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히브리서

[히 4:12] 하나님의 말씀

'코이네' 2024. 2. 16. 20:46

하나님의 말씀

4:12-13

 

 

한 나라가 평안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모두에게 기회가 균등히 분배되어져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통제할 수 있는 법이 필요합니다. 좋은 법이 제정되어지고 그 법이 제대로 운영되어질 때 그 나라는 평안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 방법은 단 한 가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거기에 이어서 안식의 나라에 들어가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무슨 법칙 하에서 살아야만 바로 살 수 있을까요? 천국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는 백성들이 지켜야 할 법은 무엇인가요?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자면 하나님의 말씀의 법칙에 따라야 합니다. 사사 시대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므로 가나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므로 그들은 각기 제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고 그 결과로 그들의 삶은 무질서의 극치를 이루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일찌기 말씀을 전달해 주시기를 가나안에 들어가면 말씀을 가르치기를 잊지 말라고 했습니다. 손목에 매고 미간에 기록하고 때마다 가르쳐서 다른 길로 나가지 않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그들에게 쉐마 교육을 분부했습니다. 항상 자녀들의 귀에 들려주어서 항상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살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가나안에 들어가는 사람마다 이 말씀을 따라 살 것을 요구하셨을까요? 왜 우리는 일평생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하면서 살아야 할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 몇 가지 특징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습니다.

 

펜은 검보다 더 강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문필의 힘은 폭력의 힘보다 더 강하다는 말입니다. 칼은 폭력으로 사람을 잠시 억압할 수는 있지만 마음을 움직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글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서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합니다. 존경하는 사람의 글을 읽고 일평생 삶의 목표를 정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실로 글의 힘은 위대합니다.

 

옛 속담에 八十生男 非我子란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느 명현이 80세에 낳았던 자식과 가산을 욕심 많은 사위에게 맡기고 죽으면서 써준 유언입니다. 이는 그 사위가 유산을 탐하여 유아를 암살할까 두려워서 80에 얻은 아들은(八十生男)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非我子)는 말로 유언을 남겼던 것입니다. 그러니 유산은 가지되 아들은 죽이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는 장성한 다음 훌륭히 자라서 자신을 돌아볼 즈음에 장관에게 유산 반납 소송을 냈습니다. 장관은 풀이하여 해석하기를 八十生男인들 非我子“80에 낳은 아들인들 다 내 자식이 아니겠느냐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유산이 아들에게 넘어갔다는 말이 있습니다. 글의 위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글의 위력도 한계가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글이라 해도 모든 사람의 동의를 얻는 것은 아닙니다. 시대마다 해석이 달라집니다. 내용이 변합니다. 다만 한 시대에 일부분의 사람에게 약간의 감화를 주어 사람의 결심을 바꾸는 힘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다릅니다. 모든 세대의 전 인류와 관계되며 그들의 전 생애를 바꾸는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지 문자만의 기록이 아니라 지금까지도 살아 있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 속에 하나님의 뜻이 있고, 역사가 있고, 새로운 감동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 자체가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생명력이 있다는 말입니다. 말씀에는 창조의 생명력이 있습니다(1:1-3). 영생의 생명이 있습니다(5:39). 부활의 생명이 있습니다(5:24-29). 거듭나게 하는 생명이 있습니다(벧전1:23). 영원히 없어지지 아니하는 생명이 있습니다(24:35).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쇠함이나 다함이 없습니다. 항상 새롭습니다. 사탄의 사변적 공격에도 결코 죽지 않습니다. 살아 있기에 수천년이 지난 지금도 생명력을 가지고 모든 사람에게 감화를 줄 수 있습니다. 복음은 생명입니다. 생명력이 없다면 벌써 기독교는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단은 생명이 없습니다. 지금 이단이 극성을 부리기는 하지만 그것은 한 때로 끝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길어야 200, 혹은 300년입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는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딤후 3:14-17). 사람을 온전하게 만듭니다. 생명이 있다는 말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요한복음 11절로 13절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말씀은 태초부터 있었고 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으로 오셨습니다. 생명체로 나타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말씀은 곧 예수 그리스도요,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불변으로 존재하시는 살아계신 분이기에 그 말씀이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예수 안에 진리가 있고, 그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사람들은 요한복음 539절의 말씀과 같이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알고 성경을 상고했습니다. 말씀이 없는 곳은 기갈이 있을 뿐입니다(8:11-14). 하나님의 말씀만이 인생의 등불이 되어서 지금도 우리를 주관하고 있을 뿐입니다(119:105).

 

살아 있는 것은 죽은 것과 대조를 이룹니다. 죽은 것은 냄새를 풍길 뿐이지만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향기를 흩날립니다. 살아 있는 말씀은 인생에 새로운 삶을 심어줍니다. 탕자 어거스틴을 변화시켜서 새로운 사람으로 만든 것도 말씀이었습니다. 핍박자 사울이 변하여 이방인의 사도 바울이 되게 한 것도 말씀이었습니다. 루터로 하여금 종교 개혁을 일으키게 하었던 것도 말씀이었습니다.

 

말씀 속에 있는 자마다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살아 있는 말씀은 죽어져 가는 자들에게 생명을 줍니다. 죽게된 자에게 소망을 심어줍니다. 육체의 질병으로 죽어져 가는 자에게는 치유의 은총을 베풀어 줍니다. 신명기 712절로 15절의 말씀을 보면 말씀을 지키는 자는 질병에 걸리지 않도록 하신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말씀은 살아 있기에 반드시 열매를 맺도록 합니다. 말씀을 묵상하면서도 신앙의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하면 그 신앙은 큰 문제가 있습니다.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가 예수님의 저주를 받았듯이 말씀 속에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자마다 찍어 불에 던지움을 당할 것입니다. 우리는 때에 따라 말씀의 풍요 속에 살면서도 말씀의 열매를 생각하지 못하고 지날 때가 많습니다. 이런 것들이 다시 한 번 말씀 속에서 변화되는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운동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침체된 것들에 활력을 불어넣어 줍니다. 모든 靜的인 것들을 動的인 것으로 만들어 줍니다. 말씀은 Action이며 Dynamic합니다. 말씀은 모든 것을 움직이도록 만듭니다. 만물을 움직이도록 합니다. 사람들이 감추려고 해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억제하려고 해도 억제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은 모든 것을 움직이는 動因이기 때문입니다.

 

186693일 토마스 목사가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대동강변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24명의 동료들과 함께 우리 나라에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 군인들은 그들을 모두 죽였습니다. 그 때 토마스 목사는 최치량이란 어린 아이에게 성경 세 권을 주었습니다. 최치량이란 아이는 그 책을 받기는 하였으나 그 책을 가지고 있다가 자기도 사형을 당할까 두려워서 군인에게 그 책을 주었습니다. 군인은 그 책이 쓸모 없는 것으로 여겨져서 벽지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그의 집에 놀러오던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고 평양이 복음화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복음은 역동적입니다. 아무리 죽이고 가두고 구석에 쳐박아 놓으려 해도 복음은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운동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 속에서 역사하는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말씀은 쪼개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좌우에 날선 검이 되어서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서 쪼갭니다. 이 말은 마음의 가장 비밀스럽고 숨겨진 부분까지 파헤친다는 말씀입니다. 혼은 정신을 말하고 영은 영혼을 말하고 관절은 혈기를 말하고 골수는 성품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말이 곧 삼분설을 지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참고적으로 이분설과 삼분설에 대해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본문에서 나오는 말씀과 데살로니가전서 523절에 나오는 말씀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삼분설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헬라및 알렉산드리아의 교부들은 주로 삼분설을 주장했습니다. 그 이유는 본문에서 혼과 영이 구분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거스틴이나 스콜라시대의 사람들은 이분설을 주장합니다. 종교 개혁 이후의 지금까지의 정설은 이분설로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과 혼이 구분되면 관절과 골수도 구분되면서 사분설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단지 수사적 반복에 의한 구분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이런 모든 것을 쪼개서 고치는 운동력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말씀으로 받아야 합니다. 말씀은 죄악의 심령을 쪼개는 힘이 있습니다. 죄를 깨닫게 하고, 회개하게 하고, 죄인을 변화시키며, 바른 삶을 살도록 합니다.

 

쪼개되 찔러서 쪼갭니다. 쪼갠다는 말은 의학 용어로 해부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의사가 병든 몸을 해부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은 죄를 해부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은 다시는 죄악의 길을 걷지 못하도록 한다는 말씀입니다.

 

말씀으로 찔러 쪼개는 예리함은 세상의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다림줄과 다림추는 세상의 판단 기준과 다릅니다. 세상은 자기의 이익에 따라 판단이 굽어집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판단은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굽어지지 않습니다. 말씀이 모든 것의 판단의 기준이 됩니다. 그러므로 참된 안식을 누림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것을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통찰력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드러냅니다. 드러난다는 말은 헬라어로 γυμνοσ인데 이 말은 벌거벗었다, 벗기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은 세 가지 경우에 사용이 되었습니다. 첫째는 운동 경기 용어로 시합하는 자가 상대방의 목을 잡고 움직일 수 없게 할 때 쓰였고, 둘째는 동물을 매달아 놓고 그 가죽을 벗기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셋째는 재판소나 형장으로 끌려가는 범죄자에게 단도를 위로 향하게 해서 그의 턱 밑에 붙잡아 맬 때 썼습니다. 범죄자로 하여금 창피해서 얼굴을 밑으로 떨어뜨리지 못하게 해서 얼굴을 사람에게 보여 부그러움을 알게 하려고 할 때 썼던 말입니다. 이 세 가지를 모두 종합해 보면 결국 하나님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마치 요나가 하나님을 피하려고 했으나 피하지 못했던 것과 같습니다. 만물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말씀은 사람의 모든 것을 감찰하십니다. 감찰한다는 말은 법률적 용어로 판단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재판장이 피고인을 심판하듯이 사람의 모든 것을 재판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에는 모든 피조물에 해당됩니다. 말씀의 거울 앞에 비추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X-ray로 사람의 뼈를 보는 것보다 더 정확하게 사람의 모든 것을 감찰하십니다. 속 깊이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마음과 생각과 뜻을 다 감찰하십니다. 사람은 겉으로 드러난 행위만 볼 뿐이지만 하나님은 마음 속 깊은 곳까지도 다 감찰하고 계십니다. 행동이 있기 전의 마음까지도 판단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속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마음 속으로 간음한 것도 간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은 전쟁에 나가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전리품을 가지고 돌아온 후에 그것이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중심을 보셨습니다. 말씀의 거울 앞에 위선이 그대로 통과될 수 없습니다.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는 감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만의 계교와 이세벨의 간사함도 말씀 앞에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관계된 모든 사람 앞에 다 드러나게 할 것입니다. 그 때 감추고 살았던 사람들은 벌거벗은 것같이 부끄러운 모습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제사드려지기 위해서 껍질이 벗겨지고 내장이 드러나지고 여러조각이 나서 제사장 앞에 드려지는 것처럼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이 때는 아무도 피할 수 없습니다. 시편 1397절로 12절에 기록하기를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 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고 했습니다. 아무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나안의 안식을 사모하는 자마다 자기의 모든 것을 솔직하게 드러내 놓아야 합니다.

 

 

이제 말씀의 결론을 맺습니다.

 

가나안의 안식은 순종하는 자만이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살고 있지만 가나안을 살고 있는 주님의 택한 백성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영원한 안식을 바라보며 말씀에 순종하는 훈련을 쌓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므로 열매맺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천지는 없어져도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변하지 않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합니다. 말씀은 영원한 인생지침서와 영혼을 살리는 생명입니다. 바른 인생관, 세계관이 여기에 있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가나안의 삶을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