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는 젊은 사자로다.
창 49:8-12
유다가 받은 복은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지도자의 축복이었습니다.
유다에게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8)라 하여 모든 지파 중 으뜸이 될 것을 예고합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될 것에 대한 예언은 10절에 나와 있습니다.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홀이나 지팡이는 모두 왕이나 통치자가 가지고 있는 지휘봉과 같은 것을 말합니다. ‘실로가 오시기까지’라는 구절은 해석이 어려운데 흔히 실로는 통치자를 가리킵니다. 유다 민족이 끊임없이 꿈꾸었던 비전은 온 민족이 이스라엘 왕의 통치를 받는 비전입니다. 이 비전은 메시야의 비전으로 확대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되었습니다. 메시야의 통치 이전까지 유다가 이스라엘 모든 백성을 다스릴 것이고 이 약속은 다윗과 유다 왕국을 통해서 실현이 되었습니다.
두 번째 축복은 평화와 물질의 축복입니다.
11절과 12절입니다.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그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 이는 우유로 인하여 희리로다”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면 안 되지요. 나귀가 다 먹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이 부어지니까 포도나무가 지천으로 자랍니다. 그래서 나귀를 그 귀한 포도나무에 매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 옷을 포도주에 빨 정도로 포도가 많습니다. 포도를 얼마나 많이 먹었는지 눈이 포도주처럼 붉습니다. 우유를 얼마나 많이 먹었는지 이가 하얄 정도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의 축복입니다.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한 것은 유다 안에 젊은 사자의 본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9절입니다.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저는 무엇보다 유다를 향한 이 사자와 같은 복이 우리에게 있기를 소망합니다. 유다는 젊은 사자입니다. 그 안에 사자와 같은 용맹함과 위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도 그를 범할 수 없습니다. 사자의 본성은 본래 유다 안에 있었을 수도 있지만 야곱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구체화되고 있습니다. 유다는 아버지 야곱이 사자라고 하는 순간 사자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젊은 사자와 같은 존재로 부르셨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그리스도를 그 안에 품고 있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가 그 안에 있습니다. 영어로는 Power입니다. 우리 안에는 파워가 있습니다. 그것이 곧 사자의 용맹함입니다. 우리가 누구인지 분명히 아는 데서부터 우리는 우리 자신의 권세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사자와 같은 본성을 가지고 있는데 내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모른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니체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인간의 삶을 낙타와 사자로 비유한 적이 있습니다.
낙타는 인내심으로 상징됩니다. 물도 없고 뜨거운 사막을 무거운 짐을 지고 걸어갑니다. 낙타는 “너는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가치관이 지배합니다. 낙타의 등에 있는 두 개의 봉은 의무와 희생입니다. 낙타는 헌신하며 열심히 일하지만 즐거움은 없고 남을 위해 사는 고단한 존재입니다. 그러다 사막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습니다.
두 번째 유형은 사자입니다. 사자는 자유와 도전을 상징합니다. 공격적입니다. 사자는 자신이 주인입니다. 남의 말이나 명령도 듣지 않고 자기 욕망과 자기실현에 충실합니다.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인생을 즐깁니다. “나는 하고 싶은 대로 한다”가 사자의 삶의 양식입니다. 니체는 우리를 향하여 낙타의 삶에서 사자의 삶으로 존재를 바꿀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낙타처럼 살고 있지 않습니까? 야곱의 예지적인 눈이 유다 안에 있는 사자의 본성을 발견하듯이 우리 안에 있는 이 사자성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서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현실에 좌절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하는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은 사자처럼 우리가 용맹하게 삶의 한계에 맞서 도전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행1:8)는 말씀은 우리에게 더 이상 한계가 없음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한계는 어디 입니까? “땅 끝”입니다.
21세기는 이처럼 사자처럼 도전하는 사람들이 성공합니다. 기회는 여전히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페이스북 창시자 주커버그는 2003년에 하버드 대학의 기숙사에서 연구를 시작하여 지금은 전세계 6억 명이 이용하며 기업가치 80조원이라는 엄청난 일을 이루었습니다. 전세계 검색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구글도 1997년 9월 허름한 창고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 사의 빌 게이츠나 애플 사의 스티브 잡스, 한국의 안철수 등은 모두 최근 2, 30년 사이에 등장한 뉴프론티어들입니다. 우리의 젊은이들이 자기 안에 사자와 같은 본성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낙타처럼 길들여지는 것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젊은 사자들을 동물원에만 가두려 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현실입니다. 안철수 씨는 우리나라를 삼성동물원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가장 최상층에 삼성이라는 대기업이 있으면서 그 밑으로 먹이생태계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이익은 대기업이 가져가고 중소기업이 근근이 떡고물을 먹으며 살고 있습니다. 조금 좋은 제품을 개발하거나 좋은 사람이 생기면 대기업이 다 가져가 버립니다.
이 동물원 안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이 최상층에 올라가지 못해 안달입니다. 그들의 꿈은 좋은 직장을 갖고 신분상승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좋은 스펙을 쌓으려고 합니다. 모험과 도전은 하지 않습니다. 검증된 안정된 길만 가려고 합니다. 한 번 실패자는 용서하지 않는 가혹한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시스템이 한국 사회를 2만 불 수준에 묶어두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한국경제는 잘 모방하면서 선진국을 따라 잡았습니다. 남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경쟁과 빠른 속도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창조하고 끊임없이 자기 안에서 도전하고 무엇인가를 만들어내야 도약할 수 있습니다. 마치 한국 사회는 고등학교까지는 그 실력이 세계에서 선두권을 형성하지만 대학에 들어가서는 100위권 밖으로 처지는 것과 같다 할 것입니다. 더 앞서가기 위해서는 낙타처럼 순종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사자처럼 도전하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그 과정에서 실패도 할 수 있습니다. 그 실패를 용납하고 격려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또다시 도전할 수 있습니다.
순응적인 사람이 되지 말고 좋은 일을 위하여 욕심을 내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손 안에 주어진 것은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고후10:4)입니다. ‘강력’을 영어로는 divine power라 합니다. 신적인 능력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바로 사자의 힘입니다.
공정무역 운동을 일으킨 커피 판매업체 ‘푸라 비다(Pura Vida)’를 그 한 예로 들고 싶습니다.
공정무역이라는 것은 제3세계에서 싼 값에 원료를 사들여 비싸게 파는 방식을 지양하고 가난한 제3세계 사람들에게 제 값을 받게 하자는 운동입니다. 일반 기업들은 예컨대 에디오피아의 커피를 1kg에 100원에 사들여 서구에서는 근 200배가 넘는 값에 팝니다.그러니 이들 나라는 여전히 기근에 시달리고, 그 인근 나라인 소말리아는 해적질을 하고 살 수밖에 없는 형편이 됩니다. 크리스 던리와 존 세이지라는 사람은 1980년대 말에 신앙적 소명의식에서 공정무역 커피판매 업체 ‘푸라비다’를 세웁니다. 이들이 공정무역 운동을 시작하면서 세운 사명선언문이 매우 감동적입니다.
“첫째, 우리는 다른 사업방식이 있음을 믿는다. 탐욕이 아닌 선으로 움직이는 사업방식. 자본주의를 연민의 통로로, 믿음을 행동을 위한 엔진으로 보는 사업방식이 있음을 믿는다.
둘째, 우리는 이 땅 자체가 우리의 최대 생산라인이며 우리가 잘 돌볼수록 이 땅은 더 많은 소산을 내놓는다는 것을 믿는다.
셋째, 우리는 모든 사업은 무엇보다 인간들로 구성되며 우리가 공정하게 대할수록 인간들의 삶은 더 의욕이 넘치고 생산적이 된다는 것을 믿는다.
넷째, 우리는 가장 만족스러운 형태의 기업 이윤은 이윤창출을 가능하게 해준 사람들과 공동체에 돌려주는 이윤임을 믿는다.
다섯째, 우리는 푸라 비다가 이 철학으로 성공할 수 있다면 세상의 다른 모든 기업도 그럴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런 신념을 가지고 그들은 자본주의의 일반적인 생산양식과 가치에 도전을 했습니다. 공정한 가격을 지불했고, 그 수익금을 커피생산국의 가난한 아동과 가족들을 돕는 데 사용했습니다. 비록 그 수입 규모는 스타벅스의 3천분의 1 수준이지만 그들의 이런 도전이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이처럼 사자와 같은 본성을 심어 놓으셨습니다. 우리는 견고한 진에 막히고 운명 앞에 맥없이 사라지는 그런 존재들이 아닙니다. 유다에게 주셨던 이 말씀을 새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by 코이네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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