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고린도서

[고전7장] 결혼에 관한 지혜

'코이네' 2016. 7. 13. 18:39

 

결혼에 관한 지혜

 

고전 7장

 

 

이제까지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저질렀던 죄의 문제들을 언급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고린도 교회 사람들이 편지로 문의해 온 신앙의 문제들을 다루기 시작합니다. 그들이 바울에게 문의해 온 문제들은 결혼의 문제(7:1,25). 우상에게 받쳐졌던 음식을 먹는 문제(8:1), 성령의 은사 문제(12:1), 죽은 자의 부활 문제(15:1) 맟, 유대인들을 위한 연보 문제(16:1)등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7장을 공부할 때에는 바울의 답변이 한정적인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바울은 7장 한 장에서 결혼에 관한 성경 전반적인 논의를 펼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제시하는 것 이외에 성경의 그 나머지 부분은 이 중요한 주제에 대해 뭐라고 말하고 있는가를 반드시 숙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부 자유주의 비평가들은 바울이 결혼과 또 여자에 대해 호의적이지 못하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잘못된 것입니다. 또한 6,10,12 절과 25절 말씀은 바울이 영감(靈感)되어 쓴 것이 아니라고 하는 주장 역시 잘못되었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예수께서 세상에 계실 때 가르치셨던 것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마19:1-12/5:31-32/막10:1-12/눅16:18). 바울은 예수께서 가르치신 적이 없는 질문들에도 대답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주님께서 말씀하셨던 문제들에 대해서는 주님의 말씀으로 답을 하였습니다. 바울은 성령의 영감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서신으로 쓰는 답변은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것과 동일하다고 주장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결혼에 관한 하나님의 뜻을 설명하며, 각각 다른 세 부류의 신자들에게 권면을 합니다.

 

1. 신자와 결혼한 신자(7:1-11)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문의한 내용 중의 하나는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결혼하는 것보다 더 신령한 것인가?”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대답하기를, 남자나 여자나 독신의 은사를 받는 것은 좋지만, 독신 상태가 결혼한 것보다 월등히 나은 것은 아니며 더욱 어느 누구에게도 독신 생활이 최상의 생활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케네드 웨스트(Kenneth Wuest) 박사는 바울의 답변을 다음과 같이 변역하였습니다.

“엄격한 독신 생활은 지극히 합당하고 존중할 만하며 도덕적으로 적절하다.”

그러나 독신 생활은 허용이 되기는 하나 명령은 아닙니다.(6절 참조). 또한 독신은 일종의 은사이며 아무나 이 은사를 소유한 것은 아닙니다(7절 참조). 바울의 이 답변은 마태복음 19장 10-12절에서 예수께서 가르치신 것과 연결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고자”는 결혼을 삼가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창2:18)란 하나님의 말씀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러저러한 이유로 인해 독신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생활이 영적으로 열등하거나(subspiritual) 우월한(superspiritual) 것은 아닙니다. 결혼을 하고 안 하고는 모두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결혼을 하는 한 가지 목적은 음행을 피하기 위함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일부다처제나 동성 결혼을 용납치 않으신다는 것을 2절 말씀은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창세때부터 섭리해 놓으신 결혼의 형태입니다. 결혼한 남녀의 성생활은 정상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남편과 아내는 그 정상적인 성적 사랑의 특권을 남용해서는 안 됩니다. 아내의 몸은 남편에게 속해 있고 남편의 몸은 아내에게 속해 있습니다. 따라서 각각 피차의 의견을 존중하고 고려해야 합니다. 부부 간의 성생활은 서로를 성장시키는 아름다운 도구이지 결코 서로 싸우는 데 사용되는 무기가 아닙니다. 남편이 아내를, 혹은 아내가 남편을 거부하는 것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강도짓을 하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며(살전4:5,6 참조)

(살전4:5)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고 (살전4:6)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거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니라

자칫 남편 혹은 아내가 아닌 다름 사람으로부터 성적 욕구를 충족시키게 하려는 사단의 유혹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일에 있어서 영(靈)이 육체를 다스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남편과 아내는 기도와 금식에 전념하기 위해 합의상 분방할 수 있습니다(7:5). 그러나 이를 핑계삼아 그 상태를 오래 끌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부부는 영적인 일에서나 육적인 일에서나 피차에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바울은 권고합니다.

8,9절에서 바울은 1절에서 언급한 원리를 혼인하지 않은 신자와 과부에게 적용시킵니다. 즉, 절재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 사람들은 독신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이혼에 대해서도 문의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예수께서 말씀하신 적이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인용했습니다. 즉, 남편과 아내는 이혼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39절 참조). 그러나 이혼했을 시에는 그대로 독신으로 지내거나 재결합의 길을 모색해야 합니다.

물론 가장 이상적인 것은 이혼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한 가지 예외를 말씀하셨습니다. 즉, 부부 중 어느 한 쪽이 음행죄를 저질렀을 때에는 그것이 이혼의 사유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음행한 사실을 자백하고 그것을 용서해 주며 다시 화합하는 것이 휠씬 더 좋지만, 이런 것을 고려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음행하지 않는 편에서 이혼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지 이혼은 최후의 선택입니다. 우선은 화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야 할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주님께 순종하고 또 부부 관계 내에서 서로를 즐겁게 해주려고 한다면, 그들의 결혼 생활은 지극히 만족스러워서 결코 자신의 욕구 충족을 위해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리지 않게 된다는 것이 목회자들의 일반적인 말씀입니다.

현금에 있어서 증가일로에 있는 이혼율 기독교인들의 증가는 분명 하나님의 마음을 상케 하는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2. 불신자와 결혼한 신자(7:12-24)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 중에는 결혼 후에 자신은 구원받았는데 남편이나 아내는 아직 회심치 않은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그들의 가정에 어려운 문제가 야기되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가 회개함으로 새로이 변화되었는데 구원받지 못한 자와 여전히 같이 지내야 합니까?”라고 묻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믿지 않는 남편이나 아내가 그들과 계속 살기를 원하는 한 이혼하지 말라고 답변합니다. 구원받았다는 사실이 결혼 상태를 변화시키지는 않습니다. 변화시키는게 있다면, 그것은 결혼 생활을 향상시키는 방향으로의 변화여야 합니다(벧전3:1-6에서 믿지 않는 남편을 둔 아내에게 베드로가 주는 충고에 주목하면)

(벧전3:1)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벧전3:2)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 (벧전3:3)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벧전3:4)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벧전3:5)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벧전3:6)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

결혼은 근본적으로 육체적 결합이기 때문에(창2:24,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오직 육체적인 이유에 의해서만 파기되어질 수 있습니다. 간음이나 상대방의 죽음 등이 그 두가지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39절).(고전7:39) 아내가 그 남편이 살 동안에 매여 있다가 남편이 죽으면 자유하여 자기 뜻대로 시집 갈 것이나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

 

그러나 불신자와 결혼해서는 안 됨을 잘 알고 있는 그리스도인이 구원받지 못한 자와 결혼하는 것은 불순종의 행위입니다(39절에 “주 안에서만”이라는 말에 주의 합시다. (고후6: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 그러나 결혼한 후에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그로 인해 가정에서 야기되는 문제를 회피하기 위해서 이혼이라는 방법을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성도된 남편이나 아내는 구원받지 못한 자신의 배우자에게 영적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 것이 사실상 바울이 강조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14절 말씀은, 구원받은 남편이나 아내로 인해 구원받지 못한 그들의 배우자가 구원받는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위한 결단은 각 사람 스스로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의미하는 바는, 구원받은 자가 가정에서 그 영적 영향력을 발휘할 때, 구원 받지 못한 남편이나 아내를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녀들은 어떠한가?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해서도 믿는 남편이나 아내의 영향력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남편이나 아내는 그 신앙의 영향력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주변에는 헌신적인 신앙 생활을 하는 남편이나 아내가 결국 자신의 배우자로 하여금 구주를 믿게 만드는 사실은 늘 있어왔습니다.

 

그러나 구원이 결코 결혼의 상태를 변화시키지 않습니다. 만약 어떤 아내가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이혼을 한다면 그 가정의 자녀들은 사생아가 되고 맙니다(14절에서는 “너희 자녀도 깨끗치 못하니라”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아내가 그리스도에게 순종하고 그 뜻을 따라 이혼하지 않는다면, 장차 그 가정의 자녀들도 구원받을 수가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가르침에 친숙해져 있는 오늘날의 우리가 결혼에 대한 바울의 이 가르침이 당시 로마 세계에 얼마나 충격적인 영향력을 끼쳤을까를 이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바울의 가르침은 종족이나 사회적 신분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로마 제국 내에서 노예와 자유민, 남자와 여자, 부자와 가난한 자들이 동등한 위치에서 교제할 수 있었던 유일한 장소는 아마 교회뿐이었을 것입니다(갈3:28). 그러나 이 새로운 평등성 역시 잘못 이해되어졌고 그 결과 또 다른 문제를 야기시켰습니다. 바울은 17-24절에서 그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하나입니다. 그러나 개개의 신자는 주님께서 그를 구원하셨을 때 그가 처해 있었던 것과 똑같은 상황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울이 제시하는 문제 해결의 원리였습니다. 즉,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언약의 육체적 표(標)인 할례를 지움으로써 이방인이 되려고 해서는 안 되며, 그 반대로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할례를 받음으로써 유대인이 되려고 해서도 안 되었습니다. 또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동등하다고 해서 노예들이 그 주인에게 자유를 요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 할 수만 있으면 자유하게 되라고 권합니다. 이처럼 각 사람들이 부르심을 입은 상태에서 그대로 행하라는 원리는 구원받지 못한 자와 결혼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적용됩니다.

 

그러나 구원받지 못한 자가 이혼을 제안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15절 말씀이 이에 대한 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인 남편이나 아내가 굳이 가정을 위해서 불신자와 살 의무는 없습니다. 우리는 화평에로 부르심을 받았고 할 수 있는 한 화평한 가운데서 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롬12:18). 그러나 화평케 사는 것이 불가능할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즉, 믿지 않는 남편이나 아내가 믿는 남편이나 아내와 이혼하길 원하는 경우입니다. 그럴 경우 믿는 남편이나 아내는 오직 기도하고 주님께 계속 순종하는 것 외에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별거(別居)하고 있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인 남편이나 아내에게 이혼하고 재혼할 권리가 생기는가? 바울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러다가 믿지 않는 남편이나 아내가 결국 다른 사람과 함께 살기에 이른다면 어찌할 것입니까? 물론 그것은 상대방이 간음을 저지른 것이므로 이혼의 충분한 근거가 됩니다. 그러나 그랬을지라도 바울은 용서하고 화합하라고 권고합니다(10,11절 참조). 바울은 야기될 가능성이 있는 문제들을 다 취급하지는 않습니다. 바울은 어떤 규정적인 목록이 아니라 다만 영적 원리만을 제시할 뿐입니다.

 

우리는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환경을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대개 우리 안에 있는 것이지 우리 주변에 있지는 않습니다. 모든 문제의 핵심은 항상 사람들의 마음에 있습니다. 이혼을 해서 새로운 환경 속에서 행복을 찾으려는 부부들을 자주 봅니다만, 그들이 안고 있는 문제점은 여전히 그들을 따라다닙니다. 한 그리스도인 변호사가 언제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혼으로 인해 이득을 보는 사람은 변호사뿐이오”

이왕 남 좋은일 시키려면 건설적인 면에서 사랑이 포함된데서 해야지 부정적이고 파괴적인면에서 해서야 되겠습니까?

 

3.결혼하지 않은 신자(7:25-40)

 

바울은 혼인하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8-9절에서 이미 간단한 권고의 말을 했었습니다. 이제 바울은 미혼의 성도들에게 결혼의 의미를 보다 상세히 설명합니다. 그들의 질문은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결혼해야 하는가? 혼기(婚期)가 지난 교회 내의 여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것이었습니다(36절 참조). 이 단락에서 바울은 주로 혼인할 대가 된 딸을 가진 부모들에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에 관한 한 예수께서는 특별한 가르침을 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바울은 자신의 권고를 주되 주님으로부터 지시받은 권고로써 그것을 제시합니다(25절).

 

바울은 결혼에 관해 어떤 결정을 하기 전에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항을 고려해 볼 것을 요구합니다.

첫째, 현재의 상황을 고려해 보라(7:25-31).

그때는 세상이 변화를 겪고 있던(31절) 환난의 때였습니다(26절). 성도들이 주님을 섬길 시간이 많이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또 당시의 고린도에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지 못한 어떤 정치적이나 경제적인 압박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생각해 볼 때, 결혼하는 것보다 결혼하지 않는 것이 더욱 현명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이미 결혼한 부부들이 이혼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27절). 바울의 권고는 아직 미혼인 자들에게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바울의 권고는 어느 누구도 결혼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니라, 결혼한 자들은 거기에 따르는 시련을 감당할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28절). 사실, 상황이 매우 어려워져서 이미 결혼한 자들도 마치 결혼하지 않은 것처럼 살아야 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29절). 바울은 여기서 아마 경제적인 압박이나 핍박으로 인해 서로 떨어져 살아가고 있던 남편이나 아내들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고려하라는 것은 현대의 부부들에게도 매우 유익한 충고입니다. 미혼 남녀의 평균 초혼(初婚) 연령이 점점 높아지고 있는 현상은 그 만큼 결혼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결혼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은 허락을 받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허락하고 부모가 허락하고 친구들이 허락하고 이웃들이 허락하고 가장 최종적으로 하나님이 허락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허락이 있고 나서야 결혼의 가치가 상승하는 것입니다.

둘째, 자신의 책임에 솔직하게 직면하라(7:32-35).

이 구절의 강조 점은 “염려”(care)라는 낱말에 있습니다. 이 말은 “근심한다”, “다른 방향으로 끌려간다”는 의미입니다. 피차 두 사람이 함께 살면서 같은 문제로 함께 고민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결혼을 서둘러 더 많은 문제를 야기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결혼에 필요한 것은 성숙한 인격입니다. 그리고 연령 자체가 그 사람의 성숙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주님을 위한 삶을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바울의 말은, 결혼한 남녀는 주(主)를 온전히 섬길 수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결혼을 하고서도 온전히 주를 섬기는 부부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혼한 하나님의 종들은 그 배우자를 돌아보아야 하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자녀들도 보살펴야 합니다. 이러한 일로 인해 그들의 마음이 산란해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차라리 독신을 고수했다면 더 좋았었을 것입니다. 웨슬레의 아내는 결국 웨슬레의 곁을 떠났고, 휫필드는 여행을 많이 한 탓에 그의 아내는 오랜 시간을 혼자 지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부부가 피차 그리스도께 순복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면, 주님도 기쁘시게 할 수 있고 자신의 배우자도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행복한 가정, 만족할 만한 결혼 생활은 주님을 섬기는 일에 닥치는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큰 격려가 됩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이와 같은 사실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영국의 한 유명한 목사가 어떤 문제에 대한 그 자신의 입장 때문에 공공연하게 많은 비난을 받고 있었습니다. 신문은 거의 매일 그 목사를 부정적으로 보도했습니다. 어느 날 그의 한 친구가 그에게 “자네는 어떻게 그러한 비난을 참아나가는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그 목사는 󰡔나는 우리 가정에서만은 행복하다네󰡕라고 조용히 답변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일하려고 하는 미혼의 신자들은 자신의 마음 상태를 점검하여 결혼이 자신의 사역에 방해가 될 것인지 아니면 도움이 될 것인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또한 자신과 똑같은 소명을 느끼는 사람을 배우자로 택할 수 있도록 신중히 결정해야 합니다. 사람은 저마다 자신의 고유한 은사와 소명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습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부르시는 자들은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셋째, 개개인의 상황은 저마다 독특합니다(7:36-38).

바울은 본문에서 결혼하지 않은 처녀들의 아버지들에게 권고합니다. 바울 당시의 사회에서 딸의 결혼은 부모들의 결정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특히 딸의 결혼에 대한 아버지의 결정권이 컸습니다.(고후11:2 참조). 바울은 자신의 권고가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그저 엄격하기 만한 규정이 아니라는 사실을 35절에서 이미 밝혔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딸을 결혼시킬 것인가 시키지 않을 것인가는 아버지의 자유로운 선택에 달려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오늘날 남녀간의 데이트 방식이나 결혼관은 당시 고린도인들의 그것과는 판이하지만, 바울의 권고는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적용됩니다. 나중에 후회할 결혼을 방지하기 위해서 젊은이들은 부모나 교회 지도자에게 자문을 구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36절에서 바울은 “혼기”(婚期)라는 말을 언급함으로써 문제의 핵심을 찌릅니다. 이는 처녀가 점점 나이가 들어간다는 단순한 뜻이지만 좀 복잡한 의미를 지닙니다. 즉 “청춘이 꽃피는 시기가 지나간 처녀”라고 해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케네드 웨스트 박사)

노처녀가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서둘러 결혼을 한다면 잘못된 결혼을 할 위험이 있음은 물론입니다. 흔히 홧김에 결혼해 버린다거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한다거나 뒤지지 않기 위해서라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그러한 생각으로 하는 결혼은 행복한 결혼이 되지못합니다.

어떤 분은 말하기를 “저주받은 결혼 생활을 하는 것보다는 혼자서 외롭게 사는 것이 훨씬 낫다.”고 합니다.

각 사람이 처한 상황은 저마다 다르므로 부모와 그 자녀들은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찾아야 합니다. 행복한 결혼을 하는 데는 당사자인 두 남녀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결혼이 성경에 비추어 옳은지 그른지가 늘 쉽게 감지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네째,결혼은 평생을 위한 것임을 기억하라(7:39-40).

결혼에 의한 연합은 영속적이 되어야 하며 또한 평생 동안의 책임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시험 결혼󰡕이란 있을 수 없으며, 또한 “결혼 생활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라도 이혼할 수 있다”는 식으로 도피구를 마련해 놓는 것도 그리스도인에게는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결혼은 외모, 돈, 낭만적 감정, 사회적 지위 등보다 더 건실하고 건전한 가치관 위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책임, 성품 및 성숙함 등이 결혼에 있어서 보다 우선적인 요인이 되어야 합니다. 또 피차 성장하고자 하고 서로 배우고자 하는 의욕, 서로 잘못을 용서하고 잊어버리며 서로 섬기고자 하는 자세도 반드시 갖추어져야 합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묘사한 것과 같은 사랑이 두 사람을 단단히 결속시키는 데 꼭 필요한 것입니다.

바울은 끝으로 과부의 문제를 설명하며 결혼 문제를 마무리 짓습니다. 과부들은 자유로이 결혼할 수 있으나 그 결혼은 “주 안에서만” 이루어져야 합니다(39절). 이 말은 반드시 그리스도인과 결혼해야 할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안에서 결혼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과부들 역시 결혼하지 않고 지낼 것을 권고합니다(그에 대한 이유는 이미 앞에서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결정은 그들에게 맡겼습니다.

하나님께서 결혼에 관한 규정들을 설정하신 것은 결혼을 감옥과 같은 것으로 만들기 위함이 아니라 안전하고 견고한 요새(要塞)로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결혼을 일종의 감금 상태로 간주하는 사람은 결혼해서는 안됩니다. 두 남녀가 서로 사랑하고 서로에게(그리고 하나님에게) 기쁘게 헌신할 때 그들의 결혼은 풍요롭고 발전적인 것이 됩니다. 교회와 가정에서 한 「팀」(team)을 이룰 때 그들은 함께 성장할 것이며 주님을 섬기는 일의 풍요로움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상의 내용을 살펴본 우리는 결혼이 얼마나 중요하고 진지한 일인지 새삼 느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혼을 매우 중요시하시며,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결혼에는 고통스러운 결과가 따른다는 것을 바울의 권면에서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바울도 어떤 특별한 상황 하에서는 이혼이 용납될 수 있음을 언급합니다. 그러나 결혼 생활의 문제에 있어 이혼이 첫째 되는 대책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혼을 싫어하십니다.(말2:14-16) 화합의 길을 사방으로 모색해 보지 않고는 이혼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요약건대, 결혼을 고려하고 있는 젊은 남녀들은 다음의 사항을 자신에게 질문해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사는 무엇인가?

둘째, 나는 믿는 사람과 결혼하는가?

셋째, 현재의 상황은 결혼해도 좋은 상황인가?

넷째, 이 결혼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

다섯째,결혼은 평생을 위한 새로운 결합입니다. 나는 이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는가?

 



by 코이네자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