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화자료

예수처럼 살고 싶었던 바보 의사 장기려 박사

'코이네' 2015. 12. 19. 15:24

예수를 닮고 살고 싶은 장기려 박사

 

 

바보 의사

장기려 박사는 우리나라 외과 학회에서는 아주 뛰어난 업적을 남긴 외과 전문의였지만, 그의 인생은 너무나도 서민적이고 초라했다. 1995년 12월, 86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부산 복음 병원 원장으로40년, 복음 간호 대학 학장으로 20년을 근무했지만, 그에게는 서민 아파트 한 채, 죽은 후에 묻힐 공동 묘지 10평조차 없었다.

 

 

장기려 박사는 언제나 , 매우 어려운 처지에서 사셨다. 물론, 병원 원장이나 대학 학장으로서의 수당은 있었겠지만, 그에게는 월급이나 수당보다는 가불이 많았다.  여기에서 그의 수수께끼가 시작된다. 장 박사에 대해 떠도는 미신에 가까운 풍문 때문에 전국의 가난한 수술 환자들과 다른 병원에서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은 말기 암 수술 환자들이 부산 복음 병원으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겨우 입원을 하고 수술을 받아 병이 나으면 그 다음에는 또다른 문제가생겼다. 그들 대부분은 입원비와 약값이 없었다.이 때 마지막으로 찾아가는 곳이 원장실이었다.  

 

원래, 잇속이 밝지 않아 셈을 잘 할 줄 모르고, 바보 같을 정도로 마음이 착한 장 박사에게 "시골 우리 집은 논도 밭도 없고 소 한 마리도 없는 소작농이어서 입원비나 치료비를 부담할 능력이 없습니다."라고 환자들이 하소연하면, 장 박사는 그들의 딱한 사정을 생각하고는 눈물겨워하였다. 병원비 대신에 병원에서 잡일을 하는 것으로 대신할 수는 없겠느냐는 환자들의 제안에 장 박사는 환자의 치료비 전액을 자신의 월급으로 대신 처리하고는 하였다.

병원 행정을 이렇게 하다 보니 장 박사의 월급은 항상 적자였고, 이것이 누적되면서 병원 운영도 어려워지게 되었다.  결국, 병원 회의에서 결정이 내려졌다. 앞으로 무료 환자에 관한 모든 것은 원장님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부장 회의를 거쳐 결정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가난한 환자들이 장 박사를 찾아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모든 결정권을 박탈당한 이후부터 장 박사는 어려운 환자들이 생기면 야밤에 탈출하라고 알려주고는 하였다. "내가 밤에 살그머니 나가서 병원 뒷문을 열어 놓을 테니 탈출하라."는 것이었다.

 

장 박사의 이러한 '바보 이야기'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산의 아픔

한국전쟁이 일어난지 4개월만인 1950년 10월 19일 유엔군과 국군은 평양을 탈환했다  당시 김일성의과대학 외과의사였던 장기려는 대학병원과 야전병원에서 부상병들을 치료하고 있었다.그해 12월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국군은 평양을 철수하게 되고 이 때 장기려를 남으로 데려가기 위해 그를 야전병원 환자수송용 버스에 태웠다.그것이 가족과의 45년에 걸친 긴 이별의 시작이 될 줄 몰랐다.

그는 언젠가 가족들을 만날거라는 희망하나로 부산에서 피난살이를 시작했다.그러나 곧 다시 가족을 만날거라 했던 그의 바람은 길고 긴 분단의 세월속에 묻혀버리고 말았다.장기려의 인생은 헤어진 가족을 향한 그리움으로 바쳐진 사랑과 기도였다.

 

'다른 사람이 모두 만날 수 있을 때, 나도 가족을 만날 것이다'

그 자신은 분단 조국에 의한 피해자였다.1.4후퇴 때 환자를 돌보는 와중에 부모 부인 5남매를 평양에 남겨두고 둘째아들만 데리고 피난길에 올라 이산가족이 된 장박사는 평생 재혼하지 않고 고향의 가족을 다시 만날 날만 기다리며 살았다.그런 그가 85년 정부의 방북권유를 거절하였다.혼자만 특혜를 누릴 수 없다는 이유였다.장박사는 끝내 그리운 가족과 상봉하지 못한 채 95년 성탄절 새벽에 생을 마감하였다.그러나 그는 임종을 앞둔 1995년 10월 가족들에게 통일과 민족의 만남에 대해 " 이 땅에서 지금 만나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렇게 짧게 만나느니 차라리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만나야지 " 라고 말하며 유명을 달리하였다.



 

 



청십자의료보험조합 - 한국 최초의 의료보험조합 설립

의사 장기려의 가족에 대한 사랑은 황무지나 다름없던 우리 의료계에 '가난한 사람도 치료혜택을 받아야 한다'는 박애정신의 꽃을 피워냈다.그는 의사란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직업의 차원을 넘어 하나님이 허락한 소명이라 생각했다.그래서 처음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을 때부터 의사 한번 못 보고 죽어가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노라고 하나님 앞에 맹세했다.장기려는 경성의전에 들어가면서  한 이 하나님앞에 약속을 생이 다할 때까지 지켜나갔다.

 

"의사를 한번도 못보고 죽어 가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다."


병원 규모가 커지면서 무료진료가 불가능하게 되자 장기려박사는 1968년 '건강할 때 이웃돕고, 병났을 때 도움 받자'라는 표어 아래, 북유럽의 의료보험제도를 본 딴 '청십자의료협동조합'을 탄생시켜한국 의료보험제도의 모태가 되었다. 먹고 살기도 힘들었던 그때, 주변의 몰이해와 재정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병의 고통으로 시달림을 받는 것으로도 슬픈데 가난한 사람에게 과중한 치료비를 부담시킬 수 없다'는 신념 하나로 장기려는 한국최초의 의료보험조합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장기려는 자신이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면 북에 있는 가족도 누군가 도와줄 것이라고 믿음을 갖고 하루 200명이 넘는 환자를 돌보았다.

당대 최고의 외과의사

장기려박사는 서울의대 전신인 경성의전을 수석 졸업하고 59년 국내 최초로 간대량(肝大量) 절제수술에 성공하는 등 학문적으로도 당대 최고의 외과의사 중 한 사람이었다.장기려는 한국 간외과학의 창시자로 평가된다.

'나는 가진 것이 너무 많다'

장기려는 수술비가 없는 환자를 위해서 자기 돈으로 수술을 해주었다.자기 월급으로 감당할 수 없게 되자 환자를 야밤에 탈출시키기도 했다.평양 시절 그의 부인은 장기려가 생활비를 가져다 주지 않아 의사가운과 환자복 삭바느질로 생계를 꾸려갔다.그는 평생 자기 집 한 칸 갖지 않고 병원 옥상의 24평 사택에서 살았다.

 



특히 그는 지난 95년부터는 당뇨병과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했음에도 불구하고 매일 상오 청십자병원에서 영세민 10여명씩 진료해 주다가 그해 성탄절 새벽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고  경기도 마석 모란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장기려 박사의 비문에는 그분의 유언대로 "주님을 섬기다 간 사람"이라고 적혀 있다.그는 '가난하고 소외받는 이웃들의 벗'임을 자처하며 기독교 신앙에 기초한 철저한 희생과 봉사의 삶을 살아간, '이 땅의 작은 예수' 로 칭송받은 사람이다.

 

그에게 붙은 '한국의 슈바이처', '살아있는 푸른 십자가' 라는  찬사에 한 점도 부끄럼 없이 평생 이웃 사랑을 몸으로 실천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를 이 사회도 존경하여 부산시민상, 막사이사이상, 국제적십자상, 국민훈장, 호암상등을 수여했다.

예수처럼 살고 싶었던 사람

절대빈곤시절의‘천막 무료진료’부터 미래를 내다본 의료복지 정책인 ‘청십자 의료조합’까지, 그것은 그의‘사랑'이 이뤄낸 기적이었다.그는 예수처럼 살고 싶어했고, 그렇게 살았다.분단의 아픔을 환자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한 의사 장기려의 삶은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참 모습이다. 평생을 아프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인술을 펼친 의학박사 장기려.그는 춘원 이광수의 소설 『사랑』의 주인공 '안빈'의 실제 모델로 알려져 있는 인물로 '한국의 슈바이처', '살아있는 성자'로 불렸다.이광수는 장기려를 가리켜 '당신은 聖者 아니면 바보요'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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