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시편

[시142:1] 내가 소리내어 부르짖으니

'코이네' 2021. 2. 3. 21:40

내가 소리내어 부르짖으니

성경:시편 142:1-7

 

 

 

19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사람과 가축의 힘은 지구상의 전 에너지의 94%을 차지했었다고 합니다.다시 말하면 사람이나 가축의 힘만으로 모든 일을 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경우는 사람이나 가축의 힘으로 해낼 수 있는 일의 비율은 1% 정도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힘으로 해내던 일들을 기계문명의 힘에 떠넘겨 버렸습니다.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이 비축했던 석유량은 5백만톤이었다고 합니다.그런데 그것은 요즈음의 석유 소비량으로 치면 10일분 정도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그만큼 세상이 달라진 것입니다.

다가올 미래는 그야말로 과학만능시대가 될 것입니다.집 짓는 것,밥 짓는 것,심부름하는 것,심지어 그날 입고 나갈 옷을 선택하는 것 기차표나 비행기표 사는 것 등을 기계가 해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과학의존 비례율이 좋아질수록 인간의 능력은 떨어지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정신력이나 사고력은 점점 퇴화해서 결국 바보들 세상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계가 제 아무리 발달하고 과학문명이 최첨단을 걷는다 해도 사람이 할 일은 사람이 해야 합니다.

오래전 어느 모임에서 산행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산 중턱을 오르고 있을 때 낭낭한 불경 독경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아마 중턱 어느 곳에 있는 절에서 들려 오는 소리였을 것입니다. 나중에 안 일입니다만 녹음테잎을 녹음기에 넣어 들려주는 소리였습니다. 남의 종교 얘기입니다만 그것은 세속화입니다. 불경은 불자가 직접 읽고 독경을 해야 합니다. 중은 드러누워 낮잠이나 자고 녹음기가 독경을 대신 한다면 그것은 본래의 궤도에서 이탈한 것입니다.

 

우리들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십시다. 시인은 본문에서 내가 소리내어라고 고백했습니다.그 뜻은 내가 내 소리로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내가 내 소리로 내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본문이 주는 몇자기 교훈을 찾아 보겠습니다.

 

1. 소리내어 기도해야 합니다.

 

1절을 보면 내가 소리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소리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1절 속에 기도자,기도방법,기도대상이 명확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내가 기도해야 하고 소리내어 기도해야 하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소리의 크기는 그 사람이 건강과 힘과 비례합니다.죽어가는 사람의 소리가 쩌렁쩌렁 울리는 경우가 없습니다.90세된 노인의 소리와 20대 청년의 소리가 같을 수 없습니다.대 수술을 받고 병상에 누워있는 사람과 경기장을 누비며 뛰어다니는 운동선수의 소리가 같을 수 없습니다.소리는 건강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영적 건강도 그 사람의 소리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기도소리,찬송소리,전도소리,감사소리,고백소리가 없는 사람은 신앙이 없는 사람입니다.그러나 그 소리들이 크고 우렁찬 사람은 믿음이 좋은 사람입니다.그 소리가 있긴 있는데 모기 소리처럼 작은 사람은 신앙이 죽어가고 있거나 약한 사람입니다. 사람이 한 평생을 살아가느라면 필요한 것들이 많습니다.,,가정,가족,직업,친구,이웃 등 그러나 건강은 절대로 필요한 것입니다.

소피 터커(Sophie Tucker)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여자는 태어나서부터 18세까지 좋은 부모가 필요하다.18세에서 35세까지는 훌륭한 용모가 필요하다.35세에서 55세까지는 원만한 성격이 필요하다.55세에서 끝까지는 충분한 돈이 필요하다.

그러나 태어나서 죽는 날까지 반드시 필요한 것은 건강입니다.그리고 그 건강은 육체의 건강만이 아니라 영적인 건강인 것입니다. 심신상관의학(心身相關醫學)에서는 몸의 병은 그 원인이 몸에도 있으나 마음의 원인이 더 큰 영향을 미친다고 보고 있습니다. 현대병의 하나인 노이로제의 원인을 규명해 보면 육구불만,불안,초조,갈등,감정의 억압 등 감정의 비정상적인 상태가 게속되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현대의학은 병은 약이 고친다라고 고집하지 않습니다.병은 마음이 고친다는 것입니다.

 

소리의 크기는 세가지 경로을 통해 결정됩니다. 하나는 두성입니다.머리를 울려서 내는 소리가 두성입니다.소리는 가늘고 곱지만 소리가 작고 약합니다. 둘은 목젖을 울려 내는 소리입니다.높은 소리 미세한 소리는 가능하지만 역시 소리가 작습니다. 셋은 배에 힘을 주고 폐활량을 넓힌 후 나팔을 불듯 토해 내는 소리입니다.이 소리는 크고 강합니다.그리고 넓고 멀리 공명이 됩니다.입안에서 맴돌아 나오는 소리는 약합니다.폐부에서 나오는 소리로 기도해야 합니다.

내 소리가 있는가 살펴봅시다. 봉사도 내가 하고 기도도 내가 하고 찬송도 내가 해야 하고 헌금도 내가 해야 합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예배시간에 가족들이 한 의자에 앉아 예비를 드리고 있습니다.남편만 대표로 찬송을 부르고 다른 식구들은 입을 다물고 있다면 예배가 성립되지 않습니다.아내만 눈감고 대표로 기도를 하고 다른 가족들은 기도시간에 눈을 뜨고 딴 일을 해선 안됩니다. 헌금의 경우도 같습니다.한 사람이 대표로 헌금을 드리는 것보다는 각자 이름으로 하는 것이 좋습니다.이유는 내가 드리는 예배이기 때문입니다.내 소리로 부르짖고 간구한다는 시인의 고백이 사실을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소리내어 부르짖으며 소리내어 간구하는도다

 

2.기도 내용이 솔직하고 절실합니다.

 

2-4절을 보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내용이 열거되어 있습니다.그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솔직성과 절실성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체면이라든지 꾸밈이 없습니다.자신의 내면을 그대로 털어 놓고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그리고 그 내용이 물질적인 것이나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이며 영적인 것입니다. 그 내용은 구체적으로 조명해 보겠습니다.

 

1)원통함과 속상한 일을 고백합니다.

2절을 보면 내 원통함을 그 앞에 토하며라고 했고 3절을 보면 내 심령이 속에서 상할 때라고 했습니다. 시편 142편은 다윗이 사울 왕의 추적을 피해 다니며 읊은 시입니다.그리고 이 시는 그가 굴 속에 숨어 있으면서 읊은 시입니다.그 굴은 엔게디 굴이거나 아둘람 굴이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관용과 신앙의 사람이었던 다윗도 속상한 일과 원통한 일 때문에 고민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천사를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들은 원통한 일과 속상한 일들 때문에 고민하고 아파할 것입니다. 다윗도 바울도 베드로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다윗은 그것을 하나님께 말씀드림으로 해결했습니다.

매튜헨리는 시편 142편을 가리켜하나님께 드린 다윗의 진정서라고 했습니다. 조선조 태종 때(1402) 백성들의 억울한 일을 직접 해결해 주기 위해 대궐밖 문두위에 큰 북을 달아 놓고 억울한 백성은 누구나 그 북을 치게 했습니다.그 북을 신문고라고 불렀습니다.임금은 직속기관으로의금부 당직청을 만들고 북을 친 백성의 억울한 사연을 직접 처리하도록 하였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원통하고 억울한 심정을 하나님께 진정으로 신문고를 친 것입니다. 누군들 속상한 일이 없겠습니까? 누군들 원통하고 억울한 일이 없겠습니까?

그것을 해결하는 몇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그것을 알리고 떠드는 방법이 있습니다. 둘은 침묵하고 혀를 물고 스스로 삭이는 방법이 있습니다. 셋은 낱낱이 대면하고 따지고 규명하고 갈피를 가르는 방법이 있습니다 어느 방법이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다윗이 선택한 방법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그는 하나님께 내 소리로 원통함과 속상한 일을 알려 드렸습니다.그리고 거기서 위로와 평안을 얻었습니다.그것이 최상의 방법입니다.

 

2)고독을 말씀드렸습니다.

2절 끝을 보면 내 우환을 그 앞에 진술하는도다라고 했고 4절을 보면 나를 아는 자도 없고 피난처도 없고 내 영혼을 돌아보는 자도 없다고 했습니다.한마디로 철저한 고독이며 단절입니다.이쯤되면 누구나 절망할 것입니다. 싸르트르는 이러한 실존적 상황을출구가 없다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조울증은 조증과 울증을 합한 의학 용어입니다.조증의 특징은 감정이 격앙된 상태에서 쉴새없이 지껄이는가 하면 과대망상에 빠지고 행동이 무질서하고 논리의 비약이 심합니다.의미없이 물건을 사들이는가 하면 내키는대로 남에게 주어버립니다.깊이 생각하지 않고 공격적이고 화를 잘 냅니다.울증은 그 반대입니다.우울하고 희망이 없고 모든 일이 귀찮습니다.말수가 적고 후회가 많습니다.그리고 망상에 사로잡힙니다.예를 들면 암에 걸려 죽을거라든지,굶어 죽게 될 거라든지,나는 쓸모가 없다든지……”,그래서 방문을 닫아 걸고 사람 만나기를 피합니다. 영적 조울증 환자가 있습니다. 다윗의 경우는 조울등의 밑바닥에 떨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만 그러나 그는 거기서 떨쳐 일어났습니다. 소리내어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는 것이 그의 탈출방법이었습니다.

 

인간의 심리를 치료하는 사람들은 개인의 증상을 따라 다르긴 합니다만 환자 자신이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 놓도록 유도합니다.특히 내성적 성격인 사람일수록 자기 표현이 소극적이기 때문에 자기 표현 능력을 자극하고 유도함으로 치료를 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문제를 그 누군가에게 이야기 함으로 도움을 받기 보다는 더 진한 상처를 받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믿고 이야기했다가 그 사실이 온 세상에 사발통문이 되어 퍼지는가 하면 도와달라고 이야기했다가 오히려 손해를 보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다윗은 정말로 주변에 아무도 없었습니까? 오는 자도 없었고 돌아 보는 자도 없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주변에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그러나 진실로 자기 사정과 고뇌를 털어 놓고 도움을 요청하거나 구할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찾았고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두 가지 불신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불신과 인간 불신.하나님을 불신하는 것은 멸망의 조건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외면하거나 불신한 채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인간을 불신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모조리 도둑놈이라느니 믿을 놈이 하나도 없다느니 모두가 다 썩었다느니 하면서 인간전체를 매도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런가하면 인간을 절대화하고 신뢰하는 것은 더 큰 잘못입니다. 인간은 서로 우정을 나누고 친절을 베풀고 함께 살고 일하면서 살아나가는 생활 존재이지 믿고 숭배하는 신앙대상은 아닙니다. 바로 그 진리를 다윗은 깨달았던 것입니다.

 

다윗처럼 내 깊은 영혼의 상처도 말씀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나 자신의 절박한 사정도 진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소리로 부르짖고 간구해야 합니다.내 기도,내 찬송,내 고백,내 신앙이 필요합니다. “내가 소리내어 부르짖으며 소리내어 간구하는도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