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히브리서

[히 5;12] 성숙한 믿음의 삶을 위해

'코이네' 2024. 2. 19. 20:53

성숙한 믿음의 삶을 위해 

본문: 5:12-6:2

 

 

“(5:12)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5:13)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저희는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5:14)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6:1)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6:2)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

 

우리는 지난 시간에 성숙한 신앙이란 무엇인가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성숙한 성도들의 믿음의 특징을 들었습니다.

성숙한 성도, 온전한 성도는 지식이나 행실에 있어 완숙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신앙의 완숙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성경을 읽고 이해 합니다. 하나님을 압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지식으로도 압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중심하여 삽니다. 이런 사람들이 신앙의 완숙한 자리에 오른 사람입니다.

그결과 모든 생활을 하나님의 주권 아래 두고 사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기독교 교리에 밝으며 단단한 음식을 먹습니다. 말씀에 대한 깊은 이해로 선악을 분변하는 사람입니다.

말씀을 이해하고 생활하기 때문에 말씀을 풍성히 경험한 사람입니다.이렇게 성숙한 성도 온전한 믿음의 사람들은 말씀을 중심하여 삽니다.

 

오늘 우리는 계속하여 성숙한 믿음을 위한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기본적으로 알고 이해하고 있어야 할 진리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가장 초보적인 진리, 믿음의 토대가 되는 교리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기본적이며 초보적인 교리의 바탕 위에, 성숙하고 완전한 자리에 나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6:1-2).

 

(6:1)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6:2)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

 

회개와 신앙(믿음)” “세례들과 안수” “죽은자의 부활과 심판이런 교리들이 모든 믿는 자의 기초적 진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신앙의 터와 같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초와 터를 기반으로 하여 온전하고 성숙한 삶을 위해 정진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들이 아파트나 건물을 지을 때 기초공사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압니다. 건물이 높을 수록 기초와 그 터는 더욱 공고히 해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공부를 하고 학문을 배울 때도 그렇습니다. 무슨 기술을 배울 때도 그러합니다. 이렇게 기초가 부실하면 더 깊은 학문, 기술의 길에 들어설 수 없습니다.

심지어 스포츠를 해도 기초가 중요합니다. 이렇게 기초는 모든 배움에 있어서 터요 디딤대 입니다.

 

믿음의 기초도 이와 같습니다.

교회에 나오고 예배한다고 쫒아 다녀도 기초가 든든치 못하면 무너지게 됩니다. 쉽게 교회를 그만둡니다. 이단과 사이비에 영혼을 빼앗깁니다. 기초가 부실하면 신앙의 성장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히브리서 기자는 기독교의 초보적인 진리 기초를 확고히 한 후 그것을 바탕으로 더 깊은 신앙으로 나아가라고 말씀합니다.

(6:1)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6:2)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

 

여기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라는 말씀은 포기하고 없애버리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에만 머무르지 말고 과감히 전진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대한 바른 해석은 다음 절에 있습니다.

“(6:2)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

 

우리가 집을 지을 때 터와 기초가 중요하다고 매일 터만 닦을 수 없습니다. 만일 터만 닦고 있다면 얼마나 답답한 노릇입니까?

! 집을 짓는데 건물을 세울 생각은 않고 10여년간 터만 닦고 있다면 얼마나 한심한 모습입니까?

이와같이 터만 닦지 말고 성숙한 신앙으로 나아가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이 터 닦는 것에 대해 듣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큰 신앙의 집을 지으려면 이 기본되는 터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살펴보고자 하는 이 기초적이며 터가 되는 교리들은, 모든 기독교인들이 기본적으로 누구나 다 믿고 깨달아야 할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최소한 이 교리들을 믿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적어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한 사람은 이 진리만은 분명히 알야야 합니다. 그리고 이 진리를 믿음의 생활에 실천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진정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이 초보적이며 기본이 되는 진리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 모두가 이 진리를 기초로 해서 더 성숙한 신앙의 자리에 이르기를 바랍니다.

 

그럼, 기독교 교리의 초보적이며 근본적인 진리들은 무엇입니까?

 

먼저 회개입니다.

 

기독교 입문의 최초의 문은 바로 회개입니다. 이는 누구도 회개없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회개없인 결코 신자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회개는 기독교인이 되는 최초의 관문이며 기독교의 가장 기초적인 교리입니다.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었던 세례 요한의 처음 말씀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세례받으신 예수님이 하신 최초의 말씀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는말씀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세상에 오신 목적이 회개시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5: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이렇게 회개는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공통된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바울 사도는 자기의 사역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20:21)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

 

베드로 사도도 회개를 말씀했습니다.

(벧후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이렇게 회개는 기독교의 기초요 터입니다. 회개 없이 기독교인이 될 수 없습니다. 회개없이 성도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럼 회개(悔改)가 무엇입니까?

회개는 자신의 그릇된 삶에 대한 전면적인 전환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것을 죽은 행실을 회개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6:1)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죽은 행실이란 죽음에 이르게 하는 행동들을 뜻합니다. 죽어 마땅한 죄행(罪行)을 의미합니다.

이런 죽은 행실에서 돌이키는 것이 회개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죽은 행실, 죽음에 이르는 죄행들에서 180도 방향을 바꾸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그릇된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동쪽으로 가던 사람이 서쪽으로 가는 것입니다. 삶의 모든 목적과 방향을 전적으로 뒤집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등지고 살던 사람이 하나님과 예수님을 향하여 사는 것입니다.

죄를 지으며 살던 사람이 죄를 끊고 선하고 의로운 삶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이렇게 회개는 자신 죽은 행실에서 180도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면 마음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자기가 큰 죄인임을 깨닫습니다.

전에는 죄가 아닌 것 같았는데 이젠 큰 죄로 알게 됩니다. 돈을 빌려쓰고도 갚지 않은 것이 죄임을 깨닫습니다. 남에게 손해를 입히고 괴롭힌 일이 죄임을 깨닫습니다.

이렇게 회개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한 새로운 각성을 가져 옵니다. 자신이 큰 죄인임을 깨닫습니다. 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생깁니다. 그리고 자기의 죄와 악함에 대해 슬퍼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하나님에 대한 그릇된 생각을 고치게 됩니다.

전엔 예수님이 싫었습니다. 교회가 싫었습니다. 예수쟁이들이 미웠습니다. 그런데 이젠, 하나님을 믿지 않은 죄, 우상을 섬기던 죄가 큰 죄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이 자기의 구세주로 믿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같은 죄인을 위해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것이 큰 감명을 줍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감사가 충만합니다. 교회에 가는 것이 기쁨니다. 예수쟁이들이 이젠 이뻐집니다.

이렇게 회개는 마음의 변화를 가져 옵니다.

 

그리고 회개는 자기의 그릇된 삶을 고치게 합니다.

술취하고 방탕하던 생활을 정리합니다. 거짓과 위선으로 살던 옛 사람을 벗어 버립니다. 남을 미워하고 욕심스럽던 과거를 청산합니다. 욕설과 비방으로 남을 미워하던 사람이 사랑의 삶을 살려고 힘씁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비록 실패하고 낙심할 때가 많아도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살려고 애를 씁니다.

이런 사람이 진정 회개한 사람이며 회개하는 성도입니다.

이렇게 회개는 전 인격적인 변화를 가져옵니다. 삶의 목적과 모습이 달라 집니다.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가 변합니다.

 

세례 요한이 유대 광야에서 회개를 선포했습니다.(3:7-9)

(3:7)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3: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3:9)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그러자 사람들이 묻습니다(3:10-14).

(3:10) 무리가 물어 가로되 그러하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3:11) 대답하여 가로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3:12)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3:13) 가로되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라 하고 (3:14) 군병들도 물어 가로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 말고 받는 요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회개는 이렇게 사람의 본연의 모습으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무자비 했던 사람이 자비를 베풀고 선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넉넉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무 공무원은 정해진 세 이외는 거두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다히 징수하고 착복하는 일을 말아야 합니다. 불의로 세금을 거두고 부정한 행위들을 말아야 합니다.

또한 군인은 자기 군무에 충실해야 합니다. 민간인들을 괴롭혀선 않됩니다. 폭탄과 총을 들고 민간인을 공포로 떨게 해선 않됩니다. , 칼을 가졌다고 횡포를 일삼아선 않됩니다.

 

이렇게 회개는 사람의 사람됨과 자기 직무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회개는 마음과 생활을 180, 선하게 옳은 방향으로 전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회개 하셨습니까?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오늘 우리 모두가 이 회개의 진리를 깊이 깨닫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죄를 깊이 회개하며 새로운 생활로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두번째로 기독교의 기초적이며 터가 되는 두번째 교리는 믿음입니다.

 

오늘 히브리서 기자는 회개 다음에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말씀합니다.

(6:1)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

 

오늘 말씀을 보면 두가지 진리들이 한 쌍을 이루고 있습니다. 회개와 신앙” “세례들과 안수그리고 죽은 자의 부활과 심판이 그것입니다.

이 쌍으로 기록된 교리들은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이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어느 한 면이 없다면 온전한 가치를 상실합니다.

 

요즘 만원짜리 지폐를 둘로 갈라 속여 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돈을 물에 불려가지고 둘로 쪼갭니다. 그리곤 한 쪽에 창호자를 붙입니다. 물건을 살 땐 돈을 잘 접어서 냅니다. 그러면 감쪽같이 속 습니다.

 

그러나 그 돈은 분명 가짜 돈이며 결코 사용해선 않될 돈입니다.한 쪽이 없는 돈이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이 기독교의 회개와 신앙도 서로 연결된 진리입니다.세례와 안수” “부활과 심판도 그러합니다.그러므로 이 둘을 쪼개 버리거나 서로 아무 관련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면 거짓입니다.

그래서 2쌍의 교리들이 어울려 기독교의 진리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 히브리서 기자는 죽은 행싱에 대한 회개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한 묶음으로 말씀합니다. 그럼으로써 회개와 신앙이 연결되어 있음을 교훈합니다.

 

우리가 이미 들었듯이 기독교의 기본적이며 기초적인 진리의 처음 것은 회개입니다. 그리고 그와 연결된 또다른 기초적 진리는 믿음이라는 말씀입니다.

 

기독교인은 회개한 사람입니다. 회개한 일이 없는 사람은 결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회개의 방향은 하나님을 향한 것입니다.

회개한 사람은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가집니다. 이렇게 회개와 신앙, 회개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뗄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회개가 아닌 것은 진정한 회개가 아닙니다. 회개는 꼭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회개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반드시 수반해야 합니다. 그럴때 이 회개가 진정한 회개입니다. 그리고 이런 회개만이 구원을 얻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간혹 개과천선(改過遷善)하는 것을 봅니다. 자기의 과거의 죄를 뉘우치고 후회하여 생활을 고치는 것입니다.

술주정뱅이가 술을 끊고 새 삶을 삽니다. 도둑질로 생계를 유지하던 사람이 열심히 일해서 먹고 삽니다. 흉포한 범죄자가 새 삶을 꾸립니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이제 저사람 회개 했네...”

 

그러나 기독교의 회개는 이런 것을 회개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적 회개는 분명 이런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삶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것을 포함합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우리 삶을 인도해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자기의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고 헌신하는 자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독교의 회개는 삶의 개과천선과 함께 하나님을 믿을 때 완성됩니다.

회개했다고 하면서 입산 수도하는 것은 회개의 실패입니다.

회개했다고 하며 머리깍고 산에 들어가는 것도 회개의 실패 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자기의 죄를 슬퍼하며 자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용서를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피로, 자기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요 신앙입니다.

 

이렇게 회개하고 믿는 사람은 삶의 어떤한 고난 속에서도 신앙을 버리지 않습니다.

이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님께 대한 신앙은 그의 삶이요 그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족들의 박해, 친척 친지들의 조롱과 눈총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죄의 또다른 유혹이 와도 견뎌 내어 이깁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께서 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아무리 과학적인 이론들이 어지럽게 난무해도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결코 잃지 않습니다.

 

과거 19세기에 하나님이 우주와 사람들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부인하는 이론들이 등장했습니다.

다윈이란 사람이 진화론을 주장했던 것입니다.

 

오늘 날의 이 우주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지금의 모양대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물론이고 다른 여타 동물들도 지금의 모양대로 만드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이나 동물들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하등 동물이나 생물에서 진화했다는 것입니다. 이 진화의 결과 현재의 모습을 갖게 되었다는 이론입니다.

 

그러나 정작 다윈은 이 이론을 신봉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그의 진화론을 부인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임종시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미숙한 개념들을 알고 있었던 젊은이 였소. 나는 질문을 던지고 대답을 시도해 보고 언제나 모든 문제를 찾아 헤매었다오. 그런데 나 스스로도 놀랍게도, 그 개념들은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갔소. 그리고 사람들은 그들 나름의 종교를 만들어 버렸다오.....”

 

이렇게 다윈의 의도와는 다르게 그의 진화론이 이젠 과학적 가설이 아니라 종교적 신념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다윈 당시에, 이 이론이 넓게 퍼졌습니다. 그러자 교회의 많은 목사들이 자기들의 믿음을 변경하기도 했습니다.

신학자들도 엉뚱한 성경 해석을 해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창조적 진화론이라는 아주 그럴듯한 이론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처음엔 하등 동물을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화의 방법으로 현재의 고등 동물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학자들 마저 과학자들의 한 낮 가설에 불과한 이론을, 마치 진리요 사실인양 경거망동하게 받아들이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목사요 신학자란 분들이 성경에 명백히 기록된 창조의 사실 조차도 고수하지 못했습니다.

 

성경은 명백히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1:11)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어(1:12)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1:21) 하나님이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1:24)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육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고(그대로 되니라) (1:25)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육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6:20) 새가 그 종류대로,육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케하라

(7:14) 그들과 모든 들짐승이 그 종류대로,모든 육축이 그 종류대로,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모든 새 곧 각양의 새가 그 종류대로 (8:19) 땅위의 동물 곧 모든 짐승과 모든 기는 것과 모든 새도 그 종류대로 방주에서 나왔더라

 

이렇게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종류대로 창조하셨다는 말씀에 밑줄을 긋고 계십니다.

아마 진화론이 나올 것을 대비하시어 써 놓으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이 다윈이 숨을 거둘 때의 일입니다.

그의 비서(호프(Lady Hope)여사)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지금 마지막으로 남기실 말씀이 없으십니까?

그러자 그는 강조하는 분명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에 대하여... 그리고 그의 구원에 대하여 말해 주시오. 그것이야 말로 최고의 주제가 아니겠소? 그리고 나는 당신이 그들과 찬송을 같이 해주길 원하오....그러면 나도 찬송을 함께 하고 있음을 알 것이요

 

진화론의 주창자로 알려진 다윈은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주제만이 인류 최고의 주제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진화론을 주창한 다윈도 그의 이론이 아닌 진리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을 사모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윈의 진화론이 마치 진리인양, 사실인양 받아들여선 안됩니다. 그것은 한갖 가설이요 사람의 두뇌에서 나온 한 가지 이론일 뿐입니다. 그것도 전혀 증명되지 못한 이론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실한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의 수많은 학설과 속설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과 그 구원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을 비웃고 온갖 감언 이설로 속이려 해도 결코 속아 넘어가지 않습니다.

이렇게 믿음은 세상을 이기게 합니다. 오늘 여러분 모두가 이런 세상을 이기는 믿음을 소유하시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기독교의 초보적이며 기초적인 진리의 첫 부분을 살펴보았습니다.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그것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가 이런 기초적 교리를 확고히 알고 확신함으로써, 더 온전한 믿음, 더 성숙한 삶의 자리에 오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축 도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6:24-26).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한량없는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크고 영원하신 사랑과 성령의 교통 위로 충만하신 역사가, 그리스도 도의 기초와 터를 확고히 하기 위해, 죽은 행실을 회개하고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더욱 성숙하고 온전한 믿음의 삶을 살기를 다짐하는,모든 교회와 사랑하는 모든 성도들의 심령들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