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민수기

[민11:4] 죄와 그 결과

'코이네' 2020. 9. 23. 21:22


죄와 그 결과

민11:4-6


오늘 우리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역사 속에 나타난 특별한 사건에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킴으로 말미암아 죄의 문제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부정적이고 음울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좀 더 긍정적이고 아름답고 위로적인 이야기에 많은 관심을 갖고자 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선하심과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는 것은 우리에게 분명히 위로가 되고 소망이 될 것입니다.그러나 우리가 한가지 인정해야 할 것은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이나 예수님의 은헤가 현실화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는 조건이 요구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서 치과에 가 본 경험이 있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제가 치과에 갔을 때 경험입니다. 의사는 내 입을 크게 벌리게 하고 마취 주사를 놓습니다.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이상한 기구를 입속으로 넣고 내 입을 고문하기 시작합니다. 벌리고 있는 입이 너무 아파서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손으로 그 의사의 손을 잡고 멈춰주기를 바랬습니다. 그런데 이 의사는 잔인하게 내 의사를 무시하고 일을 마무리 했습니다. 다 끝나고 났을 때 의사는 내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를 너무 함부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리고 양치질을 골고루 하십시요. 이빨이 특이해서 치솔이 닿지 않는 곳이 있습니다.
나는 돈내고 고문당하고 말하기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할 수 있다면 저는 다시는 치과에 가고싶지 않습니다. 치과의사의 임무가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때때로 고통을 당하는 것은 영구적인 치료를 위해 필수적인 고통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알고 있을 것입니다. 복음도 이와 동일한 진리가 적용되는 것입니다. 죄를 말하는 것은 결코 즐거운 일이 아닙니다. 차라리 잊고 싶은 것이 우리의 솔직한 마음일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죄가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속에 있다 보니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을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를 말하는 사람들에게 반기를 듭니다. “주머니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있냐?”
우리는 죄의 동조자들이며 공범들이기 때문에 죄를 경멸하면서도 심판은 너무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죄의 중요함을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1.죄는 탐욕으로 시작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온 이후 광야 생활을 하면서 배고픔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게 원망과 도움을 함께 구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에게 만나를 주셨습니다. 처음 그들은 기쁨과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그들은 배부름으로 만족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애굽생활에서 먹었던 고기가 먹고 싶었습니다. 그들은 다시 하나님께 고기를 구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 주셨습니다. 만나는 은혜였지만 메추라기는 욕심이었습니다. 이제 그 욕심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죄를 유발 시켰습니다. 그 욕심은 애굽에서의 노예 생활의 비극도 잊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고기가 먹고 싶다는 이유 하나로 애굽의 비참함을 오히려 그리워하게 됩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들입니까? 이것이 바로 죄의 특징입니다. 우리는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그 끔찍한 고통이 싫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욕심이 생기면 우리는 바보가 됩니다. 그 욕심은 우리로하여금 비이성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행동하게 합니다. 죄의 영향력은 너무도 강했습니다. 그들은 한 때 먹었던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 이외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당했던 고통은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즐거웠던 일들만 생각하고 불행했던 기억은 무시하는 천하고 비열한 방식으로 인간 지성을 사용합니다. 죄는 인간을 어리석게 만듭니다. 그래서 어리석음에 대해 가르치는 사람에게 전혀 고마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분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생선과 수박과 부추와 파에만 흥미를 가지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세상의 화려함만을 기억하시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2.죄는 인간을 타락시키는 힘이있다.


죄는 우리의 본성을 비뚤어지게 합니다.
죄는 우리의 지성과 이해력에만 어리석음으로 몰고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성에까지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거절하게 만듭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이제 우리의 마음에서 악한 것이 나오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그러한 태도가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애굽에 있는 좋은 것들만 사모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진정으로 심각한 죄를 범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는 우리의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그들의 말에는 조소와 경멸이 담겨 있습니다. 그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를 경멸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기적과 사랑을 무시하는 오만이 생겼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경멸했습니다. 이러한 삶은 바로 복음을 경멸하는 것의 상징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그렇게 기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아름다움과 풍요를 그리워합니다. 우리에게 죄로부터 자유와 죽음으로부터 소망을 주신 구원의 감격을 우리는 금방 지루하게 생각합니다. 오히려 세상의 죄가 가지고 있는 쾌감과 재미와 풍요를 그리워하며 그런 것을 주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원망합니다. 인간의 욕심을 채워주지 않는 하나님에 대해 감사를 잃어버립니다. 이제 더 이상 기쁨과 소망과 사랑이 그 사람을 지배하지 못합니다. 그에게 신앙은 결코 전부가 될 수 없었습니다. 만나를 조소했던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은 오늘에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상징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죄의 요심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잃어버리게 합니다. 즉 우리의 삶을 타락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주셨는데 그들이 사모했던 것은 애굽의 생선과 오이와 양파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사는 것이 광야에서 방황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좋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너무 생활이 단조롭고 재미없다” 고 말합니다. 종교적인 소망을 갖는 것은 좋으나 세상적인 쾌락을 버릴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한 것입니다. 만나를 먹고 산다는 것이 결코 그들에게 행복이 되지 않았습니다. 죄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멸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 만나의 클라이막스는 그리스도였습니다.
그 분은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셨고 우리를 대신해서 죽음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랑을 감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수 많은 사람들은 경멸과 조소를 보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이 말씀 앞에서 봐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만나를 먹어본 기적을 가진 사람들입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여러분은 주님이 나의 전부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항상 행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혹시 세상의 생선과 수박과 오이 때문에 절망하며 하나님을 감사히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은 없습니까?
우리는 입으로 하나님을 말하면서 마음으로 세상을 그리워하지는 않는지 이제 정직하게 우리의 모습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진정으로 하나님을 누리며 살기를 원한다면 세상의 욕심으로 주님을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유혹하는 생선과 오이와 수박과 양파로 만나를 바꾸시지 말기를 바랍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순간의 욕심으로 잃어 버리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말기를 간곡히 권면합니다.


여러분은 가장 소중하고 위대한 것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세상을 부러워 마시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놀라운 것들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생활하신다면 여러분은 언제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기적을 누리시며 살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