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자료

영의 힘을 가지고 영혼을 움직이는 설교를 하라

'코이네' 2016. 6. 27. 21:53

인간은 영적인 동물 영에 의해서만 변화 받는다

 

인간은 정신과 육체, 영 세가지의 집합체입니다. 인간 정신건강의 기본은 영입니다. 영이 흔들려 버리면 정신도 육체도 함께 흔들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영이 건강할 때 모든 것이 함께 건강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이나 저나 인간은 모두 영적인 동물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 영적인 동물은 지식에 의해서 변화받지 않습니다.

 

영적인 동물은 영적인 언어에 의해서만 변화받고 거듭납니다. 우리가 지식과 궤변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고 회개시키려 한다면 큰 오산입니다. 인간의 영은 지식에 의해서 치유받거나 변화를 받지 않습니다. 지식이 많은 사람 앞에 가면 편합니까? 깊은 감화를 받을 수 있습니까? 사람은 지식이 많고 똑똑한 사람 앞에서 절대 감화받지 않는 존재입니다. 차라리 좀 모자라는 바보 앞에서는 변화를 받습니다. 똑똑하고 잘난 사람은 오히려 환자입니다. 사람은 머리에서 나오는 언어나 말에 의해서 변화받지 않습니다. 책을 많이 보면 지식은 많아집니다. 시간이 있어 책을 많이 본 사람은 훌륭한 것처럼 행세하려 하고 바빠서 책을 못 보면 무식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드라마 작가들은 ‘바보’를 소재로 글을 많이 씁니다. 70년도 초에 힛트했던 ‘여로’는 바보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바보에게서 순수한 인간을 만날 수 있기 때문에 감화를 받습니다. 설교를 해도 바보같은 조금 모자라는 사람을 소재로 하면 더 많은 감화를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야기를 하는 데는 몇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첫 번째 유형은 입술의 언어입니다. 입술과 입술의 대화, 입술에서만 나오는 인사나 언어는 차라리 안 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입술을 가지고 언어를 말하려면 차라리 입을 다물고 고개로 말하는 것이 훨씬 더 좋습니다.

 

그 다음은 머리와 머리의 대화입니다. 네가 많이 아느냐? 내가 많이 아느냐는 식으로 지식을 가지고 하는 대화도 사람을 치유시키는 데는 아무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그 다음, 차원이 깊이 들어가는 언어는 가슴과 가슴이 만나는 대화입니다. 이것은 상대방이 슬픔을 당하면 나도 깊이 슬퍼하는 것으로 이런 대화는 느낌의 대화입니다. 이것부터는 어떤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근본적으로 거듭난다든가 회개를 한다든가 방향을 바로잡는 데는 이것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마지막 언어가 영혼과 영혼의 대화입니다. 이 영혼의 언어가 비로소 사람을 치유시키고 변화시킬 수 있는 언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혼의 언어는 입을 통해서도 언어를 통해서도 종종 표현되지만 주로 영의 언어는 몸을 통해서 많이 표현됩니다.

 

제가 존경하는 부흥사 가운데 한 분이 이용도 목사님입니다. 이용도 목사님은 특별히 영혼으로 가장 강하게 말씀을 하시는 분이었다고 생각을 하는 데, 만주에 가서 부흥회를 하는 데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목사님이 강단에 올라가서 청중을 말없이 눈으로 쳐다보는데 그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집니다. 한 시간이고 80분이고 서서 교인들만 쳐다보는데 나중에 교인들 가운데 회개운동이 벌어지고 통곡이 터졌습니다. 이것이 영의 언어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내 의사를 전달하고 내 역량을 불어넣을 때 입을 많이 써야한다고 알지만 입처럼 인간에게 적은 힘을 가진 것은 없습니다.

 

목사님들이 교인에게 올바른 치유의 언어를 넣으려면 입을 쓰지 마시고 영의 언어를 몸을 통해서 보내야 합니다. 눈을 통해서, 손과 얼굴 전체를 통해서 나가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이사를 가서 5년만 지나면 우리 목사님이 어떤 설교를 했다는 것은 전혀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도 자기 목사님이 어떻게 몸으로 이야기했는가는 분명히 기억을 합니다.

 

외국에서 가장 훌륭하고, 교회를 빨리 성장시키면서도 건전한 목사님을 10명을 선정했는데 그 목사님의 공통점은 전부 다 말을 많이 하지않고 몸으로 이야기하는 점이었습니다. 설교가 어떻게 청중에게 많은 감화를 주느냐는 목사님의 눈, 얼굴, 몸의 전달에 달려있습니다.

 

설교내용을 전달할 때 방법에 따라 어떤 효과를 주느냐에 대한 연구보고서가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자기 설교 내용을 교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더니 3%의 영향을 주었을 뿐이라고 합니다. 목사님이 원고에다 감정을 섞어서 녹음을 해서 들려주었더니 그 소리가 38%를 더 감화시켜 합쳐서 41%의 효과로 나타났습니다. 다음에 목사님이 직접 나와서 교인들과 눈으로 보면서 얼굴과 몸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니 53%의 역량을 더 가산시켜서 복음을 전달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많이 쓰신 전달 수단입니다. 말씀을 많이 하셨지만 그 얼굴, 그 눈빛, 손으로 만지는 몸의 언어가 가장 강하게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우리 목회자들은 내 자신의 몸의 언어를 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교단에서는 원고를 보는 것이 유행했습니다. 중요한 복음의 전달 수단이 그것인 줄 알고 따라한 것입니다. 목회자들이 눈을 청중과 떼어버리면 그만큼 원고의 내용은 죽어버리므로 몸의 언어를 잘 활용할 수 있어야 됩니다. 이 몸의 언어는 영의 언어인데 이것은 저절로 개발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을 깊이 하나로 갈고 닦을 때 나오는 것입니다.

 

인간은 영의 힘을 가지고 이야기할 때 끌려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영의 언어 앞에서 가장 약합니다. 불교에서도 말없이 마음과 마음이 서로 통하는 그것을 이심전심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영의 이야기로 교인들을 치유하고 변화를 주고 싶으면 여러분의 마음을 깊이 하나로 모으는 작업을 먼저 해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의 영이 점점 힘을 발하게 되고 여러분의 얼굴과 눈과 몸 전체는 영의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게 된다는 면에서는 훈련도 조금은 가미가 되어야 합니다. 말하지 않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가장 힘있는 이야기를 하려면 될 수 있으면 말을 삼가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저는 말 잘하는 사람에게 주고 싶은 선물이 있는데 매끈매끈한 차돌입니다. 말하고 싶을 때 입에 물으라는 뜻입니다. 교인들을 만날 때 말을 많이 하고 싶지만 그때에는 참으십시오. 목사님들은 눈으로 이야기하고, 교인들이 눈으로 이야기할 때 들으십시오. 6개월 동안 교인들과 눈으로 듣고 눈으로 이야기하고 얼굴로 이야기할 때 교인들 모두 목사님께 사로잡힙니다. 아이들을 교육할 때도 아이들이 빗나가고 부모에게 반항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머니 아버지가 잔소리를 많이 해서 그렇습니다. 그런 부모님은 말을 삼가십시오. 부모가 입을 다물고 자식의 이야기를 눈으로 얼굴로 고개로 몸으로 깊이 들어주면 아이들이 점점 순화되어버립니다. 이런 이야기는 영의 이야기이므로 감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상담을 하면서 말을 많이 하지 않습니다. 주로 듣습니다. 세 네 시간에도 한 두 마디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세 네 시간 마음껏 하고 일어나 가면서 “교수님 말씀 잘 들었습니다”합니다. 틀린 이야기가 아닙니다. 나의 이야기는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영으로 그 사람을 깊이 받아들이고 공감을 느끼는 것이므로 그들이 변화됩니다. 그러나 내가 말로 많이 이야기해준 사람은 고개는 끄덕이지만 행동하지 않습니다.

 

일리노이에 어떤 목사님이 말이 많지 않은데도 청년 교인들을 성공적으로 성장시킨 목사님입니다. 그 목사님은 얼굴과 손으로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청년을 만나거나 학생을 만나면 한 번 손으로 등을 두드려주고 쳐다보면서 윙크하고 웃으며 지나갑니다. 그것은 “내가 너를 좋아하고 너는 이런 장점이 있고 …”하는 천 마디의 말보다 강한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교인들 모두 목사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다시 부탁드리는 것은 내 마음을 갈고 닦아서 하나로 모으는 작업이 가장 중요한 기본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정태기 교수의 '설교와 정신건강'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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