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사사기

[삿2:1] 깨어진 약속들

'코이네' 2017. 12. 10. 20:22

깨어진 약속들

 

본문:2:1-3

 

 

 

사사기를 처름 읽어보면 성경 전체에서 가장 어두운 책이라는 인상을 받습니다. 사사기는 여호수아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하여 사무엘의 등장과 왕정 체제 수립까지(주전1390-주전1050년경) 350년 간의 이스라엘 역사에서 발생했던 중요한 사건들을 기록한 책입니다. 사사기는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을 서술해 나가면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과 축복을 저버리고 타락해 가는 과정을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멸망 시키기로 되어 있는 가나안 족속들을 철저히 정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의 악한 행습에 물들어 버렸습니다. 이점에서 사사기는 슬픈 이야기 입니다.그렇지만 이스라엘의 민족적 죄악의 암울한 역사에 축복과 소망이라는 한 가닥의 희망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이 희망이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다스리기 위하여 영적 능력을 입혀 주어 부흥의 도구로 쓰셨던 사사들의 시대를 말합니다. 이 사사들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일으켜 주셨는데, 그들은 백성들을 관장하였으며 군사적 지도자의 역활을 담당한 경우도 흔하였습니다.

 

사사기에는 여호와의 신이 사사들에게 임하였다는 표현이 자주 나옵니다. 그리고 상대적이긴 하지만 사사들이 통치하던 때는 국가적으로 꽤 장기간 태평하고 번성한 적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에훗이 모압을 쳐서 이긴 후에 이스라엘은 80년간 태평하였습니다. 평화란 물론 영적 부흥과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기들은 백성들의 신실성이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는 충분한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사사기는 두 말 할 나뉘없이 인간의 온갖 추악상들을 폭로합니다. 사사기 19-21장의 타락상을 능가할 수 있는 이야기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사사기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펼쳐주고 죄인들의 회개를 촉구해 주는 책이기도 합니다. 사사기에는 아무런 자격이 없는 악한 백성들을 향한 구원의 메시지가 각 시대마다 계속해서 울리고 있습니다. 이 메세지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크신 자비를 대변해 주는 것인데도 소위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들은 대부분 마음의 문을 굳게 닫고 귀를 막았습니다.

 

이러한 사시기 시대를 오늘날의 현실에 적용한다면 이스라엘은 구약의 교회이며 또한 우리 시대의 이스라엘이란 신약시대의 언약 백성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그들 자신의 신앙고백과 역사에 의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교회입니다. 이 같은 관점에서 우리들은 사사기의 교훈들을 먼 과거의 그들에 대한 이야기로 받지 말고 우리들에게 주는 말씀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현대의 국가에 적용시키지 말고 현재의 신약 교회에 대입시켜야 합니다. 사사기는 우선 하나님과의 언약에 신실해야 할 지상의 언약 백성들을 향한 메시지를 외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사시기는 하늘 아래 있는 모든 국가들의 불신자들에게도 회개를 촉구하며 구원의 소식을 선포합니다. 세상 나라들은 어둠과 사악의 길에 방치되어 있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국가간의 경계선에 상관없이 이곳 저곳에 교회를 세우시고 그 능력을 드러내십니다. 각 곳에 흩어져 있는 이 교회들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한 나라입니다. 이 집단은 거룩한 나라이며, 왕같은 제사장이며, 지상의 모든 민족들로 구성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선택된 교회입니다. 우리들이 사사기를 읽으면서 제일 먼저 적용시켜야 할 대상은 바로 이 교회입니다. 구약백성들은 어떤이의 말처럼 입만 살고 발(행위)은 죽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약속들을 헌신짝처럼 내던지곤 하였습니다. 그럼 오늘날 우리들의 교회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입만 살고 발은 죽은 자들이라는 주님의 평가를 받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것이 사사기가 우리에게 주는 도전입니다!

 

확고한 약속들

 

이스라엘이 실패한 까닭은 하나님의 약속들이나 신령한 능력이 결여되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애굽에서 구원을 받았으며 약속된 땅으로 인도되었습니다. 여호수아의 정복 전쟁이 끝날 무렵에 가서는 비록 가나안의 해안 지역과 골짜기들이 점령되지는 못하였지만 가난안 땅의 상당 부분이 이스라엘의 손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가나안 백성들은 이스라엘의 이같은 승리를 보고 공포에 떨었습니다. 대세는 이미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전적으로 유리하게 기울어져 있었습니다.(비교,11:16-23)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고별 메세지를 주면서 가나안 정복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완수된다는 약속을 상기시켰습니다.(23:6-11) ‘너희 중 한 사람이 천 명을 쫓으리니 이는 너희 하나님 영호와 그가 너희에게 말씀하신 것 같이 너희를 위하여 싸우심이라 그러므로 스스로 조심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23:10,11). 이 언약은 나중에 세겜에서 갱신되었는데 그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겠다고 엄숙하게 맹세하였습니다.

이 후속 사건은 이전에 있었던 확고한 약속들에 바탕을 둔 것이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이스라엘의 신실성에 구멍이 뚫렸다는 하나의 반증이기도 합니다. 후대의 역사가 증명하듯이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불신실의 하향길로 내달았습니다. 여호수아는 당시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서 행하셨던 놀라운 행사들을 열거하고 백성들에게 누구를 섬길 것인지를 택하라고 도전하였습니다.(24:15) 그들은 이집트에서 섬겼던 거짓 신들이나 혹은 가나안의 거짓 신들을 선택하든지 아니면 주 여호와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당연히 여호와를 경배해야 한다고 큰소리로 자신있게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그들의 호언장담에 넘어가지 않고 그들이 여호와를 제대로 섬기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 그리고 만약 가나안의 신들을 따르면 하나님이 그들을 망하게 하실 것이라고 부언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여호수아는 백성들이 자신들의 신실성을 크게 자신할 때에 그 의미를 입술이 아닌 마음에 새겨야 한다는 것을 촉구한 것이었습니다.(24:19). 그래도 백성들은 그들의 언약을 끝까지 내세웠습니다.(24:21). 그러자 여호수아는 그들이 가진 이방신들을 내던지고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실천에 옮기라고 재촉하였습니다.(24:23). 백성들은 한사코 자신들이 여호와의 종들이라고 공언하였습니다.(24:24). 그래서 이 번에는 여호수아가 큰 돌을 세워 백성들의 서약에 대한 하나의 증거물로 삼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불신실하면 이 돌이 물적 증거가 되어 이스라엘을 정죄할 것이었습니다. 인간들은 단순히 어떤 일이 싫어서 안했기 때문에 정죄를 받기 보다는, 하나님께 하겠다고 약속을 해놓고 이를 이행하지 않기 때문에 심판을 받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우리들은 마음으로는 천리나 떨어져 있으면서 입술로만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떤 면에서 보든 이스라엘은 최후의 승리를 목전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들의 마지막 승리는 오지 않게 될 것이었습니다. (920712PM)

 

부분적인 순종

 

1:1-2:6절은 본서의 연대기에 실린 두 개의 소개문 중에서 첫 번째 서론입니다. 여기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직무 태만과 그에 따라 주의 사자로부터 받은 견책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두번째 소개문은 2:7-3:6절 까지 이어지는데 대체로 첫 번째 소개문과 동일한 내용을 싣고 있습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여기서는 사사기의 본론에서 전개될 주체인 퇴보와 부흥이 번갈아 이루어지고 있다는 관점에서 사사 시대의 역사가 기술되었다는 점입니다.

1장에 의하면 유다는 가나안 족들과 싸우기 위해서 시므온과 연합으로 먼저 전쟁에 나셨습니다. 시므온의 영토는 유대지역의 여러 도시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아도니베섹을 이겼고(1:4-7), 예루살렘도 함락시켰습니다.(1:8) 그러나 여호수아15:63절의 리록으로 미루어 보아 예루살렘성은 여부스 족들에 의해 곧 탈환되었음이 분명합니다. 이들은 많은 승리를 거두었는데 그 까닭은 여호와께서 그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1;19). 그러나 골짜기의 거민들은 철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1:19)하였습니다. 다른 지파들의 성과는 더 적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족들을 강제 노동에 동원시켰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가나안족들을 진멸시키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의식적으로 무시한 정책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산간 지역만 정복하고, 그 주민들을 죽이기 보다는 노예로 삼아 부리는 편을 택하였음이 분명합니다. 2:1-6절의 말씀과 그 이후의 사건들, 그리고 백성들의 임박한 배도를 예상했었던 여호수아의 훈시에 비추어 볼 때,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들과 그들의 도시들을 의도적으로 파멸시키려고 하지 않았다는 결론은 피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또한 철병거로 무장된 해안 평야의 거민들을 상대로 정복 전쟁을 벌릴 의사도 없었습니다. 위험 부담이 켰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같은 정책은 주님께 대한 노골적인 불순종이었으며, 그들의 비적극적인 군사 행동의 동기는 2:12-23절에서 확인되듯이 가나안의 거짓 종교들을 수용하고 픈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남이 모르는 나의 비밀스런 죄악들에 대하여 호전적인 자세를 취하지 못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공의를 집행하는 자들로서 살아계신 하나님과 그분의 귀한 약속들을 믿지 않고 현실과 타협하였던 것입니다.

 

이 점을 우리 시대에 적용해 보십시다. 교회는 복음을 전할 임무를 띠고 있습니다. 교회의 복음 전파는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계속해야 할 커다란 사명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축복하였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교회가 어떤 정해진 비율로 성장을 한다거나 성공을 할 것이라고 약속하시지 않았습니다. 누가 구원을 받게 되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회심하게 될런지는 우리들에게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교회에는 양적 성장이 있을 수 있고 혹은 단련의 시험이 올 수도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교회에는 숫적으로 감소되는 축복된 현상이 생겨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무었보다도 하나님의 교회 사역의 중심 주제는 신실한 언약 백성들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물이 바다를 채우듯이 세상을 덮을 것입니다. 선택된 자들이 모여서 이루어지는 교회는 보이지 않는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교회의 참된 신자들은 절대로 주님의 손에서 떨어져 나갈 수도 없습니다. (6:37,38)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항상 수효가 불어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자들은 죽어서 영광의 나라로 옮겨지고, 불신자들은 지상의 교회를 통해 거듭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구원 활동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장자들의 교회(12:22-24)가 완성될 때까지 힘차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역사가 증명하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적용을 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당신은 복음에 대해 어떤 기대를 갖고 있습니까? 당신은 복음의 전망이 밝다고 보십니까? 아니면 복음 사역이 비판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당신의 교회는 잃어버린 이웃들을 찾기 위해 그리스도의 복음의 가치를 얼마나 높이 쳐들고 있습니까?’

 

우리들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위와 비슷한 질문들을 던질 수 있습니다. 흔히 교인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도 개인의 성결 생활에서는 주춤거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들은 너무 거룩하게 될까봐 거의 두려워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옛 방식에 대한 탐애입니다. 사실상 그런 교인들은 과거에 속한 죄나 그런 과거의 생활 습관을 계속할 수 있는 기회들이 없으면 세상 사는 맛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굳어져 버린 체제적이고 인습적인 죄악들을 묵인해 줍니다. 예를 들면 매춘이 사회에 어떤 공헌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희생자가 없는 죄악이라면 지원할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이같은 견해는 사실을 중시하는 기독교 사상과 완전히 배치됩니다. 죄인들은 적어도 그들 자신의 죄로 인한 희생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죄악된 가나안 족속들을 박멸시키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들은 가나안 사람들의 죄악으로 거듭 되돌아가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다시 사사기2:1-6절을 읽어 보십시요 이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들이라고 공언하는 사람들에게 향한 주님의 훈계였습니다.

 

통곡하는 사람들

 

여호와의 사자는 이스라엘을 견책하고 꾸짖었습니다. 이 사자는 성삼위의 이위이신 그리스도였습니다. (참조 제7). 여호와의 사자는 길갈에서 보김으로 오셨습니다.(2:1). 이것은 여호와의 사자가 거쳐온 일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 분께서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났던 때를 상기시키기 위한 표현입니다. , 이스라엘은 여리고를 탈취하기 전에 언약의 표징인 할례를 길갈에서 다시 시행하면서 하나님의 사자를 만났었습니다.(5:13), 그런데 여리고를 정복케 하셨던 과거의 그 하나님의 사자가 이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언약 파기를 놓고 따지고 계십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복종치 않았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족속들을 멸망시키지 않았고 거짓 신들을 내몰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가나안 족들을 내쫒아 주지 않을 것이며 그 결과 가나안 사람들과 그 신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올무가 될 것이라고 예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무런 항의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죄가 그들의 벌이 된 셈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가지 원칙적인 적용을 이끌어 낼 수 있습니다.

 

첫째, 우리들이 하나님께서 분부하신 일을 행하지 않는다고 하나님이 그 일을 우리 대신 해 주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마귀와 대항해야 한다는 주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면 마귀는 우리들로부터 도망을 가지 않습니다.(4:7). 우리들은 어쩔 수 없이 우리 자신들의 죄에 빠져들게 됩니다. 성경이 지적하듯이 우리들의 죄가 우리 자신들을 찾아내고야 말 것입니다.(32:23)

둘째, 죄에는 후유증이 뒤따릅니다. 죄의 잔존적 영향은 우리가 회개를 하고 죄책과 형벌로부터 벗어났을지라도 남습니다. 이스라엘은 불순종에 대한 하나의 상기물로서 엎구리에 가시를 지니고 살아야 했습니다. 죄는 흔적을 남깁니다. 오직 죽음과 부활만이 죄로 인한 상처의 흔적들을 지울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날마다 지니고 사는 죽어가는 이 육신은 우리들의 죄를 되새기도록 합니다.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를 누릴 지라도 우리들의 약점들이 완전히 제거 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죄로부터 온전한 구원을 얻기 위해 주님께 철저히 의지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케 됩니다. 그러기에 참된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하늘 나라를 사모하며 삽니다. 그곳에서 만이 우리 구주 그리스도에 의해서 우리 속에 남아 있는 구원의 사역이 완성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보인 반응은(2:5,6) 퍽 교훈적입니다.

첫째 백성들은 죄를 슬퍼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을 만났던 장소를 보김이라고 불렀습니다. 보김은 문자적으로 통곡하는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인간들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눈물을 흘립니다. 너무 우스워서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이별이나 사별을 당하여 울기도 하며 혹은 너무 화가 치밀어 눈물을 떨구기도 합니다. 그런데 자기의 죄 때문에 우는 일은 매우 드뭅니다. 당신은 자신의 죄를 생각하고 눈물을 흘린 적이 언제였습니까? 기도를 하다가 마음이 걸려 운 적이 언제였습니까? 거룩하신 하나님을 섭섭하게 해드렸기 때문에 아무런 축복도 받을 자격이 없고 , 하나님께 면목이 없으며, 도움을 청하기도 부끄러운 형편이라고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이같은 상태야말로 참다운 헌신의 출발이며 주님과의 복된 교통의 시작입니다.

 

두 번째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호소하였습니다. 그들은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사기의 기독론적인 강조점이 표출된 것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아의 사자이신 영존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임재하신 곳에서 은혜와 용서를 받기 위해 주님께로 나아갔습니다. 이 영원하신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체로 육신이 되셨던 우리들의 구주이십니다. 이제는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들의 구원이 영광스런 모습으로 성취되고 계시되었습니다.

 

보김의 그림자는 이제 갈보리의 실체로 대치되었습니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이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30:5). 주님의 견책으로 가슴을 치게 될 때에 우리들은 감사를 올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들에게 구주를 계시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손에는 하나님 앞에서 지키지 못한 약속들의 긴 목록이 쥐어져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 불신실의 목록들을 주님께 보여드리고 회개하십시오. 주님은 속죄를 위한 희생 제물이십니다. 주님은 결코 상한 심령과 참회하는 마음을 업신여기지 않습니다.(51:17). 이것이 이스라엘을 향한 주님의 메세지이며 동시에 우리 모두를 향한 권면의 말씀입니다.

 



by 코이네설교자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