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골로새서

[골4:1] 세월을 아끼라

'코이네' 2019. 10. 1. 22:12

  세월을 아끼라

골로새서 4:1-6

 

 

소진 증후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영어로는 burn-out 혹은burn-out syndrome이라고 합니다. 현대인이 가진 정신병의 하나입니다. 소진증, 탈진증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진찰로도, 어떤 기계에도 이 증후군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장 무서운 중병입니다. 탈진상태에서 오는 병입니다.

젊어서는 의욕을 가지고 딴에는 정력을 다하여 살아왔습니다. 무엇인가 앞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나름으로 남못지않게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생각해보니, 그 가시적 경과가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한계를 느끼게 됩니다. ‘이제는 다 왔구나. 내가 아무리 노력하고 아무리 힘써봐도 고작 여기까지구나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렇게 한계를 느끼는 동안에 그는 그만 좌절하게 되고, 실패감에 빠지게 되고, 무력하게 되고, 허탈에 빠집니다. 때로는 내가 겨우 이 순간을 위해서 그 많은 수고를 했던가? 그 많은 애를 썼던가?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렇게 라는 존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때에 탈진상태에 빠지는 것입니다. 주로 정신노동을 하는 사람과 관리직에 종사하는 사람에게 있는 증후입니다. 그래서 불안과 피로, 의욕 상실, 의미 상실, 무기력에 빠지며 스트레스가 쌓이고 쉽게 화를 냅니다. 혹은 식욕 부진, 체중 감소, 불면 증세가 옵니다. 그리고 모든 일에 무관심해집니다. 아직 체력도 있고, 기회도 있고, 능력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한계를 생각하면서 내가 가진 가능성과 능력마저 지레 다 포기해버리고 맙니다.

이렇듯 소진증후군은 치명적인 병입니다. 모든 병의 원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자본, 지식, 경험, 노력.....다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느낄 수 있는 것이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내게 한계가 왔습니다.

 

먼저 아이온이라고 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동시적으로 똑같이 주어지는 수평적 관계의 시간입니다. 24시간 지구의 회전과 함께 우리 모두에게, 모든 생물에게 똑같이 주어지는 이런 시간이 있습니다.

 

두 번째로 크로노스라고 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이것은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라 틀별한 의미의 시간입니다. 수직적인 개념의 시간으로서 과거에서 현재로, 미래로 이어지는 역사적 시간을 말합니다. 여기에는 크나큰 의미의 사건들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역사적 사건이 있는, 역사적 시간이 있습니다.

 

세 번째로, ‘카이로스라고 하는 시간입니다. 상황적 시간입니다. 내가 어떤 사건에 부닥치는 그 정점에서 이루어지는 상황의 시간입니다. 다른 말로 세월이라고도 번역하고 기회라고도 번역할 수 있는 성격의 시간입니다. 이런 상황적 시간이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시간은 카이로스입니다. “세월을 아끼라(5)” -- 헬라어로 톤 카이론 엑사고라조메노이라고 하는 이 구절을 우리말로 세월을 아끼라라고 번역해 놓은 것입니다. ‘아끼라라는 말로 번역을 한 이 엑사고라조메노이라고 하는 말의 뜻을 특별해서, 우리가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은 속량하라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redeem in the time’이라고 표현됩니다.

 

신학자 윌리암 바클리는 이 말을 옛날의 역사를 예로 들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옛날에 노예제도가 있었습니다. 노예는 한번 노예로 팔리면 일생동안 노예입니다. 아무 소유권도 없습니다. 그의 재주, 그의 능력, 그가 버는 돈도 전부 주인의 것입니다. 그에 관한 한 무엇이든지 다 주인의 것입니다. 생명 자체가 주인의 것입니다. 때때로 노예가 주인이 요구하는 것보다 더 충성되고 아주 진실되게 일을 하면, 주인이 그것에 감동을 해서 자기 소유에서 얼마의 돈을 줍니다. 그러면 노예는 이 돈을 신전에 갖다 맡긴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 또 노예가 얼마동안 일을 잘하여 주인이 기분이 좋고 만족스러울 때에 얼마의 돈을 주면, 노예는 다시 그것을 신전에 갖다 맡기고, 또 주면 맡기고.....이렇게 하기를 반복하여 그 액수가 어느 정도로 차면 노예는 주인을 모시고 신전에 가서 그동안 모아두었던 돈을 찾아서 자기 몸값을 치릅니다. 그 때부터 노예는 자유하게 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바로 그 순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자유할 수 있는 구원의 시간, 생명의 시간을 앞에 놓고, 정성껏 충성되이 일해서 조금씩 조금씩 내 속량의 시간을 위하여 저축해나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시간을 속량하는 것입니다. 순간순간 고귀하게 기회를 속량해나가는 바로 그런 시간을 말합니다. 그래서 세월을 아끼라라는 말씀을 영어로 번역할 때에는 ‘make the most of every opportunity’ 하기도 하고 ‘make your time the best’라 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최선의 시간으로 알고 시간을 속량하라 하는 귀중한 의미가 여기에 있습니다.

 

시간을 한번 구분하여 생각해보면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real time---실제적 시간입니다. 내가 알거나 모르거나 시간은 엄연히 존재합니다. 두 번째는 물리적 시간(physical time)입니다. 이것은 계측기계에 나타나는 시간을 말합니다. 우리가 시계로 재는 그런 시간을 의미합니다.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은 심리적 시간(psychological time)입니다. 심리적 시간이란 시계에서 볼 수 있는 시간과 달리, 길 수도 있고 짧을 수도 있고, 초조할 수도 있고 느긋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결정적인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종교적시간(religious time)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보는 시간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어떤 두 사람이 똑같은 시간, 똑같은 현실을 살아가는 것 같으나 그실 한 사람은 지옥행으로 살고 다른 한 사람은 천국행으로 산다, 그 말입니다. 두사람이 똑같은 감옥에 있는데, 한 사람은 죄를 지어 감옥에 들어가 있고 다른 한 사람은 감옥에 들어간 사람을 방문하러 가 있다는 것입니다. 현장에 똑같은 모양으로 있으나 같은 것이 아닙니다. 질적으로 다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구원받은 자의 시간이 있습니다. 이미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양육되는 시간이 있습니다. 이것은 훈련받는 과정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로 보기에는 못마땅한 것이 있습니다. 게으르고, 잘못됐고, 나태하고, 거짓되고, 욕심이 많고, 교만하고......이런 것들을 하나님께서 다 제거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다듬어가시고 양육하십니다. 그러한 의미에서의 구속받은 자의 시간을 말합니다. 대단히 중요한 시간입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진노 하에 있는 시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심판하실 것입니다. 무서운 심판을 받고 있습니다. 심은대로 거둡니다. 숨겨진 죄가 드러나서, 오래오래 숨겨졌던 것이 다 노출이 되면서 계속 심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무서운 심판--하나님의 진노 하에 있는 그런 시간이 있습니다.

또하나의 시간이 있습니다. 이것은 심판 유예기간입니다. 이미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본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구원받을 사람들을 위하여 필요한 어떤 경륜이 있기에 집행이 유예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지금 큰 죄를 지어서 심판을 받게 됩니다. 당장에 벼락을 맞아서 끝나고 말아야 되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영적으로는, 실제적으로는 심판을 받고도 그 형은 집행이 유예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 바리새인들을 향하신 예수님의 심판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11:41)”--헬라 원문대로 말하면 아나데마티조입니다. ‘천벌을 받으라입니다. 그것은 심판받은 것입니다. 이미 심판을 받았지만 그러나 멀쩡하게 살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구원받기 위한 생애가 아닙니다. 그저 형 집행이 유예되고 있을 뿐입니다. 바로 왕이 그러했고, 가룟 유다가 그러했습니다. 이렇게 이미 심판을 받고 남은 생애를 사는, 그런 의미의 시간이 있습니다.

또하나, 구속을 기다리는 자의 아름다운 시간이 있습니다.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8:23).” 비록 세상에서는 고통스럽지만 양자될 날, 주님의 재림을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순교자에게는 앞으로 누릴 영광이 있습니다. 그것을 바라보면서 지금 순교의 과정을 치르고 있습니다. 어려운 터널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고통 속에서 지금 피를 흘리며 순교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기간, 이 고난의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영광된 순간입니까? 성도의 생활에는 이같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구속을 기다리는 성도의 시간이 여기에 있습니다.

 

빌립 브룩스라고 하는 미국의 감리교 감독 한 분이 연로한데 지금 중병을 얻어서 임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너무 괴로워서 아무도 만나지 않습니다. 누가 와도 안만나줍니다. 그런데 하루는 어렸을 때에 학교를 같이 다니던 잉글슨이라는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그렇게 여러 번 전도를 했건만 끝까지 무신론자이기를 고집하며 일생을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만남을 다 거절하던 사람이 이 친구는 만나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 한참 얘기를 나누다가 돌아갔습니다. 가족들은 궁금해서 물어보았습니다. “귀한 분들은 다 거절하시면서 왜 그 변변치 못한 무신론자 친구는 만나셨습니까?” 그러자 이 감독이 아주 유머러스하게 대답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천당에 가서 만날 것이니 인사 안해도 되지만, 저 친구는 틀림없이 지옥에 갈 것이니 마지막으로 인사나 하려고 만났지.” 여러분, 같은 시간에 사는 것 같으나 절대로 같은 의미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시간의 속성을 생각해보셨습니까? 시간이란 무형자원입니다. 자본 중에서 제일 큰 자본이 시간입니다. 젊은 사람에게는 사실 시간이 많지 않습니까? 그것 때문에라도 젊은 사람은 절대로 슬퍼할 권리가 없습니다. 나이많은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젊었다는 것 하나만 가지고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습니다. 젊은데 울고짜고 하는 것은 난센스입니다. 젊었다는 것이 얼마나 중효합니까? 시간이 있지 않습니까?

, 이제 보십시오. 시간은 가장 큰 자원입니다. 무형자원입니다. 또 시간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주어집니다. 부한 자 가난한 자의 차별이 없습니다. 시간은 가장 공평합니다. 또 사용하든 사용하지 않든, 뜻을 알든 모르든간에 시간은 소멸됩니다. 과거에서 현재로 계속해서 시간은 흘러갑니다. 내가 알거나모르거나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은 자꾸만 지나갑니다. 또하나, 시간은 저장할 수 없습니다. 돈도 저장하고 지식도 저장하고, 컴퓨터가 어떻고......무엇이든 저장한다고 합니다만 시간은 저장되는 것이 아니다. 그저 흘러갑니다. 시간은 양도하지 못합니다. 매매도 못합니다. 돈 주고도 사지 못합니다. 이래서 시간은 소중합니다.

가끔 이렇게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시간 좀 내주세요.” 돈을 달라면 얼마를 줄 수 있지만 시간을 줄 수는 없습니다. 혹 어떤 사람이 나를 위해 한 시간을 내주었다면 여러분은 정말로 고맙게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일생에서 소중한 한 시간을 내게 떼어준 것이니까요. 이것은 돈으로 계산할 문제가 아닙니다. 시간은 양도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닙니다. 그래 가끔 이런 말을 하지 않습니까? 젊은 사람이 갑자기 죽었을 때, 나이많은 사람이 슬퍼하면서 하는 말입니다. “네가 살고 내가 죽어야 될 것을 ......” 그렇습니다. 시간은 양도하지 못합니다. 매매도 못합니다.

시간에는 물리적 시간과는 다른 심리적 시간이 있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에 시간이라는 성격의 가변성이 있습니다. 보십시오. 기다리는 자에게는 시간은 너무 깁니다. 두려워하는 자에게는 빠르게 지나갑니다. 비탄에 빠졌을 때에는 시간이 그렇게 길 수가 없습니다. 기뻐할 때에는 시간이 짧습니다. 이런 심리적 시간이 있습니다. 한가지 더 생각할 것은, 지나간 시간은 되돌아오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한 번 지나가면 그만입니다.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이 시간입니다.

 

그런데 이같이 소중한 시간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어떻습니까? 몇 가지 유형을 살펴보겠습니다.

 

첫번째로 시간 파괴형이 있습니다. 그 소중한 시간을 파괴해버립니다. 도박을 하는 사람들, 술을 먹는 사람들, 마약을 하는 사람들, 이밖에도 많습니다. 그 소중한 시간을 그래 어쩌자고 술마시고 멍청한 가운데 보내고 있습니까? 그 아까운 시간을 말입니다. 그뿐입니까? 남의 시간가지 빼앗지요. 남의 시간까지 파괴합니다. 이제 일어나서 가겠다는 사람을 술 한잔만 더 하라고 붙들어놓습니다. 그사람의 소중한 시간을 내가 파괴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간 파괴형의 인간이 있기에 세계는 어려운 것입니다. 사실은 시간 파괴가 아니라 생명 파괴인 것입니다.

 

두 번째로 시간 소비형이 있습니다. 계획은 많이 세워 놓고 실천을 안합니다. 약속은 많이 했는데 지키는 것은 없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무엇을 해야겠다 생각만 복잡했지 정작 이루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무엇 하나 제대로 하는 것이 없어요. 지구력이 없어요. 무엇을 시작했다 하면 끝을 내야지 들쑥날쑥, 하다말다 합니다. 도대체 이게 뭡니까? 좀 너저분하지 않습니까? 창피하지 않습니까? 언제까지 이 모양으로 살 것입니까? 시간 소비형입니다. 또 번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쓸데없는 일에 걱정하고 있어요. 시간 낭비입니다. 또 잠이라는 것은 적당히 자야지요. 그런데 몸이 무거울 정도로 잠을 많이 잡니다. 시간 소비입니다. 그것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니까요. 멍청한 가운데 지나간 것이니까요. 그런고로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시간 창조형이 되어야 합니다. 시간의 뜻을 알고, 가장 고귀한 시간으로 그 의미를 꽉꽉 채워나가야 합니다.

시간 관리에 있어서 그릇된 환상이 있습니다. 하나는 일을 빨리 처리하면 시간의 의미가 살아남는 줄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또한 일을 오래오래 하면 시간의 의미가 좋아지는 줄로 압니다. 그것도 잘못된 생각 입니다. 이것저것 다는 설명을 해드리지 못합니다. 간혹 어떤 사람은 스케줄을 꽉 차게 해서 새벽부터 밤까지 바삐 돌아갑니다. 그러면 시간의 의미가 살아남는 줄로 아는데, 이것도 큰 착각입니다. 오히려 시간의 의미를 파괴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최선의 시간 관리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먼저는 은혜로 주어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내 시간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내게 은혜로 내게 주어졌다, 그것을 아는 것이 중요 합니다. 거기서 출발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됨을 감사하면서 은혜요, 은사요, 사명이요, 기회로 여기십시오. 하나님께서 나에게 두신 기대가 여기에 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시간에 임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자원성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억지로 끌려가는 시간은 나를 끌고 있는 자에게 빼앗긴 시간입니다. 그런고로 무엇을 하든지 자원해서 선택적으로 자유한 가운데서 행해야 할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같은 직장생활을 해도 그렇습니다. 내가 가고 싶어서, 내가 선택해서, 나의 일을 하는 마음으로 즐겁게 일하면 그것은 나의 시간이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도살장에 끌려가는 기분으로 할수없이 일한다면 그것은 완전히 시간을 빼앗긴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간간이 이런 사람을 봅니다. 무슨 일을 하는데 그저 시간만 있으면 휴가를 갖겠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말, 휴가, 주말, 휴가.....이것만 바랍니다. 불쌍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에게는 휴가인 시간은 내 시간이고 나머지 시간은 전부 빼앗긴 시간인 셈입니다. 원래 제대로 사는 사람은 휴가를 안가집니다. 왜 그렇지요? 갈 필요가 없으니까요. 하루하루 사는 것 자체가 다 휴가인데 무엇하러 또 휴가를 가집니까? 내가 자원해서 즐기고 있으면 그것이 바로 시간의 의미를 창조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그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또한 시간을 질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증오하는 시간은 빼앗긴 시간입니다. 내가 누구를 미워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사람에게 내 시간을 빼앗긴 것입니다. 그 사람으로 인하여 손해본 것도 많은데다 나의 고귀한 시간까지 빼앗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멍청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시기 질투도 합니다. 내가 질투하는 사람에게 내 시간을 바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또한 바보스럽습니다. 이것도 그냥 없어지는 시간입니다. 그런고로 사랑하는 시간만이 진정한 내 시간이요, 감사하고 기뻐하는 시간만이 시간의 의미를 창조하는 시간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시간의 의미를 질적으로 시간의 의미를 높여서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더욱이 미래지향적 영원지향적 시간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여러분, 비행기를 타보셨습니까? 저는 비행기를 탈 때마다 거기서 인생 철학을 얻곤 합니다. 비행기를 타면 말입니다. 여러 가지 해야 할 일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반드시 제가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먼저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나서 하는 일이 무엇이냐 하면 시간을 바꿉니다. 시계를 꺼내어 시계바늘을 행선지의 현지 시간으로 확 돌려놓습니다. 내가 지금 가야 할 그곳의 시간으로 바꾸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시계 볼 때마다 내가 떠나온 곳을 생각하게 됩니다. 거기는 지금 몇 시다, 거기는 지금 밤이다, 거기에 지금 누가 자고 있다.....이 무슨 쓸데없는 생각입니까? 내가 가야 할 그곳의 시간이 중요하지요. 목적지에 시간을 딱 맞추어서, 거기는 지금 새벽이다, 거기서는 지금.....이런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현재를 살아가지만, 비행기 안의 현재라고 하는 시간에 있지만, 목적지향적으로 현지 시간에 맞추어 살아야 합니다. 거기에다 목적을 두고, 현지의 시간을 내 손에 가지고 이제 카운트다운을 시작해나가는 것입니다. 저 시간을 위해서는 이제 얼마 남았다, 내가 가야 할 본향, 내가 가야 할 하늘나라를 위하여 몇 시간 남았다, 그런고로 나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한다.....하고 말입니다. 여러분, 밤이 깊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우리의 생각은 아침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현제를 사는 것입니다.

 

금년에도 여러분은 어떤 목적을 세웠습니까? 어떤 목표를 두었습니까? 돈입니까, 건강입니까, 명예입니까? 하지만 그동안도 많이 애썼는데 별볼일 없습니다. 이제는 생각을 달리하십시다. “세월을 아끼라”-- 새로운 기회, 새로운 시간, 새로운 어떤 가능성이 내게 주어지기를 바라서 몸부림치지 마십시오. 이미 주어진 시간을 그대로 감사함으로 받고, 이 시간을 최선의 시간으로, 가장 높은 가치의 창조적 의미의 시간으로 살아가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기에 지혜가 있습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 삶의 의미를 이렇게 높여주시며, 새롭게 하여주심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의 지체가 된 자로서 참으로 거룩하고 복된 시간을 보내게 하시고, 또다시 시간을 낭비 하고 가슴을 치며 후회하는 그러한 미래는 결코 없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뜻 그대로 주님께 향하며 오늘을 사는, 가장 높고 귀한 그리스도적 의미의 생을 살아가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