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자료

설교의 영성, 창조자의 영으로 사람의 마음에 영감을 주라

'코이네' 2016. 6. 27. 22:13

설교자의 영성개발

 

설교자가 성서를 떠나서 설교할 수 없듯이 또한 설교자는 성령과의 관계없이 설교할 수 없습니다.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말씀이기에 성령의 감동 없이는 성서는 이해할 수가 없고 설교되어질 수가 없습니다. 성령은 준비할 때 영감을 주며, 실제 설교할 때 열정을 주며, 설교가 행하여진 후에는 모든 의미있는 열매들을 맺게 해줍니다. 존 녹스(J. Knox)는 ‘참된 설교는 처음부터 성령의 역사’라고 하였습니다. 벵겔이 딤후 3:16절을 주해하면서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되었다는 것은 다만 성경을 기록할 때에 저자들이 영감을 받았을 뿐 아니라 독경함으로서도 영감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하나님의 입김이니 성경은 사람에게 유익한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말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성경에 3중의 관계를 가진다는 의미가 됩니다.

1) 하나님의 성령은 저자들이 기록할 때에 영감을 주셨고,

2) 하나님의 성령은 우리가 성경을 읽고 또 들을 때에 성경의 말씀을 통해 역사하시고,

3) 성령이 하나님의 빛을 던져주므로 우리가 그것으로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1) 성령과 성경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말씀입니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벧후 1:21). 우리가 완전한 성령의 감동을 이야기할 때는 어느 한 부분만이 아닌 성경 전체가 감동된 것을 말합니다. 이와 같이 성령의 영감으로 쓰여진 성경의 말씀은 성령의 은혜를 받기까지는 하나님께서 나타내신 말씀으로 이해하지 못 합니다.

 

성경을 읽는 모든 사람들이 다 경험하는 사실은 말씀이 이전에는 건조무미하였고 자신과는 아무 관계가 없었으나 언젠가는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데, 그때부터는 말씀은 생명이 되고 자신의 메시지가 된 것입니다. 이것을 성령의 내적 증거라고 합니다. 성령은 이와 같이 말씀에 생기를 불어넣어 우리 영혼이 살아 있는 하나님 말씀에 직면케 합니다. 이러한 경험은 하나님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생활이 기본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 사이에는 영광스런 결합이 존재합니다.

 

오순절에 베드로는 구약 성경에서 인용하는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행 2:16) ‘이는’이란 말은 약속된 성령을 말합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것이란 기록된 말씀을 가리킵니다. ‘이는 말씀하신 것’이란 성령과 말씀과의 놀라운 결합을 주고 있습니다. 능력있는 설교는 성경말씀 하나, 혹은 한 구절, 혹은 한 장이라도 그것이 성령에 근거를 둔 설교일 때라고 믿습니다. 말씀은 성령께서 활용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외쳐져야 합니다.

 

오늘날 강단의 능력이 약화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설교하거나 가르칠 때 우리 성령께서 그 일을 하시도록 문을 열어 줍니다. 하나님께서 웅변에 능한 설교나 지적인 설교를 축복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 말씀만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으로 나타나게 하십니다.

 

(2) 말씀과 성령

 

독일의 신학자 루돌프 보렌 교수는 설교와 성령의 중요성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설교는 가장 뛰어난 신학적 기초 설정도 성령께서 활동하시지 않으면 설교자에게는 소용이 안 되는 것입니다. 설교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성령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설교의 행위가 필요로 하는 것도 성령이며,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는 단순하게 말만이 아니라 힘에 있어서 성취됨을 인식할 수 있는 것입니다(고전 4:20). 이에 반하여 영이 빠진 설교는 허무에서 허무를 향해 설교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쓸데가 없는 것입니다.”

 

성령은 자신께서 설교 행위의 근원, 힘, 그리고 목표가 되심을 증거해 보이시는 것입니다.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전능하신 주 하나님께서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설교한다는 것은 성령으로부터 와서 성령에 있어서 행해지고 성령을 목표하여 행해지는 것입니다. 설교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기적적인 성격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말씀을 선물로 주시는 영이십니다. 예수님은 세례 받으신 후에 비로소 성령과 함께 설교를 시작하신 것입니다(막 1:9). 바울은 그 힘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자로서(고후 3:5) 자기는 성령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며 성령께서 가르쳐 주시는 말씀으로 말하는 자라는 것을 주장합니다(고전 2:12 이하). 성령 강림의 날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충만된 사건은 언어의 기적이라는 결과를 낳았던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성령으로 가득 차서 성령이 시키는대로 여러 가지 외국어로 말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행 2:4).

 

성령은 다만 단순하게 말씀을 주시는 분일 뿐만 아니라 그 자신께서 말씀을 해석하고 적어도 그 이름을 부르시는 일을 필요로 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성령은 제자들의 언어 교사가 되고 제자들은 성령의 말씀을 전하는 자가 됩니다. 저자가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저자의 입을 필요로 합니다. 저자는 성령을 언어로 인도한다고 하면 성령은 저자를 말하는 일로 인도합니다. 성령은 단순하게 말씀을 주실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을 명백하게 말하는 일도 주십니다. 그러므로 설교자의 골방 속으로 열려진 창문이 있는 것이며, 이는 곧 성령의 임재를 의미합니다.

 

성령의 임재는 우리들의 속에 계시는 임재이며, 또 우리들의 주위를 둘러싸는 임재인 것입니다. 그것은 은혜의 선택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성령의 임재는 성령에 의하여 약속된 것이기 때문에 설교자는 이것에 의존할 수가 있습니다. 상호 관계속에 있어서 이 성령의 임재는 약속인 동시에 의무이기도 합니다. 성령은 단지 말씀을 주시는 것만이 아니며, 다른 한편 말씀의 성령이 함축하는 바를 밝히는 것만도 아닙니다. 말씀이 성령을 매개하는 것입니다. 그때 설교의 목적이 되는 것은 영감을 주는 일입니다. 영감을 주는 설교란 생명을 주는 설교인 것입니다. 설교는 이 세상을 새롭게 창조하는 영을 매개해야 합니다. 창조자의 영으로 사람의 마음에 영감을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설교의 기적적인 사건은 성령의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였노라.”(고전 2:1~5)

 

여기에서 바울은 설교의 핵심을 두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그리스도 십자가의 증거와 성령의 능력을 의존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증거할 때 성령이 역사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영이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성령이 충만하였고, 그들의 설교는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이들의 설교의 권위는 성령으로부터 왔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며,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또한 성령은 진리의 영이며, 사랑의 영이며, 능력의 영이며, 지혜의 영이고, 성령은 생명의 영입이다. 성령충만하다는 말은 하나님의 충만한 것으로 충만하다는 뜻입니다.

설교자가 이렇게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게 될 때에 그의 말은 사람의 말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화합니다. 듣는 자가 사람의 말로 듣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습니다. 그 이유는 듣는 자들의 마음 가운데로 같은 성령이 역사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성령충만을 위하여 묵상하고 기도하여야 합니다.

 

(3) 설교자와 성령

 

성령은 설교자의 생명이며 성령없이는 모든 것이 헛된 것입니다. 성령은 설교자의 최상의 능력입니다. 성령의 사역은 설교준비, 설교현장, 설교 후 열매를 맺는 능력이라고 목사들이 인정하면서도 그렇게 살지는 못했다고 바우만 박사는 지적했습니다. 설교자는 목사, 행정가, 연설가, 사회개혁가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사람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가) 성령은 설교자를 변화시킵니다.

은혜스런 설교는 언어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인격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인격과 일치되지 않는 설교는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습니다. 설교자는 성령이 그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만드시고 지으시는 데 따라 변화됩니다. 설교자는 육체적 공덕으로가 아니라 성령의 열매를 통하여 인정이 되어야 합니다.

 

나) 성령은 설교자를 가르치십니다.

성령은 교사로서 그리스도의 종들을 인도하시며, 그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요 14:26) 그들을 영감하십니다(요 16:13).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책이기에 성령의 감동을 받지 않으면 바르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계시의 영을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마음 눈을 밝히사(엡 1:18)-성서의 진리를 알기 위해서는 눈이 열려야 하고 성령의 조명(照明)이 있어야 합니다. 설교자는 청결한 마음으로 눈을 밝게 하고(마 5:8), 성령의 불빛이 설교자의 심령을 비추어 주어야만 됩니다.

 

다) 성령은 설교자를 도우십니다.

설교자도 인간이기에 가정과 교회와 사회적인 문제로 슬프고 고통스런 일들이 파도처럼 엄습하여 옵니다. 그리고 목회에 뜻밖의 시련과 인간적인 배신으로 실망의 함정에 빠집니다. 이때 좌절하고 낙심하여 스스로 일어설 수 없을 때 성령님은 우리를 위로해 주시고 도와주십니다. 자신이 연약하여질 때 도우셔서 승리하게 만드십니다(롬 8:26). 그러나 영적인 권능은 영적인 인격을 갖춘 사람에게만 속한 것입니다.

 

라) 설교자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성령은 설교자의 삶 속에 전부를 성취시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의 능력을 힘입었고(눅 4:18), 베드로가 오순절에 성령의 능력을 받아 3천명이 회개하는 사건이 이루어졌으며 바울은 자신의 설교는 능변이 아니라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을 통한(고전 2:4)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설교자가 설교의 권능을 갖기 위해서는 반드시 케리그마적이어야 합니다. 어떤 형태의 설교이든 중심이 케리그마일 때 성령이 능력을 주십니다. 설교자는 마치 설교가 전적으로 나에게 매여있는 것처럼 설교를 준비하여야 하며, 그리고 설교는 준비와는 아무 상관없는 것처럼 성령님을 의존하며 강단에 서야 합니다.

 

(4) 성령의 권능을 받기 위해

 

가) 열심히 기도하여야 합니다.

위대한 설교는 기도 없이는 창작되지 않습니다.

E.M. 바운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강력한 결과를 가져오는 설교자는 사람을 설득하기 전에 하나님께 간구하는 데에 승리한 사람이다. 골방에서 하나님과 사귀는 데 있어서 가장 우수한 설교자는 강단에서 사람과 사귀는데 우수하다고 하였습니다.

크리스웰(W.A Criswell)은 이렇게 썼습니다. “가장 잘 무릎 꿇는 이가 가장 훌륭히 서는 자요, 가장 겸손하게 무릎 꿇는 자가 가장 강하게 서는 자이며, 가장 오래 무릎 꿇는 이가 가장 오래 서는 자이다.” 기도는 하나님을 움직이는 방편이 아닙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의 일부가 될 때까지 우리 자신을 그에게 이끄는 영적 훈련입니다.

 

영혼을 죽이는 설교는 기도없는 설교입니다. 기도가 약한 설교자는 생명력이 약합니다. 기도하는 설교자만이 기도하는 성도를 낳고, 기도하는 강단은 성도의 심령을 움직입니다. 현대 교회가 필요로 하는 사람은 기도에 능한 사람, 기도의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성령은 방법을 통해서 흘러나오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을 통해서 흘러나옵니다. 생명을 주는 능력에 있어서 설교자체가 사람을 초월해서 어떤 힘을 일으킬 수는 없습니다. 죽은 사람은 죽은 설교를 할 것이요, 죽은 설교는 영혼을 죽입니다. 모든 것은 설교자의 영적 성품에 달려있습니다.

 

서울 어느 교회에 겸손하고, 강단 밑에 눈물이 마르지 않는 목사님이 계셨는데 그 교회는 크게 부흥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에 은혜받지 못한 장로님이 한 분 계셨는데 교회가 성장되었으니까 학위있는 지성적인 목사님을 모시자고 교인들을 선동하였으므로 목사님은 사임하였습니다. 그리고 박사학위를 가진 목사를 모셔왔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부흥될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교인은 자꾸 줄어만 갔습니다. 목사님은 불안하고 초조했습니다. 전에 목사보다는 내가 더 많이 배우고 아는 것도 더 많은데 하며 안타까워하던 중 어느날 이 목사님은 사찰 집사님에게 당신이 보기에 그전 목사님과 나와 다른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이때 사찰 집사님은 ‘한 가지가 다릅니다. 먼저 계신 목사님은 교회만 들어오면 꿇어 엎드려 강단 밑에서 눈물로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그런 일은 한 번도 본 일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그날밤 목사님은 처음으로 강단 밑에 꿇어 엎드렸습니다. 강단 밑에서 기도하던 중 잠이 들었고 그날밤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성도들이 성전에 가득 메워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목사는 열심히 설교하고 성가대는 찬양을 했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찬송을 열심히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성도들이 입술을 벌리나 소리가 없고 목사가 설교를 해도 전혀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에 항상 기도하는 권사님의 찬송하는 음성만이 들렸고 천군천사가 화답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

내뜻과 정성 모두어 날마다 기도합니다.

 

목사님은 깨달았습니다. 기도없는 설교는 인간의 설교는 될지언정 하나님의 말씀은 될 수 없습니다. 기도없는 찬양은 노래는 될지언정 찬송은 되지 못합니다.

 

혹시 이 가운데 교회성장을 원하나 교회가 부흥되지 않으므로 답답한 심령들이 있다거나 교회가 은혜가 없고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겸손한 마음으로 무릎 꿇는 목사가 되지 못한 것이요, 가슴 속에 눈물이 말라있는 증거입니다.

 

나) 성령은 자아를 희생시키는 목사에게 임합니다.

하나님의 영은 교만하고 자기 우월감에 사는 자에게는 냉정하신 분이십니다. 목사는 자기 자신에게 신뢰를 두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 완전히 굴복함으로 자아를 망각해야 합니다. 성령의 권능은 그리스도에게 헌신하는 자에게 임합니다. 머리로 하는 목회는 전혀 순교자를 낳지 못합니다. 사랑과 충성에 목숨을 다 하는 것은 마음뿐입니다.

 

목회자의 승리는 자신을 이기는 데 있습니다. 자신을 이긴 자는 다른 사람의 심령을 복음으로 점령할 수 있습니다. 자기 몸을 성령의 인도하심과 하나님 뜻에 복종시킬 줄 아는 목자가 되지 못하면 도리어 버림받는 교역자가 됩니다. John Milton은 말하기를 ‘스스로 자신을 제재(制裁)하고 정복과 공포를 자치(自治)하는 사람은 제왕 위에 있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자는 자신을 희생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중표 목사, '설교자의 자기개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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