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히브리서

[히 5:7] 주님 왜 우십니까?

'코이네' 2024. 2. 19. 20:56

 주님 왜 우십니까? 

히브리서 5 : 7

 

 

인간에게 고귀한 액체가 있다면, 그것은 땀과 눈물과 피가 있읍 니다.

모든 인간의 위대한 인격의 실현은 거의가 이 고귀한 액체가 뿌 려진 결실입니다. 땀을 흘리지 않고서는 결코 값진 성공을 이룰수 가 없으며, 눈물없이는 숭고한 정신이나 진리가 실현된 일이 없으며 피를 흘리지 않고서 새 역사가 창조된 일이 없읍니다.

땀은 노력의 표상이요 인간성실의 증거입니다. 땀을 흘리지 않 고 성공하였다면, 그것은 모리배요, 불의로 얻은 것입니다. 인생의 모든 보람은 모두 땀의 산물입니다, 그러나, 땀보다 더 고귀한 것은 눈물이 올시다. 눈물은양심의 결 정이요, 모든 언어를 함축시켜 생성된 이슬입니다. 눈물은 사랑의 발로입니다.

가슴속에 사랑의 샘이 마르면 눈물도 없어집니다.

 

오늘날 현대인에게 비극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서 눈물도, 웃 음도, 모두 사라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른 눈으로는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고 스펄 ? 목사는 말하였 는데 오늘날 교회는 왜 이토록 눈물이 말라가는지 알 수가 없읍니다.

석고상처럼 메말라버린 우리의 가슴이 뜨거워질 때, 그 속에서 홀러내리는 아름다운 눈물이 샘물처럼 흐르게 될 것입니다.

대지가 열기로 뜨거워질 때 비가 내리듯이, 가슴이 성령으로 뜨 거워질 때 눈물의 소나기가 쏟아지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일생을 회고 해 볼때, 주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들이 모두 우리의 심령을 뒤혼들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감동적인 사실은 [예수님께서 우셨다]는 예수님의 눈물입니다.

인간의 눈물속에는 무한히 깊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읍니다.

역사의 고귀한 사상, 종교, 진리, 박애정신은 눈물의 산물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눈물이야말로 무한히 깊은 하나님의 크 신 사랑을 발견하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계시는 동안 웃으셨다는 기록은 없읍니 다. 이 세상을 바라볼때 ?을만한 현실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 아침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의 눈물을 생각하면서 은혜를 받 ?자 합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세번 우셨읍니다.

 

첫째, 예수님은 인간애의 눈물을 흘리셨읍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라비인 나사로가죽은 것 을 보시고 깊은 우정의 눈물을 흘리셨읍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조용히 눈물을 흘리셨읍니다.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 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가라사대 그를 어 데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

리시더라. '{ll : ss-s5}

 

옛 사람은 이 세상을 가리켜 '눈물의 골짜기' (84 :6) 라 하였읍니다, 인생은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첫 울음을 터트리고 인생을 마칠 때까지 눈물 골짜기를 통행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이 지구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울고 있읍니다.마리아 처 럼 오라비를 잃은 슬픔의 눈물도 있지만, 그 보다 더 깊은 마음의 비애가 있읍니다.

사랑하는 애인을 잃어버린 연인의 쓰라린 눈물, 자식을 잃어버린부모의 단장의 눈물, 부모를 잃은 고아의 슬픈 눈물이 이 골짜기를 흘러가고 있읍니다.

 

건강을 잃어버린 병상에서의 아픔의 눈물이 있읍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고 호소할 길 없는 사.연속에서 몸부림치고 있는 자들이 얼 마나 많이 있읍니까?

그러나 이 슬픔에 참여해 줄 이웃이 없다는데 인생의 더 큰 슬 픔이 있읍니다.

 

서양 격언에 이런 말이 있읍니다.

'슬즘을 당한 자에게 함께하면 슬픔이 적어지며

기뻐하는 자에게 함께하면 기쁨은 더욱 커진다'고 하였읍니다.

예수님은 인간고에 허덕이는 우리들에게 가까이 오셔서 슬픔을 나누어 가지십니다. 예수님은 슬픔을 친히 담당하tI니다.

이사야서 s34절에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 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 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 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 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 도다'하였읍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슬픔을 친히 담당하시려 오셨읍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는 말은 전 복음서를 통하여 예수 님의 가슴속에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부드럽게, 아니 간절하게 표현해 주고 있읍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고통과 눈물을 구경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출 애굽기 S7절에 보면. '내가 애굽애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 령히 보고 그들이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 고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하나님은 우 리들의 고통에 마음 아파 하시며, 참여하시는 그 눈물을 예수 그리 스도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보여 주셨읍니다.

예수님은 땅에 계시면서 이런 슬픔에 잠긴 자들을 찾아 발걸음을 쉬지 않았읍니다. 굶주린 백성들에게 빵을 먹이셨으며,병들어 고생 하는 무리들에게 병을 고쳐 주셨으며, 외롭고 고달픈 자들을 찾아 가시어 위로하여 주셨읍니다.

 

버림받은 자들에게 친구가 되어 주셨고,자비를 나타내셨읍니다.

예수떰은 스스로 고난에 참여하시고, 그 죄인들에게는 용서로서

소망과 기쁨을 주셨읍니다.

오라비를 잃은 슬픔에 잠겨 있던 마리아와 마르다에게는 베다니 조객이 아무런 문제의 해결을 주지 못하였읍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슬픔에 참여하고, 그리고.

 

그 슬픔 기쁨으로 바꾸어 주셨던 것입니다.

오늘 교회는 그리스도의 눈물이 있어야 하며,참여하는 사랑이 있어야겠읍니다.

로마서 l2l5절에 '즐거워하는 자들도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자

들도 함께 울라.'

오늘 이 땅에는 슬픔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랑을 찾고 있읍니다.

이제 나사로의 무덤에서 흘리셨던 그리스도의 눈물이 우리의 가

슴속에서 홀러나와야 되겠읍니다.

 

둘째, 예수님은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는 눈물이 있었읍니다.

이는 역사적인 비극을 바라보는 예언자적인 울음이었읍니다. 눈 물의 농도를 보면 나사로의 죽음에는 조용히 눈물을 홀렸고 예루살 렘을 향해서는 소리내어 우셨읍니다.

 

오늘 이 역사에 예수 그리스도의 눈물이 이 조국을 적신다면 결코 이 민족은 버림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성을 보시면서 울음을 터뜨리신 것입니다. (19 : 4l _44) 평화의 성이어야 할 예루살렘이 인간의 죄악으로 말 미암아 평화의 비결은 숨겨지고, 주후 7o년경에 멸망할 예루살렘의 참상을 예언하시면서 우신 것입니다

로마장군 디도는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모인 일백 만명이 넘는 유 대인들을 s일만에 쌓은 토성안에 가두어 굶겨서 죽였읍니다. 이러 한 비참한 멸망이 다가 오는데도 유대인들은 아직 구원받을 길을 찾 지 못하고 있었으니, 예수님은 통곡하지 않을 수가 없었읍니다.

디도장군은 어린 아이들을 메어치며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하였고,성전과 성곽을 위시하여 전 도시를 완전 파괴할 것을 명령했읍니다.

과연 예루살렘은 옛터를 알아 볼 수 없을 만큼 폐허가 되었읍니 다, 하나님께서는 유대민족을 구원하시려 독생자를 보내시어 권고하셨지만, 그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멸망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주님께서는 조국의 멸망을 안타까이 보시며, 애국의 눈 물을 홀리신 것입니다.

이와같이 예수님의 눈물에는 각 사람을 향한 인정과 애정의 눈물이 있었읍니다.

오늘 우리들은 예수님의 심정으로 이 나라 이 민족을 향한 뜨거운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에는 국경은 없으나 그리스도인에게는 조국이 있다고 했읍니다.

무릇 참된 그리스도인이면 자기의 조국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자기 민족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모든 선지자들은 조국을 사랑하여 울었읍니다 모세가 그러하였웁니다, 사무엘이 그러하였읍니다. 예레미야가 러했읍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조국을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조국을 위한 애국의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은 민족을 위해서 눈믈을 ?렸읍니다.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를 봅시다. 그는 자기 백성이 하나님을 배 반하고 범죄하므로 앞으로 미치게 될 하나님의 진노를 생각할때 너무 마음이 아파서 ,내 백성의 파멸을 인하여 내 눈에 눈물이 시내처럼 흐르도다. 내 눈의 흐르는 눈물이 그치지 아니하고 쉬지 아니 함이여'하엿읍니다,

이와같아 주님께서 예루살렘성을 보시고 통곡하시는 그 눈물이 우 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조국을 위하여 울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 있읍니다.

우리의, 동족을 반세기 동안이나 일본에 종살이하며, 희생당하였던

이 얼마이며, 이같은 비운의 역사 앞에서도 조국을 위해 울던 순국선열들이 그 얼마이

음으로 순교를 당한 하나님의 종들이 그 얼마입니까?

6. 25사변은 이 민족에 게 더없는 참상이었으나 천신만고 끝에 유 엔군의 도움으로 s8선 이남이라도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은 하니님의 백성들이 산간벽지 토굴속에서, 그리고 피난 행렬에서 눈물로 드린 그 기도가 이 백성을 구한 것입니다.

 

우리는 사무엘처럼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기를 쉬는 않으려는]각오가 있어야 겠읍니다.

. 녹스처럼 하나님이여 스콧트랜드를 나에게 주소서. 그렇지 않으시면 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U하는 진실되고 사명감이 넘치는 간구를 드려야 하겠읍니다.

 

세계에서 가장 축복받은 나라 미국은 역대 지도자들이 기도로서 나라의 터를 놓았기 때문입니다.

 

워싱턴은 영국으로부터 독럽을 얻기 위하여 미연합군 사령관으로 서 누더기를 걸친 기진맥진한 군대를 거느리고 싸울때에도 추운 겨 울 눈 위에 엎드려 기도하였기에 하나님은 그 들 편에 승리를 가져 다 주었읍니다.

 

무기 아래 세운 나라는 망할지언정, 무릎 아래 있는 나라와 민족은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백성들의 눈물을 보시고 이 백성을 보호하 시고 계시는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왜 이 민족을 불쌍히 여기십니까 ?

 

그것은 새벽마다, 밤마다 철야하는 남여 종들의 기도 때문인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읍니까? 셋째, 전 세계 인류구원을 위하여 우셨읍니다.

이는 인류가 죄로 말미암아 멸망할 영적인 통곡이었읍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큰 소리로 통곡하며 우신 것입니다.

 

?세마네 동산에서 우셨는데 그는'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죽음에 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기원을 올렸 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하였읍니다.

?세마네 동산에서밤 깊도록 홀로 눈물 홀리시며, '아바 아버지여,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제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의 원대로 하옵소서'하시며 눈물로 기도를 드리셨으며, '또 십자가 상에서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시나이까?'하고 큰 소리로 우셨읍니다, 이 눈물은 종교적인 눈 물이며 인간구원을 향한 눈물입니다. 생각하여보면, 예수 그리스도 의 눈물의 기도를 통하여 인류구원이 완성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눈물속에서 하나님의 심장에 흐르 고 있는 사랑의 깊이를 측량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를 향하여 쏟으신 그리스도의 피맺힌 눈물의 흔적을 까지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람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나의 죄 때문에 그리스도가 버림받는 그 아픔의 눈물이 내 심장에 발견하기적시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부터 버림받은 적이 없었읍니다. 가족들로 부터 버림을 받고 동네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았읍니다. ,자기가 구원 하려고 온 자기백성에게서 버림을 받았읍니다.제자에게도 버림 을 받았읍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예수님을 버린 적이 없었읍니다.

하나님은 매 순간마다 예수님의 생애에서 접촉하고 교제하여 왔읍 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버린적이 없었는데 십자가상에서는 하나님 마져도 예수님을 버리신 것입니다.

_예수님께서 오전 9시로부터 오후 s시까지, 6시간동안 고통 가운

데 있었는데,l2시로부터 오후s시까지는 온 세상이 및을 잃고 깊 은 어두움에 싸이게 되었읍니다. 오후 s시 가까이 올때에 예수님은 큰 소리로 통곡하시는 음성으로 '엘리 엘리 라마 사박 다니 나의 하 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버리시나이까'하고 울부짖으셨던 것입 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 말?은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통의 절정에서 부르짖은 절규요.우 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는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이요, 통곡하시는 주님의 눈물이 골고다의 언덕을 적시고 하나 님의 진노의 땅을 사랑으로 적시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그 눈물이 있었기에 우리에게서 영원히 이를 갈며 통곡할 눈 물을 거두어 주신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심판해야 할 그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를 심판하고,우리가 써야 할 가시관을 예수님 머리위에 쐬우시고, 내손과 발을 관통해야 할 그 쇠못이 하나님의 아들의 손과 발을 찔렀고 내 가슴 을 향하여 꽂아야 할 창이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찢었던 것입니 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면서도, (4: 25)극악한 죄인으로서 십자 가에서 버림을 받았읍니다. (4:25)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통곡속에서 저 지옥의 통곡소리를 들어야 하며, 그 눈물에서 무한히 깊으신 하나님의 사랑의 높이와 깊이와 넓이와 길이를 찾아야 합니다.

제가 고부교회에서 목회할 때 일입니다.

어느날, 저는 고난주간에 기도하기 위하여 성전오로 갔읍니다.

주님의 수난을 묵상하며. 하루 종일 금식하고, 조용히 머리숙여 기 도하다가 제단 가운데 있는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순간, 이런 음성이 내 심장을 울려주었읍니다.

 

'나는 너를 위하여 이 몸 버려 피흘려 주었건만 너는 나를 위하 여 무엇을 버리고 있느냐'하는 음성이었읍니다.

이때,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케 하시는..' (8 : 2s)그리스도의 영이 이 종의 심령속에 통곡하게 만들었읍니다.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감당할 수 없는 눈물이 제단을 적시었읍니 다.

그후 부터는 눈에서 눈물이 마르지 않고 흘러 내렸읍니다. 너무 도 많은 눈물이 매일같이 흘렀읍니다.

이 패역한 도성을 부둥켜 안고, 밤이면 산에 올라가 온 몸이아슬 에 젖도록 울었고, 낮이면 하나님을 모르는 내 백성의 파멸을 인하 여 눈에서는 눈물이 시내처럼 홀렀읍니다.

어느날 새벽4시에 새벽종을 치기 위하여 종줄을 잡고 이렇게 기 도를 드렸읍니다.

'주님, 이 고을 사람들을 구원하여 주소서. 어두움에 잠든 이 백성들에게 잠을 깨우시고, 새벽을 알려주소서'하는 순간 눈물이 가 슴속 깊이에서 흘러내러면서, 나의 앞에 나타난 환상은 예수 그리 스도가 눈물을 흘리고 있는 모습이었읍니다.

나는 종 줄을 놓고 땅에 엎드려, '주님 왜 우시나이까?'하고 물 었읍니다, 그때 내 종아 지금까지 너의 그토록 많은 눈물은 너의 눈물이 아니고, 내가 네 안에서 흘린 눈물이었다. '는 응답이었읍니다. 이 비천한 종에게 수많은 생명을 구원하시려는 그리스도의 영이 나로 하여금 그토록 많은 눈물을 홀리게 한 것을 알았고, 그 눈물 헛되 지 않아 많은 형제들에게 그리스도를 믿게 하였웁니다.

하루는 눈물을 흘리면서 고부의 거리를 걷고 있었읍니다. 평소에나를 아는 할머니 (후에 송옥순 집사가 되었음)는 왜 우느냐고 묻기에 이 고을사람이 죽었기에 슬퍼서 우노라고 하였더니 이 고을누카 죽었느냐기에 할머니 손목을 잡고 바로 할머니 영혼이 죽었기에 슬 피우노라고 전도하여 구원받게 된일이 있읍니다

 

그리스도의 눈물이 우리의 심장에서 흘러야겠읍니다. 오늘 눈물 이 말라버린 제단과 성도의 심령을 보시면서 그리스도의 영이 탄식 하고 있읍니다.

 

'주여, 우리에게 눈물을 주소서.

그리고 이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56:8)

그리스도가 눈물을 흘려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 기에 눈물없이는 그리스도의 뒤를 따를 수 었읍니다.

지난날 불충한 과거를 통회하는 베드로의 눈물이(l4 : 72)있어야 제자의 길이 있읍니다.

마리아처럼 주님 발 앞에 서서 울며 눈물로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는 사건을 통하여 죄사함의 펑안이 있을 것입니다. (7: s7)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형제들을 향하여 불쌍히 여기는 바울 의 눈물(s: l8)이 있어야 전도자의 기쁨이 있읍니다.

목자의 목을 껴안고 우는 성도의 눈물이 있어야 교회는 은혜스럽 고 아름다운 양들이(20 : s7)될 것입니다.

자기 양들을 위해 홀리는 사랑의 눈물(2o : I9)이 있을때, 자랑 스런 목회자가 되어질 것입니다.

눈물없이 못가는길 피 없이 못가는길.

영문밖의 좁은길이 골고다의 길이라네.

영생복락 얻으려면 이길만은 걸어야해.

배고파도 올라가고 죽더라도 올라가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