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마태복음

[마태복음9장] 믿는 자에게 주시는 세 가지 복

'코이네' 2015. 12. 1. 23:28

믿는 자에게 주시는 세 가지 복

마태복음9장 1절- 8절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예수께로 찾아 나오는 것입니다. 예배에 참석하는 것 그 자체를 주님께서는 중요한 믿음으로 인정하십니다. 오늘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중풍 병자와 같이 불완전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완전합니다. 주님은 죄짓던 이 모습 이 대로를 부르시고, 주님께 믿음으로 나아 오기만 하면 새로운 생의 출발을 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십니다. 믿음에는 축복이 담겨져 있습니다. 믿음은 그릇이요, 축복은 그 내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고 주님께 나오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엄청난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첫째, 죄사함의 축복을 주십니다

본문 2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람을 받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앞으로 네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이라고 하지 않고, 이미 네 죄를 사함 받았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죄란 화살이 과녁에서 빗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탈선하는 것을 말합니다. 비정상으로 사는 생활, 빗나간 생을 사는 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생활이 자꾸만 곁길로 가면서 스스로 자제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습니까? 죄는 인간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도를 닦아도, 아무리 자기를 억제해도 아무리 금욕을 할지라도 죄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죄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죄를 해결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죄를 해결해 주시고 용서해 주실 수 있는 능력은 오직 예수님만이 가지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이를 믿고 나오는 자마다 모든 죄를 사해 주십니다.

 

죄를 사해 주시는 그분의 권세는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권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전1:18절에서 십자가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나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날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피 흘려주신 피의 권세가 우리의 죄를 깨끗이 씻어 줍니다. 히9:22절에서 보면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죄는 반드시 값을 치러야 하는데, 즉 피 흘림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구약 시대에는 예수님을 상징하는 양의 피를 흘리므로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는 친히 어린 양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2천년 전에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하시고 우리를 위해 피 흘려 돌아가신 것을 믿기만 하면 죄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 순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모든 인류의 죄가 법적으로 용서받고 사유함 받은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2천년 전에 이미 용서되어진 것을 내 것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제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2천년 전에 이미 완성된 구원이 내 것이 되고, 이미 용서해 주신 그 용서가 바로 내 것이 되어 우리는 자유 함을 누리게 됩니다.

 

둘째, 하나님은 마음의 평안을 주십니다.

본문 2절에는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안심하라는 말은 ‘마음의 평안을 가지라’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권면의 의미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시니, 이제는 마음의 평화를 주시는 예수님 앞에서 두려울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중풍 병자는 예수님 앞에 나아 올 때에 참으로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나아 왔습니다. 죄로 인한 압박과 죄책감 때문에 마음이 불안했을 것입니다. 또 이 중풍 병자는 언제가는 죽으리라는 죽음에 대한 불안감,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신앙적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오늘 교회에 나오지만 불안하고, 두렵고, 때로는 답답하기도 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물론 죄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주님 앞에 나와 죄용서 함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을 온전히 떨쳐 버리지 못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온전히 내 자신을 맡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엄마 품에 있는 어린아이가 평안히 잠잘 수 있는 것은 온전히 내맡겼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현대인의 불안한 근거가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요즘같이 사회가 불안한 시기는 없었습니다.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은 경제적 불안, 도덕적 불안, 신경 중세적 불안, 영적 불안 등으로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 마음의 평안과 평화를 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 생사 화복과 역사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모든 것을 온전히 맡길 때만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엡2:14절에서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 지라”라고 했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요14:27절에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평화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 와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마음과 생활에 주께서 가지고 계신 평안을 우리에게 매순간 공급해 주십니다.

 

셋째, 이적을 체험하는 축복을 주십니다.

논리적인 신앙, 머리로 믿는 신앙은 죽은 신앙입니다. 가슴으로 믿고, 머리로 알고, 생활로 체험하는 살아 있는 믿음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본문 6-7절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이라는 구절에서 보듯이 중풍 병자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이적을 체험했습니다.

 

믿음이 크면 이적도 크게 나타납니다. 믿음에는 반드시 순종이 있습니다. 순종할 때에 기적의 축복을 체험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일어나라 하실 때에 중풍 병자가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면 일어날 생각도 안했을 것입니다. 그가 믿었기 때문에 순종하였고, 순종할 때에 일어나는 기적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이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믿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순종의 믿음으로 인한 이적이 생활 속에서 자주 자주 일어나야 생활의 변화가 일어나고 살아 움직이는 생동적인 신앙이 되어, 온전한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불란서의 나폴레옹이 유럽을 휩쓸고 갈 때에 그의 장군 한사람이 정예부대를 이끌고 오스트리아의 한 국경 도시인 펠드리히(Feldrch)를 공격하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도시의 주변 고지에는 수많은 불란서 군대가 진을 치고 쳐들어 갈 준비를 하였습니다. 펠리히드 시에서는 비상 시의회를 소집하고 불란서 군에게 미리 항복을 해서 피해를 방지할 것인가, 아닌가를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에 모든 시민들로부터 존경받는 교회의 지도자가 일어나서 말했습니다.

‘여러분 오늘은 우리 주님이 부활하신 부활절이 아닙니까? 지금 우리가 우리의 힘을 의지한다면 지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예정대로 교회의 종을 치고 예배를 드립시다. 그리고 나머지 일은 하나님께 맡깁시다’...시의회에서는 이 발언을 모두 찬성하였습니다. 불란서 군대가 공격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교회에서는 기쁨에 찬 우렁찬 종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이 종소리를 들은 불란서 군인들은 밤사이에 오스트리아의 많은 지원부대가 도착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불란서 군대는 작전을 변경하여 오스트리아의 펠드리히 공격을 취소하고 다른 곳으로 가 버렸기 때문에 그 도시는 군대도 없이 하나님의 간섭으로 승리를 거둔 것입니다.

 

삶의 모든 결정권과 작전 권을 하나님 손에 맡겨려 드리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신약성서 속에는 ‘믿음’이라는 뜻의 ‘피스토스’라는 헬라어가 600번이나 들어 있다고 합니다. 성서에서 믿음을 빼면 텅빈 책이 되고, 그리스도인에게서 믿음을 빼면 정신나간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 온전한 믿음, 예수님이 인정하시는 믿음, 주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믿음의 사람에게 얼마든지 주시는 기쁨과 평안과 축복이 넘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y 코이네자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