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사사기

[삿13:8] 삼손, 어떻게 키워야 합니까?

'코이네' 2016. 9. 28. 07:24

어떻게 키워야 합니까?

본문 : 사사기 13:8

 

우리는 자녀를 낳으면 하나님께서 주신 이 자녀를 어떻게 길러야 하겠나이까 하고 하나님 앞에 진지하게 묻지 않고 기도를 해도 그냥 참고 정도로만 합니다.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도 자녀를 세상적인 안목과 세상적인 관습과 세상적 시류를 따라 양육하지 성경에서 가르치는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대로는 거의 하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가정도 드물게는 있습니다.

 

마노아 부부는 하나님께 자녀를 어떻게 길러야 할지를 묻는 경건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참고하려고 물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일러주시는 자녀 양육의 방법을 받으면 그대로 지켜 양육할 것을 마음에 결심하고 평생 그와 같이 할 것을 작정하고 물어보시는 것이지 참고 사항으로 물어본 것이 아닙니다.

 

천사는 아들을 줄 터이니 이렇게 가르치라며 아이를 기르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하여 아이를 기르는 방법을 가르쳐주신 것은 오늘까지도 우리에게 큰 귀감이 됩니다.

 

독일의 세계적 교육가 헬바트씨는 '교육은 원래 가정에서 하여야 하는 것으로서 부모야 말로 가장 훌륭한 교사다'라고 말했는데, 이분은 많은 검증을 거치고 많은 사람들의 지식을 모아 자기 가정을 비롯한 여러 가정에서 실제 실험을 한 후 '교육은 원래 가정에서 해야 하는 것이며 부모야 말로 가장 훌륭한 교사다'라는 결론을 내렸던 것입니다.

 

마노아는 하나님께서 자녀를 주시려고 했을 때에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오며 우리가 그에게 어떻게 행하오리까'하고 물었습니다. 이 질문에 들어있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첫째, 내게 주신 자녀의 소유권자는 오직 하나님이시다는 것을 깨닫고 인정하고 믿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녀를 낳게 되면 자기 소유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내가 낳은 내 자식이니 내가 원하는 대로 작품을 만들어 보려고 하는 욕망들을 가집니다. 그러나 성경의 위대한 부모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자기에게 주신 자녀의 소유권은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삼손 시대 직후의 엘리 제사장은 자기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를 자기 자녀로 알고 길렀습니다. 그의 신분이 백성을 대표하여 하나님앞에 제사 드리는 제사장인데도 불구하고 홉니와 비느하스를 자기 자녀로 알고 길렀습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자녀를 잉태하지 못한 한나라고 하는 한 평민 여인은 자기에게 주신 자녀 사무엘을 하나님의 자녀로 알고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아기를 못낳다가 아기를 낳았으니 본인이 직접 기르고 싶고 매일 보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하지만 한나는 사무엘이 젖을 떼자마자 하나님의 집인 성막에서 살게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로 길렀습니다. 그 결과 제사장 엘리의 아들인 홉니와 비느하스는 나름대로의 필요한 교육을 다 받았지만 결국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다가 죽었습니다. 하지만 한나는 자기가 낳은 사무엘이 비록 자기 몸을 통해 태어났으나 그 소유권은 절대 하나님의 것이며 자신은 맡아 관리하는 것 뿐이라고 여기고 하나님께 맡기고 기른 결과 사무엘은 이스라엘을 이끄는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또 다른 예를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생활할 때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인구가 날마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자 애굽 왕 바로는 이제부터 이스라엘 여인이 아들을 낳으면 히브리 산파가 그 자리에서 그 아들을 죽이라고 명령했다가 그것도 제대로 실천이 안되니까 히브리 여인들이 아들을 낳으면 무조건 강물에 던져넣어 죽이라고 강하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만약에 이 명령을 어기면 온 집안이 죽게 됩니다. 히브리 여인들은 모두가 아들을 낳으면 자기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줄 알고 강물에 던져넣어 죽였습니다. 비록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 백성이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 보다도 보이는 세상의 왕 바로가 더 겁이 났습니다. 그래서 바로의 명령을 어기지 못하고 아들을 낳으면 나일강에 던져 죽여버렸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아버지 아므람과 어머니 요게벳은 아들을 낳았을 때에 그의 준수한 모습을 보고는 죽이지 않았습니다. 준수하다는 말은 잘 생겨서 죽이기 아까웠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이 보였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이 있어 주신 아들임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고 믿게 되자 이 아들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목적 때문에 이 가정에 이 아이를 주셨으니 하나님의 자녀를 어떻게 내 마음대로 죽이고 살릴 수 있겠는가하는 생각으로 부모들은 이 아이를 길렀습니다. 결국 그 아이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는 위대한 지도자가 되지 않았습니까. 내게 주신 자녀의 소유권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오며 우리가 그에게 어떻게 행하오리까'하는 마노아의 이 질문에는 삼손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고백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내게 주신 자녀의 양육권, 즉 양육하는 책임은 가정에 있다는 것입니다.

 

가정은 어린 아이의 최초의 학교요, 부모는 자녀의 최초의 스승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쑨다슁 같은 사람은 어머니의 품이 나의 신학교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모세가 태어나서 3개월 이 되니 울음소리가 커져 도저히 집에서 기를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는 나일강에 버리든지 어떻게든 살리든지 해야 하는데 모세의 부모로서는 이 아이를 살려낼 아무 힘도 방법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이 아이는 하나님이 세상에 나게 하셨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나게 하셨다고 믿고 갈 상자에다가 물이 들어오지 않도록 역청으로 칠을 하고는 아이를 그 상자에 담아 나일강에 띄웁니다. 띄우기는 띄우는데 어디에 띄우느냐 하면 바로왕의 딸, 공주가 시녀들을 데리고 자주 목욕하러 나오는 갈대 강가에 띄웠습니다. 마치 호랑이 굴에 넣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때 모세의 부모는 하나님께서 이 아이를 살게 하시면 살 것이고 하나님께서 죽게 하시면 죽을 수 밖에 없다, 생사화복은 하나님에게 달려있지 사람에게 달려있지 않다고 철저히 믿었습니다. 이 믿음으로 아이를 갈 상자에 넣어 강가에 띄웠는데 마침 그때 바로의 공주가 목욕을 하러 시내에 나왔습니다. 갈 상자 하나가 물에 동동 떠내려 오는데 보니까 아이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 순간 공주는 '이는 필시 히브리 여인의 아이구나'하고 당장 물에 밀어넣어 죽이라고 해야 할 것인데 이상하게도 성경에 보면 공주는 그 아기를 보자마자 굉장히 불쌍한 마음이 들어 도저히 그 아기를 죽일 수 없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명령을 따라야 할 공주이지만 그보다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더 강하게 이 공주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아이를 내 양아들로 삼아야겠다고 마음에 작정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그렇게 되도록 다 간섭을 했다고 기록해 놓았습니다. 성경에 그렇게 적어놓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저 여러 가지 추측밖에 할 수 없지만 명백하게 기록해두었기 때문에 우리는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천하만사를 배후에서 다 간섭하시고 인도하시고 통치하시고 다스리고 섭리하시는구나 하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모세의 경우만 아니라 우리 모든 사람의 배후에도 하나님께서 이렇게 함께 하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공주가 이 아이를 물에서 건졌다고 해서 아이의 이름을 애굽 말로 모세라고 붙였습니다. 모세는 히브리 말이 아니라 애굽 말입니다. '물에서 내가 건졌다'는 뜻입니다. 이제 아이를 건지고 보니 공주는 처녀라 젖이 나지 않습니다. 아이를 키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유모를 구하려고 하는데 모세의 누이 미리암이 그 근처에서 하나님께서 그 아이를 어떻게 하시는가 지켜보고 있다가 민첩하게 공주 앞에 나아가 '공주님, 이 아이에게 유모를 구해주려고 합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래, 유모를 구하려 한다.' '내가 이 아이의 유모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그래, 소개해 다오.' 여기서 공주가 말하는 유모는 그저 젖만 먹이는 유모가 아니라 아이를 잘 길러줄 유모였습니다. 이 아이를 이제 양아들로 삼기로 작정을 하니 아이에게 애착심이 생기고 잘 길러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 아이를 젖먹이고 보호하며 잘 키울 수 있는 자는 바로 이 아기를 낳은 어머니입니다. 아기의 어머니 만큼 정성을 다하여 잘 키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생각이 공주에게 들었습니다. 그래서 미리암에게 이 아이의 어머니, 즉 요게벳에게 이 아이를 데리고 가서 키우고 젖 떼거든 나에게 데리고 오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모세의 가정에서 아무 두려움없이 당당하게 양육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이때부터 아이에게 젖을 물리며 계속 이야기를 했습니다. '너는 이제 애굽의 궁중으로 들어갈 것이나 너는 애굽인이 아니다. 너는 이스라엘 사람이다. 너는 이스라엘을 해방시켜야 한다. 너는 이스라엘 백성을 돌아보아야 한다.' 젖먹이 아이가 잘 알아들을 수도 없지만 어머니 요게벳은 계속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젖을 떼자 모세는 이제 궁중에 들어갔습니다. 그때부터 모세는 공주의 아들로서 애굽의 최고 학자들로부터 특별 교육을 받게 됩니다. 애굽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들이 와서 애굽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지리, 역사, 천문, 군사전략, 전술과 같은 많은 지식들을 40년간 가르쳤습니다. 40년간 가르쳤는데 사도행전 7장 23절에 보면 묘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나이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볼 생각이 나더니'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애굽의 그 유명한 학자들에게서 애굽의 모든 학문을 40년간 배웠는데 어릴 때 어머니에게서 배웠던 그 말씀이 애굽의 40년 간의 교육을 이긴 것입니다. 어머니 요게벳이 잠시 가르친 그 교육이 애굽의 40년 교육을 이겼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이 전 세계에서 모든 면에 지배하고 있는 것은 유대인의 가정 교육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히틀러는 어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어머니가 재혼을 했는데, 유대인과 재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의붓 아버지가 어머니를 얼마나 박대하고 무시하던지 어린 히틀러가 마음에 복수심이 쌓였습니다. '내가 커서 힘을 가지게 되면 저 유대인을 멸절시키리라. 씨를 말리고 말리라.'하는 악한 복수심이 그 의붓 아버지 유대인 때문에 쌓였습니다. 마침내 히틀러는 모든 정치력, 군사력을 장악하자 유대인 600만을 학살했습니다. 그것은 그 조그만한 감정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을 600만이나 죽였는데도 불구하고 유대인은 다시 살아났습니다. 유대인 말살 정책을 편 히틀러가 실패했습니다. 히틀러가 나중에 실패를 인정한 말이 지금도 남아있습니다. '나는 무엇이든지 다 파괴시킬 수 있었으나 유대인의 가정만은 파괴할 수 없었다.' 이렇게 유대인들은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을 중심으로 기도하면서 교육시키기 때문에 유대인은 지금도 말합니다. '어떤 아이라도 우리(유대인 부모)가 세살 까지만 양육을 하면 그 후에는 어떤 사람이 데리고 가서 무슨 교육을 어떻게 시키든 상관없다.' 세 살 까지만 유대인 가정에서 교육을 시키면 그 아이는 완전히 유대인 사상으로 세뇌되고 물이 든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의 뛰어나고 우수한 교육을 시켜도 세 살 까지 받은 유대인의 가정교육이 우수하다는 것을 지금도 자부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마노아는 자녀를 어떻게 양육하였습니까?

두가지 양육법을 오늘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기대대로 길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각 가정에 자녀를 주실때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바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어떻습니까? 자녀를 낳으면 하나님이 기대하는 것을 먼저 생각하지 않고 우리가 기대하는 것을 먼저 생각합니다. 아이를 낳으면 어릴 때부터 이런 교육, 저런 교육, 온갖 교육을 시켜서 아이들이 정신을 못차릴 정도로 마구잡이로 교육을 시킵니다. 기계를 맞추듯 맞추어서 작품을 만들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더라도 그대로 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원하는 대로 되는 아이가 거의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가정에 자녀를 주실 때 반드시 그 아이에게 기대하시는 바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마노아 부부는 아들을 낳고 이름을 삼손이라고 불렀습니다. 삼손이란 태양과 같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줄 터이니 그가 블레셋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아이가 40년간 계속되고 있는 이스라엘의 고통을 그치게 할 자라고 예언했습니다. 하나님의 삼손을 향한 기대는 민족을 해방시킬 태양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이 기대하시니까 마노아 부부도 자기 아들에게 그만큼 기대하면서 삼손, 즉 태양과 같다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길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내 자녀에게 기대하시는 것을 발견하여 그만큼 믿고 길러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부모들이 오늘날 좀처럼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 마저 그렇습니다. 그러니 우리 그리스도인의 자녀들이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고 또 우리 자신이 그렇게 되려면 이처럼 우리가 살고 자녀를 이와같이 양육하면 되는 것입니다.

 

어느날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7장 4-5절에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19절에 가서 보면 아브람은 하나님의 자기를 향한 기대를 믿고 그 후로는 이름을 아브라함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백 살에 이삭을 주신다고 약속하면서 그 후손에게 영원한 축복을 주신다고 또한 약속을 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삭을 통하여 큰 민족이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아질 것을 믿고 길렀습니다. 하나님이 이삭에게 기대하는 만큼 아브라함도 이삭에게 기대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하나님께서 '이삭을 잡아 모리아 산에 데리고 가서 내게 번제로 바치라'고 했습니다. 번제는 아이를 짐승 잡듯이 잡아 나무불 위에 완전히 재가 되도록 태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을 잡아 번제를 바치려는 순간 까지도 아브라함은 이삭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우리 사람의 생각 같으면 잡아서 죽였고 재가 되어 없어졌는데, 어떻게 그 이삭을 통하여 자손이 하늘이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을것이라고 한 것이 이루어지겠냐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11장 17-19절에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아이를 통하여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아질 것이라고 했는데 지금 번제로 바치면 이 아이의 후손은 끊어지고 말 것 아닙니까? 우리 사람의 생각으로는 말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이삭을 번제로 드려도 하나님은 창조하시는 하나님이시므로 재가 되어 없더라도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이 이삭을 다시 창조해서 믿었더라라는 뜻입니다. 믿습니까? 이런 믿음으로 이삭을 길렀습니다. 이같이 하나님이 기대하는 만큼 기대를 가지고 자녀를 기른 아브라함이나 마노아 같은 부모는 자녀가 다 그렇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것 만큼의 기대를 가지고 꼭 길러야 됩니다. 이제 우리가 자녀를 볼 때는 시각이 달라야 되고, 기대가 달라야 되고, 생각이 달라야 되고, 기도가 달라야 됩니다.

 

그 다음으로 자녀를 양육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자기가 그렇게 살면서 자녀를 길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노아에게 아들을 주시면서 태에서 나올 때부터 죽을 때까지 나실인으로 기르라고 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레위 지파 제사장들만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많았기 때문에 레위 지파 제사장 수가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할 사람이 더 필요하게 되자 어느 지파 사람이든지 나실인 서원만 하면 하나님의 일만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실재로 삼손은 레위 지파가 아닌 단 지파의 사람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을 시키려고 삼손을 나실인으로 부른 것입니다.

 


by 코이네자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