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빌립보

[빌1:12] 감옥 안에서 승리한 비결 / 김서택 목사

'코이네' 2019. 2. 13. 22:33

(빌립보서강해 3)

 

목회자 자신의 체험(1)-감옥 안에서 승리한 비결

1:12-18

 

 

 

지난 번에 어느 교회에서 집회를 하던 중에 잠시 그 교회와 관계되던 한 여선교사님이 안식년을 맞이하며 본국에 돌아가기 전에 잠시 인사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 동안 자신이 한국에서 받은 은혜와 사랑에 대하여 감사하면서 자기를 위하여 기도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이 안식년을 통하여 주님과 더 깊은 교제의 시간을 가지게 해 달라고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그는 그 동안 많이 기도해야 하는데도 바빠서 제대로 기도하는 시간을 충분히 가지지 못했다고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어머니와 오빠가 아직도 주님을 인격적으로 알지 못하고 있는데 그들이 개인적으로 주님을 영접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윤락녀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이십 사 시간이 노출되어 있어서 자신이 매우 긴장했고 실제로 여유를 가지지 못했다고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위인전을 읽을 때 그 위인전이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어떤 점에서는 오히려 마이너스가 될 때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그 훌륭한 사람이 그 어려운 위기에서 취했던 용감한 행동에 대하여 감동하면서 실제로 그 사람과 나를 더욱 더 다른 종류의 사람으로 생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영웅이니까 그렇게 할 수 있었어. 나같은 평범한 사람은 절대로 그렇게 할 수가 없어라고 단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신앙 생활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사도 바울의 기록을 읽으면서 이것은 사도 바울같은 위인이니까 할 수 있는거야. 나같은 사람은 절대로 할 수 없어라고 단정하기 쉽습니다. 사실 그렇게 하는 것보다 더 바울을 오해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바울을 볼 때 바울의 가장 솔직한 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영웅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앙의 문제로 힘들어 하기도 했으며 또 양육하던 형제들과 헤어지면서 걱정을 많이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또 자기와 불편한 관계에 있던 사역자 때문에 많이 괴로워 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이런 부분보다 더 말하기 어려운 점도 없습니다. 자기들끼리도 하나 되지 못하고 자기들끼리도 사랑하지 못하면서 무슨 다른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합니까? 그러나 바울에게는 솔직하게 그가 잘 용납하기 어려운 다른 복음 전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는 도저히 옹납하기 어려웠던 현실이 믿음의 눈으로 볼 때 오히려 받아 들여 질 뿐 아니라 감사할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편지를 통하여 그도 얼마나 나약한 인간의 몸과 생각을 가졌으며 그런 가운데 믿음을 사용하였을 때 얼마나 결과가 달라지게 되었는지 빌립보 교인들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는 사실 개인적으로 사정이 더 어려워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로마에 죄수로 오게 되었을 때 하숙집 같은데 있으면서 상당한 자유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는 마음대로 사람들을 만나서 복음도 전하고 성경 공부도 할 수 있는 처지였습니다. 단지 그 집을 벗어나서 아무데나 다른 곳에 가지 못한다는 제약은 있었지만 그래도 상당히 자유로운 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사정이 달라져서 그는 더 이상 그런 편한 상태에 있지 못하고 악명높은 시위대 감옥 안으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그래도 그는 틈틈히 복음도 전하고 만날 사람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완전히 자유가 봉쇄당하는 본격적인 감옥 생활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열심히 복음을 전했지만 사정은 나아지지 않고 더 악화되었습니다. 이럴 때 그가 걱정하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선 자신의 일신상의 문제였습니다. 그는 분명히 시위대 감옥 안에 들어가면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재판이 빨리 결정되어버려서 그가 사형을 당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것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걱정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문제에 대하여 걱정을 합니다. 또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태에서 미래에 대하여 걱정을 합니다. 또한 지금까지 그가 말씀을 양육하던 자들에 대해서도 걱정을 합니다. 특별히 맡겨둘 만한 사람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감옥에 들어가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눈 앞에 나타나는 현실을 생각하면 그렇게 답답하고 단 하루도 견디기 어려운 형편이었습니다. 더욱이 바울을 아주 힘들게 하던 경쟁적인 입장에 있는 종교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감옥 안에 있는 바울을 더 괴롭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모든 것을 조용하게 이겨냅니다. 처음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답답했는데 한번 생각을 바꾸니까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었습니다. 바울이 감옥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어떤 신비적인 기적이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아무 변화가 없는 가운데 생각의 전환만으로도 그렇게 기뻐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가 깨달은 것은 적은 자기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완전하려고 하는 경향,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만드는 자기 기질,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지 못하는 완벽주의, 다른 사람 앞에서 자신의 약한 모습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교만과 프라이드 바로 이것이 자신의 적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가 마지막 까지 붙들고 있던 자존심과 자기 생각을 벗어버렸을 때 그는 감옥 안에도 하나님의 찬란한 빛이 비취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고의 변화입니다.

 

1. 시위대 안에서 맺은 열매.

 

사도 바울은 12절에서,“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말하고 있는 나의 당한 일이라고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것은 빌립보 교인들이 알고 있는 일이며 그것으로 인하여 대단히 염려하고 있던 일로 생각이 됩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이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바깥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죄수 생활을 하다가 시위대 안에 있는 감옥으로 이감되게 된 것을 말하는 것같습니다.

왜냐하면 13절에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났으니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가 로마에 끌려 오고 난 후 상당한 기간 죄수인기는 하지만 비교적 자유로운 생활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사정이 바뀌어서 그는 악명 높은 시위대 안에 있는 감옥으로 들어 가게 되었고 이것은 그가 육체적으로 매일 뿐 아니라 더 이상 다른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없는 상태에 빠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바울의 감옥에 달라지게 된 것은 그의 재판이 임박한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 뒤에 나오는 말씀을 보면 바울이 자신의 삶과 죽음의 문제를 놓고 엄청나게 고민을 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어쩌면 바울의 사역은 여기서 끝나는지 모릅니다. 그러면 이제 그가 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왜 지금까지는 그런대로 괜찮았는데 갑자기 환경이 어려워지는 것일까요?

사실 이 시위대 감옥이 바울에게 고통이 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를 상당히 짜증스럽게 만들 수도 있었고 그를 고통스럽게 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숙집에 있다가 감옥 안에 들어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특히 매일 밤에 쇠사슬을 차고 잠들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사도에게는 엄청난 모욕이며 정신적인 고통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 시위대 안에서의 생활을 상당히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13,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났으니

그리고 12절에는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 바울은 시위대 안에서 자신의 생활에 대해서 대차대조표를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시위대 감옥 안에 그에게 고통스럽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안은 불결했으며 그 안에서 그는 분명히 비인간적인 대접을 받았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나 벼룩같은 벌레로부터 고통을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무엇 보다 늘 만나던 믿음의 형제들과 만나지 못하는 상실감이 그의 마음 속에 더 손실로 다가 왔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모든 것을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분명히 그에게 마이너스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플러스가 되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가 시위대 안에 있음으로 해서 다른 방식으로는 도저히 얻을 수 없는 몇 명의 사람들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가 어떻게 해서 이 시위대 안에서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게 되었는지는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시위대 안에서 한 두 사람의 크리스챤만 얻은 것이 아니라 그의 존재가 시위대 안과 기타 여러 사람들에게도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 사람들은 모두 지금까지 그가 전도했던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심지어는 가이사의 집 식구 중에서도 몇 사람이 예수를 믿는 일이 있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두가지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그가 시위대 감옥으로 옮겨짐으로 받은 육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상실감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가 여기게 들어오게 됨으로 얻게 된 몇 명의 크리스챤들입니다. 그는 이 두가지 대차대조표 항목을 보고서 전체적으로 플러스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가 이 시위대 감옥 안에 들어오고 또 이 안에서 고통 받은 것이 복음의 진보가 되었다다시 말해서 복음을 위해서는 더 유익했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당한 육체적인 고통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습니다. 아마 그렇게 했다면 시위대 감옥에 대하여 끔찍했다’(terrible)이라고 결론을 내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물론 그가 당한 고통도 항목 안에 다 집어 넣었습니다. 사람은 결코 천사가 아닙니다. 그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이 정도는 괜찮아요라고 체면을 나타내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대단히 실제적인 사람이었고 경영학적인 두뇌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비중을 자기 개인의 편의에 두지 않고 복음의 진보에 두었습니다. 그랬더니 모든 것이 그의 머리 속에 명쾌하게 정리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수지맞는 장사라는 것입니다.

사실 요나는 니느웨 성에 갔을 때 그 원수의 나라가 망하기를 바랬습니다. 그가 성 밖에서 작은 움막을 하나 세우고 그 성의 결과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마음 속으로 니느웨 성 사람들의 회개가 위선적이기를 바랐습니다. 겉으로는 회개하는 척하지만 속으로 악한 마음으로 그대로 가지고 있어서 하나님의 진노로 망하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이상한 벌레가 벅넝쿨을 잘라 먹는 바람에 그만 움박이 소용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뜨거운 낮의 더워에 너무나도 마음이 상했습니다. 요나는 신앙의 대차대조표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가 손해 본 것이 무엇입니까? 박넝쿨 한 줄기였습니다. 그리고 사실 그것도 자기가 심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얻은 것이 무엇입니까? 니느웨 성 안에 있는 십이만 명의 어린 영혼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더 많은 숫자의 성인들과 가축들이었습니다. 그는 손해 본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단지 그의 민족주의적인 감정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엄청나게 불의한 분으로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그의 분노가 대단히 의로운 것으로 느끼게 만들었을 뿐입니다.

한번은 제가 수련회에 갔다가 목욕탕에서 구두를 잃은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구두 잃은 것에 짜증이 났습니다. 사실 그 수련회에서 하나님께서 많은 젊은이들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잃은 구두로 인하여 마음 속으로 짜증을 내고 또 나의 시간을 아까와 했습니다. 그러나 조용히 대차대조표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그했더니 말로 할 수 없는 이득이었습니다. 그것은 완전히 대어를 낚는 것과 같습니다. 대체로 청년들과 함께 사박오일 정도 함께 말씀을 나누면 틀림없이 그들을 건질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영적인 대차대조표가 없기 때문에 울어야 할 때 웃고 있고 웃어야 할 때 화를 낼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대하여 판단할 때 얼마나 내가 편해졌느냐 혹은 어려워졌느냐 하는 것으로 판단을 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얼마나 복음의 진보가 되었으며 얼마나 하나님의 나라에 유익이 되었느냐 하는 것으로 판단해야 제대로 모든 것이 보일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정말 전혀 하나님 나라에서는 의미없는 일을 위하여 일년 내내 뛰어다녔습니다. 그것으로는 아무 영혼에도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겨우 식구들 밥 먹여 살리느라고 정신없이 뛰어다녔다고 합시다. 그런 경우 통곡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이런 영적인 대차대조표가 없기 때문에 모르고 넘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 자신의 삶을 복음의 진보하는 기준에 맞추어 정리를 해 봅시다. 과연 나의 삶이 복음의 진보였는가 아니면 복음의 후퇴였는가? 아니 복음의 진보는 고사하고 내 영혼이 더 성숙하고 치료받고 온전해졌는가 아니면 더 퇴보하고 더 헤매었으며 중요한 것을 잃지는 않았는지 결산을 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2. 바울이 시위대 안에서 적응 할 수 있었던 비결.

 

그러면 어떻게 해서 사도 바울은 이 험악한 시위대 감옥에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그가 이 감옥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지만 기왕 들어와야만 한다면 철저하게 적응하기로 마음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죄수가 감옥을 옮길 때에는 신고하는 의미에서도 많이 매를 맞게 되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에서 사도 바울이 무수하게 매를 맞았다고 말할 때 어쩌면 이 시위대 안 감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그는 처음에 이 비인간적인 감옥에서 적응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는 참으로 존경받는 사도였습니다. 그리고 위대한 신학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전혀 통하지 않는 이방인의 감옥에 들어 와 있습니다. 그가 어떻게 여기서 복음의 진보를 나타낼 수 있었을까요?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그 상황에 적응시켰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바울은 자기 자신을 철저히 한 사람의 죄수로 처신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 바울은 시위대 감옥 안에 들어가면서 그나마 자기가 가지고 있던 마지막 자존심을 다 버리고 철저하게 그 시위대 감옥에 적응을 한 것입니다. 사람은 적응하지 않으면 절대로 남에게 감동을 줄 수 없습니다. 특히 도저히 적응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이 너무나도 잘 적응할 때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게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나라 전직 대통령 두 사람이 감옥에 들어 갔다가 얼마 전에 대통령 특별 사면으로 풀려나오게 되었습니다. 만일 그들이 감옥 안에서 대통령 때의 일을 잊지 못하고 그 안에서 대통령처럼 행동하려고 했다면 아마도 모든 사람들이 그들을 비웃었을 것입니다. “아직도 저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고 하면서 조롱할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그들이 교도소 안의 생활에 철저하게 적응해서 오히려 다른 사람들보다 더 규칙을 잘 지키고 기꺼이 그런 생활에 자신을 맞춘다면 사람들은 그에게 감동할 것입니다.

한번 생각을 해 보십시오. 로마 군인들 중에서도 감옥을 지키는 군인이 가장 보직이 나쁜 군인일 것입니다. 그들이 하루 종일 보는 사람들은 항상 찡그리고 있으며 언제나 불만에 가득 차 있고 몇번씩 말을 해야 겨우 반응을 보일까 말까 한 죄수들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노인이 있습니다. 그들은 처음에 그를 모르고 때렸습니다. 그러나 조금 지나고 보니까 그는 거기에 있어야 할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너무나도 따뜻하고 긍정적이며 사랑에 넘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얼굴에는 항상 여유가 있고 편안함이 있습니다. 아무리 감각이 없는 로마 군인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물론 감옥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바울에게 감동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몇 사람은 바울의 영향을 받았고 그와 친해져서 나중에는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는 자리까지 가게 된 것 같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복음 안에서 바울에 대한 좋은 소문이 퍼지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금방 이 아름다운 인격을 가진 죄수의 소문은 온 시위대 안에 퍼지게 되었고 다른 모든 사람들도 이 죄수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바울은 사람의 영혼을 다루는데 있어서 전문가가 아닙니까? 크리스챤은 어디에 가든지 처음이 가장 힘든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자기 자신을 지키려 하고 자기 안에 아직도 남아 있는 자존심이나 고집 같은 것이 있어서 잘 적응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일단 한번 친해지고 나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이 고비를 넘겨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에게 그 고비를 넘기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자신의 프라이드를 버리고 상대방에게 나를 기꺼이 맞추어주는 것입니다. 일단 마음 속에 가로 놓여 있는 불신의 벽을 넘기만 하면 그때에는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영적인 힘이 마음껏 발휘가 될 수 있습니다. 나에게 아무리 좋은 것이 있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내 안에 아무리 좋은 은사가 있다 하여도 남들이 나에

대한 좋지 않은 생각이나 감정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가장 현명한 사람은 처음에 사람을 얻기 위하여 자신을 완전히 낮춘 후에 그 영적인 능력을 가지고 사로잡아 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배운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것은 모두 유악하다는 것입니다. 달콤한 잔만이 아니라 고통의 쓴 잔도 나에게는 결국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좋은 환경만이 아니가 어려운 환경에서도 적극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있었으면 아무 결과도 얻지 못했을 상황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3. 다른 믿음의 형제들 가운데 나타난 반응.

 

사도 바울은 감옥에 들어가기 전에 지속적으로 말씀으로 양육하던 형제들이 있었습니다. 그가 시위대 감옥에 들어가면서 걱정되었던 사람들은 바로 이들이었습니다. 혹시 이들 중에서 너무 낙심한 나머지 신앙을 버리는 자들은 없을까 혹은 제대로 채움을 받지 못해서 거짓 교사를 따라가는 자들은 없을까 하는 염려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타난 결과는 그의 염려와는 정반대였습니다.

14,“형제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하므로 겁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

분명히 그들 중에는 그의 문제로 신앙에 흔들리는 자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다수를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바울의 매임을 보고 더 주님을 신뢰함으로 겁없이 하나님을 담대히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이 부분을 끝까지 하나님께 맡기기 어려웠는지 모릅니다. 사실 말씀의 종들이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가 양육하고 있는 사람들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아마도 바울이 감옥을 옮기면서 끝까지 마음에 부담을 느끼던 자들이 있었다면 바로 이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나타난 결과는 너무나도 달랐습니다. 이들은 스스로 자기 발로 일어서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맡겼더니 자기가 맡고 있었던 때보다 더 좋은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볼 때 우리 안에 있는 완벽주의적인 생각이 얼마나 주님을 믿지 못하게 하느냐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끝까지 주님을 믿지 못해서 붙들고 있는 동안 주님은 아무 것도 하시지 못하셨던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없으면 이 형제들이 매우 흔들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형제들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전도라고 하는 것은 바울같은 탁월한 말씀의 종이나 하는 것이야. 나처럼 믿은지 얼마 되지도 않는 사람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어하는 식이었습니다.

지금까지 그들은 바울이라는 사람만 믿고 아무 것도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감옥 안에서 외롭게 복음을 붙들고 믿음 생활하는 것을 보고 그들은 모두 다 자기 발로 일어서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지금까지 자기들은 너무나도 어리기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들은 충분히 스스로 일어 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이라는 사람만 믿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가장 염려하던 것을 주님께 맡겼을 때 주님이 이들을 직접 양육하며 키우시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것이 자기가 붙들고 있던 때 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께 맡기면 주님은 내가 하는 것보다 더 일을 잘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 사역자 없이도 일을 잘 하십니다. 선교사들은 그 대표적인 경우를 중국으로 들고 있습니다. 중국에 공산당이 들어서면서 모든 선교사들은 그 선교지에서 내어 쫓기게 되었습니다. 선교사들에게 있어서 이것보다 더 비참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사십년이 지난 후 두껑을 열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선교사 한 명 없이도 많은 놀라운 일을 하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 안에 자기 스스로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는 자들이 많이 생겨났던 것입니다.

저희들은 내가 없으면 하나님이 아무 것도 아실 수 없는 것처럼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부족한 우리들은 사용하실 뿐입니다. 우리들이 기도할 것은 더욱더 하나님께서 그 영광된 일에 나를 사용해주시는 것이지 내가 없으면 하나님이 아무 일을 하실 수 없다는 생각은 너무나도 하나님을 잘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4.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들.

 

우리가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인간적이며 솔직한 사람인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는 부끄럽게도 그곳에서 자신과 좋지 않는 관계에서 복음을 전하던 자들이 있었던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자기가 묶여서 꼼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너무 열심히 복음을 전하여 성공하는 것을 보고 한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졌던 것을 솔직하게 인정을 하고 있습니다.

15-17,“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여기서 투기와 분쟁으로 복음을 전한다고 하는 자들이 누구인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단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이단이 복음을 전하는 것을 두고서 바울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전파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3:2에 보면 유대주의자들에 대하여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분명히 사도는 유대주의자들을 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사도 바울의 마음 속에 괴로움을 더하게 하려고 복음을 전한 자들이 누구일까요? 아마도 그것은 언급할 가치가 없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말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과 바울의 사이가 불편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들은 바울을 사도로 보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경쟁 대상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그는 많은 크리스챤들로 부터도 그렇게 인정을 받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더욱이 그가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직접적인 관계없이 바로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바울이 좀 이상하거나 혹은 경계해야 할 사람으로 인식되어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더 이상 활동하지 못하고 시위대 감옥 안에 갇혀 버리니까 아주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마치 눈에 있는 가시가 없어졌던 것처럼 환영하면서 더욱 더 본격적으로 자신들의 세력을 확대시키기 위하여 열심을 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로마 안에는 복음을 위하여 열심을 내는데 두 부류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으니까 우리라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복음을 전하는 자가 있었는가 하면 다른 한편은 그 동안 우리를 힘들게 하던 자가 제거되었다 이때야 말로 우리들의 세력을 넓힐 때다고 하면서 열심을 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것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순수하게 복음을 전하는 것과 다툼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어떻게 다를까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순수하게 복음을 전한다고 해서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만 소개하고 그 뒤에는 전혀 양육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복음을 전한 뒤에 이제 저는 당신에게 해야 할 일을 다 했습니다. 이제 부터는 당신 집 가까운 아무 교회나 찾아가서 신앙 생활 하도록 하세요라고 말하는 것이 순수하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사실 처음에는 전도하는 단체들은 그렇게 해왔습니다. 그러나 처음 복음을 들은 자를 바로 다른데 보내기 보다는 좀더 붙들고 양육할 필요가 있는 것을 많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분쟁으로 복음을 전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정말 사람들에게 어떤 지식을 주입시켜서 완전히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물론 복음도 전하지만 그 안에 자신의 철학이나 어떤 특별한 강조점을 부각시켜서 다른 사람은 따르지 못하게 하고 오직 자신이 집단만 추종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다툼과 분쟁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를 믿기는 믿는데 자신들의 신앙 칼라가 상당히 강해서 쉽게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받아 들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말이 아닙니다. 분명히 그리스도인이며 구원받은 성도입니다. 그런데 그를 지도한 사람이 어떤 점을 지나치게 강조해서 그 사람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 놓아버린 것입니다. 사실 요즘 제자 훈련이라고 하는 것이 쉽게 이야기 하면 자기 사람 만들기입니다. 다른 교회에서 오랫 동안 신앙 생활하던 사람을 그 교회에 교육 프로그램 안에 집어 넣어서 자기 교회의 체질로 만드는 것입니다.

아마도 지금까지 바울은 전도하면서 자기 세력을 키우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특히 선교를 하면서도 다른 교회가 이미 들어 간 지역은 들어가지 않도록 함으로 교회가 서로 경쟁하지 않고 보다 넓은 지역에 복음을 전하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분명히 믿는 사람들이 그 지역에 자신들의 교회를 세우게 해서 스스로 자립하게 했지 자기 세력을 확보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그는 어떤 복음 전하는 자와 분명히 불편한 관계에 있었고 이것이 바울을 굉장히 괴롭게 하고 고민하게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17절에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 생각하여라고 말한 것은 실제로 그들의 활동이 바울 자신의 사역을 무너뜨렸으며 그의 원칙을 깨트려서 상당히 마음을 상하게 했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한때 내가 열심히 복음을 전한 곳에 다른 교파가 들어와서 주도권을 다 차지해 버린다든지 혹은 내가 열심히 전도한 캠퍼스에 다른 선교단체가 들어와서 학생들을 많이 가져 가버렸을 때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사실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 중에서 넘기 어려운 한계가 바로 하나님께서도 나와 같은 스타일로 일해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런 사적인 감정으로 봐야 할 성질의 것이 결코 아닙니다.

바울은 어떻게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까?

18,“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한 동안 바울은 이 얌체같은 자들의 사역이 잘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그의 마음이 편치 않고 시위대 안에 들어 옴으로 그의 모든 사역이 다 망가지는듯한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도 이 문제만큼은 잘 용납이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사실 감옥 안에서 굉장히 고통스러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 순간 이 고통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것은 그 안에서 생각의 변화였습니다. “반드시 나를 통해서 복음이 전해질 필요가 없는 것 아니냐? 그리고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그리스도만 전해지면 되는 것 아니야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그것을 생각할 때 그는 그들을 용납할 수 있었으며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습니다. 단 순간의 생각의 전환이었습니다. 비록 그들이 주장하는 것이 다 옳지는 않고 또 어떤 부분은 사실 욕심으로 하는 것도 있지만 그래도 그 복음을 듣고 구원을 얻는다면 이것이 얼마나 좋은 일이냐 하는 것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이라고 하면 영적으로 엄청나게 성숙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라고 해서 감정도 없고 미움도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의 마음과 사람의 감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오히려 우리들 보다도 더 민감했고 더 어떤 문제에 집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어려운 가운데 싱리할 수 있었던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믿지 않고 주님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오직 주님의 종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가 주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종은 얼마든지 맞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나은 대접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얼마든지 비인간적인 대접을 받을 수 있고 또 욕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대파대조표는 내가 얼마나 좋은 대접을 받았느냐 혹은 내가 얼마나 좋은 상태에 있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느냐 하는데 있습니다. 비록 내가 고통 가운데 있게 되어도 그것이 복음의 진보가 될 수 있다면 더 유익한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바울은 자기가 할 수 없는 것을 주님께 맡겼습니다. 자기가 직접 돌볼 수 없었던 형제들을 주님께 맡겼더니 더 좋은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것이 기도의 묘미입니다.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을 주님께 가지고 갑니다. 금방 결과가 나타나지 않을 때에는 끝까지 주님께 맡깁니다. 그런데 주님은 내가 붙들고 있던 때 보다 더 좋은 결과를 나타내십니다. 결국 일하시는 분은 주님이신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주님이 꼭 나의 방식으로 나를 통해서만 일하셔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나와 다른 종들을 통해서 얼마든지 일을 하실 수 있고 만일 그렇게 해서라도 복음이 전해질 수 있다면 기뻐할 일입니다.

저는 제가 무엇에 집착하려고 할 때 마다 내 안에 성령이 고갈되어 있는 것을 느낍니다.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고 아내가 하는 말들이 나의 신경을 그슬리게 할 때 내가 아내를 이겨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내 안에 성령이 고갈되어 있고 또 내의 완벽주의병이 발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한 때 제 방식으로 교인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잘 따라 주지 않으면 미워지기고 하고 비난할 때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저의 방식이었습니다.

우리는 형제나 자매를 나의 사람으로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주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거리가 필요합니다. 인간적으로 너무 가까워져서 인정 때문에 아무 것도 하지 못하게 된다면 압살롬처럼 백성들의 마음을 도적질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지옥에 간다거나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그들도 더 진리를 깨닫게 될 때 그 사람의 굴레에서 벗어나 더 온전함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바울이라고 해서 천사같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연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믿음으로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다스렸기 때문입니다. 가장 무서운 원수는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것은 한 순간에 되지 않습니다. 늘 뭉둥이로 두들겨 잡아야 합니다. 그래야 어려운 가운데도 주님이 일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