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민수기

[민10:1] 찬양을 어떻게 할 것인가?_찬양대헌신예배설교

'코이네' 2020. 9. 23. 21:15


찬양을 어떻게 할 것인가?

(찬양대 헌신예배 설교)

(민10:1-10)


 음악이 우리의 생활에 미치는 영향은 너무 놀랍습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응앙!" 하고 노래를 부르며 태어 났습니다. 이렇게 노래를 부르며 태어난 인간은 노래를 해야 할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땅에 태어 난 것입니다. 이것은 성서적입니다.
 사43:21절에 보면,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존재하는 목적은 찬송을 부르는 것입니다.
 여러분, 공부를 왜 합니까? 왜 장사를 합니까? 왜 직장에 다닙니까?... 왜 유학을 갑니까?... 그 모든 것의 궁극적인 목적은 다 '하나님께 찬송을 부르기 위해서' 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만 여러분들이 오늘 분명히 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일반적인 음악도 그 효과나 영향은 대단합니다.
 된장, 간장, 김치, 포도주 등 발효식품의 제조과정에서 음악이나 그 진동을 들려주면 식품의 맛이 좋아지고..., 또 야채재배나 젖소 사육 과정에서 들려주면 생산량이 늘어난다는 것입니다. 한국 식품개발 연구원(이남혁 연구원/`발효식품에 음악진동효과를 이용한 새로운 기술'이라는 논문)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일본에서 젖소나 동물들에게 음악을 직접 들려주고, 청각기능이 없는 식물이나 식품에 대해서는 특수 변환장치로 음악을 진동으로 바꿔 들려 주니까... 농축산물 등 관련제품의 품질과 생산성이 아주 현저하게 좋아 졌다는 발표가 있었습니다.

 포도주의 맛이 좋아지고, 젖소의 우유 생산량이 많아지고, 치즈, 요구르트, 빵, 된장, 간장, 고추장, 김치 등 모든 발효식품에도 놀라운 효과가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또한 이 음악이라는 것으로 말미암아 서먹한 분위기가 노래로 말미암아 잘 어우러 지게 되고, 음악으로 말미암아 알지 못하던 사람들도 금새 마음이 하나가 되어 화합을 이루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저는 가끔 TV에서 '열린 음악회'를 매우 감명있게 보곤 합니다. 노래는 실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하나를 이루는데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일반 음악도 이처럼 놀라운 효과가 있는데, 하물며 영혼의 노래... 찬송, 찬양은 더 말할 나위가 없는 것입니다. 더욱이 찬송은 아무나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부르는 노래이기 때문에.. 우리가 찬송을 할 수 있다는 이 기회, 이 은혜를 받은 것에 대해서 우리는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성가대의 찬양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기도가 하나님을 향한 것이고, 설교가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면, 찬양은 하나님과 사람 모두를 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끝나면 설교도 끝이나고, 기도도 끝이 납니다.  그러나, 찬송은 하늘나라에서도 영원히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곳에 가면, 천사들이 모두 찬양할 것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소리를 발하여 영원히 영원히 주를 찬송할 것입니다. 할렐루야!

 

1. 찬송의 성경적 근거


 민10:1-10절에 보면, 제사장으로 하여금 음악을 담당케 했습니다(민10:1-10), 나팔을 불며 하나님을 찬양케 했는데, 나팔을 신호로 온 백성들이 회막 문앞으로 모이고, 혹은 족장들이 모이고, 또 백성들이 진행하는 신호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였고, 오직 아론의 자손들 제사장들만 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적을 물리치러 나갈 때에도 나팔을 불며 하나님을 찬송했는데,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대적을 물리쳐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또한 기쁨의 날과 절기 제사를 드릴 때, 그리고 번제를 드릴 때 나팔을 불며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기쁨으로 받으신다고 약속 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반대로 생각해 보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전쟁이 났을 때 대적을 물리칠 수 없고, 제사를 드려도 받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찬송을 부르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이것은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되는 것이고, 이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민10:10절 말씀에 "그로 말미암아 너희 하나님이 너희를 기억하리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고 했습니다.

 대하20장에 보면, 놀라운 역사적 사건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여호사밧이 유다의 왕으로 있을 때 전쟁이 일어 났습니다. 모압과 암몬과 마온 족속들이 연합을 해서.... 지금으로 말하면 세 나라가 연합을 해서, 다국적군이 쳐들어 온 것입니다. 참으로 어찌 할 수 없는 긴박한 상황입니다. 꼼짝없이 멸망당할 위기입니다. 왕은 얼른 성소로 가서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한타깝게 기도하면서, 왕은 온백성들에게 금식기도를 선포하며 전심으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야하시엘이라는 선지자를 통하여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응답하신 내용이 좀 이상합니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하여 '성가대'를 조직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지극히 멍청하고 엉뚱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래하는 사람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성가대를 조직 했습니다. 그리고는 백성들 앞에 서서 여호와 하나님을 소리 높여 크게 찬송을 했던 것입니다.

 이때의 찬송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간절하게 전심으로 하나님을 찬양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대하20:22절에 보면,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 될 때에... 여호와께서 그 다국적 연합군을 물리치시므로 저들이 크게 패하여 도망을 갔습니다. 저들끼리 찌르고 쏘고 치고 해서 완전히 멸망했는데, 유다 백성들은 칼 한번 안 휘두르고 전쟁에서 크게 승리를 했던 것입니다. 25절에 보면, 저들이 가지고 온 군량미, 재물, 의복 등이 너무 많아서 그것을 거두는데만 밤낮 사흘이나 걸렸습니다. 피해 하나 없이 전쟁도 이기고, 많은 재물도 얻은 것입니다. 할렐루야!

 

찬송의 위력이 이렇게 크고 위대한 것입니다. 그들은 찬송을 할 때 엉뚱한 생각을 하면서 부른 것이 아닙니다.  "조금 이따가 사랑하는 애인을 만나야 될텐데...., 이따가 점심을 무엇을 먹을까?...., 피곤하니까 집에 가서 잠좀 자야 되겠다......, 좋은 영화 프로가 나왔는데 누구하고 갈까?...." 등등의 생각을 하면서 부른 것이 아닙니다. 오직 전심으로 찬양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위대하신 분이시요!, 환란중에 구원자이시요!, 우리의 대적을 물리쳐 주실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영원히 찬송을 받으실 주 여호와! 세세토록 영광을 받으소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하면서 신령과 진정으로 전심을 다하여 찬송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 성가대도 바로 이런 찬송을 날마다 부르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이런 찬송을 원하십니다. 성경을 보면, '영광'이라는 성경구절만 보아도 410구절이나 있고, '찬양'이라는 단어는 81구절, '찬송'이라는 단어는 211구절이나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것 뿐만이 아닙니다. 대상25:1-7절 말씀에 보면, 성막에 288명의 레위 사람으로 하여금 찬양을 담당케 했는데,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의 자손들 중에서 구별하여 수금과 비파와 제금을 잡아 신령한 노래를 부르게 했습니다. 그중에 아삽의 아들들 중에서는 노래를 부르고, 여두둔과 그의 아들들은 현악을 담당하였고, 헤만과 그의 자녀들은 금관악기를 담당했습니다. 찬송을 하는 것도 다 분야가 있었습니다. 또한 대상25:7절에 보면, 찬송하기를 배워 익숙한 자의 수가 288명 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찬송을 하는 것도 배우고 익혀서 잘 드려져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하5:12-14절과 대상23:3-5절에 보면,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을 때 하나님은 레위사람 4,000명과 120명의 제사장들로 하여금 찬양을 담당케 하였습니다. 또한 에스라2:41절에 보면, 스룹바벨 성전에는 128명이 찬양을 담당했고, 느헤미야7:44절에 보면, 무너진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였을 때 찬양하는 레위사람이 148명 이었습니다. 이런 기록들을 보면, 하나님은 분명 찬양을 받으시기를 원하셨고, 친히 우리에게 명령하시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2. 찬송의 문자 적인 의미


 "찬송이 무어냐?"고 물으면, 흔히 "곡조 붙은 기도"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답이 아닙니다. 물론 기도의 요소도 있습니다만 기도의 한 부류로 분류하면 안 됩니다. 찬송의 문자 적인 바른 해석은 '하나님의 덕을 칭송하는 노래'입니다. 시대와 형식의 구별 없이 하나님의 영광과 그 권능을 높이는 모든 노래를 총체적으로 찬송이라고 부르면 됩니다.  우리 성경에는 찬송(讚頌)이라는 단어와 함께 찬미(讚美), 찬양(讚揚)이라는 비슷한 단어가 쓰여지고 있는데 모두 같은 의미입니다. 일본 성경에는 찬송이라는 말이 없고, 찬송대신 찬미라는 말로 전부 표현되어 있습니다.

 

1) 찬송은 성도의 의무입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노래에 대해서는 음치입니다." 하면서 아예 찬송을 잘 부르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음정이나 박자, 리듬감이 없다는 이유로... 찬송은 음악적인 재능이 있는 사람들이나 하고, 자기는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별문제가 없다는.... 소위 선택 사항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마치 찬송을 취미로 여기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 취미란 의미가 무엇입니까? 취미에는 결코 강제성이 없습니다. 취미는 철저히 자신의 정서를 위한 것일 뿐이지 타인을 위한 행위가 아닙니다. 그러나 찬송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고, 또 사람을 위한 것이 이니라, 오직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다.

 어떤 젊은 목사님이 한 교회로 부임하였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신임 목사님을 환영하는 만찬회가 열렸는데, 어떤 부인이 목사님에게 다가가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목사님, 목사님께서는 왜 수백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요구를 만족시켜 주어야 하는 그런 힘든 목회를 하시게 되셨는지 이해가 잘 안됩니다" 하고 존경반 의구심 반으로 말을 합니다. 그러자 이 목사님은 주저 없이 대답하기를, "성도님, 제가 여기에 온 것은 수백명의 사람들을 기쁘게 해 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단 한 분만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하여 온 것입니다. 그 분이 기쁘시기만 하면 나머지 모든 것들은 저절로 잘 될 것입니다." 하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부르는 찬송이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찬송도 역시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 나머지는 모두 잘 될 것 입니다. 그러므로, 사43:21절에서 "이 백성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어떤 분들은 자신은 찬송의 은혜 즉, 찬송의 달란트를 받았다, 혹은 받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 역시 잘못된 생각입니다. 찬송은 결코 특정인에게만 주어지는 은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시33:1절을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의 마땅히 할 바로다"
했습니다. 이 말씀을 역설적으로 해석하면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바로 구원받았다고 말하면서도 찬송하지 않은 성도는 불량한 자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주위에는 구원의 감격을 노래하지 않는 불량한 자가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찬송은 구원받은 성도의 마땅히 해야 할 사명이요, 기본적인 의무임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찬송은 우리가 이 땅위에 존재하는 이유요, 목적인 것입니다. 요셉 하이든(Franz Joseph Hayden)는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그 유명한 '천지 창조'를 작곡 했
습니다. 그의 곡이 발표 되기 위해서 비엔나에서 오라토리오 "천지창조"의 공연이 있을 때, 하이든이 마땅히 지휘를 해야 했지만 늙고 병이 들어서 지휘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휠췌어를 타고 그 공연장 한 구석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날 공연은 참으로 놀라왔습니다. 지휘자의 지휘에 따라서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은 정말 아름다운 찬송을 불렀습니다. 공연이 마치고, 지휘자가 인사를 하자 우뢰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그때 지휘자는 손을 들어 한쪽 구석에 앉아 있는 하이든을 가르키면서, "저분이 작곡한 것입니다." 하고 하이든을 소개하자 청중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습니다. 그런데, 병약한 하이든은 온 힘을 다해서.... 그의 떨리는 손을 위로 치켜들고 외쳤습니다.
       "아닙니다. 여러분, 아닙니다! 그 음악은 내가 지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것이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하고 외쳤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진정한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2) 찬송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입니다.
여러분, 찬송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찬송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찬송은 신앙심을 일깨우는 노래요, 예배의 분위기를 돕는 노래라고 생각할는지 모릅니다. 그 말도 일리는 있습니다. 찬송이 성도들의 정서에 유익을 주고, 예배의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심령을 평안케 하는데도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그런 이유 때문에 찬송을 부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너무나 잘못된 생각입니다.
 이런 현상은 우리가 하나님을 올바로 찬송하는 가운데 얻어지는 부수적인 소득(?), 다시 말씀드려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주신 은혜이지... 찬송 자체에서 나오는 어떤 능력이 아닌 것입니다. 찬송은 무엇을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찬송은 그저 찬송일 뿐입니다. 그래서 가장 순수한 동기에서 불러야 합니다.

 어떤 교회 장로님은 주일날 찬양대의 찬송을 마치 자신이 심사위원이라도 되는 것처럼 늘 평가하는 분이 있습니다. 만약 음정이나 가사 전달이 잘 안되면 성가대원들에게 왜 죽을 쒔느냐고 책망을 한다는 것입니다. 아마 그 장로님에게는 틀리지 않고 제대로 하는 찬송은 밥이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죽이나 누룽지가 되는가 봅니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문제는 많은 성가대원들 자신들도 이 장로님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찬송이 끝난 후에 성도들이 "아멘!" 하고 힘차게 화답하면 흐뭇해 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서로 쳐다보면서 키득 키득 웃으면서 "에이 오늘은 죽을 쒔네!" 하는 것 입니다.

 여러분, 왜 그런 생각이 들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이 아니라, 예배의 분위기를 위해서... 즉 성도들을 의식해서 선곡했고, 또 그런 자세로 불렀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경우는 찬송을 자신의 음악적인 취향에 따라 선택하고 즐기려(?)고 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지금 우리에게 어떤 찬송을 받고 싶어하시는지 그것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내 취향만을 우선하는 경우입니다. 이 역시 찬송이 예물임을 모르기 때문에 아무런 뜻 없이 하는 행동입니다. 한 마디로 찬송을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물로 생각하지 않고, 신앙인의 정서와 예배의 분위기를 위한 보조 수단정도로 인식하는 잘못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찬송이 예물이 되겠습니까?.. 앞에서 살펴본 대로 찬송의 시작은 하나님의 명령에서 부터 비롯되었습니다. 그 명령의 목적은 하나님 자신이 찬송을 받기를 기뻐하고 간절히 원하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찬송은 우주 공간을 울리는 메아리가 아니라, 주의 보좌 앞에 피어나는 향연이라는 말입니다.
 시편을 읽어 보면, 구구절절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가득차 있습니다. 어느 인간이나 다른 대상을 향하여 찬양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한 것도 아니였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찬송했더니 놀라운 기적의 역사가 일어 났는데, 대적이 물러가고, 심령에는 평안을 얻고, 승리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찬송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물입니다.

 

3) 찬송은 복음의 나팔입니다.

앞에서도 말씀했습니다만, 우리가 찬송을 하는 목적은 오직 한 가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찬송하는 과정 속에서... 몇 가지 현상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 첫째로, 우리는 찬송에 담긴 복음의 능력과 그로 인해서 선교의 열매를 거둘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수한 경우를 빼고는 모든 찬송이 소리로 표현됩니다. 소리로 표현된 찬송은 그 크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아무튼 그 울림 반경 내에 있는 사람은 자기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들려오는 그 찬송의 소리를 거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찬송의 선교적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가령, 예를 들어서 여러분 중에 누군가가 직장에서 일을 하다가 잠시 휴식하는 가운데 작은 소리로 찬송을 불렀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리고 그 옆에는 몇 사람의 동료들이 커피를 마시며 담소하고 있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처음에는 자기들끼리 무슨 말을 주고받다가 찬송이 계속되자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해서 차츰 찬송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을 것입니다. 찬송은 복음을 증거하는 나팔입니다.

 몇 년전에 제 아내가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습니다. 기저귀를 삶은 펄펄 끓는 대야를 들고 막 목욕탕으로 갔는데, 그만 타일에 미끄러져서 뒤로 넘어 지고 말았습니다.  뜨거운 물이 이내 옷 속으로 스며들어 무릎 쪽으로 해서 밑에까지 흘러 내렸고, 귀가 떨어지는 비명 소리가 났습니다. 예람이는 놀래서 울고, 저는 얼른 가 보았습니다. 큰일이 났습니다. 얼른 수돗물을 틀고 열을 식혔습니다. 그리고는 차를 불러서 응급실로 갔는데, 돌팔이 신라병원 덕에 어려움을 겪고는 다음날에 이대 부속병원으로 옮겨서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근... 몇 달을 고생했는데, 교회에 일을 하랴, 병원에 가서 간병을 하랴.... 무척 고생했습니다. 몸과 마음이 무척 피곤한 때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병원엘 갔는데 이른 아침에 대학생 몇 명이 복도에 와서 찬송을 부르는 것입니다. 남녀 대학생 몇 명이 혼성으로 부르는데, 그 찬양은 천사의 소리였습니다. 제 심령을 일깨워 줬습니다.

 341장의 찬송입니다.
        "너 하나님께 이끌리어 일평생 주만 바라면
         너 어려울 때 힘주시고 언제나 지켜 주시리
    주 크신 사랑 믿는 자 그 반석 위에 서리라.......
        주 찬양하고 기도하며 네 본분 힘써 다하라
        주 약속하신 모든 은혜 네게서 이뤄 지리라
        참되고 의지하는 자 주께서 기억하시리......."

이 찬송을 들으면서 나는 속으로 얼마나 흐느껴 울었는지 모릅니다. 아내에게 눈물을 안보이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습니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몇번이고 그 찬송을 불렀습니다. 내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복음이였습니다.

 

 여러분, 찬송이 무엇입니까?
찬송을 통하여 복음이 증거 되는 것입니다. 찬송에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그저 단순히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인데 그 능력의 파급은 실로 놀랍습니다.  다시 말해서 찬송은 복음이거나, 복음의 해설처럼 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듣는 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복음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찬송은 듣는 이로 하여금 영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 좋은 예를, 요한 웨슬레(감리교의 창시자)의 선교 여정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신대륙(미국)에 있는 이교도들에게 복음을 전하겠다는 부푼 꿈을 안고 오클레소프 장군이 이끄는 조지아주 이민단의 소속 목사로 1735년 10월 중순에 그리 크지 않은 배를(Thymonth호) 타고 대서양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불어닥친 폭풍으로 인하여 웨슬레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어디에선가 은은하고도 힘차게 들려오는 찬송의 소리가 있었습니다. 함께 승선하고 있던 26명의 모라비안 교도들이... 많은 사람들은 지금 두려움에 떨고 있는데, 아주 평안하게 찬송을 부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찬송의 소리는 요한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자신의 믿음이 얼마나 보잘 것이 없는가....육신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참으로 비참하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날의 체험을 일기에 기록했는데, "오늘은 내가 지금까지 겪어온 날 중에 가장 영광스러운 모습을 본 날"이라고 기록해 두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찬송은 선교적 의미가 매우 큽니다. 아름다운 복음의 나팔이 되어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도구가 되고, 그 동안 수없이 외쳐왔던 복음의 능력을 확증해 보이는 영적인 노래이기도 합니다.

 

4) 찬송은 서원과 결단의 고백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매일 부르고... 내 평생에 불러야 할 이 노래가 오늘 내 자신에게는 과연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의 내용을 살펴 보면 정말 대단합니다. 너무나 진실한 신앙의 고백이요, 뜨거운 선교의 열정속에서 작사가 되고 작곡이 되었음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때문에 찬송을 하다 보면, 가슴이 뭉클해지고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자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찬송하는 소리만 들어보면, 이 땅 위에 사도 바울이 수백만이요, 베드로와 야고보가 그렇게 많은데도... 생활 속에서는 좀처럼 신앙의 거인을 만날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앞에서 우리는 분명히 찬송이 예물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렇다면 그 예물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요, 모두 다 기억해 둘만한 사랑의 고백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의 삶에는 얼마만큼의 잘못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 보낸 주님의 편지를 보면,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초대교회 성도들의 행위를 아시는 주님이, 오늘 우리들의 행위를 보실 때 과연 찬송으로 여길만한 삶이 얼마나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동안 하나님을  너무 많이 기만했고, 그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어 왔습니다. 혹시,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 분도 있을 줄 압니다. 그렇다면 몇곡의 찬송을 그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만 입이 내게 있으면 (23장)
  {만 입이 내게 있으면 그 입 다 가지고
  내 구주 주신 은총을 늘 찬송하겠네.}

 

 이 찬송은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입니다. 그 내용은 설령 입이 만개가 있다 할지라도 그 입으로 죄를 짓거나 망령을 부리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찬송하는데 쓰겠다는 고백입니다. 우리는 이 찬송을 즐겨 불렀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입술에서는 과연 얼마나 찬송이 있었습니까?... 만 개는 커녕 한 입을 가지고서도... 주님을 찬송하고 덕을 세우기 보다는... 의롭지 못한 저속한 언어로 얼마나 몸과 마음을 더럽혔는지 모릅니다.

 

  달고 오묘한 그 말씀 (235장)
  {달고 오묘한 그 말씀 생명의 말씀은
  귀한 그 말씀 진실로 생명의 말씀이
  나의 길과 믿음 밝히 보여 주니
  아름답고 귀한 말씀 생명 샘이로다
  아름답고 귀한 말씀 생명 샘이로다.}

  참으로 아름다운 찬송입니다. 이 찬송을 부를 때면, 이 시대에 활자화된 말씀이 없었다면, 인류가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할 때, 성경에 대한 소중함을 더 느끼게 되고.. 아울러 자유롭게 말씀을 대할 수 있는 환경을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더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찬송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달고 오묘한 생명의 말씀'이라고 노래를 하지만 사람들은 왜 그렇게 성경 읽기를 싫어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자신이 마치 방송사에 PD라도 되는 듯이 TV는 매일 보면서, 성경 한 장을 읽지 않고 하루 해를 보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신문은 그토록 즐겨 읽으면서도 말씀 한구절을 묵상하지 않은 채... 한 주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에서 즐겨 부르는 찬송가중에 '베스트 10'을 꼽으라면 355장입니다. 이 찬송은 언제나 그 순위에 들어가 있을 것입니다.


   부름 받아 나선 이 몸(355장)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만 따라 가오리니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

 

 이 찬송을 부르는 그 순간 만큼은 한국성도들의 신앙고백을 사도 바울의 수준으로 끌어 올립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의 마음이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 라고 큰 소리쳐 외치지만 한번이라도 복음을 제대로 전해 보았는지를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불속에라도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겠다는 사람들이 내 가족, 내 이웃들에게 얼마나 전했는지를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는 너무 많습니다. 우리는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라는 찬송을 부르면서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하면서 내 뜻대로만 하고, "주 없이 살 수 없네"를 부르면서 주님을 멀리하는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사랑하는 찬양대 여러분!
 우리의 모든 삶의 가치와 기준과 그 목적을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우리는 찬송을 부르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날.. 우리 주님을 슬프게 했습니까?....
 이 찬송을 통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었습니까?

 사회에서도 말과 행실이 다른 사람을 가장 쓸모 없는 인간으로 취급하는데..., 하물며 구원받아 거룩한 백성으로 구별된 성도들이... 어찌 찬송으로 주님을 욕되게 하고 말과 행실이 다른 사람을 살아야만 하겠습니까?....그러므로, 한걸음 더 나아가서 찬송과 생활은 일치해야 합니다. 아니, 그렇게 하기 위하여 몸부림쳐야 합니다.

 사랑하는 찬양대 여러분!, 우리의 찬송은 천사도 흠모할 놀라운 사명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결코 취미이거나 선택사항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찬송이야 말로 믿음의 고백이요 신앙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요. 아무리 믿음 좋기로 소문난 사람이라도 시험 중에 찬송하지 못하면... 그 믿음의 본질을 의심해 봐야 합니다.  또한, 찬송은 예물이라고 했습니다. 예물은 예물답게 항상 정성을 다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드리는 대상을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오직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찬송은 복음의 나팔이라고 했습니다. 찬송의 선교적인 의미... 그 가치는 실로 대단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잘 보여지고, 잘 들려지기 위해서 또는 선교를 하기 위해서 찬송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찬송을 드릴 때 얻어지는 놀라운 은혜요 축복입니다.

 끝으로 찬송은, 우리들 자신에게 있어서 하나님께 드리는 서원이자 결단의 고백입니다. 서원과 결단은 항상 신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기 위해서 주님의 은혜를 더 많이 간구하고 스스로 낮아져야 합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있어서 찬송은 더 이상 보통 노래가 아닙니다.
 부를 때마다 새롭고,
 부를 때마다 뜨겁고,
 부를 때마다 축복이 될 것입니다.
 "호흡이 있는자 마다 여호와를 찬양하라" 했습니다.
 우리가 살아 숨쉬는 동안...... 아니, 그 나라에 가서도... 영원히 영원히 주님을 찬송하시는 우리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