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자가 네 앞서 가리라
본문 : 출애굽기 32: 25-35
설교 : 김창인 목사 (광성교회)
본문 34절에 보면 "이제 가서 내가 네게 말한 곳으로 백성을 인도하라 내 사자가 네 앞서 가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모세에 앞서 보내겠다는 의미입니다. 천사를 앞서 보낸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서 너를 도와주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실 때는 사람을 통해서 도와주시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요셉과 아리아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두 사람은 예수님을 안고 애굽으로 피난을 가야했는데 너무 가난해서 가져갈 만한 밑천이 없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동방박사 세 사람을 보내셔서 황금과 유향과 몰약이라는 아주 값진 예물을 가져오게 하여 피난생활이 어렵지 않게 도와 주셨습니다. 그 다음에 사건을 통한 도움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기드온이 3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어마 어마한 적군과 싸울 때에 무기라고는 한 손에 나팔을 들고 한 손에는 횃불을 들었을 뿐입니다. 정말 기막힌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나팔을 불고 횃불을 드는 순간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미디안 군대 진중에서 웅성거리더니 자기들끼리 죽이고 죽이는 내분이 일어났습니다 기드온의 군사는 손 하나대지 않고도 승리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도와주기도 하시고 어떤 사건을 통해서도 도와주기도 주십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이 직접 도우시기도 합니다. 성도가 병들어 죽어갈 때에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역사해 주셔서 깨끗이 낫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경우는 천사를 통해서 도와주시는 경우입니다. 언제 돕고 누구를 돕느냐 하면 하나님이 가라고 하시는 길로 걸어갈 때 가는 그곳에 천사를 먼저가게 하셔서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원하는 곳으로 가는 사람들은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I. 하나님 편에 있는 자 (25-26)
25절과 26절에서 "모세가 본즉 백성이 방자하니 이는 아론이 그들로 방자하게 하여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음이라 이에 모세가 진문에 서서 가로되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오라 하매 레위 자손이 다 모여 그에게로 오는지라". 여기를 보면 분명히 여호와의 편, 하나님 편에 있는 자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잘아는 대로 누가복음 23장에 보게되면 아리마대 람 요셉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리마대 람 요셉은 그 당시, 산헤드린공회 의원이었습니다. 산헤드린공회는 70명 내지 72명으로 구성되었는데 절반이 바리새파이고 절반은 사두개파입니다. 로마의 식민지하에서 이 공회 의원은 유대인으로서는 최고로 출세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으로서는 최고로 높은 자리, 세도를 부리는 그런 자리였습니다. 성경에 보면 또한 그는 굉장한 부자였습니다. 한번은 공회가 소집되어 참석했더니 예수님을 붙잡아놓고 죽이기로 결정하자는 것입니다. 그 많은 사람들은 전부 예수님을 죽이자고 주장했습니다. 그때 아리마데 사람 요셉은 '아니오'를 분명히 하고 예수님의 편을 들었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기로는 나도 그렇게 하겠다고 할런지는 모르겠지만 그 당시는 지금과는 다른 상황임을 계산해야 합니다. 그 당시 공회의원으로서는 하기 어려운 일을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편을 드는 사람은 출교 처분을 하기로 이미 결정 돼 있습니다.
출교는 교회 나오는 사람을 나오지 못하도록 내 쫓아 버리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장로교회 법에도 출교 처분이 있습니다. 가령 어느 집사가 광성교회에서 출교 당하게 된다고 해서 문제 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다음주일 바로 옆에 있는 교회에 가게되면 당장 집사로 임명하면서 대 환영하는 실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2,000년전 유대 땅에서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공회 의원들은 바리새파사람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각파에서 천거하여 오른 자리입니다. 가령 바리새파에서 출교 처분을 받게되면 사두개파에서 받아 주지를 않습니다. 또 사두개파에서 출교 처분을 당하면 역시 예외는 아닙니다. 그것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생활 수단으로 하는 장사도 할 수가 없게 됩니다. 출교 처분을 받은 사람의 물건을 팔아주지를 않습니다. 만약 팔아주게 되면 그 사람도 한패로 몰리게 되어 출교 처분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물건을 살려고 해도 살수도 없습니다. 결국 있는 재산 다 떨어지면 거지 신세가 되는 것입니다. 거지노릇이 싫으면 로마군인들과 로마 정부의 앞잡이가 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또 유대인들로부터 따돌림받게 됩니다.
이렇듯 어마어마한 출교 처분을 각오하고 예수님 편을 들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아리마대 요셉은 '아니오'하면서 예수님의 편에 굳게 섰습니다. 지금까지는 예수님의 숨은 제자였지만 지금이야말로 나서야 할 때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기의 정체를 밝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 없는 영광, 권세, 출세를 원하지 않는다는 굳은 결의를 나타내 보이는 것입니다.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는다는 일사각오의 신앙인 것입니다. 이렇게 믿을 때만이 예수님의 십자가가 내 십자가 되고 예수님의 부활이 내 부활되고 예수님의 영광이 내 영광되는 것입니다. 나중에 공회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기로 결정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아리마대 요셉은 당돌하게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하여 가져다가 장례를 치렀습니다 이렇게 행동했을 때 다른 사람들이 요셉을 출교처분 한다든지, 재산 몰수라도 했느냐? 하면 그렇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배후에서 도와주시니 어느 누구도 그를 해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요셉은 결과적으로 재산도 지키고 영화도 지키고 믿음도 지키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예수님 편에서는 사람은 하나님이 도와주십니다. 여러분 중에서 아직까지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사는 성도가 있다면 지금이라도 정체를 밝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 편에 서시기 바랍니다.
본문을 보게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을 향해 가는 중에 시내산 밑에 진을 쳤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시내산 꼭대기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십계명을 받으러 올라갔습니다. 40일의 기간이 지났습니다. 그사이 모세의 인도로 나왔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음성도 못 듣게되고 지도자도 없으니 난리가 났습니다. 모세의 형 되는 제사장 아론에게 나와서 섬길 신을 만들자고 요청했습니다. 결국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 앞에서 절을 합니다. 먹고 마시고 야단법석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몹시 화가 나셨습니다. 모세에게 빨리 백성에게 가보라고 하십니다. 모세가 내려와 보니 이러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노하셨는지 모조리 쓸어버리겠다고 하십니다. 그때 모세가 말합니다. 하나님의 편에 설 사람만 앞으로 나오라고 합니다. 이때 다른 사람들은 나오지 않았지만 레위 자손들만이 모두 앞으로 나왔습니다. 레위 사람들은 하나님 편에 섰습니다. 레위 사람들은 원래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실수하여 아우성치는 백성에게 미혹되어 우상을 섬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모세의 깨우침을 받고 즉시 회개하고 하나님 편으로 돌아서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우리가 편들지 말아야 할 것에 편들었던 일이 있습니까? 우리가 서지 말아야 할 곳에 섰던 일은 없습니까? 가지 말아야 할 장소에 간 적은 없느냐 하는 말입니다. 만약 그런 일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정체를 밝히시고 통회하는 심정으로 하나님 편으로 돌아오셔야 합니다. 세상과 짝하지 마시고 하나님 편에 서실 때 하나님이 도와주십니다.
"성녀 주리아"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 보면 주리아는 본래 한국 사람이었습니다. 한국 이름으로는 이수란이라고 하는데 임진왜란 때의 일입니다. 왜군들이 진주성을 쳐들어올 때 이수란의 아버지는 거기서 갑부로 사는 양반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왜군에게 죽고 말았습니다. 어머니가 그 애기하나 엎고 도망 다니다가 마지막에는 왜놈한테 붙잡혀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르니까 위급한 상황 하에서 자기의 목을 단도로 찔러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때 어머니 등에 업혀 있던 수란이가 얼마나 우는지 지나가던 사람이 주어다 길렀습니다. 그 사람은 자살할 때 쓴 단도도 함께 가져갔습니다. 이 애기가 점점 자라고 있을 때 진주는 전부 점령되었고 왜군들이 사람들을 포로로 많이 잡아갔습니다. 양아버지와 함께 8살 난 수란이도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배에 실려 가는 중에 지금 대마도, 쓰시마라고 하는 그곳에 가서 정박을 했는데 그때 왜군 하나가 수란이를 보고는 슬그머니 데리고 도망을 갔습니다. 그 왜군은 수란이를 사창가에 팔려고 했던 겁니다. 그러나 너무 어려서 사 주는 곳이 없습니다. 점원으로 팔려고 해도 역시 사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며칠을 돌아다니다 보니 배가 고프고 지치게 되었습니다. 군인의 눈을 피해 도망에 성공한 수란은 배가 너무 고파 어느 점포에서 먹을 것을 훔치다가 주인에게 들켜 매를 맞았습니다. 나중에는 울 기력조차 없고 때마침 지나가던 귀부인 하나가 그 광경을 보고 돈을 주고 사서 수란이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귀부인이 입진 왜란 때 우리 나라 왜군 장수로 참전했던 고니시이끼나까 즉 소서행장이라고 하는 사람의 딸이었습니다. 소서행장은 본래가 천주교인입니다. 나가사끼가 자기 고향인데 예수 믿는 믿음이 공인되지 않았기 때문에 대마도 영주한테 시집을 보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영주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수란이는 그 영주의 집에 가서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는 세례를 받고 세례명으로 주리아라고 하는 이름을 갖게 된 것입니다.
임진왜란은 끝나고 도꾸가와라고하는 장수가 일본 천하를 통일 할 때에 동군과 서군의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이때 소서 행장이 즉 고니시가 서군에 가담해서 싸우다가 죽습니다. 대세가 그쯤 되자 대마도 영주가 자기 신변이 위태로우니까 아내를 보내버립니다. 버림받은 그 아내는 천주교 수녀원으로 들어가고 맙니다. 그리고 29살의 나이에 죽습니다. 그때 수란이가 벌써 20살 정도가 되었습니다. 도꾸가와 장수가 그 소문을 듣고 수란을 불러들입니다. 다 큰 처녀에게 온갖 시중을 들도록 강요를 합니다. 나중에는 도꾸가와가 육체를 탐하는 지라 자기 어머니가 쓰던 단도, 양아버지가 주었던 그 단도로 자살하려고 했습니다. 수란이의 이러한 행동이 너무나 독하게 느껴졌던 도꾸가와가 쫓아내 버렸습니다. 요즘 일본 쯔시마라고 하는 섬으로 쫓은 다음에도 사람을 보내어 다시 시중들 것을 강요했습니다. 시중만 들면은 온갖 영화를 누리게 해 주겠다는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그런데도 수란은 자신의 영화보다 예수님이 더 좋다고 고집하면서 그 섬에서 주민들에게 4년을 봉사하다가 24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그 후 수란을 미워하던 섬사람들이 마음을 돌려 수란이가 믿던 예수를 믿기 시작합니다. 모두 복음화가 된 후 그 섬사람들이 수란을 못 잊어 사당을 짓고 비석을 세워 주었는데 그 비석의 이름 주리아였습니다.
여러분은 생각할 때에 그렇게 일찍 죽는 것이 무슨 하나님이 도우신 것인가? 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일본을 통일한 장수 도꾸가와에게 시중들면서 그곳에서 주는 영화를 누리며 몇 십년 더 사는 것이 과연 복입니까? 하늘의 영광과 도꾸가와 집안의 영광은 비교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죽을 때까지 하나님 편에 선 사람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괴로우나 즐거우나 하나님 편에서는 사람이 영광된 사람이요 하나님이 돕는 사람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II. 하나님께 헌신하는 자 (27-29)
29절에 보면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그 아들과 그 형제를 쳤으니 오늘날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날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보게되면 분명히 하나님께 헌신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많이 보이는 낱말 중에 하나가 거룩하다 는 말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향해 "거룩하다"고 하여 성도라고 합니다. 우리는 "거룩한 사람"입니다. 교회당을 가리켜 "거룩한 집 혹은 성전"이라 하고 주일을 가리켜 "거룩한 날 혹은 성일"이라고 합니다. 거룩하다의 본래의 뜻은 "구별하다. 갈라놓다 몫을 지어 놓다"라는 뜻입니다. 거룩하다는 말의 유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농사를 지으면서도 하나님앞에 제사드릴 양을 꼭 키웁니다. 그래서 양을 여러 마리 키우는 중에 하나님 앞에 제사드릴 양을 미리 구별해 놓습니다. 그 중에서 제일 좋은 것을 구별해놓고 아주 정성스럽게 키웁니다. 그러다가 제사드릴 때가 되면 그 양을 잡아 하나님 앞에 제물로 바칩니다. 여러분들이 아실 것은 이 구별된 양은 살기 위해서 구별된 것이 아니라 죽기 위해서 구별된 것입니다. 누구를 위해 죽느냐하면 하나님께 바쳐지는 제물로 죽는 겁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그 양은 그 죽음을 영광인줄 알고 죽겠습니까? 전혀 모릅니다. 양이 알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또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까? 양이 만약에 병이 들어서 물 한모금 마시지 못하고 풀 한 포기 먹지 못하고 비실비실 하다가 죽어진다면 그 죽음이 영광스러운 죽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 양은 죽음의 의미를 모릅니다. 그리고 또 다른 경우 도둑놈이 끌어다가 잡아먹었습니다. 도둑놈의 배를 채우기 위해서 죽었다면, 즉 도둑놈을 위해서 죽은 양의 죽음은 영광스러울 것이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을 위해서 제물로 바쳐지는 죽음은 상당히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그렇습니다. 그 많은 양 가운데서 구별해놓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우리를 불러내 구별해놓고 몫을 지어놓았습니다. 너는 나를 위해 헌신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헌신하기 위해서 구별된 성도입니다. 우리가 전적으로 헌신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신다고 본문은 증거 합니다.
본문을 다시 한번 읽어보면 너희가 하나님께 헌신하였으니 복을 주시리라. 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구원 얻는 일에는 아무 것도 할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만이 헌신하는 겁니다. 구원받은 사람만이 충성을 하는 겁니다. 우리가 어느 사람의 아들이 되기 위해서 효도하는 일은 없습니다. 아들 되었으니 효도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축복에는 공짜가 없습니다. 축복 받을 일을 할 때에 반드시 축복이 있습니다. 축복 받을 일이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일입니다.
아치볼드라고 하는 미국에 유명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스탠다드 석유회사에 취직하여 열심히 일하고 있는 회사 사원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휴가철에 휴가를 받아 어디를 가든지 그렇지 않으면 개인적인 용무가 있어 어디를 가든지 회사의 공무로 가든지 어느 호텔에 유숙하게 되면 자기의 이름과 주소를 기록하는 곳에 "한 통 4달라 스탠다드 석유"라고 쓴다고 합니다. 그것이 자기 이름이라는 겁니다. 가는 곳마다 이름대신 "한 통 4달러 스텐다드 석유"라고 기록하니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고 사람들이 웃기는 소리로 "한 통 4달러 스텐다드 석유"라고 하다보니 그 회사는 아주 유명한 석유회사가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그 회사 사장인 록펠러의 귀에도 들리게 되었습니다. 사장은 그 사람을 만나자마자, 어쩌면 그런 아이디어가 당신의 머리에서 나왔습니까, 어쩌면 그렇게 회사를 위한 정열이 뜨거우십니까? 하면서 감탄하였다고 합니다. 나중에 좋은 이야기를 주고받는 중에 록펠러가 결론을 지은 것은 "이 사람은 회사와 운명을 같이하는 사람이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내가 몸 담고있는 회사가 살아야 나도 삽니다. 회사는 죽더라도 나만 월급 많이 받으면 된다고 생각하면 잘못입니다. 이 사람은 회사와 운명을 같이해서 회사가 살면 같이 살고 회사가 성공하면 샅이 성공하고 회사가 망하면 같이 망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자세로 모든 일을 100% 자기 일로 알고 정열을 쏟아 부을 때 사장님은 지켜보았습니다. 한자리 한자리 올려주고 자기가 나이 많아 은퇴할 때 그 사람에게 사장 자리를 물려주었습니다. 결국 그 사람이 스텐다드 석유회사에 록펠러를 이어서 사장이 되지 않았습니까? 이 엄청난 자리는 헌신과 충성으로 얻어진 자리입니다. 놀고 먹고 얻어진 자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헌신과 충성을 바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보다 귀한 도움과 축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III.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 (30-35)
30절에서 35절까지가 본문입니다. 그 중에서 32절을 보면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안 사오면 원컨데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인도 하에 가나안 복지를 향해 가는 광야생활 중에 한 번은 미디안 족속들이 사는 그곳에 당도했습니다. 그랬더니 미디안 족속들이 벌떼같이 이스라엘을 잡아먹을 듯이 달려들었습니다. 이때 모세는 이스라엘 장정들을 여호수아 손에 맡겨 싸우게 하였습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장병들을 거느리고 나가 열심히 싸웁니다. 그러는 사이에 모세는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기도합니다. 모세는 싸우는 장면을 내려다보면서 기도하지만 싸우는 사람들은 기도하는 모세를 볼 수가 없었습니다. 안 보이는 곳에서 기도소리가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모세의 기도하는 손이 올라가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기게 되고 힘이 없어 손을 내리게 되면 반대의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그냥 밀고 밀리고 엎치락뒤치락 얼마나 전쟁이 치열한지 쉽게 끝나지 않습니다. 기도하면 되는 것 같은데 어느 순간에는 뒤틀어지곤 합니다. 나중에는 모세에게 돌을 갖다놓고 편히 앉게 하였습니다. 아론과 훌이 손을 붙들어 줍니다. 결국 승리하였습니다.
이 역사적인 사건 가운데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여호수아나 그 군병들은 자기가 잘 싸워서 이겼다고 할 것입니다. 모세가 기도하는 소리를 듣거나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보았다고 할지라도 기도를 하찮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들의 힘으로 이겼다고 생각 할 것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분명히 성경은 기록하기를 기도의 손이 내려오면 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올라가면 이긴다고 분명하게 단언합니다.
이 말씀을 오늘날 우리들의 생활에 구체적으로 적용해 보면, 남편들이 회사에서 계속 승진하고 월급 봉투가 두둑해지면, 내 머리가 비상하고 내 재간이 훌륭해서 얻어진 것이라고 큰소리를 칠 겁니다. 조그마한 회사가 점점 발전하고 자가용을 몇 대씩 굴리게 되면 남편들은 자기의 능력인줄 알고 목에 힘을 주며 오만 불손해 집니다. 하나님을 모르니까 그럴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아십시오. 여호수아가 나가서 싸울 때에 자기가 승리한 것 같지만 뒤에서, 누구도 안보는 곳에서 기도한 모세가 있었습니다. 새벽마다 교회에 나와서 기도하는 그 아내, 때로는 밤을 새우며 그 사업의 장래를 위해서 기도하는 아내, 그 아내의 손이 올라가는 것 때문에 성공한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 아내의 손을 잡아 끌어내리는 날 여러분의 사업은 역전된다는 것을 아셔야 됩니다. 그러기에 기도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분명히 도우십니다. 일할 때 일하는 것은 나입니다. 그러나 기도할 때 일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생각해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다 쓰러버리겠다고 말씀하실 때 모세가 하나님께 애원하기를 내가 죽는 것은 고사하고 차라리 하늘에 기록된 생명 록에서 나의 이름을 지우더라도 이 백성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간구를 기쁘게 받으시고 네 백성을 데리고 가나안 땅으로 가라 내 천사를 시켜서 네 앞서 보내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을 도와주신다는 뜻입니다.
영국에 유명한 스폴전 목사가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성공적인 목회자입니다. 소문이 퍼집니다. 미국에서 젊은 목사들이 배우려고 목사님을 찾아 왔습니다. 어느 주일날, 스폴전 목사와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어떻게 하여 이 교회가 부흥했는지를 알고 싶어서였습니다. 그 교회를 가만히 보니까 추운 겨울날인에도 난방 장치가 안돼서 성도가 오면 떨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왜 이렇게 열심입니까. 예배의 분위기가 이렇게 뜨겁습니까 라고 목사님들이 물었습니다. 예배시간 30분전인데 스폴전 목사님이 지하실로 안내를 합니다. 지하실로 따라갔더니 기도 실이었습니다. 400여명이 예배시간 30분전에 나와 얼마나 뜨겁게 기도하는지. 바로 이 지하 기도실이 이 교회를 움직이고 부흥시키는 동력 실이라는 것입니다. 큰 공장에 몇 십 대 몇 백대의 기계를 움직이는 그 동력실이 있는 것처럼 바로 400여명의 기도실이 이교회의 동력 실이었습니다. 그러니 본당이 아무리 추워도 여기서부터 뜨거워지기 시작한 신앙의 뜨거움, 마음의 뜨거움은 예배 실에 가게 되더라도 추운 줄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가정에 행복의 동력실이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여러분들 가정에 사랑의 난방실이 어딘지 아십니까? 여러분들의 아내가 나도 모르게 골방에 들어가는 그 골방이 여러분들의 행복의 동력실이요 사랑의 난방실인 줄로 아셔야 합니다. 기도하는 그 사람, 기도하는 그곳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에 앞서 하나님의 사자가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자를 앞서 보내셔서 도와주시는 사람은 철저하게 하나님 편에서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내 편에 서 주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 편에서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헌신하는 사람을 도와주십니다. 우리의 몸으로 세상보다 더 귀하신 하나님께 헌신해야 합니다. 동시에 기도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천사로 도와주십니다. 사자 굴에서 다니엘을 도운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나 돕는 분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천사로 돕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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