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히브리서

[히 6:1] 자의식

'코이네' 2024. 2. 27. 21:10

자의식 

6:1-3

 

 

 

오늘은 신앙을 출발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에 대하여 어떤 자아의식을 가지고 있고 어떤 문제에서 오해와 착각이 생겨나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신자들에게 마땅히 생겨야 하는 성장과 성숙이 어떤 문제에서 방해를 받고 있는 것과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도록 하자.

예수를 믿는데도 불구하고 믿는 사람답지 않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큰 문제이다. 보통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하는 사람들에게 예수 믿는 사람은 적어도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라는 선입관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선입감은 신자들에게 도움이 되기보다는 손해를 끼치기 일쑤이다. 우리가 남에게, 혹은 자신에게 믿는 사람답지 못하다는 말을 들을 때 그것이 개인의 신앙생활에 미치는 영향은 참으로 큰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두 가지 유형으로 살아 버린다.

 

첫째는 내가 예수믿는 사람이 마땅히 되어야 하는 수준을 알고 있는 것만큼 살지 못하는 갈등으로 바로 ‘....인척하는 것으로 해결한다. 기도많이 하는 척, 모든 고민이 없는 척, 믿음 생활을 정당하게 잘하고 있는 척 할 수 밖에 없다.

 

둘째는 웃기지 마라. 예수 믿는다고 해봤자 다 덜렁덜렁하더라. 속이 썩었는데 겉만 번지르하면 뭤하냐. 차라리 나처럼 솔직하게 나가는 것이 더 좋지 않으냐하는 식이다. 이들 중 어느쪽이 낫고 덜한 것이 없다. 둘 다 동일하게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각자의 문제의 해결방법인 것이다. 예수를 믿는 것은 버리지 못하겠고 그 믿는 모습에 스스로 만족스럽지 못하여 그렇게 양쪽으로 풀어 버리고 있는 유일한 자기 위안인 것이다. 엄숙을 떠는 것도 힘을 다하여 발버둥 치고 있는 안간힘이고, 널부러져 있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눈물이 배어나올만큼 안타까운 진심은 바로 뒤에 숨어 있다. “하나님 저는 이만큼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기에 이렇게 이라도 하고 있는 것입니다하는 안타까움이 그 배경이 되고 있다. 널부러져 있는 마음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 제가 이러고 싶어 이러는 게 아닙니다. 깔아져 있는 것을 아닌 척 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진심을 이렇게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하는 진실이다.

 

이런 두 싸움이 사실은 우리들을 괴롭히고 있는 자의식의 갈등이다. 예배를 드리면서, 기도를 하면서 우리는 정당해지고 싶어 한다. 그런데 그러지 못하는데서 괴로움은 시작되는 것이다. 이것은 단 하나의 문제를 오해하는 데서 다음과 같은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신자란 완성된 사람으로 출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신자가 되었다는 것은 완성의 표가 아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고전 1:2)”

하나님의 교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진 성도이것보다 더 아름답고 수준 높은 명칭이 없다. 그러나 다음을 또 보자.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고전 3:1)”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고전 5:1)”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 일을 판단할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고전 6:5)”

바울의 이야기는 너희들은 욕을 먹어도 싼 사람들이다. 부끄러움을 당해 마땅한 자들이다인데 불리워지는 호칭은 하나님의 교회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여진 성도이다.

 

비유로 생각해보자. 거지가 왕자로 오해되어 왕궁에 들어갔다. 그는 기이하게 생긴 옥새를 가지고 어떻게 사용할 줄을 몰라 호두를 까먹었다. 손씻는 물을 마셔 버린다. 그래도 그는 왕자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시궁창 속에서 자란 소년을 생각해보자. 그가 할 줄 아는 것은 악한 말과 거칠고 무례하기 짝이 없는 행동 뿐이다. 그래도 그를 임금이 왕자를 삼았다면 그는 왕자이다. 그의 신분은 어제와 오늘 사이에 하늘과 땅 같이 바뀐 것처럼 바뀌었다. 그러나 그의 수준은 하루 아침에 바뀔 수 없다. 내가 오늘 마땅히 왕으로 살아야 할 부름을 받은 것과 왕으로서 완성되어 있다는 것은 먼거리이다. 분명히 우리는 왕자이다. 신분의 차이가 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을 얻은 모든 사람들이 왕같은 제사장이다. 그러나 위에서 예를 든 것처럼 왕답지않을 수는 얼마든지 있다. 어제까지 살던 버릇을 하루만에 고칠 수 있는가? 침대가 귀하지만 냉바닥에 자는 것이 더 그에게는 편하다. 궁중에서 쓰는 말투보다는 거리에서 쓰는 막말이 더 좋다. 아무리 맛있는 반찬과 밥으로 식탁을 꾸몄어도 그 식탁에 앉는 것이 더 불편하다. 불안하고 이상하다. 그러나 여기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오해거리가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바로 내 자신이 내가 왕자로 끝까지 믿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 바로 왕자답지 않기 때문이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세상 사람들이 나를 대하는 모습이 달라져 있을 뿐이지 나는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다. 이런데서 훨씬 더 버릇이 나빠질 수도 있다. 즉 자신이 명령하면 무엇이든지 복종한다는 것을 알고 망나니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신앙인 가운데는 참으로 망나니가 되는 이들이 많이 있다. 또 하나 이런 면이 있다. 즉 스스로 자조적이 된다는데 무서움이 있는 것이다. 내가 왕자이기 때문에 지금 이런 대접을 받는다고 즉, 하나님이 나를 이 신분으로 세웠기 때문에 지금 이런 대접을 받는구나 생각하지 않고 이 수준이라도 사람들이 굽신거리는구나생각하면 이야기는 복잡해 진다.

 

정당하게 돌아와야 한다. 우리가 누리는 권리와 축복들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신분 때문이지 수준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자. 하나님은 우리에게 신분을 허락하신다. 그의 자녀라는 것을 허락하셨다. 그의 자녀로 허락된 신분에서 우리는 어린 아이로부터 시작되어 장성한 어른으로 가게 되기를 요청받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무엇을 주시옵소서!’만을 하는 때는 영적 유아기이다. 이것을 벗어나는 시기가 또 오는데 그때는 의미를 따지기 시작한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전 생애를 놓고 하나님 앞에 물어야할 나의 신분, 나의 가치, 내 인생의 의미를 묻는 날이 온다. 그때 우리는 이 싸움에 걸려든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과 하나님이 누구시며 그의 자녀에게 요청된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수준이 무엇인가가가 우리에게 밝혀진다.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떻게 의롭게, 거룩하게, 선하게, 아름답게 살아야 하는가가 바로 여기에 명시되어 있다. 그런데 아무리 두드려도 나는 거기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면 문득 이러한 의심에 빠져든다. “나는 혹시 하나님의 자녀로 출생하지 않은 자가 아닐까?”

 

어린 아이는 엄마 아빠가 다 자기처럼 아기로 태어나 오늘까지 성장했다는 개념이 없다. 그래서 할머니는 어른을 낳았는데 엄마는 왜 아이만 낳았는냐고 반문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신자들이 바로 그러하다. “하나님이 왜 나를 목사로 태어나게 해주시지 않았습니까? 라고 묻는다. 누구나 다 갓난 아이로 태어나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 과정에서 분명히 느끼는 하나의 갈등이 있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이 자리에 있게 허락하신 신분에 걸맞은 것을 우리가 갖고 있는 것으로 출발시켜 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 주셨다. 하나님의 은혜로우심과 자비로우심과 선하심과 사랑하심에 비하여 우리는 우리가 그분의 자녀라고 불리워지기에 너무나 부족하다. 그것이 좌절의 근거가 되었던 것은 우리의 오해 때문이다. 그것이 좌절이 되어서는 안된다. 분발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의 자녀로 부르신 것은 우리가 그분의 자녀다운 조건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렇지 않음에도 불러주신 것이다. 우리가 모자란다고 느끼는 부분들은 우리를 좌절로 끌고갈 자리가 아니라 분발로 끌고 갈 자리가 되어야 한다. 완성이 되어 있다면 더 이상 살아있을 필요가 없다. 완성되는 날이 제대날이 되기 때문이다. 여기 이 땅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완성되기 위한 훈련소이다.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은 제대가 아직 멀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데 나아갈찌니라(6: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3:1)”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같은 그런 기초를 또 다듬고 있을 틈이 없다는 것이다. 내 수준으로 내 신분을 확보하겠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자꾸만 아닌 것 같은 것이다.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그들이 누군가? 하나님의 교회요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여진 성도들이다. 잘못했을지라도 그 이름이 취소되지 않는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그 기초를 나의 수준과 능력으로 확보하려 하는 한 평생토록 그것은 확보되지 않는다. “구원이라는 말만 하다가 한걸음도 진전하지 못하고 만다. 우리가 자신이 느끼고 있는 신자답지 못하다는 것은 이제 훈련하고, 고치고 자르고 해서 도달해야 될 목표이다. 하나님 앞에서도 떳떳하고 싶고 믿는 것도 떳떳하게 믿고 싶어 한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을 죄라고 하였다. 떴떳하고자 하지 말라. 차라리 뻔뻔스러워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배짱이다. 우리가 한심한 이 자리를 벗어나기로 하되, 그러나 또 얼마나 떳떳한 지위인가를 감사하자. 우리의 부족함이 우리를 분발시키는 요소가 되는 믿음의 성장을 시작하기로 결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