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빌립보

[빌1:19] 바울 그를 힘들게 했던 것들 / 김서택 목사

'코이네' 2019. 2. 13. 22:36

(빌립보서강해 4)

  

목회자 자신의 체험(2)-그를 힘들게 했던 것들

  1:19-22

김서택 목사

 

 

대학 입학 시험을 친 후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는 수험생들에게 있어서는 그 발표를 기다리는 순간이 그렇게 길게 느껴질 수가 없을 것입니다. 더욱이 재수나 삼수를 했는데 시험 결과를 안심할 수 없는 학생들에게는 발표를 기다리는 그 시간이 마치 피를 말리는 것과 같은 고통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 중 어떤 분이 좀에 좀 이상이 있어서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 보았더니 암일 것 같다는 의사의 말을 들었다고 합시다. 물론 분명히 암이라는 말은 아니고 암일 가능성이 높다는 말을 들었다고 합시다. 그때부터 그 분은 어떤 상태에 있겠습니까? 아마 차라리 암이다. 얼마 살지 못하고 죽는다는 말보다 훨씬 더 그를 고통스럽게 살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머리 속에 별의 별 불길한 생각들이 다 떠오르면서 그를 괴롭게 할 것입니다. 의사의 말을 부정해 보기도 하고 혹은 정말 암에 걸려서 고통스럽게 죽는 자신의 모습을 연상해 보기도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감옥에서 미결수로 오래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사정이 악화되면서 그는 시위대 안에 있는 감옥 안으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에 대한 재판이 빨리 진앵될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에 처음 왔을 때 그는 가택 연금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의 죄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흉악한 것도 아니고 또 그의 종교가 그다지 위험하지도 않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네로 황제의 마음이 변하면서 기독교인들에 대한 핍박의 상도가 점점 강해질 조짐이 보입니다. 그 가장 첫 번째 변화가 바울을 가택 연금 상태에서 수비대 안에 있는 감옥으로 이송시킨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의 모든 종교 활동을 제한하는 조치임과 동시에 바울에 대한 모종의 재판이 내려질 징조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사도 바울은 자기가 시위대 안에 있는 감옥으로 이송된 것에 대하여 나름대로 긍정적으로 해석을 하려고 애를 씁니다. 자기가 시위대 안에 옮겨지게 됨으로 그 안에 있는 사람 중 몇 명은 전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복음의 진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름대로 자기를 괴롭게 하던 문제들에 대하여 믿음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을 하려고 해도 생각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의 재판의 문제였습니다. 분명히 무엇인가 기독교에 대한 로마 당국의 태도는 변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무엇 때문에 자기를 이 시위대 안에 있는 감옥 안으로 옮겨 놓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생각보다 빨리 재판이 열려서 그가 당장 처형당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의 하루는 정말 불안한 하루 하루였습니다. 마치 사형 판결을 받고 언제 사형 집행을 당할지 모르는 사형수와 같습니다. 문이 열리고 자기 이름을 부르기라도 하면 지금이 집행 시간인가 하고 불안해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불안한 상황의 연속이 자신을 엄청나게 침체하게 만들며 그의 모은 기쁨을 다 빼앗아 간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라고 해서 죽음이 두렵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도 죽음이 두려웠습니다. 그리고 분명히 그의 마음 속에도 별의 별 불길한 생각이 다 파고 들어 와서 그를 견딜 수 없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 불안한 상황과 싸워서 어떤 결론을 내리지 않는 이상 도저히 하루 한 순간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단 한 순간도 견딜 수 없는 이런 불안한 상황에서 사도 바울을 지탱했던 힘이 무엇이었습니까?

우리 형제 자매들 중에서는 이미 생활이 안정권에 들어 선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하루 하루가 크게 불안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아무 것도 되어 있지 않는 상태에서 무엇인가 결정을 내리고 또 어떤 일을 시도 해 보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모든 것이 이런 미결수의 불안한 상태와 같을 것입니다. 취업이나 결혼이나 혹은 대학원을 진학하는 것이나 모든 것이 그를 불안하게 할 것입니다. 자꾸 여러 가지 불길한 생각이 떠오르면서 지금 이렇게 가만히 있으면 안되고 무엇이라도 해야만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에는 자기에서 벌떡 일어나기도 하고 혹은 무슨 소리를 혼자서 중얼거리기도 하고 혹은 방을 박차고 나가서 주위를 자꾸 배회하기도 할 것입니다. 이럴 떄 우리를 가장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입니까? 최악의 시나리오일 것입니다. 무든 것이 잘못되어서 최악의 경우에 빠져서 결국 자신이 비참하게 될 것이 자꾸 생각이 나면서 그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런 불안이나 염려보다 더 큰 적은 없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볼 때 사도 바울이라고 해서 우리와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도 우리와 똑같은 연약한 본성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편지에 빌립보 교인들이여, 나를 위하여 좀 기도 해 주시오. 나는 너무나도 불안해서 단 순간도 견디지 못하겠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어떻게 해서 이 불안한 상황에서 불안을 떨치며 승리하고 있습니까? 그것을 살펴 봅시다.

 

1. 끝까지 나를 붙들어 주는 것.

 

가끔 영화를 보면 엄청난 태풍이나 회오리 바람이 집이나 마을을 덮치는 내용의 영화가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산더미같은 해일이 집을 덮치기도 하고 혹은 엄청난 회오리 바람이 차나 터럭같은 것도 빨아서 하늘로 끌어 올라가기도 합니다.

그런데서 살아 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대개 든든한 나무나 어떤 기둥같은데 자기를 잡아 매어야 합니다. 몰론 웬만한 나무는 뿌리채 뽑히기 때문에 가장 튼튼한 나무에 자기 몸을 강한 밧줄로 단단하게 묶어 놓아야 합니다. 우리의 손으로 잡는 것은 너무나도 힘이 없기 때문에 당장 빨려서 끌려 가버리고 맙니다. 한번씩 우리 마음에 밀어 닥치는 불안의 파도는 바로 이런 영적인 태풍이나 회오리 바람과 같습니다. 이런 것은 아무리 우리의 정신력이 강하도 해도 결코 우리 힘만으로는 이겨 낼 수가 없습니다. 우리 자신을 나보다 더 단단한데 잡아 매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감옥안의 정신적인 불안의 태풍에서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그는 자기 자신보다 훨씬 더 강한 나무에 자신의 몸을 잡아 매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무엇입니까? 그가 지금까지 붙들고 있던 구원관입니다.

19,“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을 아는고로

여기서 사도 바울은 분명히 지금의 어려움이 다른 것으로 끝나지 않고 자신의 구원으로 이르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구원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것에 대하여 여러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어떤 분은 여기의 구원은 바울이 감옥에서 나오게 되는 것을 의미할 것이라고 합니다.거기에 비하여 다른 분은 바울은 자신이 죽더라도 그리스도 앞에서 영광스럽게 서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어느 것도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지금 자기가 확신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감옥에서 놓여나게 될지 아니면 여기서 죽게 될지 몰라서 불안해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구원은 그가 놓여 날지 아니면 죽을지 모르지만 여하튼 자신의 마지막이 비참하게 끝나지는 않도록 주님이 붙들어 주신다는 확신으로 생각합니다. 어떤 불안한 일이 생겼을 때 믿는 사람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고민하고 더 두려워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하나님의 뜻이라고 이야기를 해 왔는데 만일 결과가 비참하게 나면 그 동안 떠들어 왔던 하나님의 뜻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사실 이것을 가장 두려워 합니다.

괜히 내가 잘못하는 바람에 하나님의 이름이 욕을 먹는구나 라고 생각을 하면 그렇게 마음이 아플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까지 지키려고 하니까 더 마음이 고민이 생기고 절망감이 듭니다. 마치 다윗이 법궤를 옮길 때 소가 뛰는 바람에 떨어지려고 하던 법궤를 잡음으로 죽음을 당했던 웃사처럼 말입니다. 만일 우리가 웃사의 위치에 있었다고 해 봅시다. 지금 소가 뛰는 바람에 법궤가 수레에서 떨어지려고 함니다. 우리같으면 그 법궤를 붙들었겠습니까? 아니면 이 법궤는 하나님 자신이나 마찬가지이니까 절대로 떨어지지 않아. 하나님은 자신을 지키실거야하면서 떨어지는 법궤를 그대로 보고만 있겠습니까?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그토록 생각이 복잡한 이유는 만일 일이 최악의 결과로 나타났을 때 그렇지 않아도 예수 믿는다고 조롱하던 사람들이 얼마나 나로 인하여 하나님까지 욕을 하고 조롱하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면 미칠 것 같은 것입니다. 그때 붙들어야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결과는 모릅니다. 바울은 자신이 감옥에서 석방되게 될지 아니면 그냥 거기서 죽게 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적어도 분명한 것은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비참한 결과가 나오도록 하나님께서 나를 내버려 두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4:26,“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두 다 어려움 가운데 처해 있었습니다. 특히 가룟 유다와 베드로는 둘 다 아주 심한 영적인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자살을 하고 베드로는 살아 났습니다. 무엇이 이 두 사람의 운명을 갈라 놓았습니까? 주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하고 난 후 양심의 소리만 들렸습니다. “너는 의인을 팔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맞는 말이었습니다.그러나 그 양심의 소리가 그를 살리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에는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네가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나를 부인하리라.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베드로야 사탄이 네 영혼을 밀까부르듯 청구하였으나 나는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베드로에게는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주님은 나의 모든 일을 다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토록 기도하신 것은 나를 위한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가장 치열한 전쟁은 우리 안에서 일어납니다. 한번 회오리 바람이 불고 태풍이 밀어 닥치면 그 동안 열심히 봉사한 것이나 성경 공부 많이 한 것이나 전부 다 날려 버립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 많은 진리 가운데 한가지가 남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결코 나를 이 어려움중에 그냥 내버려 두시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입입니다. 시험당할 때 결코 그냥 두지 않으시며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하는 것을 결코 허락지 아니하시며 반드시 피할 길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감옥 안에서 바울이라고 해서 반드시 편안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의 마음 속에도 지금까지 그가 경험하지 못했던 불안의 폭풍이 밀려 왔습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많은 사람을 가르쳤지만 지금은 자기가 넘어지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를 붙들어 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이 결코 나를 비참하게 망하게 내버려두시지는 않는다는 확신입니다.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내가 지금 불안하게 추측하는 것처럼 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순간 순간 자기의 힘이 아닌 다른 힘이 자기를 붙들어 주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는 그것이 빌립보 교인들의 기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이 영적인 침체에 빠져 있을 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누군가가 그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그를 위하여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상하게 한창 불안해지다가도 금방 마음이 편해지면서 잠이 옵니다. 잠 들면 일단 하루는 넘기는 것입니다. 불안에 빠진 자와 그를 위한 성도들의 기도는 직접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불안해 지면 잠이 없어져 버립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불안에 빠지기 시작하면 정신병자는 저리가라 할 정도로 불필요한 추측과 의심에 빠집니다. 그때 기도외에는 약이 없습니다. 그때 본인은 자신의 불안한 감정을 하나님께 바로 고백해야 합니다. “주여, 지금 저는 불안해서 미치겠습니다. 일분 일초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저에게 성령이 고갈되어 있습니다. 저를 이 불안에서 건져 주시옵소서이런 기도가 얼마나 우리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불안할 때 누군가가 그를 알아 주고 그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줍니다. 특히 그들이 자기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 보다 더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것이 없습니다.

하루는 일본 고후 교회의 김 부희 자매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이 자매는 전화로 다급하게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갑자기 하루 전에 한 교인의 아이가 죽었는데 오늘 그 아이의 장례식 때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더니 애가 죽었다고 하면서 교회를 욕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정말 이것은 예사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 죽은 애의 엄마는 어디에 있느냐고 했더니 지금 자기 집에 와서 울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희들은 이들과 그 교회를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의 마음을 지켜 주셨고 결국 아이의 장례식은 은혜 가운데 끝났습니다. 오히려 더 복음을 전하는 기회가 되었다고 합니다. 참 요즘은 전화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화를 이런데 쓰지 않고 쓸데없는 이야기 하는데 다 쓰는 것 같습니다. 내가 침체되었을 때 중요한 것은 그 상황이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황이 변하는 것은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무서운 것은 마음 속에 일어나고 있는 하나님께 대한 원망과 분노의 마음입니다. 이것을 끄지 않으면 신앙적으로 너무나도 큰 상처를 입게 됩니다. 그것이 상황의 변화보다 더 무서운 것입니다.

 

2. 바울의 새로운 각오.

 

바울이 감옥에서 불안을 떨쳐 버릴 수 있었던 또 다른 하나의 힘은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받아 들인 것입니다.

20,“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에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노니

만일 바울이 감옥 안에서 절대로 죽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더라면 그는 이 불안을 떨쳐 버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살든지 죽든지라는 표현이 나오고 있는데 이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살아도 좋고 죽어도 좋다는 체념의 뜻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체념이 아닙니다. 이것은 어떤 경우든지 대비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임신이 되지 않는 부인이 나는 반드시 임신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아마 자기가 임신되지 않은 사실에 대하여 용납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만약 어떤 형제가 군에 가야 하는데 반드시 장교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사병으로 가게 된다면 그는 군대 생활하면서 내내 적응이 잘 되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진정한 믿음이란 무엇인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만일 내가 요구하는대로 하나님께서 반드시 들어주셔야 하는 것이 믿음이라면 그 믿음은 주객이 전도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하나님을 부리고 있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인정한다면 결정권을 하나님께 맡겨드려야 합니다.

가장 어려운 경우가 죽을지도 모르는 병에 걸린 가족을 둔 경우입니다. 그 가족에게는 그 분이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그 분은 반드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살려 달라고 기도를 오래 했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살 것이라는 확신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만일 그 분이 그 병을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셨을 때 기도한 사람의 마음 속에 하나님께 대한 원망과 분노가 생기기 쉽습니다.

다윗은 밧새바와 간통함으로 한 아이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 아이는 솔로몬의 형인 셈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아이를 치셔서 그 아이는 병이 들었습니다.

다윗은 그 아기가 살도록 하나님께 목숨을 걸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는 아무 것도 멋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고 골방에서 울면서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죽어 버렸습니다. 사람들은 만일 다윗이 이 사실을 알면 너무 충격받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에게 알리기를 주저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보인 반응이 무엇입니까? 그는 오히려 얼굴을 씻고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진정을 회복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는 아직 아기가 살아 있을 때 살려 달라고 매달렸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살아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는 마음 속으로 그가 하나님을 억박지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한편으로는 결사적으로 하나님께 매달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께서 이 아이를 데려가실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오직 한 가지 길만 하나님께 제시하고 하나님께 강요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결정을 하나님이 하시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주권자이십니다. 사람을 살리기도 하시고 죽이기도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억박지를 수 없습니다. 단지 아직 살아 있을 때 하나님께 매어 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결정을 받아 들일 가능성을 열어 두어야 합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살든지 죽든지라고 하는 것은 살든지 죽든지 모르겠다. 모든 것을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나는 모든 것을 다 포기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는 물론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마음 속으로 죽음에 대한 각오도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주권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살아서 복음을 더 전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그에게 더 이상 시간을 주시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는 뭐라고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는 얼마든지 그것을 받아 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어려움 가운데 빠져 있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때입니다. 주님께서 여러번 말씀하신 것도 바로 하나님의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시간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아무리 야단법석을 떨고 소리를 질러댄다고 해서 단축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시간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런데 그 동안 이 영적인 침체와 불안이 너무나도 우리를 상하게 하고 우리를 불신앙의 자리에 빠지게 만듭니다. 결국 이 불안과 침체를 이기지 못하면 하나님의 때가 되어 상황이 바뀌어도 나는 상급을 받지 못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감사와 전적으로 순종하는 자세가 하나님의 시간을 당긴 예를 성경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화를 내거나 소리를 지른다고 해서 하나님의 때가 단축되지는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그는 모든 결정권을 주님께 맡겼습니다. 예를 들어서 임신이 안되는 분들도 내가 영구적으로 아이를 가지지 못할수도 있다고 생각해 버리면 그때부터 마음이 편해집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때가 되면 아이가 들어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결정권을 넘겨드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렇게 하니까 바울의 마음 속에 어떤 생각이 들었습니까?

나의 감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사도 바울의 마음 속에서 이제 주님이 나에게 시간을 더 주시지 않고 데려가실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오히려 그의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사느냐 죽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죽을 때 까지 얼마나 내가 부끄럽지 않고 담대하고 주님을 증거하다가 죽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하게 생각되었습니다.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한 순간의 생각에 따라 엄청나게 비참해 질 수있습니다. 한 순간의 생각이 그 사람을 엄청나게 비겁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이라고 해서 항상 담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마음 속에도 비굴한 타협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결정권을 주님께 맡겨 드렸을 때 그는 죽느냐 사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남은 시간 동안 얼마나 담대하고 부끄럽지 않게 주님을 나타내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케 된다는 것은 단순히 말만이 아니라 표정이나 다른 행동 모든 것에서 당당할 수 있도록 스스로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 기철 목사님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을 때 부인은 그를 만나서 살아서 돌아오지 말라고 이야기를 해 주었다고 합니다. 참으로 엄청난 이야기입니다. 사실 사람의 마음을 약하게 만드는 것은 가족들입니다. 그들이 나중에 고생할 것을 생각하면 차마 죽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가족이 죽으라고 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엄청난 용기를 불어 넣어주는 것입니까? 직장을 가진 엄마들은 늘 아이들에게 미안해 합니다. 아이를 돌보아 주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죄책감을 늘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아이가 엄마, 나 열심히 살테니까 내 걱정하지 말고 사명을 다 하고 오세요라고 말하면서 자기 일을 알아서 한다면 얼마나 담대해지겠습니까?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엄마가 직장을 가져야 한다면 늘 아이에게 미안해 할 것만이 아니라 아이로 하여금 오히려 엄마에게 용기를 불어 넣어 줄 수 있도록 키워야 할 것입니다. “나는 너의 도움이 필요해그런 말이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까지 죽느냐 사느냐 하는 것을 가지고 온갖 생각을 다 했는데 이제 생각해 보니까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하루 하루를 어떤 자세로 보내느냐 하는 것이 더 엄청나게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느냐 죽느냐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일이고 지금 내가 할 일은 당장 누워서 염려하고 있는 자리에서 일어나 당당함을 회복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경우 내가 해야 할 것은 하지 않으면서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가지고 분노하고 걱정하는지 모릅니다. 침체되었을 때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대단한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당당하게 하는 것입니다.

 

3. 바울의 삶의 원동력.

 

여기서 사도 바울은 놀라운 신앙 고백을 하나 남기고 있습니다. 아마 이것은 성경 어느 곳에 있는 신앙 고백보다 더 아름답고 강렬한 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21,“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헬라어 성경에는 더 간단히 되어 있습니다. “사는 것, 그리스도. 죽는 것,유익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사는 것 그리스도 죽는 것 유익!”

하나는 사는 목적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가 지금까지 살아 온 것은 그리스도를 위한 삶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죽음을 통해서도 주님을 나타내어야 한다는 뜻으로 생각이 됩니다.

다른 하나는 지금까지 내가 산 것은 내 힘으로 산 것이 아니고 주님이 내 안에서 나의 삶으로 끌고 오셨기 때문에 이렇게 놀라운 삶을 살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죽는다면 그것도 주님이 하시는 것이며 주님은 그 죽음을 통해서도 나에게 엄청난 유익을 주실 것이라는 뜻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둘 중 어느 것도 더 사도 바울의 본심에 가깝겠습니까? 아마도 저는 후자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았습니다. 그의 강한 자의식이 무엇이었는가 하면 자기가 그리스도의 종이요 노예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14:8,“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물론 이 말은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진수는 내가 주님을 위하여 많은 일을 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이 내 안에 오셔서 나의 삶을 운전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 인생의 핸들을 주님께 맡겨 드리는 것이지요. 우리는 많은 경우 주님을 내 조수석에 태우면서 그것을 믿음으로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요즘도 음주 운전 단속을 많이 하는데 어떤 사람은 정말 자기 몸을 가누지 못할 상태에서 운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한번은 어디를 가는데 앞에 가는 차가 이 차선 저 차선을 왔다 갔다 하면서 갑니다. 아마도 그 운전자는 술을 마신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마치 음주 운전자와 같이 우리의 인생을 운전해 왔습니다. 여기도 쳐 박고 저기도 쳐 박으면서 살아 왔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운전석에서 내려 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나의 삶을 운전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토록 엄청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힘이 아니었습니다.주님이 그의 삶을 운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하루 하루의 삶은 너무나도 신나는 것이었고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쓰릴 만점이었습니다. 마치 파도 타기와 같았습니다. 처음에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 같던 일들이 주님과 함께 하니까 그렇게 시원하게 넘을 수가 없습니다.모든 것이 엄청났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정말 오도가도 못하는 난관에 빠져 있습니다. 그는 이 감옥에서 나오지 못하고 죽고 말 것 같습니다. 그때 바울의 머리에 드는 생각이 무엇입니까? 지금 주님이 그의 삶을 운전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만일 주님이 자기에게 죽음을 허락하신다면 이것은 이 세상의 어떤 위대한 삶 보다 더 영광스러운 죽음이 될 것을 믿고 있습니다.왜냐하면 지금까지 주님은 주님께 맡긴 자에게 나쁜 것을 주신 적이 한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만일 주님이 자기에게 죽음을 허락하신다면 이것이야말로 자기에게 엄청난 유익이 될 것이며 완전히 횡재를 하는 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주님이 그에게 보여주신 신실함이 바로 그런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지금까지 단 한번도 자기를 실망시키신 적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