그런 법 제정 태도를 가리켜서 성문법주의(成文法主義)라 합니다. 즉 무엇이든지 글을 다 써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성문법이라는 것은 주로 유럽대륙에서 준용됐던 까닭에 그것을 속칭 대륙법(大陸法)이라는 말을 씁니다.

 

새로운 개화운동이 일어난 이후에 우리 나라에서는 일본과 비슷하게 성문법을 준용했습니다. 특별히 일본이 와서 우리 나라의 법을 시행할 때는 성문법을 자기네 나라와 동시에 준용해서 비교적 관습법(慣習法)에 많이 의지하던 사실들이 그 성문법 때문에 골치를 앓고 괴로움을 받고 혹은 박탈(剝奪)을 당하고 권리가 박탈당하고 한 예를 우리는 많이 봅니다. 선조 대대로 지어먹던 논()어느날 몇 시까지 전부 등록을 해라해서 자기의 재산이로라고 소유권을 확보(確保)를 하도록 등기를 하라고 했는데 선조 대대로 지금까지 등기하고 살아온 일이 없어도 누가 이 논은 네 것 아니라고 말하는 이는 없었는데 무슨 상관이냐고 타무탈하고 아무렇지 않게 무시하여 버리고 지낸 결과 나중에 그 기간이 지나니까 위정자 일본 사람들이 와서 등기 됐느냐, 안 됐느냐? 안 됐으면 이것은 국가의 것이다. 몰수(沒收)한다해서 그만 국가의 재산이 되고 이렇게 해서 소위 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가 나중에는 한국 농토의 근 8할에 가까운 땅을 다 자기 소유로 만들어 버린 것을 여러분이 식민 역사(植民歷史)에서 알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 법률의 맹점(盲点), 법의 맹점이라는 것을 이용한 것입니다. 이것이 성문법이 가지고 있는 하나의 성격입니다. 그래서 때때로 법의 맹점을 논하게 됩니다. 분명히 사리로 보아서는 이렇게 해야겠는데 법전에 그런 조목이 없어서 어떻게 적용 못한다는 것입니다.

 

영미 계통, 미국과 영국에서 (카나다에서도 마찬가지로) 많이 준용하는 것은 성문법이 아니라 관습법(慣習法)이라는 것, 불성문율(不成文律)이라는 것입니다. 성문한 것도 있지마는 비록 성문이 안 됐을지라도 관습상 또 과거에 내려오는 전통상 또 법률 전문가들의 판단에 의해서 그렇다고 하면 거기에 비춰서 판단을 내버립니다. 그러니까 일일이 문서를 쓰고, 싸인을 하고, 도장을 찍고 해서 그것이 없으면 아니다반드시 이러지 않고 문서로 하고 싸인한 것도 효과 있지만 문서 만들고 싸인 안 했어도 말로만 해도 효과 있는 것이 많습니다. 이렇게 해서 신용 사회(信用社會)를 건설해 가지고서 나아갈 때 사람들은 정직해야 하고 또 분명해야 합니다. 그런 사회를 형성해서 미국과 영국은 발달해 왔어요. 이것이 소위 관습법(慣習法)이라는 것입니다. 종래에 있던 관습에 의하든지 혹은 어떤 일의 시비(是非)를 판단하려면 다른 것으로 할 수 없으며는 판례(判例)를 보는 것입니다. 대법원에서 어떻게 판결해 놓았나, 그와 성격이 같은 예를 어떻게 판결해 놓았나 해서 그 판례가 나오면 판례가 앞으로 판단해야할 척도로 떡 남아있는 것입니다. 법전(法典)으로서 조목에다 넣지 않았을지라도 판례라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회의 가지고 있는 미풍양속(美風良俗)이란 또한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또한 존중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여기 토-라라는 말 가운데 또한 포함해 가지고서 그 말 가운데에서 아까 말한 대로 율례, 즉 법률의 례, 규례 즉 그렇게 하자는 규칙의 예, 사례 그런 것을 법률로 그냥 적용했던 것입니다. 요컨대 이것은 관습법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성문법을 말할 때는 법도(法度)다 하는 말을 했습니다. 하나 더 시편에는 혹은 훈계(訓戒) 혹은 법도라고 우리 말로는 번역을 그냥 루-(loose)하게 해 놓았는데 그것은 또 전연 원어상 불성문법이라든지 성문법이라든지 하는 법제정의 연원()을 가리킨 것이 아니고 특별히 가르친다는 의미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토-라라는 말은 그 성격을 나누어 가지고 지금 말한 대로 한 다섯 가지나 됩니다. 첫째는 계명, 그 다음에는 증거, 다음에는 규례 혹은 율례, 다음에는 법도, 그 다음에는 훈계 등 다섯 가지로 중요한 용어가 나타나서 구약에서 사용됩니다.

 

그런고로 이런 것들을 우리가 대할 때 다 같이 율법, ()의 율법이라는 말로 크게 둘러싸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귀를 돌이키고 듣지 아니하는 자는 그 기도도 가증하다. 왜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어떻게 가라고 하시고 하나님은 사람을 위해서 무엇을 하시고 하나님은 사람을 어떻게 살라고 하시고, 그런고로 그것을 받아 가지고 산 사람들은 어떻게 그 길을 걸었고 이런 것들이 아까 말한 대로 불성문법에서 특별히 볼 수 있는 보다 중요한 것으로 사람을 인도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으로 쓰이는 것인데, 그런 것을 무시하여 버리고 자기 마음 가운데 생각하고 느낀 대로 살겠다든지 자기가 알고 있는 신관에 의해서 자기가 자기 길을 정하고 살겠다든지 하면 도저히 하나님께서 그런 기도를 아니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활의 규범이나 생활의 현상을 어디서 보느냐 하면 이러한 토-, 율법이 보이는 바에서 얻는 것입니다. 생활의 규범을 거기서 얻을 뿐 아니라 생활의 표준이 될 만한 혹은 준거할 만한 중요한 재료가 되는 어떤 사례를 여기서 또 보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이야기한 것과 같이 관습법이라는 것은 사례(事例)를 자꾸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하나의 법이 됩니다. 구약도 그렇게 형성한 법들이 있습니다. 그 사례라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어떻게 해 나갔느냐 즉 어떻게 성신님의 인도를 받아 가지고 나갔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사실상 이러한 성문법(成文法)이라는 것이 완전히 있어서 지시하기 전에는, 즉 모세의 시대 이전에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있을 때도 그랬겠지만 그 이전에 노아의 계열에서 아브라함까지 또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에게까지 쭉 내려가면서 그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법도를 지키고 산 사람이지마는 그 법도라는 것은 주로 하나님께서 그를 지시하시고 깨닫고 안 것에 의해서 생활을 하고 생활 가운데서 사례(事例)를 만들어 내고 그 사례에 의거해서 비판을 했습니다. 그것도 오늘날은 법입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가 창세기에 있는 아브라함의 사적을 읽을 때는 거기 아무런 법전적인 용어가 없어도 그 생활 행동 가운데, 길 가운데서 중요한 법들을 추출해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하라고 지시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이다고 볼 수 있는 것들을 거기서 충분히 우리는 추출을 해서 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에다가 주의를 않하면 알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해라 하는 말만 나는 듣겠다. 다른 것은 부주의 하겠다면 그것 역시 부주의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하나님의 거룩한 계시가 역사의 형태로 나타났든지 어떤 사람의 전기의 형태로 나타났든지 거기서 하나님의 토-라를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부주의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은 가령 성경를 밤낮 듣고 있을지라도 사실 주의를 집중 않으니까 귀를 돌이키고 율법의 말씀을 부주의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그 기도하는 것도 하나님 앞에 구하는 것도 가증한 것입니다. 어디서 문제가 생기느냐 하며는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하고 교통하기를 원치 아니하시고 오히려 그런 태도를 미워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나는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마음을 기울이고 주의를 하며, 주의를 했으면 주의를 한 사람답게 무엇을 거기서 얻어냈느냐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냥 쪼르르 말씀을 듣고 외우고만 앉았는 것은 의미 없는 것입니다. 여기 귀를 돌이킨다는 말은 귀를 기울인다는 말의 대척어인데 그것은 주의해서 집중해 가지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것을 간취하라 혹은 취하라 추출하라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알지 못하고서 기계적으로만 외우는 것은 의미 없습니다.

 

이렇게 해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해명하는 일을 중요한 임무로 삼고 또 해명을 듣도록 하는 것입니다. 귀를 그쪽으로 기울여서 마음이 그것을 알 수 있고 깨달을 때까지 정신차려서 전진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아니 들으신다는 것을 오늘 우리가 특별히 주의해서 생각하십시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안 듣는데 그가 하나님한테 하는 말을 하나님께서 왜 들으시겠느냐 하는 말을 합니다마는 특별히 그렇게 법적으로 꼭 따져서 생각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그와 교통을 하시는 방법을 무시해 버리는데 교통을 하시겠느냐 그말입니다. 왜냐하며는 교통하는 방법이라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과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은 귀를 기울여서 율법에 착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없으며는 결국 하나님과 교통하는 데서 얻어야 할 기도의 응답을 교통도 않고서 덮어놓고 하나님은 오냐, 오냐하고 주기를 바라는 그러한 하나님의 법칙은 없는 것이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제일 중요한 문제는 하나님께서 교통할 수 있는 위치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위치에서 그렇게 걸어가야 하고 거기서 벗어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기도하십시다.

 

기 도

 

거룩하신 아버지시여, 저희가 항상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기울여서 이 세상 일에 착심하고 돈을 버는 데 착심하는 것같이 지혜를 구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의 큰 뜻을 구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무엇을 원하시며 무엇을 생각하시며 무엇을 계획하셨으며 무엇을 알리시려고 하는가를 중요하게 늘 착목(着目)하고 착심케 하옵소서. 그러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 거룩한 마음을 우리에게 열어서 보여주시는 것은 무지하고 자기 말만 하나님 앞에 아뢰는 것은 하나님 앞에 상달하지도 아니할 뿐 아니라 하나님과 교통하는 위치에 있지 아니하는 것이요 교통하는 위치에 있으면서 제 말이 하늘로 올라가기를 아무 것도 바랄 수 없나이다. 주께서는 저희의 말씀을 들으실 수 있는 자리를 만드셨고 그것은 곧 하나님과 교통하는 자리요 그 자리에 올라와서 비로소 아버님 앞에 이야기를 하게 하셨습니다. 그 자리에 벗어나서 제 마음대로 길가에 가면서 저의 집에서 하나님께 그냥 부르짖은들 멀리 하나님께 상달할 수 없는 것을 주의하게 합소서. 주여,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세상에 있는 장소가 중요치 않고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교통하는 그 장소에 저희의 속사람이 올라가서 주께 간구하고 주의 거룩한 뜻을 깨달아 알게 합소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