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골로새서

[골3:18] 복음과 가정

'코이네' 2021. 5. 7. 22:32

복음과 가정

골로새서 3:18-21

 

 

 

바울은 본 서신의 실천 부분에서 시작했던 새 원리들의 적용을(3:1-4) 계속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이번에 그가 거론하는 분야는 좀 까다로운 문제들입니다. 이번에 그가 거론하는 분야는 좀 까다로운 문제들입니다. 이 문제들은 과거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어렵습니다. 남자와 여자,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사이의 관계는 항상 문젯거리로 등장합니다. 우리는 아마 여성 해방 운동이나 젊은이들의 자유 신장(伸張)운동이 우리 시대의 독특한 현상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어떤이들은 한 술 더 떠서 이런 일들은 말세의 징조라고까지 비약시킵니다. 그러나 사실은 B.C 2세기의 로마 사회에서도 여권주의(女權主義)가 대단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이곳 저곳에서 때때로 소요가 일어나서 사회를 시끄럽게 합니다. 이런 일들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늘 있어온 사회악입니다. 현대 사회도 많은 위기들을 지나고 있습니다. 사회 불안은 심각한 것입니다. 그 배후에는 악의 세력이 도사린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이 점을 직시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어리석은 세상 정치가들이나 극단주의자들의 무모한 해결책에 동조되지 않고 그리스도인의 입장을 고수할 수 있습니다. 그럼 무엇이 그리스도인의 자세일까요?

 

새로운 정신 자세

 

격동하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식별하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우리들이 보는 것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일까요? 아니면 우리 자신들의 성향이나 교육, 환경, 인종, 성별에 따른 것일까요? 이 질문은 우리들이 늘 부닥치게 되는 문제인데 결코 쉽지가 않으며 분명하거나 종결 적이지가 못합니다.

우리들의 성경 해석은 성령의 감동에 의한 것일까요?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아직 갱신되지 않은 마음(정신)으로 이해하려는 때가 너무 잦지 않습니까? 우리는 죄가 우리의 성경 이해의 시각이나 이 세상을 보는 각도를 왜곡시키고 굴절시킨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의 계속적인 사역에 의해 마음(정신)을 새롭게 함으로’(12:2) 하나님의 뜻을 우리 자신들의 느낌들과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마음(정신)의 갱신은 우리 사회의 문제들이 강한 감정을 불러 일으키고 그리스도인의 해답이 명백한 듯이 보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세는 관습적인 보수주의나 반발적인 혁명주의가 아닌 성경 적이고 영적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이 기독교인의 자세가 무엇인지를 바울의 짧은 골로새서를 공부하면서 찾아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본 건은 매우 광범위한 성경적 자료를 숙고해야 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본 서신에서 다룬 문제들에만 국한시켜 그리스도인의 자세를 고찰토록 하겠습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안에서 마땅하니라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3:18,19)’

바울은 본문에서 취급하는 내용은 여성의 사회적 지위에 대한 일반적인 문제가 아니고 가정 네에서의 아내의 문제입니다. 물론 남편에 대한 아내의 태도는 양편의 사회적 문화적 생활에 영향을 줍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측면에 관해서 이미 고린도 교회에 말씀을 주었습니다(고전7, 11, 14)

바울의 본문은 어릿 보면 남자들에게는 우월권을 인정해 주고 여자들은 전통적인 열등한 위치에 잡아두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그러나 우리는 첫 인상에 너무 좌우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칫하면 세상 적인 관점에 쏠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런 시각을 버리고 성경 전체에 스며있는 성령의 마음을 읽을 수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우리는 우선 본문을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비추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본 서신이 쓰여졌던 1세기의 세상은 특히 여자들과 노예들에게는 억압된 사회였습니다. 그래서 유대인과 헬라인, 자유민과 노예, 남자와 여자의 동등권을 선포하는 일은(3:28) 무서운 반작용을 자극시킬 수 있는 혁명적인 도화선으로 발전될 소지가 농후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자제와 인애와 사랑을 호소한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 합니다.사람들의 정신자세는, 그리스도인들이라도 하룻밤에 바뀔 수 없습니다.

여성들이 갑자기 대우를 받는 이치를 차지하고 남편들과 동등한 입장에 서게 되는 사회적 위기를 겪으면 그들은 새롭게 획득한 권리를 남편들에게 지나치게 주장하며 남편들의 권위를 반대하고픈 유혹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남편은 자기 아내의 인격 존중과 자유에 대한 권리 주장 앞에서 크게 당황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권면은 양면적입니다.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안에서 마땅하니라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복음의 대 원칙은 남자든 여자든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평등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만민 평등주의는 개인들이 자제치 않으면 일종의 무질서를 조장할 위험을 안고 있기 때문에 바울도 기독교 초기에 이 점을 당연히 두려워 하였습니다.(2;5 ; 고전14:33,40 ; 살후3:11).

만일 이러한 평등 사상이 잘못 받아지면 복음의 위신과 신빙성이 추락될 것이었습니다.

영적 성숙의 증거인 성령의 자유는 자기 단련과 사랑을 실천합니다. 이런 자유는 육신 적인 것에 여유를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내가 기쁜 마음으로 남편에게 복종하게 되는 것은 자신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되고 남편과의 동등권이 확증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동등권과 자유가 없다면 아내의 그러한 복종은 아무런 의미가 없고 하등의 도덕적 가치도 없습니다. 자유와 사랑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복종은 복음과 기독교의 결혼이상에 대한 부정입니다. 자신의 권리들을 포기하는 것은 자유의 특권이며 사랑의 표현입니다(고전8). 그것은 참된 소유의 조건입니다.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다시 찾을 것입니다(10:39).

그러나 남편들은 아내들의 입장을 이용하거나 자신들에 대해서 너무 흐뭇하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아내가 자원해서 순종하는 것은 물론 선하고 옳으며 또한 현명한 처사입니다. 그렇다고 남편에게 그렇게 하는 아내를 휘어잡을 권위가 수여된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아내의 권리가 회복되었다고 남편이 성질을 부려도 좋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아내가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사랑을 값없이 제공하면 남편은 희생적으로 악감이나 주저함이 없이 사랑의 응답을 해야 마땅합니다. 남편은 자기 배우자의 동등한 신분을 인식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아내의 자유가 회복되었음을 인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내의 품위 회복 때문에 기분이 상하거나 상실된 우월성을 희구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앞에서 말씀드린 경우처럼 사랑의 영광이 겸손의 미덕 속에서 피어나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와 같은 겸비의 정신을 몸소 실천하셨던 것처럼 우리들도, 남자든 여자든 겸비의 옷을 입고 남을 자신보다 더 낫게 여겨야 하겠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들의 정당한 권리들과 특권들을 포기케하고 자신들을 기꺼이 비우게 하며 또한 겸손케하여 남을 섬기도록 인도한다고 입증하셨습니다.(2:2-8).

주께서는 일반적으로 인정된 지도자의 역활과 권력의 개념까지도 뒤엎어 놓았습니다.

(20:25-27)‘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에 되어야 하리라라고 마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위대한 일입니다. 참 사랑은 가정이나 교회에서 상호 복종으로 표현됩니다.(5:2). 이제부터 우리는 이러한 관점에서 가정에서의 아내의 복종과 남편의 권위에 대한 전통적인 사상들을 이해해야 합니다.

요약하면, 사랑이 없는 복종이나 복종이 없는 사랑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사랑이 여자를 위해 어울린다면 복종은 남자를 위해 어울립니다. 그러니까 골로새 교인들에게 주는 바울의 양면적 교훈들은, 아내와 남편이 지닌 특수한 유혹의 약점을 강조한다고도 볼 수 있지만 서로 일치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교훈의 목적은 가정에 어떤 상하의 우열체제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화목과 조화를 이루려는 데 있습니다. 이 교훈들은 인간 생활의 현실들을(혼란된 사회 상태)인식하고 육신의 반작용을(여성의 독립 욕구와 남성의 보복)정정함으로써 부부를 원래의 이상이었던 한몸이 되게 하는 것을 목표로 잡고 있습니다(19:4-6). 이 목표의 달성은 결혼에 기쁨을 가져다 주고 복음에 의해 수확된 최상의 화해의 열매를 이 세상에 드러나게 할 것입니다.

 

부자(父子)관계

 

가정의 조화는 결혼한 부부 사이의 조화에 달려 있습니다. 부모와 자녀들 사이의 관계도 남편과 아내 사이의 관계에 좌우됩니다. 신분이 아닌 화합에 기초한 이 협동의 관계는 자녀 양육에서 반영됩니다.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3:20.21)

본문에서 자녀들을 화나게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 쪽은 아버지이지만 자녀들의 순종의 의무를 지닌 대상은 아버지뿐만 아니고 어머니까지 포함한 부모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 시대에는 당연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바울 당시의 사회에서는 매우 대담한 발언이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또한 이 사실은 가부장제(家父長制)가 자주 가정제도의 한 모범으로 간주되긴 하지만 결코 기독교 사상이 아니라는 점을 상기시켜 줍니다.

우리가 여기서 또 한가지 주목할 점은 남편에 대한 아내의 관계는 부모에 대한 자녀의 관계와 동일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내의 경우, ‘복종하라고 한 것은 사랑 안에서의 자유 행위를 촉구한 것이지만 자녀에게 준 순종하라는 말은 하나의 명령입니다. 종들의 경우에서도 이와 유사하게 그들의 상전들께 순종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녀들과 종들의 경우에는 아내들의 입장에는 해당되지 않는 신분상의 어떤 차이점이 시사되어 있습니다.

자녀들은 부모에게 순종할 의무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다는 뜻에서 바울은 모든 일에라고 못을 박았습니다. 자녀는 아주 어릴 적부터 순종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다섯살, 열살, 열 다섯살 때가 되어 부모들이 자녀들의 순종 문제를 걱정하면 이미 그 때는 늦었습니다! 순종의 훈련은 자녀들에게 음식이나 학교 교육 못지 않게 필요합니다. 이 훈련을 사랑과 기쁨의 분위기 속에서 잘 받으면 그 자녀가 학교나 차후의 직장에서 가해지는 여러 가지 제한들을 잘 극복할 수 있게 됩니다(22:6). 만약 이런 식으로 어릴 때부터 인격이 견고해지지 않으면 나중에 만나게 될 인생의 어려움 들을 감당하는 능력이 없고 권위에 대한 올바른 자세가 흐려지며 주님을 순종으로 섬기는 데에도 문제가 생깁니다. 그래서 순종의 단련 생활을 거치지 않는 자녀들은 사회나 교회에서 말썽과 불화를 일으키기 쉽습니다. 우리들의 삶에는 모든 것들이 함께 연결되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습니다. 인생은 차단된 방들처럼 하나씩 별도로 분리시킬 수 없습니다.

바울이 자녀들의 순종을, 비록 염두에는 두고 있었지만(6:1-3). 율법이 아닌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라는 말로서 촉구한 사실은 흥미롭습니다. 우리는 자녀들이 아주 어릴 적부터 순종이 주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라는 동기를 미리 심어주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면 아이가 자라면서 하나님의 성품을 이해하며 순종의 생활을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조금씩 머리가 커지면서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부모의 약점도 발견하게 되고 혹은 부모의 더 큰 흠도 보게 됩니다. 그런 때에도 어릴 적부터 성경 적인 동기로 순종의 훈련을 받은 자녀는 부모에 대한 존경의 기준을 부모의 가치성에 두지 않고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고 믿기 때문에 계속해서 부모를 순종합니다. 그러나 자녀의 순종이 만일 하나님의 인정을 받기 때문이기 보다 부모의 권위 때문에 행해지는 것이면 부모에 대한 멸시와 반항으로 빗나가기 쉽습니다.

끝으로 바울은 부모에 대해서도 한마디 언급하였습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지니 낙심할까 하노라여기서 바울이 아버지들에게 자녀 양육의 책임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위에서 살펴 보았듯이 자녀들은 양친 부모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따라서 모친에게도 동일한 자녀 양육의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본문에서 아버지만 지적한 까닭은 각 시대마다 자녀들의 마음을 건드려 화나게 하는 쪽이 아버지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많은 경우 어머니들은 본성적으로 일을 부드럽게 덮어서 넘어가려고 애씁니다. 반면, 아버지들은 민감한 편이 아닌 경우가 많고 직장 관계로 자녀들과 가깝지 못한 편이므로 자녀들로 문제가 생길 때에 자칫 큰 소리를 내기 쉽고 권위로 나오는 경향이 많습니다.

우리들은 세대 차이의 문제가 항상 어럽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특히 요즘 사회가 젊은 세대에게 퍼붓는 관능적이고 물질적인 선전들 때문에 더욱 힘들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자녀들은 이같은 사회풍조의 영향을 받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가정에 와서 부모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행동들을 하여 부모들의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그러다 보면 집안에 큰 소리가 나고, 특히 아버지 쪽에서 강권으로 나오며 자기 관점을 자녀들에게 강요하게 됩니다. 물론 자녀들은 앞뒤가 맞지 않는 언행을 하고 격앙된 감정을 규모 없이 드러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이 자라 가는 한 중요한 과정입니다. 부모들이 이런 자녀들의 측면을 수용할 수 없어서 부자의 정()을 냉각시키면 자녀들의 인격 형성에 안정감을 주는 정신적 유대가 끊어지고 맙니다. 부모된 우리들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영감된 본 서신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도록 힘써야 합니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자녀들을 잘 양육시키기 위해 더 많은 자제력과 원칙성이 필요하고 더 깊은 사랑과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바울의 간명한 이 조언은 남편과 아내 사이의 조화를 도모하는 영구적인 열쇠가 될 것이며 동시에 가정의 화목을 이루는 비결이 되고 그 결과 사회와 교회의 화평을 진작시켜 줄 것입니다. 만일 우리들이 모두 아내나 남편이나 자녀의 입장에서 가정 생활의 작은 일들에 신실하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더 큰 일들을 맡겨 주실 것입니다. 한편 우리들이 맡은바 각자의 책무를 이행해 나갈 때에 하나님이 날마다 우리들에게 주실 표현할 수 없는 기쁨들이 우리들의 최상의 보상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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