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자료

설교를 듣는 중에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다

'코이네' 2016. 6. 27. 22:19

설교의 기능개발(communication)

 

설교는 그 메시지 내용이 좋다 하더라도 전달행위에 따라 받아들이는 데 엄청난 차이를 나타나게 합니다. 설교는 복음의 중심 메시지의 전달행위를 통하여 완전하게 됩니다. 설교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자로서, 그리스도의 대변자로서, 참석한 자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결과를 기대하고 영향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마음이나 의지 중 어느 한 부분을 감화시키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전인(全人)에게 영향을 주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설교는 설교자와 듣는 자 사이에 하나의 거래입니다. 반드시 강단은 준비된 설교가 있고, 이 설교를 전달하는 전달행위가 있습니다. 설교를 듣고 반응이 각각 다르게 나타납니다. 오늘 설교에 ‘많이 배웠다’(지적인 전달), ‘재미있었다’(감정의 전달), ‘많이 깨달았다’(의지의 전달)고 표현되는 것은 불완전한 것입니다. 설교를 들으면 은혜를 풍성히 받았다는 반응이 있어야 합니다.

 

성공적인 설교자는 청중의 반응(Feed back)을 파악할 줄 알아야 합니다. 피이드 백은 두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미소나 눈물, 아멘의 화답, 집중된 눈동자, 주의를 기울이는 모습의 긍정적인 반응과 산만한 분위기 곧 하품이나, 답답한 얼굴 모습은 부정적인 반응인 것입니다. 설교자는 청중의 반응(Feed back)을 파악하여 의사 전달과정(Communication)을 새롭게 하여야 합니다.

 

설교는 확실, 단순, 명확하여 모호성이 없어야 합니다.

 

설교자는 청중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단순하고 확실성있는 설교를 해야 합니다. 또한 교인들에게 지루한 표현은 실패합니다. 100%의 확실성으로 설교할 때 교인은 50%를 긍정하며, 50%의 확실성으로 설교할 때에 교인은 아무것도 긍정하지 않습니다. ‘…라고 생각된다’라든지 ‘…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등의 표현은 무능한 설교가 됩니다. 그리고 표현이 짧아야 하고 간단 명료해야 합니다. 설교를 논문 쓰듯 해서는 안됩니다. 문어체로 하지말고 구어체로 표현하여야 합니다. 가능한 대로 대화체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청중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수준이하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저속한 말은 안됩니다. 지식을 주려고 하는 전문적인 설교는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무슨 말을 얼마나 많이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간단, 명료하게 얼마나 간절한 마음으로 호소력을 가지고 설교를 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설교는 강의나 강연이 아니며 어디까지나 설교이기 때문입니다.

 

설교는 쉽고 분명해야 합니다.

 

성도들은 쉽게 이해하기를 원합니다. 그런고로 반드시 쉬운 것으로 되어져야 합니다. 이것은 단순하게 설명되어지기도 하고 논리적인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윤곽을 파악하기 쉽게 구성토록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설교 메시지는 단순한 말로서 표현 되어져야 합니다. 쉬운 말로 전해져야 하며 민중언어가 설득력이 있습니다. 분명하게 표현된 성서적 메시지는 모든 회중에게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설교에 있어서 설교자는 평이한 문체를 써야 합니다.

시골 교회에서 총회장을 지낸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설교 시간에 교인들은 거의 졸았습니다. 한 할머니는 설교에 무슨 말을 하는지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나오면서 교인들이 서로 주고 받는 대화입니다. “나는 한 마디도 못알아 들으니 교회를 헛되이 다니는 것 아닌가” 할 때 동행하는 할머니가 “우리 목사님 설교야 잘하시지만 우리 늙은이들이 무식해서 못알아 듣는 것이요. 그저 예수나 믿고 죽으면 천당이나 갈것이니 교회에 열심히 다닙시다”하는 것이었습니다. 못알아 듣는 설교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언어는 평범하면서도 내용을 깊게 하고 누구에게나 적용되어야 합니다.

설교는 교인과의 소통(Communication)이 잘 되어야 합니다. 대개 설교의 메시지는 비슷한데 전달방법에 문제가 있습니다. 어려운 용어를 동원하는 등 유식(? )한 설교를 하는 사람은 교회성장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교인들로 하여금 쉬운 말로 부담없이 알아듣도록 설교하는 것이 좋습니다.

 

설교는 감동적이고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설교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대언입니다. 설교는 타오르는 열정으로 성령의 권위로 선포하여야 합니다. 세계에서 엄청난 뉴스를 전할 사명을 받고도 냉담하거나 박력도 열기도 없다면 누가 그 메시지를 믿으려고 하겠습니까? 요한 웨슬레는 “당신의 설교에 불을 붙이라. 그렇지 않으면 당신의 설교를 불속에 던지라”고 하였습니다.

 

멕케인은 스코틀랜드의 설교 대가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일찍 죽었습니다. 젊은 목사가 그의 교회를 찾아 그의 능력있는 설교비결을 물었습니다. 그때 사찰은 목사의 서재로 인도하여 “저 의자가 목사님의 자리랍니다. 두 팔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두 손 위에 얼굴을 묻어 우십시오” 이번에는 강단 위로 인도하여 “올라가세요. 그 뒤에 서십시오. 그리고 얼굴을 두 손에 파묻은 채 우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설교자의 감정이 메말라가지고는 설교의 전달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영국의 배우 멕레디가 있습니다. 한 번은 설교할 때마다 청중의 관심을 전혀 끌지 못한 설교자가 그 배우에게 물었습니다. 당신들은 어떻게 그 많은 청중들은 거짓말로 사로 잡을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배우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거짓말을 참말처럼 표현하지만 당신들은 진실을 거짓말처럼 표현하기 때문이지요’하였습니다. 그리고 캠벨 몰간은 나 개인적으로 볼 때 설교자는 진리의 성경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토록 열정없이 전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아파트 지역의 지성인들에게 설교하면서 청중을 이해하는 데 새로운 점을 발견했습니다. 변두리 서민들에게는 큰소리로 설교(웅변식)하므로 반응이 좋았으나 아파트 교인들에게는 조용히 시냇물이 흘러가는 것처럼 대화식 언어의 전달이 효과적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큰소리와 열정은 다른 것입니다.

 

설교자는 청중을 사랑하는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설교자는 교인들의 영혼을 사랑하여 지극히 사랑하는 감정을 표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강단에서 눈물이 마르지 않고 흐르고 있습니다. 예수는 조국을 향해 우셨고, 바울은 자기 백성을 위해 울었습니다. 위대한 설교자들은 진실한 자기들의 감정을 아름답게 표현하여 감동적일 때 설교 효과가 있습니다. 진실한 감정이 뒷받침된 설교는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하게 할 것입니다. 큐인티리안은 말하기를 “말하는 사람은 그가 접하려고 하는 군중을 향하여 불이 붙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나는 설교 전문을 원고지에 써야 합니다. 신학교에서 원고를 쓰고 준비하도록 배웠기 때문입니다. 주일 낮 설교는 많은 교인들에게 언어에 실수할까 두렵고 내용을 잊을까 염려하여 심지어 예화까지 정확하게 써서 원고 설교를 합니다. 그러나 밤예배는 원고없이 설교를 합니다. 그것은 얼마나 많은 내용으로 많은 말을 했느냐보다 얼마나 설교에 감동을 받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목사가 교인을 보지 않으면 교인들도 목사를 보지 않는데 그렇게 되면 설교는 허공을 치게 됩니다. 교인들이 교회 올 때는 배우려는 것이 아니고, 은혜 받으려는 것이요, 깨달으려는 것보다 얼마나 감격하고 가슴이 뜨거워졌느냐 하는 것입니다. 웃는 것보다 눈물이 있었다면 이 설교는 청중에게는 가장 효과적인 설교 전달이 된 것입니다.

 

나는 언제나 눈물이 강단에 흐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성령이 나로 하여금 울게 만들기 때문입니다(롬 8:26). 눈물로 얼룩진 강단은 심령을 옥토로 만듭니다. 눈물의 습기를 묻히어 뿌려진 말씀의 씨앗은 교인들의 가슴에서 싹이 나고 열매가 반드시 맺히게 됩니다.그리스도께서는 군중을 찾으러 다니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개인을 찾으셨고 군중이 그를 찾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 설교자들은 한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 청중을 찾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쇼맨이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영혼 구원의 절대성을 강조해야 합니다.

 

누구나 구원을 받아야 하고 이 구원에는 오직 한 길 밖에 없다는 것을 강조해야 합니다. 구원에는 Best way가 아니라 오직 Only way만이 있을 뿐이다 라고 주장하는 메시지라야만 합니다.

언제나 구원의 긴급성에 대해 강조해야 합니다. 설교중 한 번쯤은 종말론적인 이야기가 언급되어지는 것이 좋습니다. 그 어떤 것보다 영혼구원은 우선적이요, 절대적인 것을 강조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영혼 구원에 대한 간절한 ‘정열’이 있어야 합니다. 많은 설교자들이 어떻게 하면 유명한 설교를, 칭찬받는 설교를 할 수 있을까 에만 고민하기 쉽습니다. 문제는 교인들의 영혼을 구원하고자 하는 안타까운 정열이 담겨져 있는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제 해결로서의 설교가 되어야 합니다.

교인들은 누구나 스스로 해결치 못하는 각자의 문제점을 갖고 있습니다. 이 문제점의 해답을 줄 수 있고 충족감을 줄 수 있는 설교가 되어야 합니다. 교인들은 설교를 듣고 자기 문제의 해결을 보아야 합니다. 모든 설교가 현실적이어야 합니다.

 

아카데미 하우스에서 열린 베델성서대학 과정에 한 반에서 같이 지낸 신부와 대화하는 중에 신교 목사처럼 신부도 설교를 잘하면 좋겠노라 하기에 나는 결혼하시오! 그러면 설교를 잘한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가족 분위기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버지가 되어야 아들, 딸의 문제를 알고, 아내가 있어야 모든 가정의 문제를 실감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신교 목사는 사회와 가정의 문제 속에서 고민하는 상황에서 일치(Identity)를 이루기 때문에 문제의 해답을 주는 설교를 하기 됩니다.

 

케리그마적 설교를 통하여 영혼 구원의 문제를 해결하고, 상하고 찢기고 실패하고 곤고한 심령들이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현재 한국 교회에서 교회성장이 둔화된 교회는 그 이유가 있습니다. 교인들에게 문제 해결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고려파는 교훈적(Didactic) 설교를 많이 하여 율법적 교리의 강조와 신사참배 거부와 신앙적 전통만을 고수하며 현실적 신앙생활에서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요, 기장은 예언적(Prophetic) 설교를 많이 하여 사회정의 구현과 현실사회 부조리를 고발하는 비판으로 현실에서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교인들에게 소망을 주지 못하고 현실 문제를 해결하여 주지 않기 때문에 청중을 잃고 있습니다. 그러나 케리그마적(Kerygematic) 설교에 중점을 둔 성결교단과 침례교단이나, 치유적(Therapeatic) 설교를 하는 통합 장로교단은 비약적인 성장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영혼의 문제와 가정, 사업, 건강, 심령의 복합적인 문제들이 말씀을 통하여 해결을 받고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갈보리교회 척 스미스 목사는 교인들과 일일이 상담(Counselling)하여 저들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습니다. 10년이 지난 후 조사한 결과 상담으로 문제해결 받은 사람은 거의 없었고 설교를 듣는 중에 문제를 해결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 뒤로는 설교 카셋트를 준비하여 그 문제에 해당되는 설교 내용을 주면서 듣고 기도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설교는 카운슬링이 되어야 합니다. 설교를 통하여 해답을 줄 수 있도록 하여야 합니다.

 

(이중표 목사 '설교자의 자기개발'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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