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히브리서

[히 5:1] 순종함으로 완성된 대제사장

'코이네' 2024. 2. 19. 21:03

 순종함으로 되어진 대제사장 

5:1-10

 

 

지난 시간에는 큰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씀을 상고해 보았습니다.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친히 인간의 약함을 입으시고 모든 약함을 체휼하신 분이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특권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이 되시기 위해서 어떤 사역을 하셨는가에 대해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당시에 성도들 가운데서는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것을 좇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꾸며진 이야기로 자기들의 가려운 귀를 긁어줄 스승을 두는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욕심을 따르려고 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교회 안에서도 점차적으로 자리를 확보해 나가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이들에게 미혹되지 않게 하려고 먼저 대제사장의 자격을 기록한 후에 이들의 한계점을 지적하고 아울러서 하나님이시며 인간이신 예수님의 대제사장의 자격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인간 대제사장의 한계성이 무엇인가를 가르치며 예수님의 대제사장직이 얼마나 월등한가를 보여주면서 절대로 유혹받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는 이제 효과적인 중보의 기도를 하고 있다는 증거를 확신시키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의 마음을 위로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육신하신 아들이 가지신 제사장직의 본질과 영광을 보다 정확하게 드러내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인간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중보적 사역을 통해서 계속되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인간의 중보적 역할을 감당했던 인간 대제사장의 특징과 그들의 한계는 무엇이며, 이것을 극복하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시며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어떤 과정을 지나오셨을까요? 이 시간 이 말씀 속에서 더욱 더 구체적인 말씀이 현실적으로 느껴지므로 주님에 대한 고백을 다시 한 번 새롭게 할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인간 대제사장의 특성및 한계성(1-4)

 

지난 시간에 인간 대제사장은 일정한 자격이 주어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그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본질적 내용을 다루고자 합니다. 인간 대제사장의 한계성은 곧 만인대제사장되는 우리의 한계성을 고백해 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먼저 대제사장의 직무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합니다. 대제사장의 직무의 특성은 우선은 하나님께 속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대제사장을 세우신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함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으로 세우심을 입은 자마다 하나님의 뜻에 부응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것은 대제사장의 사역에 있어서 가장 중심이 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모두가 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내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란 개념이 중요합니다. 중세시대에 십자군 전쟁이 있었습니다. 이 전쟁은 예루살렘을 탈환하여 신앙의 발상지를 보호하자는 의도에서 있었던 전쟁입니다. 그 전쟁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곧 하나님의 뜻인줄 알았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 결과 어떤 희생도 감수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희생도 감수할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대제사장은 또한 사람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는 분명 하나님께 속했고 하나님의 일을 하였지만 그가 하는 일은 사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소속은 하나님이지만 사역은 인간 속입니다. 이 말은 대제사장은 반드시 사람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람이어야 사람을 위해서 일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위하여 일한다는 말은 연약한 자를 위해서 일한다는 말입니다. 진정한 사람은 강자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약자의 편에 섭니다. 하나님은 과부와 고아의 하나님이셨습니다. 또한 사람을 위하여 일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하나님의 인격)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피로 값주고 산 성도를 미워하면 안됩니다. 속세를 떠나서는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 두 가지를 반드시 실행해야 합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멀어진 인간은 하나님이 계신 곳 가까이에 가지도 못했습니다. 19:12에 보면 인간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실 때 그 근처에도 오르지 못했습니다. 만약에 올라갔다가는 즉사하는 벌을 받게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어주기 위해서 대제사장은 반드시 필요했고 이 사역이 온전히 되기 위해서 대제사장은 반드시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사역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역은 아무나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9:38, 4:11).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만이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임명하시고 성별하게 하신 자만이 이 일을 감당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직분을 맡기실 때 아무에게나 아무렇게나 맡기는 것이 아닙니다. 성별하여 세운 자에게 직분을 맡겨 주십니다. 그러므로 이 직책은 대단히 존귀한 것입니다. 섣불리 취급할 수가 없습니다. 천사도 사모할만한 고귀한 직책임을 알아야 합니다.

 

대제사장은 레위인 중에서 하는 것이지만 레위인이라고 해도 아무나 할 수 없었습니다. 오직 아론의 반차를 좇아야만 했으며 그 중에서도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이 있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라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가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역에는 반드시 권위가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일에 권위가 없으면 그 일은 더 이상의 의미가 없습니다. 이 권위 때문에 비록 어려도 어른들 앞에서 가르치기도 합니다. 이 권위가 없으면 모든 것이 다 무너집니다.

 

지금은 권위가 없는 시대라고 합니다. 교회에 이런 신령한 권위가 없다면 어떻게 교회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권위는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에 찾아가는 것입니다. 이 권위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에 이 권위에 도전하는 자는 징계를 당하게 됩니다. 12:1-12에 보면 모세의 권위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모도 징계를 당하는 것을 봅니다. 비록 아론이라 할찌라도, 미리암이라 할찌라도 하나님의 징계를 면할 수가 없었습니다. 고라 자손은 권위에 도전하다가 모두 땅 속에 생매장 되었습니다. 웃시야 왕은 문둥병에 걸렸습니다(대하26:16-21).

 

하나님께서 주신 권위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권위에 도전해서도 안되고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직분을 따라 주신 권위가 소멸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권위와 능력을 주시는 이유는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이룩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르심을 입은 자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고귀한 일을 하는 대제사장이 사람 가운데서 취함을 입었다는 것이 바로 대제사장의 한계였습니다. 대제사장이 사람 중에서 되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인간이 당하는 시험을 알고, 시험을 알기에 고난을 알고, 대언의 기도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합당한 것이었습니다. 같이 연약한 모습으로 연약하고 불쌍한 사람을 위해서 사역하는 것은 좋은 것이었습니다. 자기가 대표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좋았습니다. 사람들의 실수를 보고 같은 죄인의 입장이기에 정죄만하지 않고 그들을 불쌍히 여길 수 있다는 면에서 참으로 좋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인간이었기 때문에 한계점에 봉착했다는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대제사장도 죄인인 인간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도 역시 연약에 싸여 있었습니다. 그 자신이 죄인임으로 인해서 온전한 사역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엘리 같은 사람들은 비록 대제사장이었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사역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도 자기를 위한 속죄제를 드려야 했습니다. 자신을 위해 먼저 드려야 했고 그 후에라야 다른 사람을 위해서 제사를 드릴 수가 있었습니다.

 

 

2. 예수님의 대제사장 자격(5-6)

 

그러나 예수님의 경우는 다릅니다. 아론의 반차를 좇았던 대제사장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예수님은 모두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인간 제사장의 실패를 보고서 하나님은 충실한 제사장을 세우기로 이미 약속하신 바가 있는데(삼상 2:35) 이것을 이루신 이가 곧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대제사장직은 유대인이 가진 웅장한 예배 의식, 대제사장의 화려한 옷차림, 엄숙한 위임식, 성전의 장엄함등은 없었지만 그러한 것에 못지 않는 더 위풍당당한 대제사장직이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스스로 취한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854절에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아무 것도 아니거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취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것임을 강조하셨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으신 것이기에 본성에 있어서나(1) 직무에 있어서나(2) 의무에 있어서나(3) 소명에 있어서나(4)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스스로 취한 것이라면 그 사역의 완전성을 입증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5절에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날 너를 낳았다고 말씀하시므로 중보자로서 하나님께서 확실히 세우셨음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6절에 내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고 하므로 예수님의 사역이 일반 대제사장이 아님을 더욱 구체화시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왕직이나 선지자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별로 강조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사장 사역에 대해서는 큰 대제사장으로 표현하는가 하면, 제사장의 직무를 통해서 영화롭게 되었다는 표현을 통해서 예수님의 3직 중 제사장직이 가장 중요함을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제사장직은 인간의 죄를 용서함 받고 구원을 받게 하는 직접적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으로서 흠 없는 완전한 사역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만 하면 모든 죄를 용서받을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과 인간의 사이에 중간에 아무도 설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온전히 이루셨기 때문에 이제는 인간이 중간에 설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모형을 성취하시므로 레위 반차의 제사장 사역이 모두 다 끝났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자기의 죄를 위해서 먼저 예비 제사를 드리고 다시 백성의 죄를 위해서 제사를 드려야 하는 불편한 일들은 필요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3. 대제사장 되심을 위한 예수님의 사역(7-10)

 

그러면 이제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이 되시기 위해서 어떤 사역을 하셨는가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이런 사역을 하셨기 때문에 대제사장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육체로 계실 때에 그가 하신 사역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면서 그 안에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씀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으로부터 들으심을 얻도록 하셨습니다. 들으심을 얻는다는 말은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힘주시지 않으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간구하는 자의 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에게 힘을 주십니다. 누가복음 224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에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간구하는 자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예수님도 이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들으심을 얻었습니다.

 

이 일은 육체로 있을 때 되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육체의 연약함을 가지고 있을 때 기도를 통해서 들으심을 얻었습니다. 말구유에서 무덤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은 기도하는 분이셨습니다. 습관을 좇아 기도하시던 분이셨습니다. 아직 영화롭게 되지 아니한 인간의 본성을 가졌을 때, 배고픔과 슬픔과 피곤과 갈증과 고통과 사망이 있을 때 기도를 통해서 들으심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연약한 육체에 있을 때 부르짖음을 통해서 들으심을 얻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죽음에서 능히 구하실 이에게 구했습니다. 이미 죽어서 썩어져 가는 사람도 능히 살리시는 하나님께 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기에 다시 살리실 수도 있는 분이시기에 하나님께 구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할 것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당신의 몸이 친히 제물이 될 것을 아셨습니다. 이 죽음을 통해서 인류가 구원을 얻을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에서 다시 살리실 하나님을 아셨습니다. 그 능력의 하나님께 구하셔서 들으심을 얻었습니다. 부활의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기가 막힐 수렁과 웅덩이 속에서도 죽도록 내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구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비록 죽었다 할찌라도 다시 살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들으심을 얻기 위해서 드린 기도는 심한 통곡과 눈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이 얼마나 큰가를 보여줍니다. 율법 아래 들어가셔서 전가된 죄책을 받으며 하나님의 분노로 야기된 공포와 압력, 모든 고통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를 보여줍니다. 시편 221절에 내 신음하는 소리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2638절에 내가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2242절에 이 잔을 내게서 옮기소서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2746절에서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도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울부짖었습니다. 하나님은 통곡하는 사람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이렇게 심한 통곡을 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습니다. ‘올린다는 말은 히브리서에 16번 나오는 말로 언제나 제사장적 사역에 사용된 말입니다. 예수님은 선한 것을 위해 구했습니다. 악에서 구원해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소원이란 평화를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간청하는 자들이 올려 바치는 감람나무 월계관을 말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낮아지신 동안에 간구와 소원으로 하나님의 들으심을 얻었습니다.

 

둘째는 순종입니다. 예수님의 대제사장 되심을 위한 사역은 순종이었습니다. 순종이란 다른 자의 권위를 인정하고 다른 자의 뜻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다른 자의 기뻐하는 것을 수행하는 것이 순종입니다. 예수님은 철저히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수행하셨습니다.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순종은 율법적 순종이 아닌 복음적 순종이요 믿음의 순종이었습니다. 억지의 순종이 아닌 자의, 자유, 기쁨의 순종이었습니다. 주님은 화목의 직책을 순종을 통해서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이 율법 아래 오신 것도 율법을 이루기 위한 순종 때문입니다(4:4, 5:17).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순종이 필요합니다. 순종은 능력을 이루게 하는 밑거름이 됩니다. 사이비 이단과 같은 맹목적 순종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순종은 바로 예수님의 순종입니다. 그리스도의 순종은 구원을 이루어주시는 순종이었습니다.

 

순종은 고통을 동반합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약속을 바라보고 나가는 그 길을 걸어가는 동안 고통과 역경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통해서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화창한 일기에만 항해하는 것과 같은 평안과 기쁨을 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인생은 평탄한 길이 아니었습니다. 파도도 있었습니다. 수평선 위의 검은 구름도 있었습니다. 시험도 있었습니다. 그에게 고난은 항상 있었습니다. 일찌기 하늘 나라의 보좌를 버린 것부터가 고난이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멀리하여 달라고 하는 주님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과의 갈등을 겪는 고난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십자가 상에서 자신을 제물로 드리는 것은 최대의 고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고통을 통해서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나 고통을 당했기 때문에 순종하지는 않았습니다. 고난을 받는 자체로 순종하셨습니다. 고난을 통한 예수님의 순종은 성도들로 하여금 그의 자취를 따라 행하도록 보이신 순종입니다. 순종하는데는 고난이라는 대가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은 고난의 면제가 아니라 슬픔과 질고가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F. J. Murray가 함흥 제혜병원에서 근무할 때의 일입니다. 열 두 살 먹은 소년이 밤 중에 병원에 실려 왔습니다. 맹장염이었습니다. 머레이는 상태가 그다지 절박하지 않았고 수술실의 조명도 불안정해서 다음 날 아침에 수술하기로 했습니다. 머레이는 환자 부모에게 별다른 지시가 있을 때까지는 절대로 음식을 먹이면 안된다고 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수술에 들어가기 전에 머레이는 다시 한 번 확인해 보았습니다. 환자의 부모들은 아이에게 아무 것도 먹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머레이는 의심하지 않고 수술을 했습니다.

 

수술이 끝나고 환자가 들것에 실려 입원실로 옮겨지고 있는 사이에 마취에서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환자는 채 씹지도 않은 끈끈한 밥알을 토해내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밥알은 기관지로 들어가 호흡을 곤란하게 했는데 소년은 완전히 깨어나지 않아 밥알을 뺕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숨이 막혀 죽었습니다. 머레이는 부모를 힐책했습니다. “어째서 아이에게 밥을 주었단 말이오? 수술 전에는 절대로 아무 것도 먹이면 안된다고 내가 말하지 않았소?” “그렇지만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요. 우리는 애가 배가 고플까봐 그것이 더 걱정스러웠어요.” 어머니의 대답이었습니다. 의사의 말에 대한 불순종은 생명을 잃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순종은 학습을 통해서 되어집니다. 처음부터 되지 않습니다. 순종은 훈련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훈련은 반복적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싫어도 해야 합니다. 힘들어도 해야 합니다. 자신을 버리는 것을 훈련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반대되는 곳으로 나가지 않는 것을 훈련해야 합니다. 자발적으로 하는 것을 훈련해야 합니다. 부분적 순종이 아닌 믿음 생활 전반에 걸친 순종을 하도록 훈련해야 합니다. 순종은 순종을 통해서 배운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면서 순종을 배워야 합니다. 온유와 겸손과 자기 부인과 인내와 믿음은 모두 순종을 통해서 배워지는 것들입니다.

 

순종은 온전함을 이룹니다. 고난은 영광을 더하여 주듯이 순종은 온전함을 이루어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은 하나님의 공의를 완전히 만족시켜드렸습니다. 예수님의 순종은 인간 대제사장의 부족함을 온전히 이루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을 본받음으로 영원한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순종하는 자에게는 성령 충만도 선물로 주십니다(5:32).

 

 

이제 말씀의 결론을 맺겠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사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신사적으로 받아 들어야 합니다. 신사적으로 받는 사람은 말씀을 순종합니다. 예수님도 대제사장의 사역을 순종함으로 감당하셨습니다. 순종을 통해서 구원 사역을 온전히 이루셨습니다. 우리도 순종하므로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을 수도 있습니다. 영원한 가나안을 사모하는 심령마다 말씀의 순종을 통해서 온전한 구원을 이루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