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히브리서

[히 6:9] 하나님께서 잊어버리지 않는 것

'코이네' 2024. 2. 27. 21:06

 하나님께서 잊어버리지 않는 것 

6:9-12

 

 

지난 시간에는 타락하고 배교한 자들을 꾸중하는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신령한 것을 맛보고서도 그 안에서 살지 못하고 떠나가는 사람은 다시는 구속함을 받을 수 없기에 그들에 대한 꾸중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계속해서 꾸지람만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비록 꾸짖기는 하였지만 이제 그들이 구원에 더 가까이 이르렀음을 확신하면서 위로의 말씀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배교자의 처참한 멸망을 선포한 것으로 그치지 않고 위로의 말씀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초보인 그들을 계속해서 꾸짖으면 오히려 역효과가 일어날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9절에서 사랑하는 자들아라는 부드러운 말로 본문을 시작을 합니다. 아직도 성숙하지 못한 약한 양떼들을 돌보는 사랑스런 목자의 음성을 연상하게 해 줍니다. 약한 그들이 두려움과 슬픔으로 절망할까봐 염려가 되므로 부드러운 말씀으로 소망을 더해줍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 속에 있는 칭찬할만한 것들을 드러냅니다. 비록 약하지만 그래도 유대인보다는 나은 것을 확신하면서 또한 구원에 더욱 더 가까이 이르른 것을 확신하면서 부드러운 말씀으로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머무르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면서 초보를 버리고 더욱 더 성숙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실천하면서 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면 그것을 따르게 될 것이고 그것을 따르다보면 그 신앙은 더욱 더 성숙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심중에 깊이 박히는 얘기를 들었을 때나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 상황이나 깊은 감명을 받았던 사건들을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특히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는 평생을 두고 잊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경우에는 어떤 사건을 잊지 않고 기억하실까요? 물론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시기에 모르는 것이 없으시지만 특별이 성도들에 대해서 잊지 않고 기억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잊지 않고 기억하시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1. 성도들의 행위를 잊지 않으십니다(10).

 

하나님께서 잊지 않는 것은 성도들의 행위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행위는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서의 행위가 아닙니다. 사람은 타락한 이후에 전적으로 무능력해졌기 때문에 스스로 어떤 절대적 선행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어떤 행위도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람의 어떤 행위도 구원에 이르는 전제 조건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보시고 기억하시는 행위는 구원에 이르는 행위가 아니라 구원받은 성도가 믿음으로 사는 행위를 말합니다. 행위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믿음의 결과입니다. 믿음을 가진 자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모든 행위를 말합니다. 행위가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기에 하나님께서는 행위가 없는 믿음을 인정해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성도의 행위를 기억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행위를 기억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성실성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불의치 않으신 분입니다. 성실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충성한 자에 대해서는 상급을 주고 불의한 자, 게으른 자에 대해서는 책벌을 하십니다. 이것이 제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의 행위를 기억하고 계셔야만 합니다. 그 행위를 기반으로 하여 이미 언약하신대로 축복과 저주를 더하십니다. 언약으로 약속하신 것을 지키시는 하나님은 변치 않으시는 진실하신 분입니다(요일1:9, 3:6, 1:6).

 

하나님께서 기억하는 우리의 행위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내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 자체를 보시기도 하지만 그 행위가 무엇에 근거한 것이며, 그 행위를 이루는 과정이 어떤 것인가를 더욱 중요하게 보십니다. 세상에는 선을 행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선이 모두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기억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사랑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것들이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것들입니다. 자기의 양심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명예를 위한 것도 아닙니다. 자기 칭찬을 받기 위해 하는 사랑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이름과 권세를 드러내기 위한 사랑이어야 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미명 하에 자기의 유익을 찾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도용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자들은 온전치 못합니다. 헤롯은 마땅히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가로채다가 충먹어 죽었습니다.

 

저도 가끔 그런 유혹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말씀을 준비할 때는 잘 풀리지 않아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고민하면서 기도하다가 가까스로 풀릴 때도 있고, 어떤 때는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강단에 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전하는 도중에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가르치는 도중에 풀리기 시작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이 제대로 선포됩니다. 말씀이 선포되는 중에 은혜가 넘치는 부분이 있다면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빼면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가끔가다가 성도님들이 은혜받았다고 말을 하면 그 말을 온전히 하나님께 돌려야 하는데 마치 내가 무엇을 잘해서 한 것처럼 착각을 하게 됩니다. 곧바로 그 마음을 지워버리기는 하지만 이것이 바로 제가 받는 유혹입니다. 사람들은 어려울 때 하나님을 찾다가 그 문제가 잘 해결되면 마치 그것이 자기의 무슨 공로인 것처럼 생각을 합니다. 자식의 문제, 입시의 문제, 직업의 문제, 사업의 문제, 결혼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구하여 성취된 후에는 기도할 때의 마음은 사라지고 다른 마음들이 가득찰 때가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을 드러내는데 실패합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께서 상주시기 위해서 기억하는 것들에서 제외되는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기억하시는 행위 중에 꼭 필요한 것은 그 속에 사랑이 들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입니다. 의무로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마치 부부간의 관계와 부모 자식간의 관계가 의무 보다는 사랑이 앞서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모든 행위는 의무감 보다는 사랑이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믿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면 사랑은 이 땅에 평화를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상대적 사랑이 아닌 절대적 사랑이어야 합니다. 복음에서 나오는 사랑 이외의 것은 절대적 사랑이 아닙니다. 오직 복음과 함께 하는 사랑이 있어야 하나님은 그 행위를 기억하십니다. 사랑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사랑은 믿음의 결과입니다. 사랑은 성도를 서로 연결시켜주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섬김이 있어야 합니다. 디아코니아의 개념이 바로 서 있어야 합니다. 디아코니아란 철저한 섬김입니다. 섬김이 없는 사랑은 거짓입니다. 지치지 않는 봉사가 사랑을 온전케 합니다. 사랑의 섬김은 예수님의 사역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여기지 않으시고 이 땅으로 오셨습니다. 인간과 함께 하면서 고난을 당했습니다. 급기야는 당신의 몸을 십자가에서 찢으시므로 온전한 봉사를 이루었습니다. 이것을 본받는 사랑의 행위를 하나님은 기억하십니다.

 

성도를 향한 사랑의 섬김이 있어야 합니다. 고난을 당하는 성도를 향한 사랑의 섬김이 있어야 합니다. 감상적인 섬김이 아니고 칭찬을 듣기 위한 섬김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입은 섬김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섬겨야 합니다. 함께 사랑을 나눈 하나님의 자녀를 섬겨야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물질로 섬기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슬픔을 대신 지는 위로의 방법으로 섬겨야 합니다. 이미 섬겼으나 이제도 섬겨야 합니다. 이런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상급이 있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사랑의 섬김에는 반드시 수고가 따른다는 것입니다(요일3:16-19, 4:7-11). 사랑의 수고가 없으면 복음의 참된 유익이 없습니다.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수고를 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수고를 동반해야 합니다. 자기의 체면을 버리는 수고, 자기의 이익을 버리는 수고, 자기애를 버리는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을 버리는 수고가 없이는 참 사랑이 실천될 수 없습니다. 수고가 없는 것은 사악한 것입니다. 수고의 행위가 없으면 모든 믿음은 헛것이 됩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일들은 수고가 없이는 안됩니다. 수고가 동반된 사랑의 행위를 하나님은 반드시 기억하시고 마지막 날에 하늘의 상급으로 채워주실줄 믿습니다.

 

 

2. 소망의 풍성함을 잊지 않으십니다(11).

 

소망의 풍성함은 하나님께서 잊지 않으시는 두 번째의 것입니다. 비록 이 말씀이 기록되기는 저자의 간절한 요구로 기록이 되었지만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소망이 풍성할 것을 간절하게 원했습니다. 기자의 원함은 곧 하나님의 원함이었습니다. 성도들의 성숙을 위해서 간구하고 있는 목회자의 정신을 볼 수 있습니다. 참된 목자는 양들이 풍성한 꼴을 먹으며 삶의 윤택함을 누리면서 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출애굽기 3232절에서 차라리 자기의 이름이 생명책에서 제해지는 일이 있더라도 이스라엘 백성의 죄의 용서를 하나님께 구했습니다. 단순한 소망이 아닙니다. 목회자의 간절한 열망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성도들의 소망의 풍성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기억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소망의 풍성함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소망은 믿음의 열매입니다. 소망을 낳지 않는 믿음은 순수하지 않은 믿음입니다. 소망은 고통을 즐거워하며 승리하게 합니다. 소망은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게 합니다. 소망은 목적하는 것을 이루려는 강한 기대감이나 열렬한 소원입니다. 소망은 믿음에서 나옵니다. 약속하신 이를 바라보게 합니다. 모든 어려움과 낙담케 하는 것을 뚫고 나가게 합니다. 고통의 파도가 영혼을 덮으려 할 때도 쓰러지지 않도록 붙들어줍니다. 이러한 생활이 넘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소망의 풍성이 어느 특정인에게 머무를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소망의 풍성이 각 사람에게 있을 것을 원하십니다.

 

소망의 풍성함을 위해서는 동일한 부지런함이 필요합니다. 소망의 풍성함을 유지하는 비결은 바로 부지런함에 있습니다. 로마서 1211절에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했습니다. 부지런함과 소망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부지런함을 통해서 영적 기능이 힘을 얻습니다. 믿음은 부지런해야 갖습니다. 게으르면 있는 것 까지도 빼앗깁니다. 육의 일에만 부지런하고 영의 일에 게으른 것도 병입니다. 병 중에 최고의 병입니다. 부지런함은 소망의 풍성함을 증진시켜 줍니다. 부지런함은 소망이 약해지지 않도록 모든 죄를 예방시켜 줍니다. 우리는 상급을 받도록 부지런해야 합니다. 사탄의 공격을 피하도록 부지런해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을 공급받도록 부지런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구원받은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서 부지런해야 합니다. 부지런한 자가 소망의 풍성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소망의 풍성함은 끝까지 있어야 합니다. 힘을 다해 달려가야 합니다. 중간에 휴식이 허락되지 않습니다(딤전6:12). 앞의 것을 잡으려고 부단히 달려가야 합니다(3:13). 아직 최종적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더 열심히 달려가야 합니다. 처음에 가졌던 사랑과 행위를 버리면 그 동안에 했던 모든 것이 다 수포로 돌아가게 됩니다. 우리의 생명이 다하기까지 소망의 풍성함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3. 믿음의 인내를 잊지 않으십니다(12).

 

하나님이 잊지 않으시는 세번째는 성도들의 믿음의 인내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인내를 요구하십니다. 처음에는 잘 참지만 끝까지 참지 못하므로 무너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예수님은 칼을 들고 흥분한 제자에게 말씀하시기를 이것까지 참으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의 선진들은 잘 참았습니다. 참지 못하면 실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의 인내를 위해서는 게으르지 말아야 합니다. 최선을 다하는 부지런함이 필요합니다. 게으름은 신앙을 무디어지게 합니다. 무디어진 칼이 제 기능을 다 발휘하지 못하듯이 무디고 태만한 영혼은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생활을 하지 못합니다. 육신의 일을 도모하기에만 부지런할 것이 아니라 영혼의 일들을 위해서 부지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믿음의 인내입니다. 믿음은 인내로 나타나며 인내는 믿음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이 없을 때는 실수합니다. 아브라함도 믿음의 인내를 하지 못하므로 이스마엘을 낳는 실수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인내를 가지고 하나님을 따랐을 때 선물을 기업으로 받았습니다. 믿음의 조상들은 믿음의 인내를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창문은 햇빛의 제공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창문을 통해서 햇빛이 들어오듯이 믿음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하나님은 믿음을 통해서 역사를 이루십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믿음의 인내를 기뻐하시지만 우리의 이러한 믿음의 인내를 통해서 주변의 사람들이 기뻐하고 소망을 갖게 됩니다.

 

 

이제 말씀의 결론을 맺겠습니다.

 

이러한 모든 일들은 확신에서 나옵니다. 더 좋은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는 사람들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풍성함과 믿음의 인내를 가지고 살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산 믿음의 조상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업으로 받았습니다. 그들의 생활은 우리의 본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그러한 삶이 우리의 후손에게 본이 되도록 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기억받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확신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을 바라보는 자는 확신을 갖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가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순간순간 주변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에 기뻐하고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께 기억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끝까지 수고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