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자료

기도, 은혜의 방도

'코이네' 2022. 10. 1. 12:47

은혜의 방도로서의 기도

시편 511-19

 

 

 

이 신앙의 기본 가운데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주신 은혜를 받아서 그 결과를 잘 간직하고 살아가는가 하는 문제가 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 가지 은혜를 늘 주시지마는 그것이 우리에게 생생하게 살아서 은혜롭게 역사(役事)하지 아니하며는 은혜를 헛되이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후6:1)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것들이 많지마는 그 여러가지 은혜의 결과(結果)들은 일반적인 의미로는 또한 계속적으로 은혜를 받는 수단(手段)으로서도 쓰이는 것입니다.

 

예를들면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은혜(恩惠)를 주셔서 기도할 수 있는 위치에 서고 자격이 생겨서 하는 것이지마는, 그것은 돌이켜서 기도를 하는 그것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찬송을 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 까닭에 찬송할 수 있는 자격(資格)도 생기고 속에 그러한 은혜나 능력이 있어서 진정으로, 그냥 종교 가곡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찬송을 올리는 것이지마는 그것이 동시에 은혜를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방법(方法)으로 쓰입니다. 찬송하면 그저 아무 것도 없고 기도를 하며는 거기에 대해서는 대답만 하시고 이러는 것은 아닙니다. 찬송(讚頌)을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들으셨으면 들으셨다는 그 사실로 인하여 우리에게 들으셨다는 사실을 표시하심으로 또한 우리는 마음에 평화와 기쁨과 또 그뿐더러 필요한 때에 필요한 것들을 직접으로 주장(主將)하시고 내려주신다는 하나님의 여러가지 은혜를 또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우리 전체를 헌상(獻上)하고 헌상한 것을 표시하여 또한 매일매일 생활을 주께 드려야 한다는 것을 각성(覺醒)하고 매일 생활을 주께 드리는 구체적인 예로서는 매일 생활 가운데에 가득한 물질로 하나님 앞에 드릴 것 같으며는 하나님께서 그 물질의 상징(象徵)하는 바를 보고 받으시며, 즉 그 물질 그것 자체를 소중히 여기시는 것 보다는 물질(物質)이 상징(象徵)하고 있는 바 즉 하나님의 법대로 전체를 대표해서 그것을 하나님 앞에 드렸다는 사실을 하나님이 열납(悅衲)을 하시는 것이고, 하나님이 그것을 열납 즉 기쁨으로 받으셨으면 동시에 또한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내려서 더 마음이 부요롭게 되고 넉넉하게 되고 더 하나님 앞에 봉사하고 싶은 심정과 능력 가운데 이끌어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우리 자신의 생활이 좀 더 유능해야 하겠는가 하는 문제가 있을 때,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라면 큰 잘못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다른 사람보다 우수(優秀)하기를 원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왜 우리가 능력 있기를 바라는가, 무능하지 않기를 바라는가 할 때는 그렇게 능력이 있으므로 좀더 유효하게, 유능하게, 열매있게 하나님을 섬기려고 그러는 것입니다. 이렇게 좀더 유효하고 유능하게 하나님을 섬겨 나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그러한 은사와 은혜를 더 베풀어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은사(恩師)와 은혜라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모든것을 묶어서 다 하나같이 드려서 하나님이 그것을 열납하셨을 때 그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자기에게 있는 것들이 좀더 열매를 내서 많은 열매를 드릴 수 있도록 인도(引導)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좀더 유능해 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우리에게 주신 바 은혜가 어떻게 그것이 반전(反轉)해서 은혜의 방도로써 하나님의 손에 쓰이고 있는가 하는 것들이라 그 말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받은 바 은혜는 하나님 앞에서 그것이 유효하게 잘 쓰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은혜롭게 되어야 한다 그것입니다.

 

우리에게 가령 하나님께서 넉넉한 재물을 주셨는데 그 재물을 은혜롭게 쓰지 못하고 자기의 욕심과 정욕과 행복 추구와 이기적(利己的)인 목적을 위해 쓰고 자기는 그로 인하여 행복을 얻은 것같이 망상(妄想)을 하지마는 그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바 은혜로써 받는 참된 행복, 참된 축복이 아니라 할 것 같으며는 일은 역전(逆轉)해서 그것은 불행의 씨를 심는 수가 많습니다. 돈이 없었더라면 불행하지 않을 뻔 한 사람이 돈이 많아 가지고 허랑방탕하고 돈 가지고서 자기의 쾌락과 정욕(情慾)을 사고 돌아다닌 결과 나중에는 자기의 멸망을, 자기의 파멸(破滅)을 자취(自取)하는 일이 많은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시는 어떠한 능력을 하나님의 영광(榮光)을 위해서 정당하게 바로 쓰지를 아니하고 자기의 욕심을 위해서 자기 행복 추구를 위해서 자기의 무엇인가를 늘 바라보는 근시안(近視眼)을 가지고 눈이 멀어서 남용(濫用)하고 은혜를 은혜롭게 사용하지 못한 데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우리에게 주신 바 모든 은혜와 은사, 즉 우리에게 무슨 정신적인 능력을 주셨으면 그 은사, 우리에게 물질적인 현실적(現實的)인 여러 가지 은혜를 주셨으면 그런 여러 가지 은혜들이 항상 제 목적을 위해서 잘 사용되어 가지고 그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열납하고 원하시는 열매를 더욱 맺게되는 것입니다. 그 열매를 맺는다는 말을 다른 말로 말하면 그 은혜를 선히 사용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더 많은 기쁨을 드릴 수 있는 사실들이 발생하게 하고 하나님 앞에 더 효과있게 봉사해 나가는 이런 것들이 열매를 맺는 일입니다. 또 하나님 앞에 열납하실 만한 자기 존재의 양상을 가지게 되는 것, 이것은 주로 그의 품성(品性)의 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열매인데 이런 것들이 그에게 더 발생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더 구()할 위치에 서있고 구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와같은 여러가지 은혜를 은혜롭게 선용(善用)한다는 것이 우리 신앙의 기본 생활에 중요한 것인데 그러면 그것을 선용한다, 우리 안에서 잘 활용된다, 실용(實用)된다 이런 말로 우리가 표현할 수 있는 그 여러가지 것들은 예를들면 믿음이라 하는 것도 그냥 막연한 종교 감정으로만 존재하면 실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은 실용(實用)되어야 하는 것입니다.우리 안에 있으면서 그것이 실질적으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또 우리가 기도한다는 문제도 이런 은혜가 독립해 가지고 그것 하나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마는, 기도한다는 일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바르게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그 기도가 가진 제 구실을 하는 그러한 상태 가운데에서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일인데 이제 그런 기도에 대한 것을 하나 실예(實例)로 들어가지고 이후 때때로 찬송, 헌상, 예배 이런 것들을 보겠지마는 오늘은 이것을 이 각도(角度)에서 신령(神靈)한 생활의 양상(樣相)이라는 것을 이모저모에서 생각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신령한 생활이라는 것을 그것만 체계있게 조직해 가지고서 이야기를 하더라도 대체로 오해(誤解)하기도 쉽고 그것이 명확하게 깨달음을 반드시 주는지 않는지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물론 체계있게 먼저 배우는 것이 중요하고 좋은 일이고 또 그렇게 결국은 해야 하겠지마는 그러기 전에 먼저 그 일에 대한 바른 상()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바 은혜가 어떻게 선용되느냐 하는 면에서 저축해 가면서 생각해 나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기도라 하는 문제는 우리가 과거에도 배웠지마는 그것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로 또 이것은 동시에 한 특권(特權)으로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사람이든지 하나님 앞에 기도(祈禱)하며는 하나님이 다 들으신다는 그러한 하나님과의 관계에 놓여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신 바 특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신 바 이 특권이 특권답게 우리에게 잘 선용되어야 하지 그것이 있어도 사용도 못하고 이 세상 사람과 같이 자기를 의지하고 제 지혜를 의지하고 제 노력을 의지하고 그러고만 나아가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바 이 큰 은혜를 사장(死藏)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무시하지는 아니했다 할지라도 사장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기도를 종교 의식 가운데의 하나로만 여겨 가지고 다례(茶禮)를 지내듯이 어떤 때는 기도를 한다, 교회에 와서 예배를 할 때는 기도를 한다, 그 기도의 내용이 거기 적절(適切)하든지 않든지 간에 좌우간 기도한다니까 이러한 차례 하나를 지내야 한다 해서 예식의 일부분으로 종교 의식(宗敎儀式)의 일부분으로 여기고 지내서는 그것이 정당하게 효과를 내는 것이 아닌 것은 다 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령 밥을 먹을때 기도한다, 잠을 잘 때 기도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기도한다 할 때에 그것이 의식(儀式)이 되어버리면 즉 차례 지내듯이 의식이 되어버리고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특권적인 능력이 발휘되지 않는다 할 것 같으며는 그것 큰 문제입니다. 오히려 그 많은 기도와 그 많은 의식 집행은 그에게 한 면역성(免疫性)을 주어서 나중에 우리가 공부해 나가겠지만 이사야 선지자가 너희 많은 기도가 무슨 소용이 있으며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와서 손을 들어서 하나님 앞에 향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이사야 1:15) 그렇게 타매(唾罵)한 것과 같이 하나님 앞에 손을 뻗칠지라도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열심으로 이야기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상관 안 하신다 그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항상 기도가 하나님 앞에 효과있게 되려며는 그 기도의 내용과 기도하는 상태가 정상이라야 합니다. 그런데 기도의 내용이나 상태가 정상이려면 기도를 자기의 종교 생활의 한 중요한 과정 혹은 중요한 프로그램(program)으로 여기는 것이 없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즉 종교 생활의 한 과정으로서 내가 어떻게 종교 생활을 하느냐. 나는 종교인이니까 종교 생활을 해야겠다. 내 생활 가운데는 이 사회인으로서의 일반적인 생활도 있지마는 다른 불신자와 같이 살지 않는 종교인으로서의 그 특수한 면을 또한 가져야겠다. 나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니까 안 믿는 사람의 사는 생활과 같은 것도 많이 하지마는 어떠한 면에 있어서는 믿는 사람다운 것을 또한 드러내야 할 면이 있다고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없어져야 합니다. 가령 이 세상에 나가서 장사를 하고 일하고 놀고 왔다 갔다 하는 점에 있어서는 그 사람이 믿는 사람인지 안 믿는 사람인지 특징 없이 생활을 하다가 어떤 일에, 예를 들면 주일날이면 예배당에 가서 나는 예배를 드리고 또 집에서라도 밥 먹을 때 기도하고 뭐 할 때 기도를 한다. 이런 것은 안 믿는 사람같으면 안 할 터인데 믿는 사람은 한다해서 종교 생활의 한 의식으로서 갖추는 것이다 그 말입니다. 이와같이 종교생활의 한 의식으로서 갖추는 이런 정도의 기도라며는 기도의 아무런 특권이나 효과라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마치 불교인들이 염불하는 식이라 말입니다. 혹은 보통 이 세상 사람들, 한국 사람들이 무슨 제사 때 아침에 차례(茶禮)라 해가지고 차례 지내는 그런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의미없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기도가 가지고 있는 그 특별한 은혜의 사실에서 떨어져 가지고 그것이 오용(誤用)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뭐냐 하며는 기도를 자기의 쾌락과 행복을 추구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생각해 나가는 이런 태도입니다. 기도를 자기의 쾌락, 지기의 얻어야 할 무슨 행복을 추구해 나가는 일에서 하나님 앞에 열심으로 기도해 가지고 도와 줍소서혹은 복을 주시옵소서혹은 은혜를 주시옵소서이런 식으로 기도해 가지고 무엇을 될 수 있는 대로 얻어서 자기 생활을 불리겠다는 점에 있다 할 것 같으며는 이것은 참 큰 문제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그렇게 해서 그 사람이 그것을 많이 얻는다고 생각하느냐 하면, 일반적으로 그러한 정도의 경계(境界)에 살면 기도를 함으로써 않는 것보다 다소 효과는 있다고 생각하지마는 기도를 하며는 하나님이 꼭 들으셔서 잘 이루어 주시는 것이라고 이렇게까지 생각할 그런 마음 자리도 없고, 또 하나는 기도해서 무엇을 받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하는 막연한 일종의 잠재의식(潛在意識)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않는 것보다는 밑져야 본전이니까 해 본다하고 기도하는 일이 더 많습니다. 그리고 가령 그 사람이 기도해서 무엇을 얻었다고 가정하더라도 그 얻은 과정을 가만히 바라볼 것 같으면, 세상에 있는 일반 사리(事理)에 의해서 그런 결과가 당연히 맺어질 수 있는 일이라며는 꼭 자기가 기도해서 그것을 얻었다고만 생각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를 아니했더면 이것은 나에게 오지 아니했을 것이다고 단정할 만한 조건이 없어요. ? “이 세상 사람, 예수를 안 믿는 사람, 기도 않는 사람들도 노력하니까 그런 사리에 의해서 그런 결과를 얻었다는 일이 많은 것이라 말입니다. 즉 일이 소위 합리적(合理的)으로 진행되어 가지고 합리적인 원인(原因)하에서 합리적인 결과(結果)를 수득(收得)하는 일 같으며는 자기가 기도했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도와주셨다고는 생각할는지 몰라도 기도하지 아니했더면 일은 이루지 아니했을 것이다고 이렇게 단정을 못한다 그말입니다. 이런 까닭에 사실상 그의 기도라는 것은 무슨 특권적인 것도 없고 효과적인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기도를 않는 사람이라도 그런 것을 심어가지고 그렇게 거두는 것은 다 분명하다 그말입니다.

 

가령 비근(卑近)한 예를 하나 들어서, 땅에다 무슨 과목을 심었든지 무슨 씨를 심을 때 안 믿는 사람도 믿는 사람도 심었습니다. 자연의 법칙에 따라 가지고서 때가 되면 싹이 나가지고 열매를 거둘 것입니다. “하나님, 이것을 심었으니까 이것이 잘 자라가지고 열매를 많이 거두게 합소서하고 기도를 했다면, 그리고 때가 되어 가지고서 열매를 거두었을 때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으시고 열매를 주셨다고 생각하느냐 하면 그렇게는 생각 않는다 말입니다. ? 빤히 그 옆에 있는 안 믿는 사람의 밭에도 오히려 자기보다 수확(收穫)이 많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 배비(配肥)를 많이 하고 잘 가꾸고 풀을 뽑아주고 했더니 이렇게 열매가 많다고서는 자기 노력의 결과로 얻은 것을 스스로 감사하고 즉 말하자면 합리적으로 일이 진행됐다는 것으로 인하여 마음 가운데 후련히 느끼고 그런 일반 진리에 의해서 그것을 얻어가지고 좋아하겠지마는, 믿는다는 사람은 자기가 기도하지 아니했더면 이 결과를 얻지 못했으리라고 생각할 아무런 조건이 없는 까닭에, 요컨대 기도의 특권적인 것이 없는 까닭에 기도를 아니했다 하더라도 저 사람만치 나도 노력을 해서 노력한 만큼은 거둘 것이다고 이런 생각을 자연히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심지(心地) 가운데에서 기도를 하는 것은 의미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사람은 일반법칙(一般法則)하에서 운영될 일에 대해서 기도를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자연 법칙이나 일반 사회 법칙 가운데에서 어떤 인과관계(因果關係)에 의거하여 소득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는 기도를 아니해도 필연적으로 합리적으로 수득할 터이니까 기도하지 말아라그렇게 성경은 안 가르쳤습니다. “만일 불여의 사태가 일어나서 천변지재(川邊地災)로 혼란이 일어나면 안 될 터이니까 그것을 막아 주십시오하는 정도로 기도하는 심정도 있을 것입니다. ‘씨를 심었는데 갑자기 큰 한발(旱魃)이 와가지고서는 나락을 얻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될 수 있는 대로 우순풍조(雨順風調)해서 잘 거두게 해 줍소서하는 식으로 아마 기도했을 것입니다. 자기는 그렇게 기도했는데 옆에 있는 논에서는 넉넉히 수확을 거두었으면 , 그 사람은 그렇게 기도하지 아니했는데 수확을 거두었다하는 것을 생각할 때 내 기도의 효과가 저쪽 밭에도 다 미치고 이 일방 이 평야에 전부에 다 미쳐가지고서는 금년 수확은 풍년이 들었다고 그렇게 생각하겠느냐 하면 그런 생각을 할 염치도 또 없는 사람입니다. 자기의 기도가 그렇게 도저(到低)하게 굉장히 위대한 능력을, 엘리야의 기도와 같이 능력을 발휘해 가지고서는 자기 나라의 전부의 평야에 하나님께서 우순풍조를 내렸다고 그렇게 생각할 만큼 비위가 뻔뻔하지도 않다 말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신자(信者)가 하는 기도의 생활이 합리적(合理的)인 일, 일반 사회에 있어서의 일의 운행(運行)이라는 문제와 어떻게 합치되겠는가 하는 것을 제대로 생각지 못하며는 그러한 점에서 그는 결국 기도의 특권적(特權的)인 의미를 해석할 수도 없게 되고 깨달을 수도 없게 되어서 그만 기도라는 점에 대한 그의 관념이나 생각이 별로 효과있는 것이 되지 아니합니다. 이런 것들을 우리가 참으로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라 할 때는, 기도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결과요 동시에 그것이 은혜의 수단으로서 효과(效果)있게 사용된다며는, 은혜의 수단으로 효과있게 사용되는 일이 역력(歷歷)하게 늘 일어나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지 그러지 못하고 했어도 그만 안 했어도 그만으로, 일어날 것은 일어나고 암만 기도해도 안 일어날 것은 안 일어난다 하는 정도에서 정체(停滯)해 가지고 있는 이상에는 도저히 기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가령 엘리야가 기도를 해 가지고서 비가 오게 했다든지 하늘에서 불이 내리게 했다든지 하는 문제를 우리가 생각해 볼 때도 만일 일반적인 이법(理法) 즉 하나님의 일반적인 법칙과 소위 합리주의(合理主義)라는 그런 사상 가운데 엘리야가 그대로 정체해서 거기 딱 서있고 거기서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攝理), 특별하신 계획, 하나님 나라의 그 거룩한 진행의 필연적인 요구 이런 것을 전연 몰랐더며는 도저히 하늘에서 불이 내려올 까닭도 없고 또 하늘을 닫게 해 가지고 비가 안 오게 했다가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열려가지고 비가 오고 이런 일이 발생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러한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주의를 해야 해요. 가령 비가 오는 문제 말입니다. 여름에 한발(旱魃)이 자꾸 심하면 열심으로 하나님이여, 비를 주시옵소서. 비를 주시옵소서하고 기도합니다. 가뭄이 심해서 나락이 다 타죽고 농사가 아주 못쓰게 되고 사방에서 무슨 벌레가 나고 그래 가지고 재해(災害), 한재(旱災), 충재(蟲災)에 막 뒤섞일 때에는 교회에서도 주일날 예배할 때 흔히 나서서 이제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비를 주시기를 바랍니다하고 비주기를 기도하고, 심지어 안 믿는 사람들도 나중에는 이제는 별 수 없으니까 기우제(祈雨祭)라도 지내자해서 가까운 산이나 자기네가 영검(靈驗)있게 생각하는 덕산(德山)이나 백산(百山)같은 데 올라가서 기를 꽂아놓고 기우제들을 지내고 하는 것을 여러분 보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비가 오며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기우제를 지낸 사람들은, ‘우리가 기우제를 지냈더니 비가 왔다. 안 지냈으면 비가 안 올 뻔 했다그렇게 생각하느냐 하며는 가령 부조(扶助)를 한 사람들도 다 그렇게는 생각 않습니다. ‘비는 오게 되니까 온 것이다. , 그 사람들이 산에 올라가서 꽹과리를 치고 징을 치고 무릎팍을 꿇고 빌었다고 그래서 비가 내린 것은 아니다하는 식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이것이 특별히 과학이 발달하고 합리주의가 아주 팽팽하게 세계의 사조(思潮)를 지배하게 된 이 시대의 진전에 따라서 차츰차츰 그런 회의자(懷疑者) 혹은 그러한 합리주의자, 유리주의자(唯理主義者), 래셔널리스트(rationaliat)가 자꾸 많아지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 가운데도 그래요. 교회에서 열심으로 비 주시기를 기도했지마는 비가 아주 안 오고 마는 수도 있지요. 그러나 비가 만일 왔다하며는 하아! 우리가 기도했더니 비를 주셨다. 우리가 기도를 아니했더며는 비를 안 주셨을 것이다하고 그렇게 자신있게 생각하느냐 하며는 별로 그렇게까지 생각 않는 것 같습니다. 혹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지는 알 수 없어요. 그러나 생각할 만한 조건이 자기네들도 없는 것을 안다 그말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라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비를 주시겠는가? 우리한테만 비를 주셨으면 몰라도 모든 땅 위에도 다같이 비를 이렇게 굉장히 내리셨다. 다만 비가 이번에는 늦게 오게 되어서 온 것이 아니냐하는 식으로 생각하는 경향(傾向)이 있습니다.

 

이런 것은 뭐냐? 기도가 효과도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주신 이 신성한 특권을 우롱(愚弄)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는 덮어놓고 입벌려 가지고 하나님한테 부르기만 하면 다 되는 것같이 이렇게 두려운 형태 가운데 들어가기가 쉬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바 여러가지 신성한 일들에 대해서 그것이 신성한 것으로 보존(保存)되어야 하고 거기에 대한 우리 마음이 분명해야지 그것이 불분명해 가지고 덮어놓고 하나님 보고 비 주시오하고 찝쩍해 보고 저기서도 찝적해 보고 무엇이든지 하나님한테 덮어놓고 말만하면 다 되는 것인 줄 안다며는 얼마나 하나님을 소홀(疏忽)하게 생각하고 하나님의 법칙을 무시하는 것입니까? 믿는 사람은 안 믿는 사람보다도 하나님의 법칙(法則)을 많이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안 믿는 사람이 하나님이 내신 일반 자연계시(自然啓示)에 의한 법칙을 궁구(窮究)해서 아는 것이 많은 것입니다. 그런데 믿는 사람은 이 자연계에 내리시는 하나님의 자연계시, 일반계시의 법칙도 제대로 잘 모를 뿐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에게 알기를 원하시는 바 신성(神聖)한 법칙도 더 모른다 그 말입니다. 모르고서 덮어놓고 기도한다고 그 기도가 기도답게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이 어떻게 하면 들으시느냐, 어떻게 하면 안 들으시느냐 그런 문제를 과거에 이야기를 했지마는 이제 오늘날 우리가 생각해야 할 문제는 단순히 그런 문제 안에서 듣고 안 듣는 기도의 효용(效用) 그것만 가지고 이야기 할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의 심정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 어떻게 하면 참 잘못되는 것인가 하는 것을 주의해야 할것입니다. 그러면 앞으로 우리가 이런 문제에 대해서 또한 더 깊이 생각해 나가겠습니다. 같이 기도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