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자료

스펄전 목사를 변화시킨 한 편의 설교

'코이네' 2016. 6. 27. 22:02

설교의 내용

 

설교는 열심히 외쳤다고 설교가 아닙니다. 무엇을 전하였느냐 하는 그 내용이 중요합니다. 설교는 성서를 전하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자신을 나타내거나 자기 주장을 교인들에게 펴기 위해서 강단에 서는 것이 아닙니다. 가능한 한 인간의 설명은 적게 붙이고 성서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진리를 드러내고 표현하기 위해 강단에 서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내게 대하여 증거한 것이라”(요 5:39)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고 설교가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설교를 듣고 나오는 청중의 머리 속에 무엇이 남아야 하느냐,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생각나고 그리스도의 왕국이 그리워지고 오직 예수만이 나의 전부요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 것도 영광이라는 자세에서는 것입니다.

 

카이퍼는 성서적 설교내용은 ‘오직 성서’(Sola Scriptura)와 ‘성서의 전부’ (Tora Scriptura) ‘성서를 순수하게’(Pura Scriptura) 증거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성서에 기초를 두지 않는 설교는 바른 의미에서 설교라 할 수 없습니다. 설교가 성경을 떠나면 교인은 교회를 떠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설교가 강단에서 정치를 논한다면 구태여 그 설교를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경제, 문학, 철학의 전문가가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스펄죤 목사는 16세부터 위대한 설교자로 부름 받는데 1850년 1월 6일 눈보라 때문에 길이 막혀 골목에 있는 작은 교회를 찾아 갔을 때 목사는 나타나지 않고 남루한 옷을 입은 초라한 집사가 강단에 올라서서 이사야 45장 22절을 펴서 “땅끝의 백성들아 여호와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를 읽은 후, “여러분 눈보라를 바라보지 마십시오. 세상을 바라보지 마십시오. 우러러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눈을 뜨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나서 크게 변화되었습니다. 그 후로부터 그가 입을 열어 설교할 때마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구원받게 되었다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실로 그리스도야말로 성서의 중심이요, 설교의 중심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자신이 “성서는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라”(요 5:39) 하셨으니 실로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알파와 오메가입니다. 성서 전체에 흐르고 있는 사상은 예수 그리스도이며 속죄입니다. 어거스틴의 말에 의하면 신약은 구약 속에 숨었고 구약은 신약 속에 나타나 있습니다. 전 성서의 중심 문제가 예수 그리스도인 것을 확인했습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에서 예언되었고, 또 예언된대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다가 다시 오실 것입니다. 우리는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므로 구원을 받습니다. 이 사실을 증거하는 것이 케리그마입니다. 설교의 중심은 케리그마가 되어야 합니다. ‘설교는 기록된 말씀으로부터, (Written Word)전해진 말씀에 의하여(Spoken word) 구현된 말씀의 현실이다 (Incarnated word)’ 라고 맨닝(B.L Manning)은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성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해석되지 않으면 바르게 해석되지 않고 믿을 수도 없습니다.

 

C.W.Koller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설교자는 그리스도의 대리요, 대사이다(고후 5:20).

그리스도의 대사는 ;

1. 그 교서(성서)대로 충분히 말한다. - 대사의 권한은 교서를 변경치 못 한다.

2. 그 교서(성서)의 전부를 전한다. - 대사가 임의로 전할 수 없다.

3. 그 교서(성서)를 효과적으로 말한다. - 대사는 일국의 대표이니까 적당한 때에 좋은 방법으로 전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필립 부룩스가 60세 때, 그의 서랍에 한통의 편지가 간직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주일마다 목사님의 설교를 듣습니다. 그러나 설교를 듣노라면 목사님은 잊어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과 십자가를 생각하고 은혜를 받습니다”라고 씌여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어느 유명한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의 박력있는 음성과 양의 동서와 시의 고금을 누비는 해박한 지성은 듣는 이들을 감탄하게 합니다. 그러나 돌아갈 때 남는 인상은 참 말 잘한다는 생각으로 그치고 마는 것입니다. 언제나 설교의 위기는 전하는 내용상에서 위기였습니다. 그들이 전하는 말씀의 내용이 케리그마로 증거될 때 힘이 있었고, 거기에서 외도할 때 힘을 잃었습니다.

 

지난해 목회실습을 하러온 대학원생들이 있었습니다. 그들과 대화하는 중에 조그마한 변두리 교회를 섬기고 있다는 꽤 똑똑한 학생은 현실 교회를 비판하고 그가 본 대교회 목사님 설교는 내용이 없다고 비판했습니다. 오히려 자기는 충실한 내용으로 설교하고 있다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자네는 그렇게 내용있는 설교를 하고 있는데 교인이 몇이나 모이느냐고 물었습니다. 3년전 부임시 50명이었는데 지금도 50명 정도 모인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그렇게 내용이 풍부한 설교를 하는 후배를 격려하고 이런 부탁을 하였습니다. 그 내용없는 목사의 설교를 한달 동안만 강단에서 그대로 하고 나를 만나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는 내용 없다는 목사의 설교를 하였더니 교인들은 처음으로 은혜 받았다고 하고 한달을 계속했더니 우리 목사님이 달라졌다고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교인들의 모습도 달라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설교의 내용을 이해 못하고 내용도 없는 설교는 은혜롭다고 하는 이 속 빈 교인들을 한탄하면서 강단에 서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설교내용은 문학적 수식어나 철학적 지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성서의 말씀을 현재 교인들 심령 속에 재화육되도록 전하는 데 성령이 역사했느냐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하네!”라고 조용히 말해주었습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책이며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영입니다. 그러므로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때만 성령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아무리 소리가 크고 유창한 언어일지라도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설교는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합니다. 예수께서는 “성령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영광을 나타내리니 이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13)하셨습니다.

 

바우만(J.D. Bauman)박사는 설교를 목적에 따라 네 가지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1. 전도(Kerygmatic)-구원(to redeem)

2. 교훈적(Didactic)-교육(to teach)

3. 목회적(Pastoral)-개인치료(to heal personally)

4. 예언적(Prophetic)-사회정의(to heal socially)

 

그러나 모든 설교를 다 이런 공식으로 구분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한 번의 설교에서 구원과 교육과 치료가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가운데 교회 성장과 관계된 설교는 1번과 3번의 설교가 선포되는 곳에 일반적으로 교회성장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중표 목사 '설교자의 자기 개발'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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