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사사기

[삿2:11] 거짓신들

'코이네' 2017. 12. 10. 20:27

거짓신들

본문:삿2:11-15.
                                              

    

사사기에 실린 두 개의 소개문중에서 첫번째 것은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들을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이 모두 차지하지 못한데 대한 상세한 기록입니다. 이스라엘의  이같은 실패 요인은 숫적인 열세나 화력의 부족에 있지 않았습니다. 가나안 족속들은 실제로 병력이 훨씬 열세했지만 본 소개문의 진술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실패원인은 순전히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에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주님을 순종하겠다고 약속하고서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언약의 파기자로서 언약에서 약속된 축복들을 박탈당하였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정착한 이후로 첫 3세기 동안 반복했던 민족적 탈선행위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두 번째 소개문도(2:6-3:6) 첫 번째 소개문의 내용과 거의 비슷합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3:7-16:31절에서 등장할 여러 사사들에 대한 기본적인 언급을 함으로써 앞으로 그들에 관한 기사가 나올 것을 예견케 합니다. 또한 본 소개문에는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죄들의 두 가지 측면이 다루어져 있습니다.


          ① 바알 경배로 진전되는 거짓된 예배이며(2:10-15)
          ② 사회 질서의 교란입니다.(2:16-19)
    

이런한 타락상은 여호수아와 함께 동역했었던 장로들이 세상을 떠난 후부터 웃니엘이 이스라엘의 첫 사사가 되었을 때까지의 시기에 일어났던 현상이었습니다. 사사기의 기자는 이같은 탈선의 진행 과정을 예시하기 위해서 두 개의 실화들을 하나의 “부록”으로 첨부시켰습니다(삿17:-21장). 이 두 사건들은 위에서 방금 지적한 초기 시대에 발생되었음이 분명합니다. 그 한 증거로써 사사기 20:28절을 보면 대 제사장이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로 나와있습니다. 그런데 비느하스는 가나안 정복      이전에 활약했던 인물이므로 본 사건들의 연대를 초기로 잡아야 합니다. 이러한 사건들이 첩부된 의도는 하나님께 헌신했다는 백성들이 얼마나 급속하게 전락되었는지를 제시하는데 있었습니다. 첫 번째 사건은 사사기 17장과 18장에 기록되었는데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참된 예배에서 언약 백성들이 이탈되는 상황을 예시해 줍니다. 그런 탈선이 마침내 도달하는 곳은 거짓 종교의 안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 사건을 예의 주시하며 검토해 보아야 합니다.

    

창의적인 예배
    

사사기 17장에 기재된 사건은 에브라임에 사는 미가라는 한 당돌한 인물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미가는 자기 모친으로부터 은1100세겔(450온스)의 대금을 훔쳤습니다. 이것은 당시의 시세로 보아 엄청난 거금이었습니다. 미가의 모친은 자기 아들이 훔친것은 모르고 그 도둑을 저주하였습니다. 그러자 미가는 겁을 먹고 자기 모친에게 훔친 돈을 되돌려 주었습니다.미가의 모친은 되찾은 돈을 미가를 위해 우상들을 만들 양으로 하나님께 받쳤습니다. (17:3). 그리고는 미가에게 200세겔(80온스)을 주어 새긴 신상과 주조한 우상을 하나씩 만들어 오게 하였습니다(17:4). 미가에게는 개인 신당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미가는 한편으로 자기 제사장이 레위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언짢게 여겼던 모양입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한 레위인이 나타나 머물곳을 찾았습니다. 미가는 그에게 일년 봉사료로서 10세겔의 은화와 숙식 및 의복을 재공키로 하고 그의 가정 제사장으로 고용 하였습니다. 그 레위인은 미가의 고용 조건을 쾌히 승락하였고, 미가도 이를 썩 잘된 일로 보았습니다. ‘이에 미가가 가로되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신 줄을 아노라 하니라’(17:13). 미가는  이제 개인 신당도 있고 신상도 세웠으며 레위인 제사장까지 두었으니 모든 구색을 다 갖추었다고 흡족해 하였습니다. 그는 과연 보통 사람들에 비해서 하나님께 훨씬 더 헌신한 증거가 있지 않습니까?
    

이 시점에서 단 지파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사사기 18장에 의하면 단 지파는 그 당시에 정착할 거주지를 찾던 중이었습니다(18:1). 단 지파는 원래 현재의 텔 아비브가 위치한 해안평지를 할당받았었지만 아모리 족속들을 몰아내지 못하여 에브라임의 영토에 무단 거주를 하고 있는 셈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정찰대를 보내어 정착지를 탐지케 하였습니다. 이 정찰대는 미가의 집에 이르러 레위인에게 상담을 청하였습니다. 그 레위인은 정찰대가 듣고 싶어하는 말을 일러주었습니다. ‘평안히 가라 너희의 행하는 길은 여호와 앞에 있느니라’(18:6). 마침내 단 지파의 정찰대는 헤르몬 산의 경사지와 인접한 비옥한 홀레 골짜기에 위치한 라이스 성읍을 발견하였습니다. 이들은 가는 길에 미가의 ‘신당’에 들렸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레위인 제사장에게 상담을 하기 위해서 멈춘 것이 아니고 레위인과 함께 미가의 신상들을 탈취하려고 들렸습니다. 이들의 게획은 라이스에다 그들 나름의 예배처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미가의 신당은 텅 비어 버렸고, 단 지파의 공격대는 라이스를 쳐부수고 그것을 단 지파의 성읍으로 중건하기 위해 계속 행군하였습니다. 단 지파는 계획대로 라이스에 새로운 예배처를  세우고 모세의 손자 요나단을 필두로 모세의 후손들이 제사장이 되게 하였습니다. 라이스의 예배처는 사실상 실로에 있던 공식적인 하나님의 경배처와 맞서기 위해 건립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건립된 예배처는 사무엘의 때까지 존속(계속하여있음)되었으며 이스라엘의 북왕국 시절에 끊임없이 되살아 났습니다.
    

그럼 이 얽혀진 사건들을 통해 우리들이  배워야 할 교훈들은 무었일까요? 우리는 적어도 다음 세 가지 측면의 가르침들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백성들이 도덕적으로 크게 해이해진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도적질을 예사로 여겼습니다. 미가도 그의 모친도 그리고 단 지파도 도적질의 죄악성을 문제시하지 않았습니다. 미가는 적지 않은 돈을 훔치고서 저주가 두려워 반환하였습니다. 그의 모친은 그의 도적질을 꾸짖기는 커녕 오히려 그를 보상해줄 정도였습니다. 나중에 단 지파 사람들은 아무런 상관도 없는 미가의 신당을 털었습니다. 우리는 미가가 자기의 악행 때문에 정당한 보복을 당했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단 지파의 철면피한 약탈은 죄악된 것임에는 틀림이없었습니다. 그러나 단 지파는 이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았습니다(18:32). 이런 일들은 우리 시대에 얼마든지 적용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의 심각성은 그같은 악행을 주님께 대한 헌신의 명목을 걸고 자행하는 것입니다(17:2,3 ;18:19).
    

둘째,하나님의 계시된 뜻을 공공연히 불순종하는 일들이 늘어났습니다. 단 지파의 이동이 그 대표적인 불순종의 실례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아모리 족속들을 멸망시키라고 명하셨습니다(2:32).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하였습니다. 그들은 그 대신 하나님이 주시지도 않은 지역을 마음대로 차지해 버렸습니다. 죄의 길은 항상 그런 식으로 발전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들은 한 개의 죄를 덮기 위해 또 다른 죄를 저지릅니다. 우리는 거짓말 위에 또 거짓말을 씌웁니다. 그결과 하나님을 자꾸만 노엽게 합니다!
    

세째,예배를 제 멋대로 조작하였기 때문에 악한 열매가 달렸습니다. 미가, 단 지파 그리고 레위 제사장은 모두 아래에서 지적된 네 가지 사항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어겼습니다. 하나님은 언약 백성들이 어떻게  그분을 섬겨야 한다는 것을 명백하게 제시해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마음대로 하나님이 제정하신 에배의 형태를 변조시켰습니다.
    

①그들은 하나님이 엄격하게 금지하신 우상들을 만들고 사용하였습니다(출20:4). 미가는 이런 우상들이 여호와 경배의 한 보조품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우상들은 조만간 우상 자체를 숭배하는 길을 열어줍니다. 이로써 십계명의 둘째 계명에 위배됩니다.
    

 ②그들은 비공식적인 사설 경배처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백성들이 한 장소에서 예배를 올려야 한다고 명하셨는데 이 같은 중앙 예배처는 당시에 실로에 있었습니다(신12:1-7 ; 16:1-7). 실로의 에배처에는 광야 시절 부터 장막에 안치되었던 언약쾌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분명한 지시를 무시하고 집에서 가까운 편리한 장소에다 별도의 에배처를 마련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먼곳까지 가서 하나님을 섬길 필요가 없다고 백성들을 설득시컸습니다. 하나님은 실로에 있는 ‘교회’에서 그의 백성들이 경배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미가와 단 지파는 자기들의 안뜰에다 교회를 세우려고 하였습니다!
    

③그들은 제사장들을 마음대로 임명하였습니다. 미가는 자기 아들을 제사장에 앉혔다가 나중에 레위인으로 대치시켰습니다. 단 지파 사람들은 처음에는 미가의 레위인 제사장을 고용했다가 이어서 모세의 손자 게르손의 아들 요나단과 그 자손들을 제사장직에 앉혔습니다. 이런행위들은 모두 주님의 계시된 명백한 뜻에  위배되는 그릇된 처사였습니다(참조,민8:5-26절 ; 18:1-7)
    

④미가의 집과 단 지파에서 제사장 노릇을 했던 레위인의 처신도 간과할 수 없는 오행(誤行)입니다(삿17:8). 이 레위인은 하나님게서 한 지정된 장소에서 제사장 직무를 맡게 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레위인들이 머물 수 있는 성읍에서 살 수 있었습니다(민35:1-8 ; 수21:20-40). 그런데도 이 그릇된 사역자는 자신이 주님보다 더 잘 아는 듯이 행세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보직과 일자리를 정해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입맛에 맞는 직장을 찾아 다녔습니다! 그는 대우가 좋은 곳만 골라 다니면서 ‘경력관리’나 하는 자였습니다.그에게는 하나님의 계시된 분명한 뜻이 안중에 없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창의적인 예배’란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오늘날도 미가처럼. 하나님이 새로운 형태의 예배로 인도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시대 감각에 맞는 개선된 찬양의 표현과 거창하고  화려한 방식의 복음 전파를 원하신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들이 과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방법에 따라 하나님을 섬기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시편’,곧 영감된 ‘찬송책’을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성경 자체 내에 마련된 찬송들을 부르지 않는 교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현대 교회에는 쇼를 방불케 하는 프로그램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크리스찬 ‘록’뮤직, 크리스찬 광대, 오라토리오를 부르는 전문 찬양대 등 목록을 열거하자면 끊이 없을 정도입니다. 우리들은 이렇게 자문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그분을 섬겨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이 문제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경배를 확연하게 지시해 주셨으며, 그 원칙을 신약 교회의 예배에서 현저하게 드러내주셨습니다(요4:23 ; 마26:30 ; 행16:25 ; 엡5:19 ;골3:16 ; 약5:13). 하나님의 말씀이 현대 교회에는 불충분합니까? 순종에 대한 약속된 축복이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부족하단 말입니까? 그렇치 않습니다.
    

거짓 종교의 해악들
    

하나님의 계시된 뜻에서 무엇을 빼거나 혹은 거기에 다른 것을 집어 넣으면 불가불 거짓 복음의 덫에 거릴게 됩니다.‘새 빛’은  ‘과거의 어둠’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종교의 외형적인 측면을 보고 현혹되었습니다. 가나안 종교는 가정 수호신들을 허용하는 ‘편협’를 제공하였고 도덕 문제에 자유로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처음에는 가나안 종교의 외부적인 형식에 눈이 쏠렸으나 머지 않아 가나안의 거짓 신들을 끌어안기에 이르렀습니다. 바알들은 토지와 기후의 신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알 신들은 풍작을 보장해 주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일 먼저 이런 거짓 신들의 풍요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 다음 아스다롯이라는 남녀 신들을 받아들였는데 그들의 예배에서는 매춘행위가 하나의 의식으로 들어갔습니다.아스다롯은 복수 명사인데 단수 명사가 되면 아스토렛이 됩니다. 아마 이 신은 앗수르의 여신인 아스타트(Astarte)나 혹은 이쉬타(Ishtar)일 것입니다. 영어의 이스터(Easter:부활절)은 이쉬타에서 온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러한 공공연한 타락상에서 우리들은 매우 중요한 교훈들을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더구나, 퇴페주의에 깊이 빠져들고 있는 현대 사회의  탈선에 비추어 다음 세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을 줄 압니다.
    

첫째, 사람들이 주님으로부터 떠날 때에 그들이 금방 무신론자가 되거나 자유 방임주의자들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대개 전통적인 종교의 테두리에 부착되어 있으면서 정통주의의 종교 술어들을 사용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들은 자기들의 신분이나 안정성에는 최소한의 손해를 보면서 교리나 실천에는 최대한의 방임주의를 확보시킬 수 있도록 공작합니다. 이것이 사사기 시대의 특징이었으며 오늘날 교회의 두드러진 현상입니다!
    

둘째,하나님을 부인하는 백성들이 영적인 차원에서는 놀라우리 만큼 자신에 차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배반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해야 마땅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축복의 확신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미가가 그 전형적인 실례입니다. 그는 영적으로 죽어 있었고 주님의 정죄 아래 있으면서도 그런 자신의 처지에 아주 만족해했으며, 하나님과 완전히 화평을 누린다고 느꼈고, 하나님의 축복을 당연히 받을것으로 기대하였습니다.
    

셋째,본문에서 인간 사회의 취약성을 역력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일 어떤 공동체 속에서 그분의 나라를 갱신시켜 주실 뜻이 없으시면 그 사회나 집단의 퇴락(무너지고 떨어짐)은 걷잡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고대 이스라엘이 단순한 한 국가가 아니고 하나님의 교회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간판을 내붙인 교회들의 상당수가 영적으로 하락하고 있다는 사실을 누가 부인하겠습니까? 교회가‘소돔’으로 바뀌어 가는 경우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에 ‘주님의 집’이 ‘사단의 회(모임)’가 되었다고 2장 9절에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따른다고 하는 사람들이 사실은 마귀의 일을 하고 있는 모임이나 단체를 가졌을 경우에 그럼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사기는 곧 이 질문에 대한 해답입니다.
    

교회의 부흥
    

 그리스도는 의인을 부르시려고 오시지 않고 죄인을 부르시려고 오셨습니다. 바울은 죄가 넘치는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고 가르쳤습니다. 우리들은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희생되기를 구하여야 합니다. 그래야만 복음이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당신은 현대 교회에는 고대 이스라엘에게나 필요했었던 거창한 부흥 따위는 덜 필요 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신은 성령도 교회에 그다지 필요치 않다고 여기시지 않습니까?
    

아마 우리들은 교회의 영적 하락과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너무 많이 들었기 때문에 낙심이 되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들은 아직도 유효하며 확실합니다. 복음의 목적도 여전히 건재 합니다. 그리스도의 승리는 완료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결단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껴안으십시다!  하나님께서 그 크신 사랑으로 ‘멸망에 이르는 넓은 길’을 걷는 자들을 되돌리시도록 주께 엎드립시다. 주님은 자기 생명을 죄인들을 위해 내놓으셨습니다. 하나님게서 죄인들을 부활하신 주께로 인도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들로 삼아 주시며 그리스도의 상속에 동참하는 자들로 불러주시기를 기도합시다.



by 코이네설교자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