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히브리서

[히 6:1] 초보를 버립시다

'코이네' 2024. 2. 27. 21:08

초보를 버립시다 

6 : 1 - 8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인들의 영적 나태함을 지적한 바가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유대교로 다시 돌아가려고 하는 사람들의 성숙하지 못한 부분을 초보적 단계라로 하였습니다. 유대교는 기독교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차이가 납니다. 하지만 이것은 유아적 단계와 더욱 성숙한 단계로 비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그림자와 실체의 관계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유대교적 단계에 머무르고 있는 것은 분명 초보적 단계였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것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히브리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그냥 간과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것을 빨리 깨닫고 더욱 더 완전한 곳으로 나가야 할 신앙생활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신앙 연조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신앙도 더욱 더 성숙해져야 함은 두말할 나위 없는 사실입니다.

 

토끼와 거북이의 얘기에서 발견할 수 있듯이 실력이 있다고 나태해 있는 사람은 성숙의 길로 나갈 수 없습니다. 이웃 나라 일본에서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구별이 없이 능력별로 월급을 주지만 스위스에서는 똑 같이 월급을 준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몸은 불편해서 같은 양의 일을 할 수는 없지만 그 만큼 더 노력을 해야 하기에 노력의 대가를 인정해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많은 양의 성취에 있지 아니하고 그 일을 하는 사람의 마음과 연관이 있습니다. 다만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아서 스스로 노력하며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자만이 더욱 더 성숙의 길로 나갈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14절에서 고백하기를 나는 내가 아직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위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고 하였습니다. 초보를 버리고 나가는 참된 자세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절대적인 것과 상대적인 것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절대적인 것이라고 믿고 있으나 그 중에는 상대적인 것으로 가득차 있는 것이 수 없이 많이 있습니다. 수학도 그렇고 과학도 그렇습니다. 절대 불변하신 하나님을 상실하면 사람은 상대적인 것을 따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초보적인 단계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계속되는 훈련으로 초보를 면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려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초보를 버릴 수 있겠습니까?

 

1.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아야 합니다(1, 2).

 

예수를 처음 믿을 때 기본적으로 배우게 된 신앙의 도리인 초보적 단계를 이제는 넘어서야 합니다. 초보를 버려야 합니다. 버린다는 것은 쓸모 없는 것으로 여긴다는 말이 아닙니다. 더욱 더 완전한 곳으로 나간다는 말입니다. 초보를 버려야만 성령의 충만한 곳으로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초보의 문제점은 자신이 초보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자신의 신앙이 온전하다고 하는 사람의 신앙은 항상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초보를 버리는 길은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않는데 있습니다.

 

터를 다시 닦지 않는다는 것은 유대교로부터 가지고 있는 것을 쓸데 없이 반복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터는 집을 떠받치고 있지만 바닥을 발라버리면 보이지 않습니다. 기독교가 오기 전에는 유대교가 터와 같은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체가 온 후로는 모형은 더 이상 빛나는 것이 되지 않습니다. 몽학선생일 뿐입니다(3;24). 다시 닦는 것은 실체를 버리는 것이요, 유대교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터를 다시 닦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죽은 행실을 회개해야 합니다.

 

초보적 신앙을 버리는 길은 회개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첫 설교는 회개하라는 말로 시작이 됩니다. 세례 요한의 첫 설교도 역시 회개하라는 말로 시작이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의 성격상 더러움을 가지고는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13:4,5).

 

회개할 것은 죽은 행실입니다. 죄악으로부터의 회개가 아닙니다. 초보도 죄악으로부터의 회개를 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성령에 의해서 나오는 행동이 아닌 것을 회개하라는 말입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는 그들의 육체를 정결케 할 뿐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그들의 양심을 죽은 행실로부터 깨끗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 있는 사람이 죽은 행실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심각한 죄악의 결과일 뿐입니다. 이것을 회개하라는 말입니다.

 

죄를 자주 자주 짓고 다시 반복해서 회개하는 사역을 하는 것도 역시 잘못된 것입니다. 이런 것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죄도 정복하고 죄의 유혹도 뿌리치고 시험에서 승리하여 영광과 감사를 하나님께 돌리는데까지 나가야 합니다.

 

이스라엘 안에는 포로시대를 통해서 우상 섬기는 죄를 배웠던 것을 청산하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그들의 믿음은 실상보다 형식이 더 많았습니다. 이런 모든 죽은 행실을 버리고 생명에 이르는 회개를 해야 합니다.

 

2.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예수 안에 있는 믿음입니다(2:5, 딤전 3:13). 믿으면 영생이 있지만 안믿으면 멸망이 있을 뿐입니다(3:16, 16:16).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복음의 모든 복락들은 믿음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 믿음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입니다. 국가적 신앙 대신 영화롭게 된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참고적으로 회개와 신앙의 관계에 대해서 설명하고자 합니다. 회개한 사람이 믿음을 갖는 것일까요? 아니면 믿음을 가진 사람이 회개하는 것일까요? 회개와 신앙의 관계도 중요합니다. 믿음이 있는 자가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한 자가 신앙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회개한 자가 중생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한 자가 회개하는 것과 같습니다. 한번 이런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어린 아이가 태어난 후에 웁니까? 아니면 운 다움에 태어납니까? 그렇습니다. 영적으로 태어난 사람만이 울 수가 있습니다. 먼저 중생한 자가 회개할 수 있고, 회개한 자가 그 후에 신앙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 서정 9단계를 보면 소명, 중생, 회심, 신앙, 칭의, 양자, 성화, 영화, 견인으로 이어집니다.

3. 세례에 대한 바른 개념을 가져야 합니다.

 

세례는 씻는 의식입니다. 세례를 받는 이유는 첫째는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부활한다는 것이요(6:3-5), 둘째는 죄 씻음의 표시요(22:16), 셋째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이며 예수로 옷입는 표시입니다(3:26,27). 예수님도 세례를 받으셨습니다(3;12-17). 초대 교회는 사람이 교회에 들어올 때 예수님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고 들어왔습니다. 더러운 자는 하나님께 나올 수 없으며 깨끗케 한 후에라야 나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한 번만으로 족합니다. 그런데 당시의 사람들 중에서 들락날락하며 세례의 의미를 퇴색시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들어와 세례를 받은 후에 나갔다가 다시 또 들어오면 다시 고백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런 것들은 교훈의 터를 다시 닦는 행위였습니다.

 

4. 안수에 대한 바른 개념을 가져야 합니다.

 

성경에는 안수에 대한 기록이 여럿 있습니다. 죄를 전가시키기 위한 안수가 있습니다(4;14, 15, 24). 축복과 성령을 받기 위한 안수도 있었습니다(8:17, 19:6). 특별한 임무를 맡기기 위한 안수도 있습니다(34:9, 6:6, 13:3).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성령을 받는 비결의 안수가 아닌 동질성의 표시로서의 안수입니다. 대제사장은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사람이 지은 죄를 동물에게 전가시키기 위해서 안수를 했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동물에게 안수하는 대신 친히 죄악들을 짊어지셨습니다. 이것을 바로 알지 못하는 것은 터를 다시 닦는 것입니다.

 

5. 부활에 대한 바른 개념을 가져야 합니다.

 

유대교에도 부활 사상이 있었습니다(24:14,15, 11:24). 그러나 바리새인이 말하는 부활과 유대인이 믿는 부활과 예수님이 말씀하신 부활은 그 의미가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은 자 가운데서의 부활입니다(9:9-10). 죽은 자의 부활이 아닙니다. 이것은 전격적인 부활을 말합니다. 악한 자의 부활보다 앞서 구속받은 자의 부활입니다.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부활의 신앙은 무척 중요합니다. 부활이 없으면 복음과 믿음이 헛것이 되기 때문입니다(고전 15:13-19).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리신 것과 같이 우리도 분명히 살리실 것입니다(고전 6;14).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을 알리는 첫 열매였습니다(고전 15:20). 부활신앙은 우리의 신앙의 기초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모든 것이 다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흔들리면 안됩니다. 부활 신앙을 가진 자는 생활의 변화가 있게 됩니다.

 

6. 심판에 대한 바른 개념을 가져야 합니다.

 

유대교도 심판을 믿었습니다(12:14). 그러나 그것은 영원한 심판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말하는 심판은 영원한 심판입니다. 계시록 2011절로 25절에 보면 불못심판이 있을 것이라 했습니다. 이 심판은 행한대로 갚으시는 보상의 심판입니다(고후5:10). 심판이 있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이 세상에서 함부로 살 수 없습니다. 심판을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초보적인 사람들입니다.

 

7. 완전한 곳으로 나가야 합니다(2).

 

이상으로 언급한 여섯 가지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유대교의 교훈을 따르는 행동들은 모두 터를 다시 닦는 일들입니다. 이것은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이제는 더 성숙한 곳으로 나가야 합니다. 계시된 진리 속에 있는 지식의 풍부함 속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계시를 견고히 붙들어야 합니다.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그 분께 온 시선을 집중시켜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인격의 완전한 곳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충만한 영광을 통해서 나타난바된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성육하신 아들의 인격을 통해서 계시를 온전히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리스도의 얼굴에 온전히 드러났습니다. 이것을 바로 체험하는 것이 완전한 곳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목할만한 일은 여기에서 나아가자는 말은 끌려간다는 말입니다. 마치 배가 돛을 달고 바람을 받으며 나가는 모습을 연상케합니다. 이것은 자의로 나가는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완전한 곳으로 나가는 것은 바로 성령의 힘 때문입니다. 3절에 이르기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고 했습니다. 완전한 곳으로 나가기까지는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2. 과거 지향적 행위를 버려야 합니다(4-6).

 

예수를 믿은 후에 변화된 생활을 하다가 예전의 일들이 그리워서 다시 돌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높은 특권, 독특한 은총을 입었으나 그러한 기회들을 선용하지 못하고 부패시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런 사람들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를 지나면서 애굽의 생활을 그리워하면서 불평하는 생활을 했던 것을 보면 지금 우리의 생활이라고 해서 다를 바가 없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홍해 바다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향하지 않고 다시 홍해를 찾아온다고 생각해 보십시요.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그들 중에 그런 사람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 생활을 하려고 애를 쓰기는 하는데 과거에 살던 향락을 추구하던 삶을 잊지 못해 늘 그리워하면서 거듭 끌려가는 생활을 했습니다. 과거 지향적 사고와 행위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런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나는 무슨 은사를 받았는가를 생각해보고 그 은사를 위해서 어떻게 살았는가를 돌이켜보시기 바랍니다.

 

1. 변화된 삶 속의 체험된 성도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체험된 성도의 변화된 삶을 볼 수 있습니다. 다섯 가지를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런 특권을 누리고 사는 것은 축복입니다.

 

첫째로 비췸을 얻었습니다. 히브리 성도들은 흑암에서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던 이방인과는 달리 그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안에서 기이하고 영광스러운 비췸을 얻었습니다(4:16). 빛은 희망입니다. 빛은 생명입니다. 흑암의 권세에 묶여 있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빛은 참 생명을 주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빛으로부터 비췸을 얻었습니다.

 

둘째로 하늘의 은사를 맛보았습니다. 그들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은사를 맛보았습니다. 그들은 어느 정도 계시의 긍휼을 이해했습니다. 성령께서 그 본성에 빛을 비추시면 중생하지 못한 사람이라 할찌라도 하늘의 은사를 맛볼 수 있습니다(4:10). 가야바를 감동시켜 그리스도를 예언하게 한 것도 그런 것 중의 하나입니다(11:51).

 

셋째로 성령에 참여하였습니다. 이 부분의 해석에 있어서는 약간의 문제가 있습니다. 골로새서 112절과 베드로후서 14절의 말씀으로 보건대 성령에 참여한 자는 반드시 구원을 얻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나중에 타락했다는 것을 볼 때 이 말씀은 모순을 지니게 됩니다. 초대교회 시절에는 반드시 구원받은 자가 아니라 할찌라도 이러한 성령의 역사에 참여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넷째로 하나님의 선한 말씀을 맛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선한 말씀은 메시야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레미야는 이 약속을 선한 말씀으로 묘사했습니다(33:14). 말씀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1;1).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의 신실한 성취를 체험했습니다.

 

다섯째로 내세의 능력을 보았습니다. 이 세상의 것을 초월한 하늘의 시민이 누리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이적적인 사역의 놀랍고도 영광스런 일들을 친히 목격하였습니다. 이것은 대단한 특권이었습니다.

 

이런 은사는 성도로서 한 번쯤은 체험해야 할 것들입니다. 이런 은사를 받을 수 있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당시의 사람들은 이런것들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의롭다함을 입었다든지 죄용서함을 받았다든지 순종의 열매가 있다든지 하나님에 의해 열납되었다는 말이 없습니다. 이들은 그런 체험을 하고서도 변화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체험한 것이 진정한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한 번 맛본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의 체험은 중생한 자의 체험이 아니란 추측을 하게 됩니다. 중생하지 못한 자들 중에도 이런 체험에 동참하는 자들이 여럿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참성도가 아닌 자에게 이런 다섯 가지의 독특한 일이 일어나게 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부차적인 사역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일을 통해서 하나님은 첫째로 은혜의 탁월성이 무엇인가를 보여줍니다. 악인과 대조를 하므로 선택받은 자의 탁월한 모습이 무엇인가를 보여줍니다. 둘째로 인간 본성의 부패가 어떠한가를 보여줍니다. 이런 은사를 보면서 양심의 가책을 받도록 하십니다. 셋째로 부패한 본성이 일어나서 거듭 죄짓는 것을 제한하기 위해서입니다. 넷째는 선택받은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때에 따라 형식적인 사람을 통해서도 교회가 교회되도록 만드십니다. 그들이 드리는 헌금으로 복음 전파의 사역을 할 수 있습니다. 아더 핑크는 말하기를 만일 지상에 있는 교회가 중생하지 못한 사람을 다 내어보낸다면 설교자의 생활비를 제대로 줄 교회가 한 교회라도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진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도 하나님은 잠깐 동안 은사를 비춰주신 것은 하나님의 부차적 사역이었습니다.

 

2. 과거로 돌아가는 생활

 

히브리 성도들 중에는 이와같이 특별한 은사를 체험했지만 선택받은 자로서 참여한 것이 아니라 단지 맛보는 것으로 구경한 자들이었기에 미련 없이 과거의 생활로 돌아가는 일들이 속출했습니다. 한번 은혜를 체험한 사람이 과거의 생활로 돌아갔습니다. 타락했다는 말입니다.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타락이 무엇입니까? 타락은 완전히 넘어진 것을 말합니다. 기독교에 업적을 쌓고 배교하여 그리스도를 져버린 변절을 말합니다. 기독교의 모든 특징적인 진리와 원리들을 전적으로 버리고 돌아서서 거짓 종교로 돌아서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베드로의 부인과 같이 일시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 아닙니다. 의도적이고 철저하고 최종적으로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행위를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밟고 언약의 피를 부정하게 여기고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흉악범으로 보는 것과 다를바가 없습니다.

 

타락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는 그들의 신앙고백이 외면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신앙고백이 없는 자들은 때가 되면 타락하게 되어 있습니다. 또 다른 이유는 과거에 대한 집념 때문입니다. 과거의 생활이 그리워서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돌아가기 때문에 타락의 현상이 나타납니다.

 

타락하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됩니까? 6절에 보면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고의적으로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에게는 용서의 길이 없습니다. 회개는 마음의 변화로서 이것은 양심이 스스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 일어나는 변화인데 성령께서 그를 인도하지 않으시면 그에게는 회생의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은혜받은 자도 타락할 수 있다고 합니다. 베드로후서 220절로 22절에 보면 씻었다가 다시 더러움에 빠지는 돼지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칼빈주의자들과 알미니안주의자들이 한참 논쟁을 벌린 부분이기도 합니다. 칼빈은 그의 5대교리 중 마지막을 성도의 견인이라 하여 한번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결코 타락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한 말씀들은 타락할 수 있음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 사람들이 진정으로 구원의 반열에 들어 섰다가 타락한 것이 아니라 그들 속에 있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으로 인해서 잠시 성령의 역사를 체험했을 뿐입니다(1:18,19). 이 말씀은 교회 안에도 중생하지 못한 자가 많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한번 나갔다가 다시 들어온 자는 타락한 것이 아니라 잠시 실족하여 범죄하였던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와같이 과거의 생활로 돌아가는 행위는 초보의 생활을 면치 못합니다. 이런 생활을 버릴 때에라야 비로소 초보를 면할 수 있습니다.

 

3. 열매를 맺으라는 말입니다(7,8).

 

초보를 벗어버리라고 말씀하시면서 열매를 맺을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초보를 벗어버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신앙 생활에는 두 부류가 있습니다. 열매를 맺는 자와 열매가 없는 자입니다. 성숙한 성도는 때를 따라 신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1. 비를 흡수해야 합니다.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비를 흡수해야 합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해야 합니다. 비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비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5:45). 비를 흡수하는 땅은 사람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비가 위로부터 오듯이 말씀의 은혜는 위로부터 옵니다. 비가 채소를 자라게 하듯이 복음은 백성으로 하여금 열매 맺도록 합니다. 비는 땅의 종자로 싹이 나게 하듯이 말씀은 성령의 도구가 되어 하나님의 택한 사람을 살립니다(3:5, 1:18). 비는 하나님이 주십니다. 은혜도 하나님이 주십니다. 필요에 따라 늦은비와 이른비를 주십니다. 주실 때 주십니다. 은혜도 하나님께서 필요하신 때에 때를 따라 주십니다. 적당한 비는 열매를 풍요롭게 맺도록 합니다. 하나님의 적당한 은혜는 성도를 풍요롭게 만들어 주십니다.

 

2. 합당한 열매가 있습니다.

 

열매가 있느냐 없느냐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열매가 얼마나 합당한 것인가에 있습니다. 이사야 54절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리신다고 했습니다. 열매를 맺되 하나님께서 기다리시는 열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성령의 열매는 갈라디아 522절의 말씀과 같이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고 했습니다. 이런 열매들이 필요합니다.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해야 합니다. 그 말씀을 이해하고 적용해야 합니다. 인내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런 일들을 통해서 열매를 맺는 자들을 하나님은 인정해주십니다. 그들을 향해 부끄러워 하지 않으십니다.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열매를 맺도록해 주십니다(15:2). 상하지 않도록 끝까지 지켜 주십니다.

 

3. 잘못된 열매도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열매를 맺는 자들도 있습니다. 땅도 같고 비도 같은데 열매가 달리 열립니다. 이들은 열매를 맺었다고 좋아하기는 하나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이들은 형식적으로 예배하는 자들이요, 바깥 뜰에서 예배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맺는 열매란 가시와 엉겅퀴라고 했습니다. 자연스럽지 못하고 괴상한 산물을 냅니다. 이것은 완고한 불신자들의 고집스런 결과들입니다. 구체적으로 예를들면 육에 속한 일, 음행, 더러운 것, 우상숭배, 술수, 원수맺는 것등이 있습니다(5:19-21).

 

이들은 소유주에게 필요 없는 열매를 줍니다. 자연을 훼손시킵니다(28:2).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는 자들입니다(3:18, 4:11,12). 이들은 열매가 있느나 결국은 버림을 당합니다. 빼앗깁니다. 저주함을 당합니다. 증오함으로 버림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멸망하도록 내버려둡니다. 누가복음 137절에 보면 찍어버린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결국에는 불사름을 당합니다(22:7).

 

이제 결론을 맺겠습니다.

 

우리는 이제 초신자들이 아닙니다. 기성인이 되었습니다. 이제 초보를 벗어버리고 장년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때 가능합니다. 신앙의 성숙은 하나님의 도움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영적으로 거인이었지만 그것을 자기가 얻은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3:12).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가르치는 자도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고후 3:5).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고 범사에 진리 안에 있는 모든 진보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특별한 은사입니다(3:27). 그러므로 우리는 초보를 면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기 위해서 더욱 더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벧후1:10). 부지런함이 필요합니다.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부지런히 초보를 벗어버리고 성숙한 신앙을 위해서 정진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