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민수기

[민11:1] 축복을 받는 공동체

'코이네' 2020. 9. 23. 21:19


공동체에 임하는 축복

(민 11:1-9)


할렐루야! 수련회 다녀오신 피곤이 풀렸습니까?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거의 대부분의 가정이 다녀 올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금년 수련회의 목표는 영성훈련쪽보다 가정끼리의 공동생활 훈련이었던 바 많은 분들이 협조해 주셔서 9가정이 다녀올 수 있었으니 부족한 점은 많았지만 그래도 감사한 것이 더 많았습니다.

은혜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물론 방언을 받고 예언도 하고 영적체험을 하는 것들을 가르쳐 은혜받았다고 하겠죠. 그러나 무엇을 받고 나서 “참 좋았다”는 그러한 것보다 더 큰 은혜는 하나님앞에서 나의 참모습을 보는 것이며 그 모습이 어떠하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하나님께 금식기도를 하면서 가장 큰 은혜를 달라고 했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이상을 통해 응답하시는데 어떤 어린아이가 벌거벗은 모습으로 그냥 땅바닥에 철푸덕 앉아 있는데 가만히 보니 똥을 깔고 뭉개앉아 있더라는 것입니다. 더구나 입과 눈과 귀속에도 똥이 가득한 모습으로 보여 주셨답니다. 그리고는 “이 아이가 바로 너다!” 하는 음성이 마음속에 들리더랍니다. 그동안 자기의 모습이 영적으로 성숙한 어른인줄 알았는데 하나님보시기에는 형편없는 어린아이였으며 더구나 죄로 인해 더럽기 그지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된것입니다. 그 이후 그 목사님은 자기의 참 모습을 알고 회개하여 정말로 큰 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자기의 참 모습을 아는 것, 이것보다 더 큰 또 은혜가 어디 있겠습니까?

사도바울이 다메석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후 아라비아 광야에서 3년동안 성령으로 부터 훈련을 받은 후 고백하기를 자기는 사도중에 지극히 작은 사도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자기 자신을 잘 아는 고백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깨닫고 보니 자신의 존재는 사도축에도 못끼는지라 성도중에 지극히 작은 성도라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깨닫고 보니 자기는 죄인중의 죄인인지라 죄인중의 괴수라고 눈물을 흘리며 고백했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앞에서 자기자신을 잘 아는 고백입니까?

 

아시스의 성자 성프란시스코가 교황을 알현할 때 일입니다. 교황은 그의 몸골이 형편없는 지라 농담으로 돼지같다고 하니까 프란시스코가 심각한 표정으로 나가더니 돼지우리에서 한바탕 됭구르고 왔답니다. 그리고는 교황에게 말하기를 내가 돼지같은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신 것을 감사한다고 고백했다고 합니다.  자기 자신이 하나님앞에서 어떤 존재인가를 알게 해주어서 감사하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위대한 신앙인은 하나님앞에서 겸손하여 그 어떤 은혜보다 자기의 참 모습을 보는 것을 가장 큰 은혜로 알았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우리는 너무나 많은 은혜를 받고 돌아왔습니다. 나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우리 가정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남편과 아내와의 관계,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 성도와 교역자와의 관계를 한솥밥 먹으면서 적나라하게 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하나님앞에서 큰 은혜를 받은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저 자신도 이번기회를 통해 각 가정의 문제가 무엇이며 기도제목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게 되어서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가정을 진단 할 수 있었기에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매년 주신 은혜는 주시지 아니하시고 금년에는 이렇게 우리의 모습을 보게 하셨을까요? 바로 고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고치기 전에는 네가 받는 은혜에 한계가 있고 네가 받는 축복에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큰 은혜, 더 큰 축복을 주시기 위해 방해되는 요소들을 제거하게 하시려고 그런것들을 금번 기회에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본 바를 고치면 이번 기회가 비할 수 없는 은혜와 축복의 통로가 되지만 고치지 아니하면 여전히 우리는 그냥 부끄러운 모습으로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저수지의 물은 둑 높이밖에 저장하지 못합니다. 둑 높이가 10m면 물 높이도 기껏해야 10m밖에 안됩니다. 그러나 둑이 100m면 물높이도 100m가 될 수 있습니다. 금번 우리의 약점을 보게 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축복을 100m로 쌓아 주시기 위한 선행작업으로 먼저 우리가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을 갖추게 하시기 위해서 주신 현실이었습니다. 즉 100m의 둑을 만드시기 위한 작업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대상에 따라 분류하면 두가지 인데 개인에게 주시는 축복과 공동체(가정,교회,국가,사회...)에게 주시는 축복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개인적으로 주시는 축복이라함은 여러분이 간구하는 바와 같이 건강이라든지 물질이라든지 성공이라든지 명예라든지 부귀라든지....하는 것들이고, 공동체에게 주시는 축복은 가정같은 경우는 행복과 화평과 형제우애와 효도와 사랑이요, 교회같은 경우는 부흥과 사랑의 공동체요, 국가같은 경우는 풍요함과 강성함일 것입니다. 그동안 개인에게 받는 축복은 여러분이 많이 들어서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공동체가 받는 축복은 그리 많이 들어보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수련회 기간을 돌아보며 공동체인 우리 가정이, 우리 교회가, 우리 민족이 축복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상고해 보려고 합니다.

 

1. 공동체 축복을 받으려면 먼저 이기주의를 버려야 합니다.


이기주의란 하나님을 위할 존재가 하나님을 위하지 아니하고 자기자신을 위하는 것을 말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왜 선악과를 따먹었습니까? 하나님을 위해야 할 존재가 자기를 위해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하나님처럼 된다는 말에 그만 속았던 것입니다. 그 이후 모든 죄속에는 이기주의가 숨어 있습니다.

왜 분쟁합니까? 나를 알아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질투합니까? 나만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왜 간음합니까? 내가 즐겨보자는 것입니다. 왜 도적질 합니까? 내가 많이 갖겠다는 것입니다. 왜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픕니까? 나만 가져야 하는데 나보다 다른 사람이 많이 가지니 그게 싫은 것입니다. 이와같이 성경의 모든 죄악의 리스트를 보면 그 중심에 자기가 자기를 위하는 이기주의가 숨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기주의가 있는 한 그 공동체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한 것처럼 오히려 불행해 질 뿐입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여기 탐욕한 자들이 바로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자들 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런 탐욕을 가지고 행복했습니까? 오히려 불살라 죽었고 땅이 갈라져 죽고 말았습니다.

그럼 어떤 사람이 이렇게 이기주의입니까? 성숙과 미숙의 차이는 그가 얼마나 이기적이냐 이타적이냐로 알 수 있습니다. 이기적이면 그만큼 미숙한 것이요 이타적이면 그만큼 성숙한 것입니다.

사람이 가장 이기적인때가 언제입니까? 가장 미숙한 때가 가장 이기적인 때요, 가장 이기적인 때는 바로 태아때입니다. 태아는 지금 어머니가 배가 고픈지 부른지, 몸이 약한지 건강한지, 집안 형편이 좋은지 나쁜지 가리지 않고 그저 악착같이 어머니의 영향분을 빨아댈 뿐입니다. 이렇게 어머니의 뱃속에서 잉태된 태아는 살기 위해서 악착같이 어머니의 영향분을 빨아대야 하며 비록 어머니가 어려움을 격게 될지라도 아무도 그 태아를 나무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태아는 너무나 미숙하기 때문에 이기적인 것이 지극히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태아때는 그렇다고 치고 어머니가 해산의 수고를 겪은 후 아기가 태어나면 “어머니 나를 낳으시느라고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라도 합니까? 태어나도 역시 이기적입니다. “먹여다오 앙앙!”, “입혀다오 앙앙!”, “재워다오 앙앙!”, “갈아다오 앙앙!”..... 여전히 이기적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아기가 좀더 자라면 이제는 어머니도 돕고 동생도 돌보고 심부름도 하며 어머니를 생각해 주게 됩니다. 비로서 남을 생각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숙해 간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다가 완전히 성숙해서 한 여자와 아이들을 책임 질 수 있는 성숙이 있을 때 비로소 결혼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성숙하다는 증거는 이렇게 얼마나 다른 사람을 돌볼 줄 아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런데 미숙한 사람의 특징중 하나는 이기주의도 있지만 자기의 감정을 제대로 가늠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공동생활(가정,교회,직장...)에 있어서 가장 큰 피해를 주는 것 중 하나가 바로 감정폭발입니다. 감정폭발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본의 아닌 상처를 주게 됩니다. 예를 들어 가정에서 큰소리 날때가 언제입니까? 바로 감정조절을 실패했을 때가 아닙니까? 오른손을 자주 쓰면 오른손잡이가 되고 왼손을 자주 쓰면 왼손잡이가 되듯이 화도 내면 낼 수록 더 자주 내게 되며 나중에는 습관성이 되고 맙니다. 만일 그렇게 되면 그 가정이 어떻게 되겠으며 그런 환경속에서 자란 아이들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따라서 공동체가 축복받으려면 먼저 내가 미숙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상대방도 미숙한 점이 있는 미완성 인격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미숙함을 발견했을 때 정죄하고 비판하는 것보다 감싸주고 격려하게 되며 그렇게 되면 상대방은 그러한 포용력속에서 점 점 성숙해 가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의 미숙함을 배척할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 미숙함을 감싸줄 때 그 아이가 성장하는 것처럼 여러분의 남편의 미숙함이 들어날 때 정죄하거나 실망하지 말고 “아차 우리남편이 아직 덜 자랐구나.! 내가 아들하나 더 키우는 셈 치자.”하며 감싸주어야 합니다. 남편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아내의 철없음을 보고 화만 내지 말고 “아차, 우리 아내가 이직 덜자랐구나.” 하며 딸하나 더 키우는 셈치고 감싸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시간이 가면 갈수록 아내는 남편의 진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며 남편은 아내의 진가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 위해주고 감싸줄때 그 공동체에 하나님의 축복이 어찌 임하지 않겠습니까? 축복달라고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복받기 위해 장애되는 요소를 먼저 제거하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이기주의를 버려 공동체의 축복을 다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2. 공동체 축복을 받으려면 불평불만을 버려야 합니다.


불평불만은 개인적인 뿐만 아니라 공동체에 오는 축복과 은혜의 통로를 막는 치명적인 장애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불평불만 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엄하게 다루셨음을 보게 됩니다. 누구에게 하는 불평불만이든 그것은 곧 하나님께 하는 것으로 하나님은 들으십니다.(민14:27)

그러면 불평불만 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다루십니까?
본문에 보니까 불평불만 하는 자들을 불로 사르셨다고 했습니다.

모세의 형인 아론과 누이인 미리암일지라도 불평불만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문둥병자로 만드셨습니다.

가나안 정탐 보고회때 12명의 정탐군들의 보고를 듣고는 하나님이 우리를 광야에서 다 죽이시기로 작정하셨다면 또 불평하기 시작하자 그들은 재앙으로 다 죽이시고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을 살리셨습니다.

고라의 자손이 자리싸움하며 불평불만하자 하나님은 땅을 가르셔서 그들을 모두 음부로 삼키우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일로 인해 사람들이 불평하자 하나님께서 염병을 퍼치사 14,700명을 죽이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불평불만하는 자를 엄하게 다루십니까? 불평불만은 하나님의 계획을 연기시는 무서운 방해꾼이기 때문입니다. “다된 밥에 재뿌린다.”라는 속담처럼 불평불만은 하나님의 다 된 사업에 재뿌리는 역할을 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불평불만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나는데 40년씩이나 걸렸는지 아십니까? 불평불만 때문입니다. 바로의 군대가 쫒아 오니까 홍해에서 수장시키려고 인도했냐며 불평하고, 먹을 것이 떨어지자 광야에서 굶어 죽일려고 인도했냐며 불평하고, 만나를 주면 어떻게 이런것만 먹고 사냐고 고기좀 달라고 불평하고, 고기주면 이제는 물이 없다고 불평하고..... 가나안의 풍요함을 정탐꾼들을 통해 보여주면 그들에 비하면 메뚜기떼 같다면 불평하고, 감투가지고 불평하고....

그래서 나중에 하나님께서는 불평불만자들을 다 죽이신 연후에 비로서 여리고 성을 정복했고 가나안 땅에 입성 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불평불만은 하나님의 계획을 치명적으로 방해하는 요소인 것입니다. 그래서 11:20을 보니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말씀하시길 불평불만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항상 화합된 곳에만 나타납니다. 내가정에 불평불만이 있다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는 틀렸습니다. 제아무리 금식기도 해보십시오. 하나님은 복 안주십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불만이 가득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불만이 가득하고, 자식까지 불평불만의 대상이 되고, 교역자와 사모까지 불평불만의 대상이 되니 그런 가정과 그런 교회에 축복이 임할리가 있습니까? 어림없는 소리입니다. 그런 가정에 무슨 행복이 있겠고 그런 교회에 무슨 부흥이 있겠습니까?

특히 제가  가슴아팠던 것은 여러분들이 자녀때문에 불평을 많이 한다는 점입니다. 물론 힘들고 짜증날 때가 있겠죠? 그러나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의 자식은 하나님에게 있어서 보물과도 같은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그 자식이 귀챦다고 짜증내서야 되겠습니까? 만일 그 자식이 금덩어리라면 그렇게 아무렇게나 두겠습니까? 아마 누가 훔쳐갈까봐 화장실 갈때도 품에 안고 갈것입니다.

부탁드립니다. 불평불만을 버리십시오. 그래야만 그 가정에, 그 교회에 복이 임합니다. 여러분의 입에서 너무나 쉽게 습관적으로 불평이 나오는 것을 보고는 저는 너무나 안타까왔습니다. 만일 우리가정에, 우리교회에 하나님의 복을 받고 싶걸랑 지금 즉시 불평불만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3. 게으름을 버려야 합니다.


옛 어른 말씀에 “부지런한 집안은 결코 망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반대로 생각하면 게으른 집안은 언젠가 망하고 만다는 말일 것입니다.

본문을 보니 만나는 이른새벽에 내립니다. 따라서 일찍일어나 거두지 아니하면 햇빛이 비춰 다 스러지기 때문에 그날은 굶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일용할 양식을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해뜨기 전에 일어나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법칙입니다. 해뜨기 전에 일어나란 말은 부지런하란 말입니다.

성경에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또한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 도는 것 같이 게으른 자는 침상에서 구른다고 했습니다. 일찍 일어나십시오. 그리고 아내로서 남편으로서 할 일을 다하십시오. 믿지 않는 사람들조차도 부지런한데 믿는 자들이 게을러서야 되겠습니까? 예수 믿으려면 부지런해야 합니다.

이렇게 여러분의 가정이 복받으려면 먼저 부지런해야 합니다.

이상과 같이 세가지를 버려야 우리 가정이, 우리 교회가, 이 사회가 복을 받습니다. 여러분들로 인해 가정이 복받기를 원합니다. 여러분들로 인해 교회가 복받기를 원합니다. 여러분들로 인해 사회와 민족과 나라가 복받기를 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