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빌립보

[빌1:1] 서로의 문제를 나누자 / 김서택목사

'코이네' 2019. 2. 11. 22:21

 

서로의 문제를 나누자

 1:1-6

설교 : 김서택 목사

 

 

저는 오래 전에 일주일에 한번씩 군 교도소를 방문하여 거기에 있는 죄수들에게 복음을 전하곤 했던 적이 있습니다. 제가 교도소를 찾아가서 거기에 있는 죄수들을 만날 때 마다 그들에게서 발견했던 것은 모든 것을 체념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희망이나 의욕같은 것은 조금도 찾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얼굴을 보면 정말 기뻐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그런 표정이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감옥에 갇히게 된다면 마음이 슬퍼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슬픈 마음은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에 계속 될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감옥안에서 엄청난 기쁨을 느꼈다면 그것은 예삿일이 아닐 것입니다. 만일 그가 감옥 안에서 발견한 기쁨이 너무나도 커서 감옥밖에 있는 그의 형제들이나 그가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편지를 보내어서 함께 기뻐하려고 한다면 그런 일은 평범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바로 그런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감옥 안에 갇혀 있습니다. 그 감옥이 어느 감옥이냐 하는 것에 대해서는 성경 학자들의 의견이 일치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감옥에 갇혀 있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 감옥 안에서 엄청난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 기쁨이 얼마나 큰지 그는 도무지 혼자서 이 기쁨을 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국 편지를 써서 감옥밖에 있는 사랑하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편지를 보내어서 함께 기뻐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살피려고 하는 빌립보서는 바로 이 감옥 안에 있는 사도가 보내는 기쁨의 편지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감옥 안에 추운 곳입니다. 어느 감옥도 훈훈하게 불을 때어주는 감옥은 없습니다. 그리고 감옥 안은 외로운 곳입니다. 감옥 안에는 교제가 없습니다. 감옥 안에는 자유가 없습니다. 그 안에는 인간적인 대우를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감옥 안에서 사도 바울은 기뻐하고 있으며 자신의 기쁨을 사랑하는 교인들과 나누고 싶어 합니다. 그 이유는 그가 이 감옥 안에서 여러 가지 어렵고 답답한 일들 중에서 기뻐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했기 때문입 니다. 그리고 그는 바로 이 기뻐하는 방법을 빌립보 교인들에게도 알려주려고 하고 있습니다.

요즘 우리들은 모두 기뻐할 이유가 없는 사람들 같습니다. 직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얼굴들도 모두 찡그리고 있습니다. 길에서 마주 치는 사람들의 얼굴들도 결코 밝지가 않습니다. 가족들 끼리 만나도 아무 것도 기뻐할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런 중에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1. 그리스도인들의 인사.

 

저는 다른 교회나 집회에 설교하러 갈 때 처음으로 청중들을 만나게 될 때가 많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고민에 빠집니다. 어떻게 이들에게 인사를 나누어야 하나하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고민을 하다가 적당한 인사 말씀이 생각나지 않을 경우 인사도 생략하고 바로 설교 본문으로 들어갈 때가 많습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 중에 이런 인간적인 인사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한 순간이라도 더 빨리 전하고 싶은 마음 때문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서신을 읽어 보면 아무리 바빠도 인사는 반드시 하고 주된 메시지로 들어가는 것을 보게 되면서 인사가 참 중요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사도 바울은 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1,2,“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는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왜 우리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있어서 이런 인사가 중요할까요?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만 있으면 되는 것이지 이런 인간적인 인사나 문안은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거기에 대해서 이런 인간적인 관계가 신적인 내용을 담는 그릇이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얼마 전 어느 고등학교에서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강당에 모인 학생들은 거의 대부분이 자기들이 왜 거기에 와 있는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설교를 시작하자 말자 많은 아이들은 떠들고 혹은 잠을 자고 해서 저는 설교 하려고 한 것을 거의 대부분 전하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준비한 내용이 좋았지만 아이들이 받아 들이려고 하지 않으니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 다음 시간에 저는 아이들에게 말을 했습니다. 그들이 공부를 하느라고 얼마나 지쳐 있으며 얼마나 신경이 예민해져 있는지 내가 알고 있다고 인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차라리 이 시간 여러분들을 실컷 자게 하고 빵이나 우유를 주는 것이 여러분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위로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제가 전하는 이 설교가 어쩌면 빵이나 우유보다 훨씬 더 큰 기쁨을 여러분들에게 줄지도 모른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이들은 흥미를 가지고 말씀을 듣기 시작했고 이 두 번째 설교는 대 성공이었습니다.

우리 사람이라고 하는 존재는 얼마나 약한지 모릅니다. 아무리 좋은 하나님의 말씀을 소나기 처럼 쏟아 붓는다 하더라도 듣는 사람이 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설교자는 말씀을 듣는 사람에게 먼저 인사를 하고 사랑과 예의로 나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바빠도 예의는 지키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일 제가 사도 바울 같으면 인사도 생략하고 내가 감옥에서 얼마나 기뻐하고 있는지 그 흥분과 감정을 전하려고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흥분해 있어도 편지를 받아 보는 자가 전혀 흥분되어 있지 않으면 도무지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담치기를 하지 않고 입구에서부터 서서히 그들을 안내해 들어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로 요술이나 마술이 아닙니다. 입구에서부터 서서히 한 사람 한 사람을 진리의 바다 한 가운데로 안내해 들어가는데 있어서 결코 서두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 순간 보면 자신이 엄청난 하나님이 진리 한 가운데 들어 와 있으며 이 진리의 바다 한 가운데 빠져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노련한 교사가 하고 있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먼저 자신이 누구와 함께 있으며 또 어떤 사람들에게 이 편지를 스고 있는지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와 함께 있습니다. 그는 혼자서 주관적으로 이 기쁨을 누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증명해 줄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말에서 그는 자유가 없는 노예임을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하인이 아니고 노예입니다. 그러나 로마의 노예가 아니고 그리스도 예수의 노예입니다. 그 감옥 안에 많은 죄수가 있지만 모두 다 같은 죄수가 아닙니다. 정말 무서운 죄를 지어서 거기에 들어 와 있는 사람도 있지만 바울처럼 복음 때문에 잡혀 들어와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사람들은 다 같은 죄수로 취급을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자아상은 다른 사람들과 달랐습니다. 그는 예수에 매여 있는 것이지 로마 사람들에게 매여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다른 부분에서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같은 병원의 병실에 누워 있지만 같은 환자가 아닙니다. 그냥 병으로 입원해 있는 환자가 있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환자가 있습니다. 자기가 왜 이 병에 걸렸는지 그리고 그 병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단한 환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환자입니다.

저는 오랫 동안 직장없이 지냈습니다. 아마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다른 실업자들과 다를 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끝까지 제가 예수 그리스도의 실업자라는 것을 붙들었습니다. 만일 그것이 희미해진다면 저의 모든 정체성이 무너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고생하는 의미가 없었습니다. 저는 끝까지 에수 그리스도의 실업자였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자신에 대한 정의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고생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고생하는 것과 근본적으로 성격이 다릅니다. 물론 내 욕심으로 초래된 고난이라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하여 주님을 인정하게 되면 주님의 고난이 되고 주님의 병이 되고 주님의 부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는 이 편지를 빌립보에 있는 모든 성도들과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보내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놀랍게도 그 어렵게 복음이 전파된 빌립보에 정식 조직을 갖춘 여러 교회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감독이나 집사에 대해서는 지역에 따라서 워낙 많은 차이가 있어서 똑 부러지게 이것이다는 식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빌립보 지방에 이미 조직을 갖춘 교회가 여러개 있었고 그들은 주 안에서 한 교회라는 공감대를 가지고 있었던 것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 모두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교회에서 책임을 맡고 있는 감독이나 집사들도 이 대상에서 빠트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은 더욱 더 이 편지의 내용에 유의해주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주님의 교회를 목회하거나 섬기다 보면 너무나도 많이 기쁨을 잃기 쉬운데 사도 바울의 비결을 배워서 사탄에게 속지 않고 기쁨을 잘 간직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왜 주의 일을 하면서 기쁨을 잃기 쉬운가 이해가 잘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신나는 일이 주님의 일이 아닙니까? 그러나 주님의 일 보다 더 기쁨을 잘 잃기 쉬운 것도 없습니다. 그 이유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영적인 상태가 나와 연결이 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교인들 중에 한 사람이라도 상태가 좋지 않으면 모두의 마음이 무거워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 몸의 한 부분이라도 불편하면 온 몸이 좋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결국 기쁨이 충만해지려면 몸의 모든 부분이 건강해지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기쁘기 위해서는 더욱 더 열심히 다른 분들을 기쁘게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인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냥 듣기 좋아라고 인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실제로 우리의 모든 평안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온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빌립보 교인들이 이 편지를 읽을 때 그들이 어떤 좋지 않은 상태에 있든지 간에 마음이 평안과 기쁨을 회복할 줄 믿고 있습니다. 우리의 평안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임하면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기분 나쁜 것을 다 이기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2. 기도할 때 마다 기쁨으로 기도하게 되는 교회.

 

사도 바울은 먼저 이 빌립보 교인들을 생각하기만 하면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며 기도할 때 마다 그들을 위하여 기쁨으로 기도하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3,4,“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 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아마 여러분들은 이 기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사귀었길래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는가, 혹시 좀 과장된 표현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가 됩니다. 저는 몇 년 전에 지방에 있는 한 교회의 청년부 수련회에 설교하러 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설교를 몇번 하기 까지 그들에게서 전혀 특별한 것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거저 다른 교회에서 보는 청년들과 다른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장난도 잘 치고 웃기도 잘 하는 젊은이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몇번째 설교인지는 모르겠는데 놀라운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들 거의 대부분이 설교 중에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면서 말씀을 듣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거의 돌발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마음 속에 엄청난 감격과 기쁨이 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후 저는 그들의 눈 빛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다시 만날 수 있다면 하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을 생각하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고 하나님께 감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감정은 그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도 저를 보기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저의 머리 속에는 이런 엄청난 성령이 부으심이 있었던 많은 교회가 여러 소중한 분들의 얼굴이 새겨져 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빌립보 지역은 꿈에도 잊을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는 이 빌립보에서 전도자로서 겪을 수 있는 가장 강렬한 체험을 했습니다. 그는 처음에 빌립보로 갈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드로아에서 꿈에 마게도니아 사람이 손짓하는 것을 보고 보스포러스 해협을 건너 마게도니아로 넘어 갑니다. 거기서 그가 처음 들어 간 도시가 빌립보성이었습니다.

 

그는 거기서 먼저 유대인들의 회당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빌립보에는 유대인들의 회당은 없고 강가에 기도하는 처소는 있었습니다. 거기서 그는 자주 장사 루디아를 만나게 됩니다. 이 루디아라는 여자는 이방인으로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완전히 유대인이 된 것은 아니지만 회당에서 율법을 배우는 자였습니다. 그런 자들을 사도행전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자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는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서 복음을 듣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집이 다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리고 루디아가 강권하는 바람에 그의 집에 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그 기도 처소로 가다가 귀신들린 한 여자 아이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 아이가 소리지르면서 따라 와서 바울을 아주 많이 괴롭혔습니다. 사탄의 직접적인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여자 아이 속에 있는 귀신을 나가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귀신 들린 여자 아이로 점을 쳐서 돈을 벌던 주인이 바울과 실라를 고소하여 그들은 감옥에 들어가서 매로 때리고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들은 깊은 감옥에 갇히고 발에는 착고가 채워졌습니다. 그들은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이런 대가를 지불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고 주를 찬양할 때에 갑자기 성령의 부으시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이 성령의 역사는 그들의 마음에만 부어진 것이 아니라 물리적인 현상으로 나타나기 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발에 채워진 착고도 풀어지고 감옥 문도 열려졌습니다. 그들은 이 어두운 감옥에서 하늘의 영광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놀란 것은 간수였습니다. 그는 죄수들이 모두 도망간 줄 알고 자결하려고 하는데 바울과 실라가 말렸습니다. 그는 너무나도 놀라서 등불을 들고 감옥 안에 뛰어 들어 바울과 실라 앞에 부복하고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바울과 실라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을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면서 주님의 말씀을 그 집 사람들에게 전하여 그들이 모두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이렇게 해서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아주 짧은 기간이었지만 루디아 같은 동역자가 있었고 핍박이 있었으며 강한 성령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이곳과 여기에 있는 성도들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놀라운 역사를 행하신 것은 바로 이들을 위해서였으며 이들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이 귀한 체험이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들이 그의 마음 속에 완전히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생각할 때마다 그 감동이 되살아났고 그 귀한 만남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이들을 위해서는 기쁨으로 기도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더욱 이들을 잊지 못하게 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들이 바울이 어려울 때 한 두 번 필요한 물질을 보내어 준 것이었습니다. 사실 사도 바울이 감옥 안에서 크게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빌립보 교인들이 보내어준 헌금 때문이었습니다. 이 작은 선물이 얼마나 그를 기쁘게 했으며 얼마나 그로 하여금 담대하게 했든지 도저히 혼자서만 이것을 누릴 수가 없었습니다.

 

3. 복음 안에서 교제함.

 

사실 사도 바울이 감옥 안에서도 이토록 기뻐하는 이유는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이 감옥 안으로 전달된 빌립보 교인들의 사랑의 선물 때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보낸 헌금을 대하면서 그것에서 금전적은 가치를 엄청나게 뛰어 넘는 하나님이 은혜를 맛보고 있는 것입니다.

5,“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사도 바울이 감옥이라는 그런 좋지 못한 상태에서 그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빌립보 교인들이 보낸 선물 때문이었습니다.

그 얼마 되지 않는 헌금이 바울에게 의미했던 것은 두가지였습니다. 하나는 결코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라고 해서 감옥이 좋을 리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라고 해서 고통이 좋거나 괴로운 것을 즐기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자기 혼자 이런 고생을 한다고 생각했을 때 얼마나 그 감옥 생활이 힘들고 영적으로 침체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에바브로 디도 편에 보내온 작은 선물을 보았을 때 더 이상 이 싸움에 나 혼자가 아니라 바로 이 사랑하는 빌립보 교인들이 자기의 고통을 잊지 않다고 생각하니까 갑자기 그의 마음 속에 영이 흥분되며 기뻐 뛰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은 이 헌금을 보았을 때 이것이 그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6,“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루실 줄 우리가 확신하노라

사실 빌립보 교인들은 한번만 사도 바울을 도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몇 차례에 걸쳐서 사도 바울을 돕기 위하여 물질적인 도움을 베풀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의 작은 성의를 보면서 이것은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하여 하시는 것이었고 만일 이들 뒤에 서 있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이것은 엄청난 하나님의 도우심의 지극히 작은 한 부분에 불과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 뒤에 서 계신 엄청난 주님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저희들은 가장 중요한 문제로 들어가야만 하겠습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들을 힘들게 하는 것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먹고 사는 것이 생각만큼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직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우리릎 피곤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때로는 가정 식구들 사이에도 서로 위로의 말이나 좋은 말보다는 상처주는 말을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우리가 이 모든 어려움 중에서 기뻐할 수 있는 비결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성도들 사이의 교제에 있습니다. 여기서 성도 사이의 교제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우리들이 만나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도 사이의 교제라고 하는 것은 말만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체적인 나눔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필요한 모든 것을 우리 사랑하는 믿음의 형제들 안에 감추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서로를 위한 시간을 내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 일을 더 잘 하기 위하여 믿음이 형제들을 만나는 시간을 아까와 합니다. 그런 교제가 없는 신앙의 특징이 무엇인가 하면 만성적인 침체와 분노를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만나서 음식을 먹고 말씀을 나눌 때 느끼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런 문제로 싸우고 있는 사람이 나 혼자가 아니구나 하는 것입니다.

좋은 예는 아닙니다만 한가지 예를 들어 봅시다. 어떤 여자들이 있는데 한 남자가 이 여자에게도 사랑을 고백하고 저 여자에게도 사랑을 고백하고 또 다른 여자에게도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여자들은 모두 이 남자가 자기를 사랑하는구나 생각하고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혼자서 고민하기에는 너무 힘이 들어서 서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이야기는 나누어 보니까 이것은 자기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고민할 가치조차 없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남자는 모든 여자에게 사랑을 고백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랑은 고민할 가치조차 없는 사랑으로 판명이 난 것입니다. 마귀가 우리를 속이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문제는 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고 다른 사람은 나에게 도음이 되지 않는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귀가 사용하는 가장 유치한 전법인데 우리는 잘도 거기에 걸려 들 때가 많습니다. ‘이 문제는 나에게만 해당되는 어려움이며 다른 사람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바로 이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성도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해 보면 모두 다 비슷비슷한 문제로 고민을 하고 있고 실제로 나보다 엄청나게 큰 어려움 중에 있는 사람도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잘 참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다 형편과 처지만 다르지 같은 싸움을 싸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만나야 합니다. 만나서 나의 문제를 이야기하다 보면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게 되어 있고 결국 같은 길을 가고 있으며 같은 싸움을 싸우고 있는 사람이 다 외에도 많다는 생각을 하면서 마음이 든든해집니다.

마귀는 그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도 이런 식으로 속였습니다. 마귀는 엘리야로 하여금 이스라엘 안에서 바른 신앙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자기 혼자라고 생각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너무 고독했고 너무나도 지쳐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안에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자 칠천 명이 남아 있다고 알려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 자폐아라는 것을 들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완전히 마음 문을 닫고 자기 세계 안에 빠져서 사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나중에는 너무나도 이상한 신앙이 되고 맙니다. 초대 교회 때 다른 형제들과 완전히 교제를 단절하고 요단강 건너 편으로 들어간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가난하다고 해서 에비온파라고 불리우기도 했는데 세월이 지난 후 그들이 다시 등장했을 때 거의 이단과 비슷할 정도로 이상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거의 자폐증에 걸린 사람들 같습니다. 완전히 자기 마음을 닫아 놓고 다른 사람을 받아 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폐증에 걸린 아이들의 특징이 자기 감정 통제가 되지 않는 점입니다. 기쁠 때는 소리를 지르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 슬플 때는 깔깔대면서 웃기도 합니다. 또 누군가가 안으려고 하면 기겁을 하고 발광을 부립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교만한 벽을 깨트리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다른 형제와 자매들 안에 넣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고립되어서는 안됩니다. 고립되면 병들게 되어 있습니다. 다른 형제와 자매를 만나기 위하여 시간을 내고 수고를 해야 하며 물질적으로 손해를 봐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살 수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이 하는 말과 돕는 손길을 통하여 그 일을 하고 계신 분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신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를 스스로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만일 이 일을 하나님께서 시작하셨다면 과연 이유없이 하나님께서 중단하시겠는가? 결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물론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루실 줄로 확신한다고 해서 언제나 빌립보 교인들을 통해서 주님이 그의 필요를 채워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의 손길을 통해서 무한정의 주님의 손을 보았고 만일 빌립보 교인들이 사정이 있어서 도움을 중단한다 하더라도 수많은 다른 빌립보를 통하여 끝까지 이 일을 이루실 것을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많은 역경 가운데서 크게 기뻐할 수 있는 힘이 어디에서 나올까요? 그것은 주님의 작은 흔적들에서부터 출발하는 논리적으로 추론을 통해서입니다. 이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것도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공중에 나는 새도 먹이신다면 하물며 사랑하는 자녀인 나를 굶기시겠는가?” 바로 이것이 논리적인 유추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는 아마도 정 반대로 유추할 것입니다. “공중에 나는 새는 새니까 이것 저것을 잡아 먹고 산다. 그러나 나는 새가 아니기 때문에 어디서 돈을 빌려야 할지 걱정해야만 한다이것은 불신앙의 유추입니다.

어떤 과부는 악한 재판장도 설득해서 자신의 원하는 것을 얻어 내었다. 그러나 나는 우리 하나님은 얼마나 선하신 하나님이신가 그런데 나는 너무나도 쉽게 포기했었다. 이제는 중요한 문제가 있을 때 너무 쉽게 포기하지 말고 좀 더 끈질기게 하나님께 매달려 보자.” 얼마나 놀라운 논리적인 유추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단순한 성경 해석을 듣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바로 거기서 나에게 적용되는 말씀을 듣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설교 말씀을 들으면서 스스로에게 적용을 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적용이 얼마나 내 마음을 덮고 있는 어두움의 그림자를 몰아내고 기뻐 뛰게 만드는지 체험해 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이 우울하고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때가 모든 시름을 물리치고 기뻐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성도 사이의 교제였습니다. 세상적인 교제가 아니라 복음으로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이 보낸 작은 선물이 바울로 하여금 감옥의 그 어두운 감정을 떨쳐버리고 기쁨으로 충만하게 했으며 그는 자신의 기쁨이 얼마나 큰 지 그리고 빌립보 교인들고 그런 식으로 승리할 수 있도록 이 편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믿음의 유추, 이것이 어려운 가운데 기뻐할 수 있는 힘입니다. 만일 사도 바울이 감옥 안에서 성도들과의 교제를 통하여 그 모든 고통을 이기고 기뻐하고 있다면 우리들도 같은 방식으로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 우리 자신들의 빌립보서를 기록해야 할 것입니다. 작은 관심을 통하여 나의 어려움에 동참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기쁨이 편지를 쓰든지 아니면 전화를 하도록 합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나를 찾아 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우리가 빌립보 교인들처럼 감옥이나 혹은 경제적인 어려움에 빠져 있는 자들에게 찾아 갑시다. 격려의 전화를 걸든지 혹은 작은 물질로 도웁시다. 그것을 통하여 그 사람 뒤에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께서 이 일을 시작하신 것을 깨닫게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