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빌립보

[빌1:7] 교회의 균형을 위한 기도 / 김서택 목사

'코이네' 2019. 2. 11. 22:27

 

교회의 균형을 위한 기도

빌 1:7-11

설교 : 김서택 목사 
 


 

정치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고마운 사람들이 있다면 어떤 사람들이겠습니까? 아마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무명 시절부터 자기를 믿어주고 또 말없이 정치 자금을 대어준 사람들일 것입니다. 민주화 투쟁을 한답시고 감옥에 가 있을 때에도 변함없이 찾아 와주고 인기가 떨어져서 웬만한 사람들은 다 등을 돌릴 때에도 변함없이 자기를 지지해 주어서 자기 재기할 수 있게 해 준 사람이 있다면 아마 그 사람을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사업하는 사람들에게도 이런 경험은 있을 것입니다. 아무도 자신의 신용을 믿어주지 않고 하던 일은 망해서 이제는 끼니 걱정을 하고 있는데 불쑥 찾아와서 상당한 돈을 대어주면서 다시 한번 시작해 보라고 격려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한 평생 그 은혜를 잊지 못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 참으로 잊을 수 없는 사람은 그가 성공했을 때 알아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아무도 그를 알아주지 않고 완전히 무명의 인사로 비참한 상태에서 생활하고 있을 때 그를 믿어주고 그에게 약간의 도움을 나눈 사람입니다. 물론 그가 도와준 것이 금전적인 가치로는 얼마 되지 않을지라도 그것이 가지는 의미는 “다른 사람들은 뭐라고 할지 몰라도 나는 당신을 믿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반드시 성공할 것입니다”라는 무언의 확신을 심어주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게도 바로 이런 잊을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처음 어느 곳에서 개척 교회를 하거나 선교사로 파송되어 전도를 시작할 때에는 정말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고 알아주는 사람도 아무도 없습니다. 그때의 형편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거지와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아주 작은 방에 여러 식구들이 겨우 집에 풀칠이나 하면서 지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때 그의 말씀을 믿어주고 그와 함께 고난을 나눈 사람은 그냥 고마운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바로 이 복음의 동역자요 그 전도자의 마음속에 한 평생 지워지지 않는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그가 얼마나 외로와 했으며 얼마나 절망과 좌절에 많이 빠졌는지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그의 위대한 서신들을 보면서 사도 바울이야 말로 요즘 유명한 순회 전도자들처럼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지지를 받으면서 복음을 전했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정반대였습니다. 그는 참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는 전도자였습니다. 그는 너무나도 많이 혼자 있어야 했을 때가 많았고 너무나도 많이 사람들의 무관심의 대상이 되곤 했습니다. 사실 그의 위대한 서신들은 평안한 가운데서 기록되었던 것이 아니라 감옥 안의 무서운 고독 가운데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 기록했던 것이 많았습니다. 이럴 때 얼마나 누군가가 그리운지 모릅니다. 어느 누구라도 그의 복음을 받아주고 어느 누구라도 그의 고난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이해되기를 바라게 되는지 모릅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사도 바울이 이토록 무서운 환란과 외로움에 던져져 있을 때 그를 찾아와 주었고 그를 믿어 주었으며 그에게 필요한 것을 보내 주었던 교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이 작은 사랑과 관심과 섬김이 사도 바울에게 얼마나 너무나도 큰 힘과 용기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향하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말하며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를 사모한다’고 말하면서 이 일에 있어서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시라’고 하면서 그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최고의 표현을 다 동원하여 빌립보 교인들에게 대한 자신의 애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도 바울이 하나님께 돌아갈 영광을 사람에게 돌리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그들에게 이 지나친 칭찬을 해서 그들의 마음을 우쭐하게 하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이런 최고의 표현을 하는 것은 약하고 어려운 믿음의 형제나 혹은 전도자를 돕는 것이 자기들이 상상하지 못하는 힘을 나타낸다는 것을 그들에게 알려주려고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소자를 돌아보라’ 혹은 감옥에 갇힌 자나 병으로 누워 있는 자나 혹은 굶주리고 있는 자를 돌아보라고 하셨을 때 그냥 내 시간이나 돈이 남으니까 남을 돌보아 주라는 식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런 어려운 형제나 사역자들을 돕는 것은 돕는 자신은 상상할 수도 없는 엄청난 사랑의 힘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으며 도움을 받는 자는 사람의 도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힘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1, 빌립보 교인들의 도움이 사도 바울에게 준 의미.

 

7절,“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예한 자가 됨이라”

사도 바울이 처음에 소아시아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할 때나 혹은 그 후에 유대인들의 고발로 감옥에 갇혔을 때 그는 참으로 외로운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를 알아주는 사람이 거의 없었던 것은 물론이고 같은 그리스도인 가운데서도 사도 바울은 인정받지 못하는 자였습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지 분명치 않습니다. 어쩌면 그가 예수 믿기 전에 교회를 핍박했던 전력이 있기 때문에 그것으로 바울을 의심하거나 혹은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아니면 그가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별로 친하지 않는 상태에서 단독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교인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그의 설교 스타일이 그 당시에 인기있던 수사학적인 방법을 쓰지 않고 너무나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설교를 했기 때문에 인기를 끌지 못했는지도 모릅니다. 좌우간 사도 바울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나 유대인들은 물론이고 같은 크리스챤 세계에서도 별로 주목을 받거나 인정을 받지 못하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전에 한번 목회자 세미나를 하면서 강사가 목회자들에게 교인들에게서 무엇을 가장 원하느냐고 질문했을 때 여러 목회자가 교인들의 지지와 인정을 원한다고 대답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만일 목회자가 교인들로부터 인정과 지지를 잃는다면 그는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아버지가 집에서 전혀 식구들로부터 아버지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면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는 삶의 의욕조차 잃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바로 이런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는 죽으라고 복음을 전하면서도 사람들의 인정은 받지 못하고 있었고 심지어는 기독교 세계 안에서도 바울이라고 하는 사람은 전혀 중요하게 인식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그가 감옥에 갇히게 되었을 때에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잘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럴 때 빌립보 교인들은 사도 바울을 찾아와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필요한 약간의 돈도 보내어 주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들의 사랑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들의 방문과 물질적인 도움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의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예한 자가 됨이라” ‘너희가 내 마음에 있다’고 하는 것은 이들이 사도 바울의 마음을 완전히 차지해 버렸다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그의 마음속에 도저히 지워지지 않을 사랑의 도장을 찍어놓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복음으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자들을 찾아 가 주고 그들을 믿어주고 지지해 주는 것은 완전히 그들의 마음을 차지해 버리는 것이 됩니다. 물론 사람들 중에는 어려울 때 도와주었던 사람들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배은망덕하게 행동하는 사람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마음을 차지해 버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어려워 할 때 믿어주고 가장 힘들어 할 때 그를 지지해주는 것입니다.

 

특히 사도 바울은 그들의 도움이 바울이 감옥에 갇혔을 때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바울이 감옥에 있을 때 특히 어려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감옥에 갇혔을 때 그를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심지어는 그의 먹을 것이나 가장 생활의 기본적인 필요조차 챙겨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상치도 않게 빌립보 교인들이 찾아와서 바울에게 필요한 부분을 채워주었을 때 그는 그 외로운 중에도 큰 힘을 낼 수 있었고 법정에 복음을 변명할 때에도 잘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보통 ‘변명한다’고 하면 자기가 잘못한 것을 핑계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변명한다고 하는 것은 법정에서 진술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법정에 서서 자기가 왜 체포되어야만 했는지 진술해야만 했습니다. 그것을 진술하려면 복음이 유대교와 왜 다르며 왜 자기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만 했는지 객관적으로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을 해야만 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변명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을 전혀 모르는 자들에게 복음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전하는 것입니다. 설교하는 것 중에서 가장 힘든 것이 전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하는 일일 것입니다. 저는 전도 설교를 하면서 벌선다고 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을 의미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습니다. 듣는 사람들을 전혀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약간만 힘을 주어서 강조하면 벌써 야유 소리가 여기 저기서 튀어나옵니다. 사람들은 전도자 한 사람을 가운데 세워놓고 완전히 원숭이 구경하듯이 합니다. 그럴 때 전도자는 다리가 후들거리면서 어서 그런 자리를 피하고 싶은 생각만 들게 됩니다. 쳐다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전도자의 마음속에 불같은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이 아니고 이 믿지 않는 영혼들이 너무나도 불쌍해서 이 전도자를 위하여 밤을 새우거나 금식하면서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몇 번 신앙이 거의 없는 자들 수 천명 앞에서 설교를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물론 제 말에 귀를 기울여서 듣는 사람들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첫 설교를 마친 후 그 중에 어떤 한 분이 이들의 영혼을 위하여 밤을 새워가면서 기도를 했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저의 가슴속에는 무엇인가 뜨거운 기운이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다음 시간에는 그들은 이미 저의 포로였습니다. 설교가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그들은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여기서 ‘확정함’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단순히 객관적으로 복음만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말에서 이기는 것입니다. 이상하게 자기 이상의 능력이 복음을 모르는 자들의 마음을 비상하게 눌러서 그들이 말씀을 경청하게 할 뿐 아니라 그들을 굴복시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은 대단히 예민한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의 기질은 틀림없이 우울질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쉽게 의기소침하거나 기죽을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더욱이 그가 감옥에 갇히게 되었을 때 그는 너무나도 절망하고 좌절한 나머지 심한 영적 침체에 빠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빌립보 교인들 중에 몇 명이 감옥으로 그를 찾아 온 것입니다. 그에게 먹을 것을 내어 주었습니다. 그에게 필요한 옷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재판정에 불려 나갈 때까지 내내 함께 있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법정에 섰을 때 그들은 그 뒤에 있는 구석에서 자리를 지켜 주었고 내내 그를 위하여 기도해 주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들이 저 뒷자리에 앉아서 자리를 지켜주며 자기를 위하여 내내 기도하는 것을 보는 순간 갑자기 한 마리의 사자로 돌변했습니다. 그는 그 유명하고 학식 있는 사람들 앞에서 자기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말했으며 예전에 미처 알지 못했던 지식을 쏟아 내어 그들을 굴복시켰습니다. 대개 연설하는 사람은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자기 아내를 쳐다봅니다. 자기 아내가 끝까지 자리를 지켜주고 고개를 똑바로 들어서 자기 말을 경청해 줄 때 용기를 내게 됩니다.

바울이라고 해서 결코 완전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이라고 해서 지지해주는 사람 한 명도 없는 가운데 ‘적토마’를 타고 적진을 뒤집을 수 있는 용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무 섬세하고 예민한 사람이었으며 그에게도 사랑하는 믿음의 형제들의 사랑과 지지가 필요했습니다. 그는 때로 복음 전도의 문이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디도가 오지 않아서 마음이 편치 않아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옮겨 간 적도 있었습니다.(고후2:12,13). 디모데 후서 끝 부분에 보면 이때의 외로움이 얼마나 심각했던지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었고 다 나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딤후4:16). 물론 빌립보 교회가 바울의 이런 사정을 다 알고 찾아 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한 은사니까 찾아 왔고 와 보니까 그가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자기들이 바울에게 도움이 되기보다는 그의 설교를 한번이라고 더 듣기 위하여 그의 복음 설교를 들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이 상상할 수도 없는 용기를 바울에게 주었습니다. 복음의 증거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이 말을 여기서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단지 그들에게 고맙다는 소리를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오늘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위에 어려움에 빠진 주의 종들이 있을 때 가만히 있지 말라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그들을 믿어주어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죄인들의 교만을 이기고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의 사랑에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는 계속 주저앉아 있으면서 다른 사람이 자기를 찾아오지 않고 자기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고 불평을 합니다. 이것은 영적인 불구자들입니다. 그 동안 우리들은 세상 재미에 빠져서 복음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이제는 조금씩만 더 힘을 내십시다. 조금만 내 문제에서 빠져 나와서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돌아봅시다. 어렵게 믿음을 지키려고 애쓰는 사람들에게 한 마디만 해 줍시다. ‘나는 당신을 믿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반드시 승리한 모습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이런 격려가 나에게는 작은 것일지 몰라도 어려움에 빠진 믿음의 형제 자매들에게는 아주 큰 것입니다. 그들을 사자로 변하게 할 것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

 

우리는 어떤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있는 곳에 가고 싶어집니다.

혹시 길을 가다가도 그곳으로 가는 열차나 고속 버스를 만나면 마음이 두근거려지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거기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서 그를 만나서 서로 사랑의 교제를 나눔으로 더 사랑을 확인하고 싶은 욕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자기가 얼마나 빌립보 교인들을 사랑하며 보고 싶어하는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모한다고 말을 합니다.

이번에 부산에 가니까 의사 한 분이 심장 수술을 성공시켰는데 오십대 부인에게 뇌사 상태에 빠진 한 젊은 청년의 심장을 이식시키는데 성공했다고 합니다. 이 부인은 심장이 너무 좋지 못해서 곧 죽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 청년의 심장을 물려받아서 다시 건강한 삶을 살 수 있게 되어 너무 기뻐하고 감사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삶에게 심장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중요한 맹세같은 것을 할 때 심장 위에 손을 올려놓고 맹세를 합니다. 또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받는 것을 볼 때 자신의 심장이 터질 것 같다고 말을 하기도 합니다. 아마도 사도 바울은 감옥 안에서 주님에 대하여 수없이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의 모든 생각을 딱 멈출 정도로 놀라운 생각이 하나 떠 올랐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앞두고 기도하실 때나 혹은 그가 십자가 위에서 고통 중에 죽어갈 때 그의 심장에 대한 생각이었습니다. 내과 의사 출신인 한 목사님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인에 대하여 너무나도 자신만만하게 ‘심장 파열’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그는 특히 심장을 전문했던 적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정상인 보다 훨씬 빨리 운명을 하셨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면 며칠 동안 달려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함께 달린 두 강도는 다리를 꺾어서 빨리 죽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로마 군인들이 보았을 때 먼저 운명하셨고 그의 옆구리를 찔렀을 때 물과 피가 쏟아졌습니다. 그 목사님은 그것이 바로 심장 파열의 증거라고 봅니다.

그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들의 죄로 인하여 너무 가슴 아파했기 때문에 그의 심장이 견디지 못하고 터져 버렸던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앞에 두고 기도할 때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셨던지 땀이 피처럼 되어 흘렀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의 온 심장을 다 쥐어짜는 기도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랑 중에서 가장 간절한 사랑이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랑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자기도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때 바로 예수님이 이 심장으로 사랑하기로 작정한 것 같습니다. 이것은 자기 안에 있는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다 바쳐서 다른 형제나 자매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어떤 사람이 너무나도 보고 싶으면 눈알이 시려오기 시작합니다. 얼마나 그립고 보고싶은지 어떤 때에는 눈알이 빠질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눈알로 보고 싶어한다’고 할 때가 제일 보고 싶어 할 때 쓰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기 심장도 아니고 예수님의 심장으로 이 빌립보 교인들을 보고 싶어하고 사모합니다. 그러면서 혹시라도 이 말에 과장된 느낌을 받을까 해서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라’고 분명하게 못을 박고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맹세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도는 바로 여기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볼 때 그가 빌립보 교인들을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간절하며 참으로 그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터질 것 같고 그들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그 어떤 것이라고 아끼고 싶지 않은 마음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사랑을 받았을 때 그 사람의 사랑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물론 그를 통하여 나를 도우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찬양으로 돌리고 감사해야 할 대상은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그런 식으로 선하게 사용된 것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너무나도 감사한 나머지 나를 도운 사람에게 감사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너무나도 하나님 중심이 된 나머지 나에게 도움을 준 그 모든 사람에게 감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가진 신앙은 기독교가 아니고 공산주의 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도 표현을 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혹시 표현을 하면 하나님께 돌아갈 영광이 사람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염려해서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여기서 너무나도 금기시하는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 심장도 아니고 예수님의 심장을 끌고 옵니다. 그리고 맹세를 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하나님을 증인으로 내세워서 맹세를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어려울 때 도움을 준 사랑하는 자들에게 그 사랑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어릴 때에는 너무나도 자기 중심이어서 다른 사람이 자기를 도와주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중에 좀 철이 들고나면 물론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셔서 그렇게 했겠지만 그 사람이 나를 돕기 위하여 자기 쓸 것을 쓰지 않고 자기 시간을 절약해서 나를 찾아 왔고 나에게 그런 귀한 도움을 주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고마운 분에게 감사의 표현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얼마나 부끄러워지는지 모릅니다. 사람이 성숙하면 성숙할수록 감사하는 표현을 많이 하게 됩니다. 그래서 크리스챤에게 있어서도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젊었을 때에는 너무나도 진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나머지 인간적인 요소들을 철저하게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좀 들고 보면 그 진리라고 하는 것 안에도 얼마나 자기 생각과 아집이 많이 들어가 있으며 별 것 아닌 인간적인 사랑과 관심이 얼마나 우리의 신앙을 풍성하게 하는지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이 어렸을 때에는 자꾸 유별나게 믿는 것이 신앙이 좋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이가 좀 들고나면 그 유별난 것이 얼마나 남을 무한하게 했으며 얼마나 다른 사람들을 부담스럽게 했는지 깨닫게 되면서 평범한 것 안에 얼마나 많은 소중한 것이 있는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3.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함.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처럼 감옥에 갇혀 있기 때문에 찾아 갈 수 없을 때에는 어떻게 합니까? 그가 한 것처럼 그들 위하여 기도한 후 자기가 기도한 내용을 그들에게 알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것이 나의 마음의 소원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위하여 소원하는 기도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신앙적으로 부족한 부분을 채움 받아서 더욱 더 성숙된 신앙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었습니다.

9절,“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더욱 풍성하게 하사”

무슨 뜻입니까?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무엇이 가장 부족한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성경적인 지혜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사랑이 대단히 많았습니다. 그들은 어떤 사람이든지 어려움에 빠져 있으면 도우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열심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신앙적인 지혜가 부족한 열심이요 사랑이었습니다.

전에 제가 알고 있던 어떤 한 크리스챤 지도자 모임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너무나도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들이었고 너무나도 사랑과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안타깝게 생각했던 것은 전반적인 분별력이 부족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누구든지 도우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든지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성령 운동에도 관심이 있었습니다. 제자 운동에도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북한의 굶주린 동포들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사고로 어려움을 당한 분들도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문서 출판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결국 그들은 모든 일을 다 해야만 했습니다.

아마도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의 문제가 이런데 있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어떤 일이든지 관심을 가지고 어떤 일이든지 열심을 내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늘 제자리에 머물러 있어야만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총명이 필요하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분별력이 필요했고 그들이 하는 봉사나 섬김도 중요하지만 진리에 더 든든히 서는 것이 그들을 더 풍성히 할 것으로 믿었습니다.

만일 사도 바울이 저희 교회에 편지를 쓴다면 무엇이라고 쓰겠습니까? 아마도 비슷한 내용을 적지 않았을까 생각이 됩니다. 너무나도 많은 열심히 있고 헌신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섬기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우리 신앙을 제자리에 머물러 있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지식과 모든 총명 즉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는 것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말씀으로 더 풍성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오늘 저희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충분히 들어서 균형이 있는 신앙을 가지는 것입니다.

 

전에 제가 섬기던 교회는 젊은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에게는 말씀이 풍성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부족한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사랑이었습니다. 바울은 아마 그들에게 이렇게 편지를 했을 것입니다. ‘너희의 총명이 사랑으로 더 풍성하게 하사’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들은 성경 지식은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자기 몸을 움직여서 남을 섬기는 일에는 인색하다는 것입니다. 지성인이면 지성인일수록 몸을 움직이는 것을 싫어합니다. 젊은 사람들이며 때로는 앞뒤를 재지 않고 열심을 내어 봄직도 한데 너무나도 앞뒤를 많이 재고 몸을 도사린다는 뜻입니다. 무식할 때에는 아무 것도 모르니까 몸을 때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좀 알고 난 후부터는 오히려 더 몸을 도사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총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다 자세하게 설명을 합니다. 10절,“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그가 총명이라고 말하는 것은 단순한 세상적인 처세술이 아니라 무엇이 보다 중요하며 무엇이 보다 근본적인 것인지 분별하는 능력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은 모든 것을 잘 할 수 없습니다. 밖에서 잘하는 사람은 안에서 소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한쪽에 치우치는 사람은 다른 쪽에 반드시 부족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일을 할 때 우선 순위를 정해 놓고 열심을 내라는 것입니다.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한다’는 것은 무엇이 보다 중요하고 근본적인 것인지 생각하고 하라는 것입니다. 학생중에서 무턱대고 공부하는 학생은 항상 결과가 좋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공부에도 중요한 순서가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부터 열심히 하지 않으면 공부를 하기는 많이 했는데 결과는 항상 실패입니다. 이것이 신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결코 하루아침에 되지 않는 것이 영적인 총명이며 분별력입니다. 이것은 지적인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 지식을 자신의 삶에 적용해서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한 동안 우리 나라 교인들은 ‘믿습니다’ 혹은 ‘할 수 있습니다’로 믿음의 열심을 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분별력이 없는 열심입니다. 모든 것을 다 믿습니다. 성경에서 은혜되는 것을 다 나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믿습니다. 그러나 이런 순진한 신앙이 어려운 환란에 부딪쳤을 때에는 산산히 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너희 사랑을 지식과 총명으로 더 풍성히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우리 나라 교인들은 열심이 있습니다. 마음이 뜨겁습니다. 아마 사도 바울에 감옥에 갇혀 있다면 거기 까지 찾아 갈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무엇이 문제입니까? 지식이 없는 것입니다. 성경 없이 열심만 많은 것입니다.

 

외국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활동하면서 한국 교인들의 무식함에 대하여 많이 비판한다고 합니다. 교회 안에서 그렇게 열심이면서도 밖에 나가서는 믿음대로 살지 않는 것을 그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자기나라에 돌아 간 후에는 그래도 한국 교인들이 목회자를 섬기고 사랑하는데는 어느 나라보다 낫더라고 하면서 보고 싶어합니다. 한국에 있을 때에는 김치나 라면 같은 것은 먹지 않는다고 하다가도 자기나라에 가면 그것을 좀 보내어 달라고 한답니다.

저는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 대하여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라고 했다고 해서 그들이 평소에 거짓말도 잘하고 대충 대충 엉터리로 신앙 생활을 했다가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너무나도 빌립보 교인들은 우리 나라 교인들과 비슷합니다. 우리 나라 교인들은 열심은 많은데 그렇게 진실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저는 몇 년 전에 일본 학자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일본 기독교인들은 숫자는 많지 않지만 정직한 것은 인정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는 목회자들부터 정직하지 않습니다.

저는 때로 제 자신부터도 완전히 정직하지는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그리스도인이 된 후 가장 마음속에 심각하게 와 닿았던 것이 정직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물론 남을 속이려고 거짓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남에게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으려는 자존심 때문에 과장하거나 혹은 어떤 부분은 숨기는 그런 진실하지 못한 부분이 마음에 많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떻게 하든지 진실하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래서 과장된 표현이나 혹은 어떤 중요한 부분을 은폐시키는 그런 부분은 많이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아직 마음속에 거짓된 본성이 남아 있고 또 위선적인 요소도 분명히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나라 성도들의 치명적인 본성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이 부분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지속적으로 다른 신실한 믿음의 형제들과 동역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짧은 편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날’이라는 표현을 두 번이나 쓰고 있습니다. 그는 그들의 도움이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룰 줄 확신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빌립보 교인들의 진실하고 허물없는 믿음도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일은 하루아침에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한번 시작하면 주님 오실 때까지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래 하나님께 붙들려 사용되는 비결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처음부터 바른 동기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리없이 오래 오래 지속될 수 있습니다. 외국의, 백년 넘은 선교 단체들은 철저하게 믿음으로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믿음의 원칙에 충실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부르심을 오래 확인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그 후에도 상당한 기간 바로 이 진실성과 허물없는 생활의 훈련을 받습니다. 제가 처음 목회를 시작했을 때 저는 제 자신을 잘 준비되었을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런 같지가 않았습니다. 너무나도 진실하지 못한 것 같았고 생각하는 것이 아름답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많은 일보다 바로 제 자신을 치료하는 일부터 하셨습니다. 그리고 난 후에야 의의 열매가 가득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랜 기간에 걸쳐서 저를 만들어 오셨습니다.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다른 사람들에게 많은 복음을 전하는 것보다 저를 준비키셔주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진실하지 않으면 열매가 오래 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반드시 부패하게 되어 있고 얼마 가지 않아서 그 하는 일들이 모두 썩어버린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아직도 한 쪽으로 치우치지 쉽습니다. 지혜가 있는 사람은 사랑이 부족하거나 진실하지 못합니다. 기도에 열심히 있는 사람은 말씀에 관심이 없습니다. 또 전도에 치우쳐 있는 사람은 공동체로 자라는 것에 부족하기 쉽습니다. 사도 바울은 골고루 균형있게 자라야 큰 힘이 나타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자신의 신앙을 더 이상 자라지 못하도록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교회로 하여금 수년 동안 침체 상태에 있게 했다면 그 이유는 여러 가지에 있지 않습니다. 한 가지 이유일 것입니다. 아이들이 자랄 때 한 가지 중요한 영양소가 결핍되어도 발육에 지장이 생깁니다. 우리에게는 그것이 무엇입니까? 한쪽으로 치우친 성장은 당장은 좋은 것 같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는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자라지 않습니다. 우리도 그것을 채워달라고 기도합시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내 자신의 문제에 빠져 있지 말고 어려움에 처한 형제와 자매를 격려하기 위하여 찾아갑시다. 그들과 함께 시간을 좀 보내고 그가 그 외로움과 연약함을 떨쳐버릴 수 있도록 약간 도와줍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사랑에 대하여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예수님의 그 터져 가는 심장으로 생각합니다. 너무나도 사랑한 나머지 터져 버렸던 그 심장으로 생각합시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자라려면 신앙의 균형이 필요합니다. 한쪽으로 치우친 신앙은 어느 정도 지나면 한계에 부딪쳐서 더 이상 자라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지식과 총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랑을 더 온전하게 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냥 선한 것이 아닙니다. 나의 수준에 선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이상의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우리의 분별력은 거기까지 미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두 자기 수준에 좋은대로 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날까지 지속되지 못하고 중도 하차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막연히 좋다는 것으로 밀어 붙여서는 안됩니다. 좋으면서도 현실적이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