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자료

교회학교 교사의 소명과 문제 인식

'코이네' 2021. 4. 27. 21:12

교회학교 교사의 소명과 문제 인식

 


1.교사의 사명은 엄숙한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교사의 직분을 감당하면서도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중차대하며, 영광스러운 일인지 실감하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중의 하나인지도 모르겠다.
 

만일 당신의 아이를 학교에 입학시키기 위해 갔는데, 담임 선생님을 만나 "선생님은 어떻게 교사를 하시게 되었나요?"라고 물었을 때, 그 교사가 이렇게 답을 한다면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사실, 저는 교사 체질이 아니에요. 사업을 하고 싶었는데 돈도 없고,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어서 우선 교사로 일을 하면서 기회를 보려고 합니다"
아마도 우리 대부분은 이 경우 아이를 다시 데리고 나오고 싶어할 것이다. 어떻게 이런 교사에게 내 귀하고 사랑스러운 아이를 맡길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우리는 이 심각한 상황을 오늘 우리의 교회에서도 볼 수 있다. 진정으로 우리 자신에게 질문해 보아야 한다.
 

"오늘 학생들의 부모들이 이들을 나에게 맡겨도 괜찮은가? 나는 준비된 교사인가?"
 

[교회학교]는 그저 주일날 한 시간 아동들이나 학생들을 맡아주는 곳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교사가 있다면 당장 자신의 직분을 심각히 고려해 보아야 한다. 교회 학교란 아이들이 '전인적'이면서도 '신앙적 교육'을 받는 학교이다. 이것은 너무나 중요한 사명이며, 그러하기에 교회학교의 교사란 직분은 참으로 두려운 소명에 해당하는 것이다. 우리는 [교사]의 사명이 엄숙하다는 것을 인식해야만 한다. 
 

모세의 경우를 통해서 그것을 살펴보도록 하자.
"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더니 그 무리를 광야  서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가로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는 동시에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출3:1~5)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특별한 부름을 받는 장면이다. 이제 하나님께서 이 호렙산에서 모세를 불러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종된 그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시려고 모세를 지도자로 세우는 장면이다. 모세가 처음 이 떨기나무의 불꽃을 보았을 때 그는 호기심으로 다가갔다. 그것이 어떠한 것인지 알지 못했고 단지 궁금해서 나아갔다. 또 그 산이 어떠한 산인지, 어떠한 의미를 갖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모세는 늘 거기에 가 있었고 늘 그곳에서 양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세는 목자였다. 지금까지 40년동안 그 일을 해 왔다. 그런데 그날 유독히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기를, "모세야 가까이 오지 마라. 네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이렇게 말씀하셨다. 모세로 하여금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를 알게 하신 것이다.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것을 알려 주시면서 무엇인가 특별한 것을 알려 주시려고 모세를 부르신 것이다.교사로서의 나 자신을 생각하면서 이 말씀을 주목한 이유는 우리가 교사로서의 나의 위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마치 내게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다. 신을 벗어라. 지금까지 네가 생각했던 그런 경솔함과 경박함의 모든 생각들을 벗어버리고 거룩한 하나님 앞에 섰으며 엄숙한 소명 앞에 서 있다는 것을 인식하라."는 말씀으로 들려졌다.
 

이 말씀은 아주 중요하다. 내가 생각하는 교사란 존재는 '양떼들을 무지의 속박으로부터 출애굽 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모르기 때문에 많은 양떼들, 즉 학생들과 성인들이 그릇된 길로 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속박으로부터 이끌어 내시기 위해 모세를 세우셨듯이 교사의 역할도 이와 같다고 믿는다. 하나님의 사랑하는 양떼들을 무지의 속박으로부터 이끌어내는 것, 바로 그것이 교사의 역할인 것이다. 그래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이런 고백을 들을 때 가장 행복을 느낀다.

 

"선생님, 이런 게 있는지 몰랐어요. 이젠 저도 달라져야 겠어요."
 이런 고백을 할 때 나는 생각한다.
 '비록 이것이 완벽하지는 않지만 이 학생이 무지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고 있구나.'
교사는 그러한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실 때 그가 부름 받는 자리는 엄숙한 자리인 것이다.


 2.교사 [한 사람]의 힘과 영향력은 놀라운 것이다.

 

렘5:1을 보라.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 
 하나님은 한 사람을 찾으신다. 신 구약을 통해 하나님께서 한 사람은 찾기 위해 그 자비의 눈을 떼지 않으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교사로서의 자신을 생각할   때 우리는 이 한 사람이 되어야 함을 생각해야 한다.사사 시대 말에 ,엘리 사사가 이스라엘에 영향을 미치고 있을 때 어떠한 일이 있었는가? 나는 그  시대를 한마디로 '이가봇' 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전에 이 말씀을 묵상할 당시 많은 감동을 받았다. 마치 이 시대를 반영하고 있는 듯 했기 때문이다. 엘리의  며느리가 그 아이를 낳으며 죽어 갈 때 "여호와의 영광이 이스라엘을 떠났다." 라고 하며 아이에게 이름을 붙이기를 "이가봇이라", 곧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을 떠났다'는 뜻이다. 이스라엘에 더 이상 소망이 없다는 뜻이다. 한 사람 엘리가 영적으로 어두워졌을 때 그 모든 나라가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 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그런데 소망스럽게도 하나님은 그 다음 장면에서 어린 사무엘을 등장시킨다. 성경은 증거 하기를, '이스라엘에 여호와의 등불이 꺼지지 않았다' 라고 말한다. 사무엘을 일컬어서 '여호와의 등불'이라고 한다. 사무엘이 있는 이스라엘과 엘리가 있는 이스라엘은 전혀 다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찾으시는 [한 사람]이다. 한 사람의 영향력은 그렇게 큰 것이다. 사울이 있을 때의 이스라엘은 골리앗 앞에서 쩔쩔매는 그런 모습이었다. 그러나 다윗이 왕이었을 때 이스라엘은 주변의 모든 나라를 정복했다. 이것이 [한사람] 의 차이였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 한 사람,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 사람 한 사람의 차이를 아는가? 사사가 있을 때와 없을 때, 여호수아와 그 장로들이 살아 있을 때와 죽었을 때. 그 차이를 아는가? 교사 한 사람의 힘과 영향력은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이다. 한 사람의 교사가 서 있는 것으로써 수많은 학생들이 놀라운 변화를 입는다. 교사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그것이 좋은 영향이든 나쁜 영향이든 반드시 미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더욱 조심하게 되고 주님 앞에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
 

3.주님은 최고의 교사였고,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다.

 

 교사로서 우리는 앞으로 주님을 배울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이 최고의 모델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교사라는 이름을 쓰고 있지만 성경적으로 다양한 이름을 쓸 수 있다. 목자, 지도자, 인도자, 사역자... 모두가 같은 맥락에서 적용될 수 있다. 지금 현직 교사이든 앞으로 교사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든 상관없다. 또한 교사의 직분을 가지지 않은 사람도 이 공부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양 한 마리라도 내가 돕고 섬기게 된다면 역시 교사의 정신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측면에서 우리 주님은 최고의 교사요, 모델이 되시는 것이다. 그런 주님이 교사이시면서 우리를 교사로 세우시기 때문에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마10:1~6을 보자. 
"예수께서 그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열 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가나안인 시몬과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 예수께서 이 열 둘을 내어 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택하시고 파송하시는 장면이다. 우리 중 과연 누가 이 사람들, 이 초라한 어부들과 세리, 데모하던 자 등의 이 거친 사람들이 장차 세상을 변화시킬 '위대한 교사들'이 될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던가? 베드로만 보더라도 그렇다. 우리는 변화된 베드로를 알기 때문에 그가 훌륭하다고 말하지만 처음 베드로가 등장할 때 만해도 과연 누가 그에게 인생을 맡길 수 있었겠는가? 당신이라면 예수님의 처음 만날 때의 베드로에게 삶을 맡기겠는가? 그랬다가는 베드로는 아마 우리를 그물에 싸서 갈릴리 바다에 빠뜨릴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나중에 어떤 사람이 되었는가? 베드로전서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완벽한 교사가 되었다. 왜인가? 바로 주님이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그들의 환경이나 재능이 그들을 변화시킨 것이 아니다. 주님과 늘 동행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이러한 사람을 최고의 교사로 만드셨다면 우리도 또한 최고의 교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가진 기본적인 재능이 문제가 아니라 그가 가진 신앙의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주님과 동행하는 훈련의 문제이다.주님은 우리를 교사로 부르신다. 우리 자신을 원하시고 그 다음으로 가르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과 계속해서 친밀한 교제를 나누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교사로서 내가 어떻게 아이들을 잘 가르치겠느냐, 어떤 공과가 필요하며 어떤 교재가 필요한가를 먼저 생각하신다면 그 사람은 낙제이다. 조만간 실패할 것이다. 왜냐하면 학부모로서 나는 자질 없는 사람에게 내 아이를 맡기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교사가 설령 교재 준비에 서툴고 말이 좀 어눌해도 진짜 교사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시간이 문제일 뿐이지 그와 함께 하는 삶은 반드시 학생의 삶을 선하게 변화시킬 것이다. 주님과 항상 동행하는 사람에게는 그러한 놀라운 능력이 나타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