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마태복음

[마6:9]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빠에게 기도하라

'코이네' 2019. 10. 6. 00:19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마태복음 6:5-15

 

 

아버지!

하늘에서 내려 오셔서 용서 하소서.

지금 일이 없어 놀고 있는 불쌍한 사람들.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하루종일 생각하는 것은 고작 그것 뿐.

눈이 빠지게 무엇인가 기다리면서

애절하게 당신께 기도하고 간구 하면서

입 속으로는 불평을 웅얼거릴 뿐인 사람들.

살아 계신다면 하늘에서 내려 오소서.

내려 오소서 아버지여.

이 좁고 외진 구석에서 저는 굶주려 죽어 갑니다.

왜 태어나야 했는지도 모르는 채

일거리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부어오른 손을 들여야 보고 있는 나를 내려 오셔서

잠시만이 라도 보아 주소서.

걸레쪽 같은 내 신발

텅빈 위장의 이 쓰라림

내 입에 빵조각 하나 던져주는 이 없는 이 살찐 도시.

열병은 내 살을 져미고

잔비를 맞으며 잠들고

추위마저 나를 박해하고 괴롭힙니다.

왜 이 지경인지 나는 도무지 알 수 없사오니

아버지여 내려 오셔서 내 영혼을 어루만져 주소서.

내 마음속을 보아 주소서.

나는 도둑놈도 암살자도 아닙니다.

나는 어린아이 같을 뿐

그런데도 그들은 특하면 나를 두들겨 팹니다.

왜 그러는지 정말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 내려 오소서. 만약 살아 계신다면

자포자기해 버릴까 생각도 했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부노는 쌓이고 샅여 이제 싸울 준비를 갖춥니다.

목구멍이 피로 가득할 때까지 울부짖습니다.

더 이상 못 참습니다.

나도 감정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니까요.

내려 오십시오.

당신이 만드신 나를 위해

무언가 해 주시지 않으시렵니까?

아버지여!

 

이 시는 아르헨티나의 시인 '후안 겔만'이라는 사람이 쓴 [한 실업자의 기도]입니다. 주기도문의 배후에는 이와같은 역설적인 상황이 깔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한 피조물인 이 세계가 변해서 우리의 삶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우리의 희망을 위협하는 악마적인 권세의 지배 아래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 세계의 일그러지고 뒤틀린 모습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의 사랑스런 아버지라는 증거를 찾아볼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모순으로 가득차 있고 부조리하고 불균등 합니다. 이것이 바로 2천년 전 예수님이 이 땅에서 체험하신 세계요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시지 않았고 기도하라고 요청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사랑의 아버지라고 감히 부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마굿간에서 태어난 예수님, 버림 받은 곳 갈릴리 나사렛에서 자라난 예수님,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소년 가장이 되어서 손에 못이 박히도록 노동하신 예수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머리둘 곳 없는, 집 없는 예수님의 그 삶. 죄인의 친구가 되고 소외된 자들의 편이 되었다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끌어다가 낭떠러지에 밀어서 죽이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곳에서 간신히 빠져나오기도 했습니다.

 

죄 없는 예수님을 잡아 살인 강도 대신에 십자가에 못박아 놓고, 침뱉고 조롱하고 엎드려 절하고, 가시관을 씌우고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고 갈대로 그 뺨을 치는 곳 그 골고다 언덕, 하나님이 사랑스런 아버지가 되신다는 증거는 털끝 만큼도 찾을 수 없는 무신성의 장소, 무신성의 시대를 예수님께서는 사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무신성의 세계에 계시면서 예수님은 이 세상 그 누구도 부르지 않았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시면서 날마다 기도 하셨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시면서 주님이 기도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아빠라고 하는 말은 어린이들이 사용하는 가정의 언어요 어른들이 그들의 아버지나 노인들을 존경할 때 표현하는 애칭입니다. 아빠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언어요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말합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어린아이가 아버지와 이야기 하듯이 단순하게 그리고 친밀하게 확신을 가지고 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시기 전에 먼저 사람에게 보이려고 기도하지 말라고 경고하시고 또한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교회에 가장 잘못 휩쓸고 지나간 것 가운데 하나가 잘못된 기도입니다. 기도하는 것이 자기의 이가 되고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고 하나님 앞에서 많이 중얼거려야 하나님이 들으시는 줄 아는 잘못된 생각이 교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입으로 [아바]라고 하는 표현을 170번이나 쓰고 있습니다. 희랍어 성경에는 예수님이 평소에 쓰시던 하나님을 부를 때의 호칭인 [아빠]라는 아랍어를 그대로 헬라 아말속에 옮겨 놓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의 이름을 아빠라고 가르쳐 주시기 전까지는 하나님이 아빠라는 사실을 아무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구약성경에서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이 15번 나오기는 하지만 그 아버지는 이스라엘 민족을 탄생시킨 민족의 아버지요, 이스라엘 왕이 하나님을 부를때 불렀던 이름입니다. 뿐만 아니라 신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15번 나오기는 하지만 그 아버지는 이스라엘 민족을 탄생시킨 민족의 아버지요, 이스라엘 왕이 하나님을 부를때 불렀던 이름입니다.

 

뿐만 아니라 신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이방 나라에서도 사용했던 신의 이름입니다. 바벨론 신화나 피그족, 이집트인, 앗시리아인, 그리이스, 로마들의 신화에 보면 신들을 부를때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이 아버지는 어떤 아버지입니까? 때로는 인간을 협박하고 착취하고, 희생을 요구하며 심판하고, 또 어떤 신들은 사람잡아 먹는 것을 가장 좋아하기도 하고, 인간에게는 무관심 했던 그러한 신들의 이름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호칭을 아버지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서 깊이 올바로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인간은 너무나 어려서 후견인과 가정교사의 보호를 받아야 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서 세상의 초등학문과 같은 지식밖에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때가 되어서 그의 아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모습을 우리에게 완전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통하지 않는 하나님 지식, 예수님을 통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하나님을 올바로 알지 못하고 그 믿음과 신앙은 오히려 인간을 더 괴롭히고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잘못된 신의 인식이 된다는 것을 성경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이 12살 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요셉은 예수님을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 갔다가 예수님을 잃어버렸습니다. 3일동안 찾아 헤매다가 찾았을 때 마리아는 "네가 어디 있느냐? 왜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너를 찾도록 했느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의 첫마디 말씀은 "어머니, 내가 내 아버지집에 있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라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사실 [아빠]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빠]라고 하신 첫 음성입니다.

 

30세가 되어 공생애를 시작하시고 예루살렘을 방문하신 예수님은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강도의 굴로 만들지 말아라]하고 화를 내시면서 장사꾼들을 내어 쫓았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요 만민이 기도하는 집입니다. 이 집을 강도의 굴로,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가장 괴로울 때 부른 이름도 [아빠] [아버지]입니다. 마가복음 13:36[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 마지막 숨을 거두시면서 하신 최후의 말씀도 [아버지시여 내 영혼을 아빠의 손에 맡깁니다]였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시기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빠이신 하나님]이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기도가 우리에게 주는 첫째 의미는 하나님은 우리와 너무너무 가까이 계시는 분이라는 신앙입니다. 우리의 머리카락을 다 세시는 하나님, 참새 한 마리 땅에 떨어지는 것도 관심하시는 하나님, 우리 삶의 한복판에 계시는 하나님임을 고백하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이켜 너희가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빠]라고 부르는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을 지극히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으로 믿고 그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이 가까왔다는 것은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을 인식할 때 그 천국이 우리의 삶에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을 아바라고 고백할 대에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고 고백할 때에 그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잉태되고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해 있습니까? 다른 말로 하면 여러분에게 믿음이 있습니까? 혹시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면 자기의 삶이 불안전하고 자기 멋대로 인생을 살지 못할까 두렵습니까? 하나님과 너무 멀리 떠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 삶에 깊숙이 관여하셔서 언제나 그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때에 여러분은 믿음이 있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은 미디안 광야에서 양치던 모세를 부르셔서 그를 애굽에 보내서 이스라엘을 구원해 낼 지도자로 삼으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계속해서 거절 했습니다. 왜냐하면 모세는 하나님을 너무나 멀리 계시는 분으로 밖에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애굽에서 살면서 그는 바로의 손자가 되었지만 애굽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황을 보았을 때 하나님은 결코 가까이 계시지 않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고 그 현실을 도피하고 떠났습니다. 그는 삶의 역설적인 상황속에서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을 도저히 믿을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모세에게 이스라엘 지도자로 나설 것을 계속해서 요구 하셨습니다. 이때 모세는 하나님께 "하나님 당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이 물음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 당신은 누구입니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대답하시기를 [나는 나다]라고 그랬습니다. [I am Who I am]. 우리말 성경번역에 보면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라고 했습니다. 철학적이면서 상당히 어려운 번역입니다. [나는 나다]라고 하는 말의 뜻은 [나는 여기 있다]라는 뜻입니다. '네가 있는 곳에 내가 있다''너와 함께 있는 나'[여호와]라는 이름은 [너와 함께 있는 나]라는 뜻입니다. 여호와라고 하는 하나님의 이름의 뜻은 '너가 있는 곳에 너를 위하여 내가 거기 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습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 우리의 아빠로 계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우리는 아버지로 고백하고 믿고 그 믿음오 살아가는 자 들입니다. 이 믿음으로 모세는 하나님이 계시리라고는 눈꼽 만큼도 생각할 수 없는 무신성의 땅, 바로가 권력을 휘두르고 수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밑의 노예로 탁식하는 하나님이 없는 것 같이 보

이는 그 애굽 땅에 하나님과 함께 들어 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 민족을 구원해 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도저히 하나님을 느낄 수 없는 삶의 역설적인 현실속에서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용기를 가진 그 사람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때로는 사랑하는 식구가 먼저 세상을 떠나고, 인생에 실패와 죽음이 찾아오고 질고가 찾아오고, 인생이 헐벗고 주리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같은 역설적인 상황속에서 하나님이 너무 가까이 계심을 고백하고 하나님을 아빠라고 단순하게 부를 수 있는 그 사람의 심령속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신다고 주님은 선언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계신 아바로 믿고 바라보고 고백하고 기도하는 자만이 믿음을 가지고 현실을 거슬러 올라가고 악마적인 세상과 대결하고 승리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빠이신 아버지]라고 하는 기도가 주는 또 한가지 의미는 아빠이신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다고 하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빠처럼 가까운 분이시면서 또한 먼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하늘에 계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유일성, 초월성, 절대성, 하나님의 무한하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비롭고 사랑이 많으신 가까이 계신 아버지이시면서 또한 하나님은 인간과 같지 아니하는 절대적인 타자이심을 우리에게 보여준 것입니다.

 

하나님은 육신의 아버지와 혼동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육신의 아버지를 단순히 확대시켜 놓은 존재가 아닙니다. 그 분은 우리 곁에 계시며 역사속에 내재해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과 고통과 무관하신 분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는, 인간과 절대적인 타자의 존재로써 존재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가까이 계십니다. 바로 그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아빠가 되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바이신 하나님께 접근하는 것이 얼추보기에는 너무 쉬울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믿기가 그렇게 쉬워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이 부르시지 않고서는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없음을 성경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 길은 거칠고 험한 길이며 그 길을 따르려면 용기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순을 지긋이 견디며 동시에 하나님을 "아빠"라고 큰 소리로 외칠 수 있는 용기와 능력을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계를 사탄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변혁시키는 싸움터로 우리를 불러 내십니다.

 

가까이 계시면서 또한 여전히 멀리 계시는 하나님만이 진정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고 진정 이 세계를 이끌어가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신성을 박탈당하고 인간의 욕구에 맞추어 조종되는 존재로 전락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자기 마음대로 주무르고 하나님의 뜻을 자기 마음대로 주장하려고 합니까? 예수님에게도 역시 하나님은 가까운 동시에 멀리 계십니다. 십자가의 극심한 고통속에 있을 때 너무나 멀리 계시는 하나님이심을 예수님은 체험했습니다. 하나님의 부재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하셨습니다. 멀리 계시는 하나님, 예수님의 뜻대로만 이끌어가지 아니하시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뜻대로 이끌어 가시고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임을 예수님은 고백 했습니다.

 

그러나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이 너무 가까이 계심을 체험했습니다. "아빠 내 영혼을 아빠의 손에 맡깁니다"고 하셨습니다. 니이체는 인간 실존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두가지 충동 즉 욕망과 공포에서 도피하려고 하는 도피심리가 신앙이라고 했습니다. 강한 자에 대한 약한 자의 원한이 투사된 것이 신앙이라고 했습니다. 무기력과 욕구불만의 소산으로 나타난 것이 신앙이라고 했습니다. 강한 자들의 관념주의가 신앙이라고 했습니다.

 

프로이드는 집단적인 유아신경증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 신앙이라고 했습니다. 유아기적인 정신작용에서 사람들은 무엇을 의지하며 믿음을 가진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프로이드는 하나님을 인간의 유아적 무능력감을 보상받기 위하여 투사시키는 어떤 가공의 존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 자리에 제대로 성숙하지 못한 유아적인 심리 때문에 이 자리에

나왔습니까? 우리가 인생의 모든 욕망과 공포에서 도피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왔습니까? 예수님의 삶은 도피의 삶이 아니었습니다. 강한 자에 대한 원한으로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면서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는 욕구불만과 체념의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오늘에 대한 충성과 땅에 대한 충성으로 자기의 인생을 비치기로 결다난 용기있는 사람들의 종교입니다. 초기 기독교 신앙은 노예들과 소외되고 가난한 자들이 그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리스도교는 그들을 예속과 소외 상태에 방치해 두지 않습니다. 그들을 자유하게 했으며 새로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저들의 삶이 변했고 저들의 환경을 변화시켰습니다. 저들의 사회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더 아름다운 사회로 변화시키는 이들이 그리스도인 드이었습니다. 그들은 박해의 현장에서도 하늘에 계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것을 하나님께 고백하고 기도드리면서 때로는 저들의 삶을 용감하게 내던지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할 때 하늘에 계신 아빠이신 하나님께 기도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가까이 계시는 아버지 하나님과 더불어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은 우리의 요구대로 우리의 뜻대로 우리의 손 안에 놀고 계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십니다. 멀리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멀리 계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또한 사랑하는 사랑을 가집시다. 이 믿음이 우리의 죄를 이끌어가는 모든 소외와 비인간화에서 우리를 그대로 버려 두지 아니하고 소외에서 우리를 건져 냅니다. 비인간에서 우리를 건져냅니다.

 

현대 신학자들은 현대인의 가장 큰 죄를 소외나 비인간화에서 우리를 그대로 버려두지 아니하고 소외에서 우리를 건져 냅니다. 비인간에서 우리를 건져냅니다. 현대 신학자들은 현대인의 가장 큰 죄를 소외나 비인간화라고 했습니다. 인간이 현대의 많은 물질문명을 가지고 살지만 우리인간이 지금 소외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더 큰 죄는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당한 우리 인간의식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면서 그 하나님은 우리와 가까이 계시면서도 하늘에 계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창조 주 하나님이시요, 그리고 절대적인 하나님이신 것을 고백하고 우리의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대로 우리를 인도해 가시는 것을 믿고 고백할 때에, 우리를 소외에

, 비인간화된 삶에서 건져주시고 아버지 하나님이 계시는 자리 영광의 자리로 인도해 주시게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어떤 삶의 정황 속에서 고개를 숙이고 하나님께 기도할때에 먼저 우리가 해야 할 기도는 [하늘에 계신 아빠이신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이 한마디의 기도가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문제를 잠 재우고 우리의 삶에 용기를 주고 삶에 일어나는 모든 역설적인 상황을 도한 거슬려 올라가는 놀라운 믿음과 용기를 주는 기도가 될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빠이신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