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화자료

[기도예화] 안이숙 사모님이 기도하게 된 동기

'코이네' 2016. 1. 3. 01:31

안이숙 사모님이 기도하게 된 동기

 

안이숙 사모님을 기억하시죠? 30대 초반의 그 처녀로써 신사참배 안 하겠다고 일본천황 신사 앞에서 절하지 않겠다고 버티다가 결국에는 쫓기는 몸이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으면 이젠 형무소 끌려가서 사형을 당할 확률이 거의 90% 이상 되는 그런 어려움을 겪었던 여성입니다.

 

그가 피해 다니던 어느날입니다. '내가 앞으로 주님을 위해 죽을 텐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좀더 알아야겠어. 예수님에게 확 반해야지 내가 예수님을 위해 죽지.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놀랍고 얼마나 황홀하고 행복한가를 그냥 흠뻑 젖도록 알아야지 내가 주님을 위해 죽어도 기분 좋게 죽지. 내가 지금 상태를 가지고는 좀 어렵겠다. 내가 은혜를 좀더 받아야 되겠어.' 이렇게 생각을 하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금식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분 몸이 조그만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저혈압입니다. 그런데 3일 작정을 하고 금식을 했는데 3일째 되는 날은 죽는 줄 알았다고 합니다. 온몸이 불덩이가 되고 경련이 일어나고 미칠 것 같더랍니다. 그래도 죽는다 하고 이제는 금식하고 기도했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놀라운 은혜를 그에게 주셨다고 합니다.

 

그의 글을 그대로 읽으면 그렇습니다. "금식이 끝나자 얼마나 놀라운 힘이 나고 믿음이 굳어지고 성경말씀이 더 깊이 깨달아지는 몰랐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나의 소망도 십자가에 대한 나의 감격도 더욱 더 깊어 가고 은혜는 날로 더 충만해 지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한번 재미를 봐서 그런지 그 다음에는 7일 금식, 10을 금식을 예사로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그 은혜의 풍성한 자리로 들어갔습니다.

 

그 은혜에 풍성함을 가슴에 안고 형무소로 갔기 때문에 6년 동안 그 기가 막힌 형국의 고통을 다 이긴 것입니다. 하나님이 식음을 전폐하고 은밀히 보시는 자기 앞에 나와서 은혜 받기를 사모하는 사람, 빈손으로 돌려 보내지 않습니다.

 

나의 신앙 생활이 이래서는 안되겠다 하는 고민이 있습니까? 성경을 봐도 도무지 무슨 소린지 귀에 안 들어옵니까? 기도는 짧으면 짧을수록 할렐루야입니까? 예배가 지루합니까? 예수는 믿는데 마음에 기쁨과 감사가 없이 날마다 짜증이 납니까? 이것은 우리가 영적으로 뭔가 지금 상당히 빈혈증에 걸려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분들이 계시면 은혜를 사모하십시오.

 

은혜를 사모하기 위해서 한 두끼 접어두고 깊이 말씀 묵상하면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 보십시오. 한끼 먹어서 기분 좋은 것과는 상대가 안 되는 놀라운 은혜를 하나님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상급을 주십니다. 그리고 다이어트가 되니까 몸도 좋아집니다. 그래서 '금식기도는 필요하다, 하나님이 해라 말라 명령하는 것은 아니지만 필요하다.' 하는 사실을 배우고 여러분 각자에게 이 사실을 잘 적용해 보는 아름다운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죽으면 죽으리라의 저자 안이숙 사모님

 

안이숙은 1908년 평안북도 박천에서 무역상을 경영했던 부호 안중호의 넷째 딸로서 팔삭동이로 태어났다.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의 상당한 재력으로 풍요롭게 자라난 그녀는 아들이 없어 가문의 대를 잇지 못하는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의 불협화음을 경험하며 자라게 된다. 자라면서 총명이 남달리 뛰어난 안이숙은 박천 공립보통학교를 거쳐 평양 서문여고를 졸업한 후에 그 당시 보통 사람들로는, 더구나 여자의 몸으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본 유학을 떠났으며, 일본 경도여전과 귀족학교인 동경 가정학원 연구과를 졸업했다. 그러므로 일본에서의 생활은 그 후 안이숙의 사역과 생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안이숙이 21세가 되던 1929년에 귀국하여 대구여자고등보통학교 교원으로 임용되어 근무했고, 1937년에는 평북 선천 사립보성여학교에서 음악 및 일어교사로 교편생활을 했다. 그러던 중 일제 말엽인 1939년 전교생이 합동으로 신사에 가서 행했던 신사참배시 의연히 꼿꼿하게 하나님 이외의 어떤 신에게도 절을 하지 않는 믿음의 절개를 보이며 신사참배를 거부한 후 신의주에 사는 제자의 집으로 피신하게 된다. 일본 형사의 눈을 피해 신의주 근교로 피신하던 중 “평양성으로 가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평양에 가게 된다. 거기서 평남 개천읍 십자의원의 의사인 박관준 장로를 만나 1940년 2월, 귀신의 땅 일본에 건너가서 위정자를 위시한 장관들을 만나 그들의 한국 기독교 박해에 항의했다.


또한 제74회 일본제국회의 때 의사당에서 ‘일본은 유황불로 망한다’는 여호와 하나님의 대사명을 전하고 그 자리에서 체포 투옥되어(일본 국회의사당 수위가 쓴 기록에서 이날 사건이 자세하게 열거되어 있음) 평양형무소에 이감 후 6년의 옥고를 치렀다. 

 

이후 미국에서 김동명 목사님을 만나 결혼하였고, 미국에서 교회를 개척하였으며, 은퇴 후 한국 대덕단지에서 새누리교회를 개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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