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의 개념 (고신대 전호진박사)

신학자료|2016.06.28 22:17

선교의 개념

 

독일의 ‘케제만’이라고 하는 신학자가 21세기 신학의 주제는 선교이며 모든 신학이 선교에 초점을 맞추게 될 것이라고 예고했듯이 선교가 우리 미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가 될 것이 확실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의 문제는 선교의 개념으로 말미암아 양극화가 대단히 심화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주의에서 ‘선교’의 개념은 가장 좁은 의미로 ‘복음을 듣지 못한 다른 문화 사람들에게 전도를 하는 것’입니다. 제가 말하는 선교의 의미는 타문화권에의 전도입니다. 즉 우리나라 사람이 일본 혹은 아프리카에 가서 그곳의 원주민들을 상대로 전도하는 그것을 가리킵니다.

 

조금 넓은 의미에서의 선교의 개념은 성도와 교회가 전도를 위해 하는 모든 봉사활동까지를 의미합니다. 이 폭넓은 ‘선교’의 개념 때문에 일부 교회에서는 제 1남 전도회가 제 1남선교회로 혹은 여전도회가 여선교회로 되기도 하고 또 과거의 경찰전도, 군대전도 하는 것이 이제는 경찰 선교와 군대 선교로 용어가 바뀌어 졌습니다.

 

요사이는 남선교회가 일진보해서 평신도회로 일부 바꾸어지기도 했다고 합니다. 벌써 앞을 내다보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의 세대는 목회자 중심이 아닌 평신도 시대가 될 것인데 이에 부응하는 처사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선교 개념으로 인해 종종 일부 교회 청년회나 학생회로부터 저항을 받기도 합니다. 이것이 19세기의 케케묵은 선교개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선교는 민주정의, 사회정의를 어떻게 실현하느냐 하는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말할 때는 대단히 난처합니다.

 

오늘날 우리 세계기독교회는 복음주의와 진보, 자유주의로 갈라져 있는데, 이 현상이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선교의 개념의 차이에서 나타납니다. 이 둘은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타협점이 없습니다. 같은 하나님을 믿고 한 교회, 한 주를 고백하는데 이렇게 신학사상에 있어 타협점을 못찾아서야 되겠습니까?

 

이런 생각을 가지고 양자를 절충하는데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는 영국의 죤 스토트는 W.C.C. 선교대회도 참석하고 복음주의 선교대회에도 참석합니다. 그는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캐나다 뱅쿠버의 제6차 W.C.C. 대회에서는 W.C.C.도 영혼을 전도하는 이 선교에 상당히 많은 관심을 가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복음주의 쪽에서도 사회정의, 민주화 투쟁을 외면했었지만, 현재는 많은 복음주의자들의 생각도 바뀌고 있습니다. 그들의 ‘Kingdom of God’ (신국)의 개념해석에서 Utopia의 실현에 있어 사회정의도 선교라는 차원으로 차츰 바뀌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W.C.C.의 25인 중앙집행위원회의 선교에 대한 정의는 영혼을 구원하는 선교가 아니고 아직까지는 사회정의, 심지어 혁명을 하는 것이 선교라고 생각하는 약간의 과격한 선교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해방 신학의 경우 누가복음 4장에 나타나 있는 이사야서를 인용한 말씀이 대부분 그것의 주제가 됩니다. 곧 가난한 자에게 빵을 주라, 병든 자에게는 약을 주라, 정치적으로 억눌린 자에게는 자유를 주라는 내용입니다. 민주화, 사회정의의 실현 등도 선교라고 하는 진보적인 선교개념입니다.

 

복음주의와 진보주의에서 선교에 대한 개념의 차이는 영문표기에서도 두드러집니다. 복음주의 선교학에서는 선교라는 용어를 쓸 때 Missions라고 합니다. 이것은 실제의 선교활동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선교사를 모집하고, 선교지를 결정하고 훈련을 시키고 모금을 하고 선교사 파송을 위해 기도하고 파송 후 사후관리를 하는 이 모든 활동을 의미하기 때문에 선교라는 단어를 쓸 때 단수가 아닌 복수로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W.C.C.는 공식적으로 이 선교라는 단어에서 S자를 떼어버렸습니다. 그것에 대한 대표적인 예가 1912년 이후 장구한 세월동안 세계 최장의 선교 잡지로 유명한 「The International Review of Mission(국제선교회지)」의 명칭에서 S자를 떼어버리고 1969년도 제4차 웁살라 대회이후 Mission이라고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갈드라는 에큐메니칼 지도자는 ‘미시오 데이(Missio Dei)’라는 선교개념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미시오 데이, 즉 하나님의 선교는 단수입니다. 북구 신학자로 에큐메니칼의 중진급 인사인 그는 우리의 국제선교회지의 선교용어에서 S자를 뗀 것은 잘못되었고 역시 선교는 ‘미시오 데이’가 아니라 ‘미시오 데스 데이(Missio des Dei)’ 즉 하나님의 선교들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소수의 사람들이 W.C.C. 안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하더라도 수용되어지지 않고 있는 형편입니다.

 

1980년도에 복음주의와 W.C.C.의 선교대회가 비슷한 시기에 열렸습니다. 복음주의 진영에서는 6월에 태국의 파타야에서 선교학자와 선교에 종사하는 세계지도자들이 모여서 ‘아직도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파할 것인가?’하는 소위 ‘세계복음화’라는 주제 하에 선교 세미나를 가졌습니다. 거기에서는 가령 태국의 불교신자들에게 어떻게 전도할 것인가 하는 구체적인 전략도 다루었었습니다.

그후 3,4개월 뒤인 1980년도 10월에 애딘버러에서 미국의 U.S Center for World Mission이라는 선교기구를 창설한 랄프 윈터라는 사람이 주도한 국제적인 선교대회가 열렸습니다. 저는 그 대회에 가서 일주일 가량 참여하고 느낀 것이 많았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전도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고심하는 것처럼 그곳에서도 각 종교별로 선교전략을 논하였습니다. 아직도 세계에는 만 육천 오백국의 사람들이 기독교가 뭔지를 모르고 있다고 하면서 이 Ethnic-Group, 기독교를 전혀 듣지 못했던 인종 단위의 사람들을 찾아내는 workshop을 했습니다. 이러한 Unreached ethnic Group, 복음을 듣지 못한 인종그룹에 대해서는 우리 선교에서도 종종 다루고 있는 주제입니다. 또 5월 마지막주쯤 모인 멜버른대회, 이것은 W.C.C. 선교 및 전도분과 위원회가 주최했는데 이 대회는 ‘Biking of God’ ‘당신의 나라에 임하옵소서.’라는 주제였습니다. 이 선교대회에서 최규하 대통령에게 전보가 날라왔는데 그때 우리나라는 광주사태의 와중에 있었습니다. 그 전보 내용은 “불행한 사태를 빨리 해결하시고 민주화를 하시기 바랍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선교대회는 엘살바도르나 한국 등 소위 독재국가에게 정치적 불안정을 벗어나 민주주의를 실현하라는 전보를 모두 보냈다고 합니다.

 

여기의 ‘당신의 나라에 임하옵소서.’라는 주제는 이 지상에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느냐 하는 것으로 가난한 자는 배부르게 되고 억눌린 자는 해방이 되는 ‘해방’이 주제가 되는 선교로서 제가 보기는 가난한 자가 주제가 되는 것 같았습니다.

 

오늘의 세계기독교회는 세계 선교에 대한 개념에 대해 한쪽에서는 전도, 다른 한쪽에서는 특혜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잘 먹이고 잘 살게 하느냐의 인간화 문제, 해방문제로 서로 양극을 달리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는 우리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한국 기독교회에서 실제적인 연합운동이 전개되기 위해서는 우선 사상적인 대립이 완화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양자간 절충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제 생각에는 진보주의적 선교개념은 결국 이데올로기로 변질되지 않았는가 생각합니다. 목회자분들 중에는 민중신학을 지지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그러나 저에게 언론의 자유를 좀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생각할 때는 해방신학, 민중 신학은 결과적으로 이데올로기가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이데오로기는 쉽게 말하면 특정 계층의 사람들을 위한 어떤 이념, 즉 철학이나 사상, 즉 전체를 위한 철학이나 사상이 아닌 어떤 특정계층을 위한 사상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이데올로기에 대해서 칼 막스도 처음에는 반대했다고 합니다. 요사이 우리나라에서는 이데올로기와 좌경사상이 동일시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이 왜 이데올로기화해 버렸는가 하는 점을 살펴봅시다. 독일의 선교학자들은 선교신학을 이데올로기화시키고 말았습니다. 해방신학에서의 주제는 앞서 멜버른대회에서 나타났듯이 가난한 자를 어떻게 먹이느냐 하는 ‘가난한 자’였습니다. 마태복음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에서 심령을 떼어버리고 육체가 가난한 자가 결국 복이 있고 그들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민중신학에서는 그 주제가 민중입니다. 물론 김지하씨가 사용한 민중의 개념에는 많은 혼란이 있지만 하여튼 특혜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뜻한다고 합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일부 정치가와 재벌을 제외하고는 모두 민중이라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또 어떤 이는 중산층을 제외한 하류층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여 그 개념이 다르기도 합니다. 여기서의 문제는 하나님의 나라를 믿는가, 안 믿는가 하는 신앙적인 영적인 가치 기준이 아니라 사회ㆍ경제적인 면에서의 소외계층들이 하늘나라에 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 우리는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가난하기 때문에 무조건 구원받는다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전호진 박사 ' 목회와 선교전략' 중에서 )

 



by 코이네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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