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사사기

[사사기1장]아도니베섹과 옷니엘,복과 저주의 살아있는 증거

'코이네' 2014. 11. 27. 15:16

아도니 베섹과 옷니엘 : 복과 저주의 살아있는 증거

사사기 1:7~13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준은 명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하나님과 맘몬을 더불어 섬길 수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냐 돈이냐 라는 문제에 예수님의 말씀은 명확합니다. 결국 돈이라는 것은 많은 것을 포함하고 상징합니다. 거기에는 명예나 칭찬, 지위, 혹은 가족, 어떤 사람들에게는 술과 마약, 섹스, 혹은 다른 많은 것들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도사들처럼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버리고 산 속으로 들어가기를 원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것이 필요하다면 아마도 극소수의 특별한 사람들에게 적용이 될 것이고 예수님은 오히려 땅 끝까지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극단적인 의미를 부여함으로 가족과 돈과 내가 가지는 소유를 다 내팽개치는 것은 잘못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항상 그런 극단적인 상황으로 몰아가시지 않습니다. 그렇게 부추기는 것은 오히려 이단들의 수법이지요. 그러나 그런 외적인 극단적인 적용은 피하더라도 급진적인 적용을 하는 것은 오늘날의 시대에 필요한 것 같습니다. 급진적이다는 말은 말씀의 본래의 본질적인 의미를 엄격하게 적용해 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결국 우리의 인생에 누가 주인인가라는 문제가 성경 전체에서 질문되어집니다. 마치 사영리에서 말하듯이 내 인생의 중심에 있는 의자에 하나님이 앉으시고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리는 삶을 살 때 내 인생의 다른 모든 부분들도 제자리를 찾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닌 맘몬이 그 의자에 올라가게 되면 그것은 나를 파괴하고 내 모든 부분들을 뒤섞어 버리게 됩니다. 우리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창조의 순간에 만물에 질서와 법칙을 부여하셨고 더불어 모든 사람의 인생 가운데에서도 질서를 허락하십니다.

 

누가 주인인가의 문제는 에덴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거기서 하나님과 자아 사이의 대립, 그리고 순종과 불순종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은 그가 전쟁을 훌륭하게 승리로 이끌어서도 아니고 모험심이 강한 사람이라서도 아니었습니다. 그가 믿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한 것은 그 자신의 인생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 뿐이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광야 40년은 바로 그것을 이스라엘에게 두고두고 새기는 연단의 과정이었습니다.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율법은 복과 저주로 선포되어집니다. 기준은 명확했습니다. 하나님의 편에 서서 그분을 주인으로 모시고 순종하는 자는 복되며 그렇지 않은 자는 저주를 받게 됩니다. 누가 참으로 복된 자인가 라는 문제 또한 누가 참된 주인인가라는 문제와 더불어 성경 전체를 흐르는 중요한 질문입니다.

 

사사기. 아마도 성경 66권 전체에서 하나님의 복과 저주에 대한 질문, 그리고 누가 주인인가에 대한 질문을 사사기만큼 적나라하고 고통스럽고 분명하게 보여주는 성경도 없을 것입니다. 약 B.C. 1445년 경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약 40년간 광야에서 방황하다 가나안 땅에 당도하고 여호수아의 지도아래 30년간 정복전쟁을 치룹니다. 그러나 그 정복이 완전히 끝나지 않은 채 여호수아는 죽게 됩니다. 그 후 사사 웃니엘부터 사무엘까지, 혹은 사울왕의 시대까지 약 300년에서 350년간 이스라엘이 남겨둔 가나안 족속들이 가시가 되어 끊임없이 고통당하고 신음하는 시간이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은 복의 성취였고 새로운 에덴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복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며 그분께 충성할 때 얻을 수 있는 댓가였습니다. 아담과 하와처럼 마치 자기의 소견에 옳은대로 행했던 댓가는 에덴을 빼앗기는 것, 복을 빼앗기는 것, 샬롬을 빼앗긴 엔샬롬, 그리고 저주였습니다.

 

사사기 1장의 내용은 어쩌면 사사기의 서론격으로 앞으로 펼쳐지는 모든 이야기의 저울추가 되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특별히 사사기를 설교하면서 다양한 주석과 참고서적의 도움을 받겠지만 김지찬 교수님의 사사기 강해에 많은 도움을 받을 것입니다. 여담이지만, 성경을 읽을 때는 언제나 옆에 성경배경주석과 성경지도, 그리고 권 별로 도움이 되는 책들을 가지고 있으면 참 좋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단지 말씀으로가 아니라 두 눈으로 분명하게 보이는 복과 저주의 선포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어쩌면 앞으로 300년간의 고통의 씨앗이 될 수 있는, 그러나 당장은 눈에 보이지 않는, 아니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땐 좋아보이는 일들이 전개됩니다. 바로 이스라엘이 가나안 모든 주민을 몰아내기를 포기하고 그들을 노예로 삼아 지배하기도 했던 이야기입니다.

 

그 전에 1장에서는 두 가지 이야기가 나오는데 하나는 유다에게 정복당하는 아도니 베섹의 이야기이며 또 하나는 드빌을 정복하는 옷니엘의 이야기입니다. 사사기는 단순히 있었던 사실을 역사적으로 나열하는 목적으로 쓰여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사기는 때로는 순서나 시간을 무시하고 어떤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서술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사사기의 저자는 확실치 않지만 전통적으로 사무엘이 썼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렇다면 그 암흑같은 사사의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사무엘은 그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 왕을 요구하는 백성들 앞에서 반드시 들려주고 보여주어야 할 이야기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사사기라고 본다면 우리는 사사기에서 놀라운 통찰들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사기는 단순한 역사서술이 아니라 저자가 독자를 향해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기록한 말씀임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사사기 말씀은 아마도 사사 시대 당시의 사람들을 위한 책은 아니겠지요. 왜냐하면 이미 그 이후에 쓰여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을 저자로 본다면 아마 사사기는 왕이 없는 이스라엘, 그리고 왕을 구하는 이스라엘, 나아가 잘못된 왕 때문에 무너지는 이스라엘을 향해 던져지는 메시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무엘은 과거 300년의 이야기를 통해 현재 이스라엘의 백성들에게 메시지를 던지며 오늘날 이 말씀을 읽는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동일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저자는 유다지파의 가나안 땅 정복을 다루면서 의도적으로 두 이야기를 대조시킵니다. 아도니 베섹과 옷니엘의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분명하게 약속하시고 경고하신 복과 저주의 말씀에 대한 본보기이며 하나님 편에서의 약속이행이며 성취입니다. 아도니 베섹은 베섹이라는 성의 왕이었습니다. 그는 그 지역에서 강력했습니다. 칠십명의 왕을 정복했던 자였습니다. 칠십이라는 숫자에서 볼 수 있듯이 아도니 베섹은 하나님이 없는 땅에서 오를 수 있는 최고의 권력에 위치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유다지파를 통해 그를 한순간에 몰락시킵니다. 자기가 정복하고 비참하게 죽였던 그 칠십 왕들과 똑같은 신세로 엄지발가락과 손가락이 잘린채 땅에 떨어진 음식을 주워먹으며 베섹에서 예루살렘까지 개같이 끌려다니다가 결국 죽게 됩니다. 지도를 보니까 베섹에서 예루살렘으로 내려오는 길과 거리는 약 60키로미터 정도가 되었습니다. 결코 짧은 거리는 아니지요. 아도니 베섹의 이야기가 그저 나쁜놈 하나 죽은 이야기 정도로 생각된다면 아직 부족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보면서 오늘 우리 시대의 아도니 베섹은 누구인가, 혹은 무엇인가를 질문해보아야 합니다. 나아가 혹시 내 안에 아도니 베섹은 없는가, 아니 내가 아도니 베섹처럼 되기를 원하며 그렇게 살고 있지는 않는가를 날카롭고 정직하게 살펴봐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눈빛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영혼을 철저하게 파헤쳐 봐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아도니 베섹의 인생은 저주의 인생으로 끝납니다. 우리가 부러워하고 심지어 추구했던 아도니 베섹의 찬란했던 인생도 하나님이 없으면 결국 저주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칠십 왕을 지배했던 그 인생도 끝이 있다. 그러므로 결코 하나님 없이 성공할 거라는 착각에 빠져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옷니엘을 봅니다. 갈렙의 조카 옷니엘은 용맹하게 드빌성을 쳐서 정복합니다. 그리고 갈렙의 약속대로 그의 딸 악사를 아내로 맞이하게 됩니다. 갈렙의 헤브론 정복처럼, 옷니엘의 드빌 정복처럼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대로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얻습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하나님은 가능케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의 약속은 그분을 믿고 그분을 왕으로 모시는 자의 삶 속에서 언제나 반드시 성취됩니다. 나아가 갈렙의 딸 악사는 그 현명함과 용기로 복의 복을 얻게 됩니다. 그 지역은 메마른 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물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악사는 갈렙에게 그 땅의 윗샘과 아랫샘도 얻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때론 하나님의 뜻이라서 순종했는데 오히려 메마른 광야의 인생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 때 우리의 믿음 때문에 실족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에서 믿음으로 나아가는 믿음, 신실함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강물을 만드시고 메마른 땅에 윗샘과 아랫샘을 허락하시며, 죄와 죽음 아래 놓인 우리 인생에 생명의 물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허락하십니다.

 

이렇게 사사기 1장은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하게 성취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반응과 책임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공로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미 이스라엘을 구원하셨고 그 땅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구원과 성취에 대한 반응과 책임도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기름부음 받은 왕 사울도 결국 사사기의 이야기와 똑같은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결국 사울은 버림받게 되고 대신 하나님은 자기 마음에 합한 왕 다윗을 세우십니다. 왕정시대에서도 끊임없이 반복되는 복과 저주의 이야기, 그리고 오늘 우리의 인생에서도 여전히 동일하게 적용되어집니다. 비록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궁극적으로 우리에 대한 모든 저주와 그분의 공의로운 심판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단번에 해결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에 대해 우리는 아멘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 은혜를 핑계로 우리가 방종하고 죄의 길로 행한다면 우리는 그 십자가의 영광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은혜 위에서 마땅히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명령하시는 복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길은 복된 삶입니다. 비록 이 땅에서 잠시 잠깐 하나님의 복됨과 세상의 거짓된 성공의 충돌이 일어나고 그것이 우리를 넘어뜨리고 유혹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흔들리고 혼란스러울 때마다 우리는 믿음으로 우리 앞에 놓인 아도니 베섹을 쳐 부술 수 있기 원합니다. 그가 정복한 칠십 왕의 성과 땅은 결국 바벨론의 이야기를 재탕한 거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오늘날 이 물질만능주의 시대 속에서 성공과 돈이라는 우상과 그 안에서 평화를 누릴 수 있다는 헛된 약속은 결국 아도니 베섹과 바벨론 이야기를 재탕하고 우려먹고 있는 사탄의 전략 아닙니까?

 

 

우리는 옷니엘의 이름을 마지막으로 주목해 봅니다. 그의 이름은 하나님의 사자, 하나님의 힘 입니다. 유다 지파의 사자가 되어 용맹스럽게 드빌을 정복한 옷니엘, 그를 통해 먼저는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봅니다. 그러나 그분은 세상의 권력과 모략, 시기와 핍박 아래에서 어린양처럼 연약하게 죽임 당하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으사 다시 부활하셔서 보좌 우편에 앉으십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아도니 베섹으로 역사하는 세상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며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어떤 이는 말합니다. 진실로 강한 자만이 스스로 약해질 수 있다고. 우리의 심령은 예수로 말미암아 누구보다 강한 사자와 같은 담대한 심령이 되기 원합니다. 그러나 세상 앞에서 어린양과 같은 겸손함을 가지고 섬기는 사람, 그 섬김과 사랑으로 세상을 정복하는 사람, 그리고 그러한 교회가 되기를 진심으로 소원합니다.

 

 

 



 

 

by 코이네자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