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히브리서

[히 6:13] 하나님의 맹세

'코이네' 2024. 2. 27. 21:01

하나님의 맹세

6:13-20

 

 

예수님께서는 마5:33-37에서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하셨다. 5:12에서도 맹세하지 말라고 했다. 맹세는 실재로 금지되어 있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그러나 우리의 실재 삶에 있어서는 수 많은 부분에 맹세를 한다. 비록 맹세라는 단어는 들어 있지 않지만 맹세적 성격을 띤 일들을 많이 한다. 목사 안수를 받을 때도 맹세를 한다. 임직을 할 때나 세례 문답을 할 때도 서약을 한다. 서약은 맹세라는 단어는 사용하지 않지만 그 내용은 포함하고 있다. 본문에서도 하나님께서 맹세하셨다는 말씀이 나온다. 하나님의 말씀 사이에 모순이 생기는 것 같다. 이 문제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우선 맹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위에서 언급한 성경 구절의 말씀들은 맹세를 절대적으로 금한 것이 아니다. 다만 거짓된 맹세의 남발에 대한 금지 조항이다. 거짓 맹세를 함부로 해서 자신의 진실성을 위장하는 것에 대한 금지조항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진실성의 문제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위의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서 굳이 맹세를 하지 않아도 드러나지는 진리를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맹세가 이해되어져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약속하셨다. 그 약속을 확증하기 위해서 맹세를 하셨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확증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약속을 받은 자는 아브라함이다. 그러나 이 약속은 아브라함에게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동일한 은혜로 주어질 축복의 말씀이다. 아브라함은 본보기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은 우리 모두에게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의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축복을 주시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맹세의 성격

 

하나님께서 맹세하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약속을 믿지 못하거나 확신하지 못하는 자를 확신시키기 위해서였다. 하나님은 회의적 신앙을 가진 자에게 맹세를 통해 당신의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증을 주셨다. 하나님의 맹세는 우리의 믿음을 굳게 확증시키기 위한 수단이었다.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신실성을 확증시켜 주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지키시기로 맹세하시며 이것을 이루시므로 당신이 친히 하나님 되심을 알려 주신다.

 

1. 하나님의 맹세는 자기를 가리킨 맹세다(22:16 참고).

 

맹세를 할 때는 자기보다 더 큰 것을 두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늘을 두고 맹세하기도 한다. 고대 근동에서는 절대자를 두고 맹세하는 관습이 있었다. 자기보다 더 큰 것을 담보로 하여 맹세를 하면 나중에 문제가 생길 때에 그가 해결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두고 맹세를 하신 이유는 당신보다 더 큰 이가 없기에 자기 자신을 친히 두고 맹세하심을 보여준다. 이것은 최고의 권위를 가진 맹세다. 만약 이 약속이 지켜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명예는 실추된다. 하나님의 신실성도 의심이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맹세는 만약에 이 약속이 지켜지지 않으면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최종적 맹세다. 이 맹세는 하나님의 뜻의 효력을 전달하기로 한정된 사람들에게 해당된다. 하나님의 자기 맹세는 최후 확정적이다(16). 죄로 인해 하나님과 벌어진 상태의 인간과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맹세에 동참하는 것 뿐이다. 하나님은 이 맹세를 이루시기 위해서 인간의 위치까지 친히 낮아지셨다.

 

2. 하나님의 맹세는 변개함이 없다(17).

 

사람의 계약은 파기되기 쉽다. 신실하지 못하기 때문에 파기되기도 하지만 능력이 부족하여서 부득불 파기하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약은 파기되지 않는다. 특별히 맹세로 보증하신 하나님의 계약은 파기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감추어진 뜻이 약속을 통해서 계시되어진 후에 그것이 다시 맹세로 확증되었을 때 그것은 다시는 변하지 않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계약의 원 의미를 알아보기 원한다. 고대 근동에서는 계약을 체결할 때 동물을 두 개로 쪼갠 후에 그것을 불태우는 방식을 취했다. 15:8-17에서도 그 내용이 나온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계약을 체결할 때에 동물을 둘로 쪼개고 그 사이로 지나가시면서 불로 태웠다. 이것은 의미가 있다. 만약에 어느 한 편이 그것을 파기하면 그 동물과 같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표현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계약을 파기하시면 하나님이 친히 죽임을 당해야 하는 결론이 나오게 되므로 하나님께서는 그 계약을 친히 이루실 것이고 그것을 확실히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사람들의 표현 방식대로 맹세로 확증을 시켜주신다.

 

하나님의 정하시는 뜻은 변하지 않는다. 특히 맹세로 보증하신 것은 더더욱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약속은 변하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식언치 않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가 하신 말씀은 반드시 이루신다. 하나님은 거짓말하시는 분도 아니시거니와 능력이 부족하여서 하신 약속을 취소하시는 분도 아니시다. 33:19과 삼상 15:29에 보면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지 못하시는 분이라고 했다.

 

하나님이 신실하시며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는 분이시기에 그 분을 믿는 우리도 절대로 거짓말을 해서는 안된다. 백색 거짓말이건 흑색 거짓말이건 거짓말을 해서는 안된다. 거짓말을 하는 자들은 지옥의 자식들이다. 사업상 해서도 안된다. 교육상 해서도 안된다. 거래상 해서도 안된다. 오직 진실만이 있을 뿐이다.

 

맹세의 내용(14)

 

하나님께서 친히 가지고 계신 그 뜻은 아무도 모른다. 다만 그 뜻이 약속을 통해 계시될 때라야 알 수 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약속이라는 방식을 통해 사람들에게 알려 주셨다. 그리고 그 약속을 신실히 이루시는 분이심을 입증하시기 위해서 맹세를 하셨다. 맹세를 한다는 것은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하나님됨을 포기한다고 하는 엄청난 내용이 들어 있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비중을 두고 맹세하신 내용은 어떤 것들인가?

 

1. 복주고 번성케 하신다(15).

 

맹세의 첫번째 내용은 당신께서 택한 자를 반드시 복주시고 번성케 하신다는 것이다. ‘반드시라는 말로 강조가 되면서 또 다시 복주고 복주며라는 말로 거듭 강조를 하고 있다. 하나님의 의지의 강력한 표현이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끝내 그 일을 이루고야 말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의지가 들어 있는 말씀이다. 마치 욥의 축복과도 같다. 비록 고난이 있지만 그 고난이 끝나고 나면 반드시 축복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의 고난만을 보면서 괴로워할 것이 아니라 장차 나타나게 될 영광을 볼줄 알아야 한다.

 

아브라함은 복을 받았다. 12:1-3에서 약속된 복을 받았다. 아브라함이 받은 복은 두 가지다. 하나는 육적인 축복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큰 나라를 이룬다고 하셨는데 이것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재산으로, 부귀로, 능력으로 이루어졌다. 방백으로서 귀하게 여김을 받았으며 자손의 복도 받았다. 둘째는 영적인 복이다. 그리스도께서 아브라함의 씨를 통해서 탄생하신 것이다. 이로 인하여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 되었다. 잠시 있다가 없어지는 것은 좋은 복이 아니다. 영원토록 있는 것이 최고의 복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브라함은 최고의 복을 받은 사람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 복을 받아서 혼자만 누리지 않았다. 3:14, 29을 보면 아브라함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까지 복을 받았다고 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도전을 주는 말씀이다. 예수 믿는 나로 인해 주변에 축복이 일어나고 있는가 아니면 어려움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사람이 제 임무를 다하지 않으면 자신만 고생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사람들까지도 고난을 당하게 된다. 요나 때문에 주변의 사람들은 건강도, 재산도, 시간도 손해를 보았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주변에 평화를 주는 사람인가? 아니면 고난을 주는 사람인가?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시고 우리에게 복주시기를 원하시며 우리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이 복을 받기를 원하고 계심을 알아야 한다.

 

2. 큰 안위를 주신다.

 

하나님의 맹세의 두번째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해가는 우리들에게 큰 안위를 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복주시기로 맹세하시는 이유는 성도로 하여금 그 복을 바라보면서 소망을 가지고 그 안에서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다. 지금의 고난이 있지만 내일의 축복이 보장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의 괴로움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의 약속은 큰 위로가 된다.

 

소망이 없으면 사람은 사는 의미가 없다. 소망은 생명이다. 부모 없이 자란 청소년들 중 범죄를 행하는 대부분은 소망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소망이 없는 자는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살아간다. 소망은 사람을 윤택하게 하는 것이다. 소망이 어디에서 나오는가? 소망은 복음에서 나온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약속된 구원의 축복을 바라보는데서 소망이 나온다. 소망을 가진 자가 하나님의 위로를 바라보게 한다.

 

소망을 얻으려고 피해가는 자들에게 위로가 있다고 했다. 위로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지만 이를 받기 위해서는 우리의 노력이 필요하다. 큰 안위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해가는 자가 얻을 수 있다. 피해간다는 말 속에는 도피성으로 피해가는 죄인의 모습이 담겨 있다. 위험을 깨닫고 안전을 향해 목숩을 다해 달려가는 적극적 모습이 담겨 있다. 소망을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달려가야 한다.

 

도피성(35, 19, 20:7)의 문은 항상 열려 있다. 소망을 가지고 위로를 받기 위해 그리스도께로 달려가는 길은 항상 열려 있다. 도피성은 모든 자유를 다 버리게 하지만 그리스도께로 가면 모든 것을 얻는다. 우리는 소망을 가지고 이 안위를 얻기 위해 달려가야 한다. 그리스도께로 가면 큰 안위를 얻는다(딤전 6:12). 잠시 환난을 받는다고 해도 낙심할 필요가 없다.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게 이루게 하시기 때문이다(고후4:17). 다윗은 군급하였으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다(삼상30:6). 세상의 것들도 안위를 주기는 하지만 그런 것들은 강력한 반대애 부딪치면 곧 무너진다. 그러나 하나님의 맹세는 우리에게 흔들림이 없는 견고한 위로를 준다. 하나님의 안위는 어떠한 반대도 극복한다.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과 같다. 닻은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킨다. 닻은 요동하는 바다 위에서 배를 지탱해 준다. 이와같이 인생의 고통의 폭풍우가 불 때, 유독 두려움이 있을 때 주님의 닻을 이용하므로 안전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이 닻은 견고하다. 튼튼하다. 어떤 반대에도 넘어지지 않는다. 닻 없는 배가 필요 없듯이,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를 생각할 수 없듯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소망이 없이는 진정한 위로를 받을 수 없다. 예수님은 이 소망으로 인하여 휘장 안으로 들어가셨다. 소망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하늘 나라로 들어 가셨다는 말이다. 이 소망을 온전히 이루고 큰 안위를 주시기 위해서 소망의 닻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친히 천국으로 들어가셨다. 이것을 확증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맹세로 보여주셨다.

 

3. 오래참는 자가 복을 받는다(15).

 

하나님의 맹세의 세 번째 내용은 오래 참는 자가 하나님께서 맹세하신 복을 받는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오래 참았다. 모든 난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으며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을 믿고 기다렸다. 22장에서 약속하신 것을 이루는 과정에서 175세까지 기다렸다(25:7).

 

성도는 하나님의 섭리를 오래 참고 기다려야 할 필요성이 있다. 사단의 공격도 오래 참아야 한다. 불경건을 미워함으로 생기는 핍박, 중상, 모략, 잔인함을 참아야 한다. 자기에게 거역하는 죄인들을 참아야 한다. 시험과 유혹이 있어도 참아야 한다. 인내하는 과정에는 반드시 시험과 유혹이 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믿고 바라고 참고 기다려야 한다. 인내는 한 순간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성취될 때까지 참아야 한다. 아니 성취된 후에도 참아야 한다.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믿음과 순종 안에서 오래 참으면 틀림 없이 약속의 충만을 누리게 된다. 믿음의 사람은 이 세상에서 실재로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보지 못한다 할찌라도 마치 그 약속을 이미 얻은 것 같은 위로를 얻게 된다.

 

인내는 주님의 약속에 대한 확신 속에서 나온다. 약속을 받은 사람이 확신 속에서 인내한다. 이것이 없으면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느냐는 꾸지람을 얻게 된다. 기도하다가 응답을 받은 후에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이 주신 확신을 의심하면 안된다. 기도 후에 확실성을 의심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약속은 지연되기도 한다. 부족한 내 경험으로 볼 때에도 지연되는 것들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반드시 이루신다. 내 방법, 내 때가 아닌 하나님의 방법, 하나님의 때에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반드시 이루실 하나님을 믿고 기다리는 자가 반드시 성취를 보게 된다. 아브라함이 약속을 받은 것도 25년이 지난 후였으며, 다윗도 기름부음을 받은 후에 수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있었다. 정하신 때가 되어야 이루어진다. 다만 응답될 때까지 스스로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진인사 대천명이란 말을 기억하기 바란다.

 

아브라함은 약속을 받았다. 약속의 씨가 실재적으로 이루어지는 은혜도 있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그 약속에 대한 보증으로 영혼 속에 하나님의 복락을 누렸다. 죄악 슬픔의 세상을 떠나서 더욱 철저하게 하나님의 복락으로 들어갔다. 이제 하나님의 뜻이 완전하고 끝 없는 복락과 영광 속에서 온전히 이루어지는 바 부활시에 그 온전한 것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맹세를 통해서 이것을 이루셨다.

 

맹세를 이루신 멜기세덱(20)

 

예수님은 하나님의 맹세를 구체적으로 이루신 분이시다. 그 일을 이루심에 있어서 레위 족보가 아닌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았다. 인간의 족보를 따른 분이 아니심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휘장으로 앞서 들어가셨다. 만민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리신 하늘의 지성소로 들어가셨다. 구약의 대제사장만이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지성소로 들어갔는데 신약의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하늘로 들어가셨다. 누구도 처리할 수 없는 일이기에 친히 앞서서 처리하셨다.

 

그리스도께서 휘장 가운데 들어가신 것은 단지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온 교회를 같은 영광으로 인도하시려고 앞서 들어가셨다. 나이와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모든 믿는 자들을 위해 앞서가셨다.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를 구체적으로 이루셨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축복이 있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소망 가운데 살게 하시고 그 소망으로 하여금 영혼이 튼튼하게 살 수 있도록 붙잡아 주시기도 하시며 큰 소망 가운데 구원에 이르도록 하기 위하여 반드시 복을 받게 하신다(8:24,25참고).

 

예수님은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셔서 들어가셨다. 그의 들어가심은 우리를 위하심이다. 예수님의 들어가심은 단독 사건이 아니라 우리도 들어감의 선봉이시다. 틀림 없이 우리를 보호해 주시고 온전한데로 이끌어 주신다. 우리도 그 곳으로 들어갈 수 있다. 우리는 그를 따라야 한다. 그 길을 가야 한다. 주님께서 보호해 줄 것이다. 따르는 것은 우리의 의무다. 따르는 데는 고통이 있다. 그러나 그 길에는 영광이 있다. 우리의 소망과 신뢰되신 분이 휘장 가운데로 들어갔는데 우리도 그 곳으로 들어가야 한다.

 

결론을 맺는다.

 

영원불변하신 하나님의 맹세는 우리에게 복주시기 위한 것이었다. 소망을 주시기 위한 것이었다. 위로를 주기 위한 것이었다. 오래 참는자에게 복을 주신다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이루어 주셨다. 우리를 위해서 주신 하나님의 맹세를 바라보면서 소망과 인내 속에서 오래 참음으로 잘 견디어 나가면서 은혜에 보답하는 성도들이 되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