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마태복음

[마14:27]그리스도인이 가지는 모험의 의미 / 이동원 목사

'코이네' 2015. 11. 29. 01:00

모험의 의미

마14:27-33

이동원 목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인생을 산다는 것, 모험을 한다는 것. 그 모험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이어야 할까요.

 

첫째로 우리들의 모험은 순종의 모험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의 모험은 순종의 모험이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베드로의 실패를 꾸짖기에 앞서서 그 모험의 선한 동기를 우리는 칭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이 시작되는 28절의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보십시오. 우리 다 같이 본문의 28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다 같이 시작.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네, 우리는 흔히 본문의 사건을 묵상할 때 이 충동적인 기질과 성격의 베드로가 어느 날 주가 물위를 걸어오는 장면을 보고 자기도 물 속으로 그냥 뛰어 들어간 것으로 우리가 생각하기 쉬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나를 명하사, 나에게 명령을 하여서 저로 물 위로 오게 하십시오. 주께서 이것을 허락하시고 주께서 명령하신다면 제가 한 번 이 일을 해보겠습니다. 제자 베드로는 모험의 출발점을 단순한 자기충동이나 자기 야망의 선에서 출발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계획이고, 주님의 허락하심이고, 주님의 명령이라면 제가 한 번 순종해서 이 모험을 해보겠습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마음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그대로 지나치면 안됩니다.

 

이 성경을 기록한 마태는 제자 베드로의 모험 사건을 기록하면서 그것이 단순한 그의 모험 심리에서 출발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 부분에서 역설하고 싶어 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은 저와 여러분이 단순히 번지 점프나 혹은 헹글라이더 같은 모험적 라이프 스타일을 추구해야 한다는 그런 의미로 이 말씀을 주신 것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님으로 고백한다면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 삶의 모든 경험의 사건 가운데, 그는 진정 주님이셔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분이 우리의 삶에 주인되신 그 분의 인도하심을 의뢰하면서 우리 인생의 내일을 향해서 모험적으로 과연 걸어갈 수가 있느냐, 또 걸어가기를 원하신다면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우리가 물어야할 가장 질문이 있다면 이것입니다. 주께서 이 모험을 허락하시는 것인가? 이 모험이 주께 승인하심이 있었는가? 아니 이 모험이라는 것은 본래 주님의 의도하심과 계획하심 안에서 내 삶의 장에서 허용되고 있는 사건인가? 그리고 모험의 길을 걸어갈 때 주님이 정말 함께하실 것인가? 우리는 이 부분들을 먼저 확인하고 모험의 장에 우리의 몸을 던질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같은 본문을 마가복음 6장에서 읽어본다면 마가복음 6장 48절에 마태가 기록하지 않은 한 단어를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밤 사경쯤에 바다위를 걸어서 저희에게 오사 그 다음에 지나가려고 하심에, 여기서 마가는 지나가려고 하심에라는 한 인상 깊은 단어를 사용합니다. 영어에는 그냥 Pass by 이렇게 되어있는데, 지나간다.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면 지금 배에 타고 있는 베드로 그리고 다른 제자들, 파도는 심하고 배는 흔들리고 아, 이거 큰일 나겠구나. 제자들이 당황하고 두려워하고 있던 그 순간 예수님이 그냥 그 곁을 지나가려고 하셨다. 구경하면서. 이런 오해를 살 수가 있습니다. 근데 본래 이 단어, 지나가려고 하심에라는 단어의 히랍어 단어는 발레코마이라는 독특한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어떤 의도를 가지고 한 사람의 삶의 장 앞에 의도적으로 뛰어 들어와 그가 방문하시는 모습을 가르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예를 들어서 구약 성경에 하나님이 모세를 지나가려 하심에, 바위 틈새에 있었던 모세를 하나님이 지나가려 하셨다. 그냥 옆으로 지나가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모세를 만나주시기 위해서 모세의 인생의 장에 하나님이 간섭해 들어오실 때 사용되는 단어. 혹은 하나님이 엘리야를 지나가려 하심에 그런 경우들 속에 쓰여집니다.

 

그렇다면 오늘 여기 성경에 사용된 단어의 의미를 통해서 어쩌면 베드로가 경험하고 있었던 이 상황은 예수님이 알고 있었던 상황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의도적으로 이 상황을 허용해 놓으시고, 이제 제자 베드로를 만나주시기 위해서 이 상황 속에 다가오시는 주님의 모습을 우리는 이 단어를 통해서 볼 수가 있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이렇게 말을 합니다. 주님, 정말 주님이 주님이시라면 그리고 주님이 명령하신다면 제가 한 번 나가보고 싶습니다. 주님처럼 걷고 싶습니다. 주님 그렇게 명령해 주시겠습니까. 라고 물었을 때, 자, 이제 예수님의 대답을 들어보세요. 29절에 보시면 예수님이 뭐라고 대답을 하셨죠. "오라", 오라 그랬습니다. 주님이 어떤 뉘앙스로 이 대답을 하셨을까요. 아마 예수님이 저와 같은 장난끼가 있는 사람이라면 분이셨다면 그래, 한번 와 봐. 뭐 이런 의미로 예수님이 말씀하셨을까. 그건 아닌 것 같단 말이죠. 존 왈트보그 목사님은 이 본문을 묵상하면서 아마도 오라는 이 상황은 예수님은 이미 이 상황을 알고 있었고, 예수님의 그 허용하심 속에서 지금 이 사건이 이루어 지고 있었다면 그리고 사건을 통해서 소중한 lesson을 나누기를 원하고 있었다면 모든 것을 아셨던 우리 주님은 제자 베드로가 이 요청을 했을 때, 오라는 허락을 하시면서 그 분은 아마도 아주 싱그러운 스마일을 미소를 지으면서 그래 한번 와 볼래. 아마 이런 의도가 아니였을까.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래 한번 와보라고. 그래 한번 와보라고. 모험 가운데로 사랑하는 제자를 초청하고 있는 그 의도를 우리는 이 단어에서 읽어낼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의미에서는 주님도 모험을 즐기시는 분이십니다.

 

모험으로 사는 인생이라는 유명한 책을 쓴 스위스의 내과의사인 크리스챤 의사인 폴 트루니엥은 성경의 하나님은 모험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모험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물 가운데 만물의 영장인 당신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빚어 만드시고, 그리고 사람 속에 당신의 하나님의 호흡을 생기를 숨결을 불어 넣으시고 인간에게 자유로운 의지를 허락하셨을 때, 이것은 하나님의 모험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모험이었습니다. 또 죄 속에 빠져 있는 인간을 바라보시면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인간으로 태어나게 하셨을 때, 정녕 그것은 하나님의 모험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당신의 아들을 통해서 죄 속에 있는 인간을 구속하시고 새롭게 하시고, 그 인생들이 새로운 가치관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기 위하여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로 하여금 피를 흘리게 하신 것. 이것은 정녕 하나님의 모험이 아닐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늘 이런 생각을 해요. 목회를 하다가 전 제 부족함을 느낄 때마다 하나님은 어쩌자고 나를 구원하시고, 이동원이라는 나를 구원하시고 그리고 목사로 불러주시고, 그리고 이 지구촌 교회에 목사로써 목양을 저 같은 사람에게 위임하셨는가. 내가 나를 아는데, 내 꼬라지를 아는데. 하나님 그것은 좀 지나친 모험이 아니십니까. 이렇게 하나님 앞에 묻고 싶어지는 순간들이 있어요. 그러나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를 아시는 그 분. 우리를 아시는 그 분이 우리의 연약함 이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가 여러분과 저를 모험의 자리에 초대하고 부르신다면 기꺼이 순종하면서 따라 갈수가 있느냐 하는 것 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험은 순종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속에서 어느 날 모험의 불꽃이 일어나거든 지금까지 기존의 삶의 패턴을 깨트리고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새로운 미래를 향해서 한번 모험의 의지가 내 속에 불꽃처럼 타오르거든 우리는 주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주께서 지금 제 마음속에 역사하시고 있는 것입니까. 주께서 제 마음속에 제 인생의 변화를 위해서 저를 부르시고 있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이것이 주의 명령이라면 주의 인도하심이라면 제가 기꺼이 순종하겠습니다. 바로 이 순간이 크리스챤들의 모험이 출발하는 순간일수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모험의 자리로 부르신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인 것을 확인하신다면 순종의 결단으로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하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의 모험은 믿음의 모험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모험은 믿음의 모험이어야 합니다.. 저는 모험을 다른 말로 말하면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믿는다는 것은 모험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우리가 믿음의 장. 그러면 생각나는 장이 어떤 장이죠. 믿음의 장 그러면. 네 히브리서 11장.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믿음의 영웅들의 이름이 쭉 열거되고 그들이 살았던 모습이 증언됩니다. 그들은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분들은 다 모험을 했던 사람들이 아니였습니까. 믿음으로 노아는 노아를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이 그 시대에 넘쳐나는 죄악을 보고 그 시대를 심판할 것을 계획하시고 작정하신 후에 홍수 심판을 작정하시고 나서 노아에게 배를 짓도록 명하십니다. 비가 올 징후가 전혀 없는 맑은 하늘 아래에서 배를 지어야 하는 노아의 노력. 그것은 모험이 아니였을까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주시고, 아브라함에게 네가 너를 위해서 약속의 땅. 브라미스랜드를 준비했다. 그 약속의 땅을 향해서 떠나라. 익숙했던 오늘의 고향. 오늘의 친구들. 오늘의 가족들과 작별하고 그 땅을 새로운 땅을 향해서 떠나가는 것은 정녕 모험이 아니였겠습니까. 백살이 다 되어서 얻은 아들. 그 아들을 하나님의 명하심에 따라서 제단 위에 그 이삭을 눕혀 놓았을 때 그것은 정녕 아브라함의 모험이 아니였겠습니까. 훈련되지 않은 이스라엘의 군중. 이백만에 가까운 이스라엘 백성들을 거느리고 그들을 이끌고 애굽땅을 떠나, 노예되었던 그 땅을 떠나서 약속의 땅을 향해서 , 광야로 들어서는 순간 그것은 모세의 모험이 아니였겠습니까. 드디어 가나안 땅에 들어왔지만 가나안땅에 버티고 서있었던 여리고의 거대한 성.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하심을 좇아서 여호수아가 그 백성들을 거느리고, 하루에 한바퀴씩 그 여리고성을 돌고 있었던 모습은 바보 같은 모험의 행진이 아니였겠습니까. 저는 오늘 본문의 베드로에게 이 물 위를 걸어가는 모험을 허락하신 가장 중요한 의도가 있었다면 그것은 베드로의 믿음을 위해서였다고 생각이 합니다. 우리는 베드로의 실패쪽만 그 동안 강조해 왔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다른 측면에서 이 사건을 전망하려는 것입니다.

 

29절을 다시 한번 읽어보십시오. 본문의 29절 다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29절 시작.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네, 여기까지는 계속 가고 있는 것이예요. 물 위로 가고 있잖아요. 계속. 가고 있었어요. 자, 그 순간 베드로는 자기의 믿음을 Execise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주님을 믿었고, 오라는 주님의 말씀을 믿었고, 그 말씀을 말씀하시는 주님을 신뢰하고, 지금 베드로는 물 위를 걸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기적을 체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다음 순간 베드로는 갑자기 파도와 바람을 의식했습니다. 그리고 두려움이 그를 압도하는 순간, 그는 다시 물 속에 빠져 들어갔던 것도 사실입니다. 저는 이것이 신앙인의 불신앙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신앙인의 불신앙. 신앙인들도 인생의 어떤 한 때 어떤 삶의 장에서는 불신앙처럼 될 수가 있다라는 사실입니다. 어제는 어떤 사건 앞에서 나는 당당히 하나님의 자녀다운 그 믿음을 가지고 믿음의 사람답게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경험하고 있는 어떤 사건 앞에서는 나는 전혀 믿음이 없는 사람처럼 당황하고 허둥대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고 있지가 않습니까. 그렇다면 베드로를 비난하지 마세요. 그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순간, 베드로를 건져내시면서 주님이 하셨던 그 말씀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드리고 싶습니다.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믿음이 적은 자여, 저는 여기서 주님이 베드로를 보고 믿음이 없는 자여 말씀하지 않은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주님은 베드로가 믿음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그 때까지 베드로는 주님을 믿었잖아요. 그의 말씀을 믿었잖아요. 오라는 그의 말씀을 믿고 아니 암만 주님이라고 어떻게 물 위를 오라고 거예요. 주님이 내 앞에 나타나서 여러분 그 바다의 물을 향해서 내가 수영도 못하는 사람인데 나를 향해서 오라고 명령을 하셨다면 여러분 걸어가시겠습니까. 믿음이예요. 베드로는 믿음이 있었던 사람이예요. 그러나 그 믿음이 계속 될 수가 없었다는 거예요. 그는 견고하게 계속적으로 믿음의 길 위에 설 수가 없었다는 것. 그것은 그의 믿음이 충분하지 못했다는 것을 주님이 아셨어요.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신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에게 있어서 비록 실패했다고 할지라도 그러나 이 믿음의 execise는 그리고 그 경험했던 그 일시적인 실패는 다음에 도전을 위한 믿음의 성숙의 놀라운 계기가 되었을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래서 엄격하게 말하자면 저는 믿음의 세계 안에 실패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 단순히 실험이 존재할 따름이고, 성숙이 존재할 따름입니다. 닥터 조나스 써트라는 분은 폴리오 백신 실험을 2백차례에 걸쳐서 했지만 계속 실패 했습니다. 2백번째의 실험에 실패했을 때 누군가가 그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다고 합니다. 2백번씩이나 실패하신 소감이 어떠신지요. 이 때 닥터 조나스 써트는 이런 대답을 했다고 그래요. 실패라니요. 저는 2백가지나 이렇게 되면 안된다라는 2백가지의 방법을 확인해 보았을 따름입니다. 그리고 그는 2백 한번째에 드디어 그 일을 해 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믿음이 사람이 아니예요. 모험이라는 것은 바로 이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 미래를 준비해 놓는 것입니다. 모험의 신이신, 모험하시는 하나님은 바로 당신을 믿고 신뢰하고 앞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에게 그 놀라운 미래를 준비하신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에 이 놀라운 선언을 확인하기를 원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고,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 그렇다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주께서 저와 여러분을 향해서 모험의 무대를 펼쳐주실 때 전능하신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붙들고 그 분을 신뢰하며 믿음으로 모험의 장에 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하옵나이다. 그래서 우리의 모험은 순종의 모험이어야 하고, 믿음의 모험이어야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세번째, 우리의 모험은 사랑의 모험이어야 합니다.

 

사랑의 모험일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마지막으로 이 사건이 베드로에게 허용된 더 깊은 동기를 살펴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 주님이 베드로에게 이런 사건을 경험하도록 허용하셨을까. 저는 그 대답이 사랑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베드로를 주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에. 이것은 베드로가 지금 이 실패를 소위 실패를 경험하기 직전에 상황을 살펴 보신다면 더 분명해집니다. 본문에 들어가기에 앞서서 24절을 보세요. 마태복음 14장 24절입니다. 자 마태복음 14장 24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마태복음 14장24절을 다 같이 시작.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

 

자, 이미 베드로와 제자들은 그 파도와 바람속에서 배전이 흔들리고 고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죽을 것 같은 고난과 공포를 이미 겪고 있었습니다.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 다음 절 25절에 보시면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밤 사경에, 사경은 몇십니까. 우리 시각으로 새벽 세시쯤 되요. 삼경이면 밤 12시부터 3시가 밤 삼경이거든요. 9시부터 12시까지가 제 이경. 6시부터 9시까지 저녁이 제 일경. 그렇게 시작됩니다. 사경이면 몇시부터 새벽 3시부터. 새벽 3시. 새벽 3시면 뭡니까. 한 밤중. 도둑이 제일 좋아하는 시각. 네, 새벽 3시. 우리가 곤한 잠에 떨어져 있는 바로 그 시각. 바로 그 시각에 이 한밤중에 제자들이 고난을 당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 한밤중 고난 당하고 있는 제자들 곁에 새벽 3시에 한 캄캄한 그 밤중에 다가오시는 바로 그 분. 이것은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누가 여러분에게 새벽 3시에 도움을 청한다면 그 곤한 잠을 일깨워 뛰쳐나가시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깊은 애정을 확인해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더군다나 베드로가 물 속에 빠져 들어가던 그 순간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이 때 주님은 어떻게 응답하셨다고요.다시 31절을 보세요. 31절. 예수께서 뭐라 그랬어요. 즉시 손을 내밀어. 네, 저와 같이 약한 장난끼가 있는 사람이라면 주님은 이렇게 했을 거예요. 그래 너 한번 골탕 좀 먹어볼래. 건질 때 건져 주더라도 그러나 주님은 그렇지 않으셨어요. 어떻게요. 즉시 손을 내밀어. 그 빠져 들어가는 제자의 안타까운 그 장면. 그 두려움 속에 사로잡힌 그 제자를 보시자 마자, 즉시로 손을 내밀어 다가 가시는 그 분. 사랑이 아닙니까. 우리의 이 사건에 모든 정황에 둘러싸여 있는 주님의 사랑을 우리는 볼 수가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랑 때문에 이 모든 사건이 허용되고 있어다는 것. 잠시의 실패가 있었지만 그 실패를 통해서 강해질 수가 있는 더 성숙 할 수 있는 제자 베드로의 내일을 바로 보면서 허용된 사랑의 테스트였다고 저는 이 사건을 해석하고 싶어요.

 

제가 7년 반전에 이 한국 땅으로 나와서 다시 개척을 하기로 결심했을 때 저, 제가 누구하고 제일 먼저 의논했을 것 같에요. 제가 누구하고 제일 먼저 의논했을 것 같에요. 사모님하고요. 주님하고 먼저 의논을 해야지 어떻게 사모하고 먼저 의논을 하겠습니까. 먼저 주님 앞에 기도하고, 그러나 그 다음에 제 아내와 얘기를 했죠. 그 다음에 또 누구. 제 아이들하고, 그 때 고등학교 1학년, 3학년였던 제 아이들하고 얘기하고. 하나님께서 아빠의 마음속에 자꾸 한국 교회에 개척에 대한 부담을 주시는데, 너희들 어떻게 생각하니, 고1, 고3 아이들을 뒤로 하고, 그리고 성숙하고 있었던 아름다운 교회를 뒤로 하고, 제가 떠나간다는 것이 결코 쉬운 결단은 아니였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그러드라고요. 아빠, 나는 아빠가 잘 할 것이라고 믿어. 큰 아들은 좀 말이 없는 데 그러드라고요. 아빠가 마음 먹었으면 가야지 뭐. 제 아내는 그러드라고요. 하나님이 당신의 마음속에 주신 부담인데 누가 말리겠소. 당신 따라 오겠냐고 그러니까, 따라가야지 어쩌겠어요. 그러나 그들의 마음속에서 나와 함께 있는 그들의 마음속에서 그 사랑을, 애정을, 신뢰를, 지지를 확인할 수 있었을 때, 제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있었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이들이, 나를 이해하는 이들이 있는 한 내가 실패가 기다리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도전할 만한 모험이라고 생각했어요.

 

요즘 세계 교회에 좋은 모델이 되고 있는 새들백 교회 얘기를 저는 읽다가 그 중에 한 이런 감동적인 대목이 있었어요. 새들백 교회, 오늘 날 세계적으로 모범적인 교회가 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는 자기 교회 안에 실패를 허용하는 사랑의 분위기가 있었다는 거예요. 실패를 허용하는 사랑의 분위기가 있었다는 거예요. 뤽 월렉 목사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우리 교회가 오늘의 교회가 되기까지는 우리 교회는 수 많은 실패를 거듭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실패 때문에 우리는 정죄하지 않았고, 우리는 계속해서 새로운 시도를 했고, 새로운 노력을 경주했고, 그것이 오늘의 창의적이고, 창조적인 우리의 교회를 만들 수가 있었다고. 실패를 허용하는 사랑의 분위기가 있었다니. 아주 감동적인 대목이예요. 대부분 전통적인 교회가 어느 시점까지 성장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쇠퇴하고 서서히 죽어갑니다. 왜 그래요? 변화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렇습니다. 혹은 이만큼 왔으면 됐지 하는 더 이상, 더 이상 나아가기를 하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 그래서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아요. 더 이상 새로운 것을 시도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의 상황에 비유하자면 물에 빠질까봐 두려워한 나머지 결국 결국 깨질 수 밖에 없는 뱃고리를 붙들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처럼 말입니다. 인생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최근에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가 되고 있는 책 가운데, 스펜서 존슨이라는 사람이 쓴 "누가 나의 치즈를 옮겼는가?". 아마 읽어보신 분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두 명의 꼬마 인간과 두 마리의 생쥐가 지금 줄어들어가고 있는 치즈를 보면서 그 상황 속에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가라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이 책 가운데서 저자는 이런 말을 기록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변화가 우리에게 낯설다라는 이유로 변화 그 자체를 거부한다. 또 변화가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위험하다는 핑계를 대며 마지막까지 순간가지 수용하려고 들지 않는다. 그러나 생각이 바뀌면 우리의 행동도 바뀔 수가 있다. 그 때 비로소 우리의 미래는 열릴 수가 있다고. 그런데 이 변화를 위한 우리의 액션. 변화를 위한 행동의 에너지는 어디에서 나올까요. 그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나를 사랑하는 분이 계시고,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 있고, 이 사랑을 확신한다면 우리는 어떤 모험이라고 감행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폴 푸르니에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모험의 본능은 곧 사랑의 본능이라고 말입니다. 모험은 사랑의 본능이라고. 하나님이 인생을 당신의 모습을 닮은 존재로 지어 놓으시고, 그 인생가운데 당신의 숨결을 불어 넣으시고, 그리고 인간에게 자유로운 의지를 선물로 허용하신 것.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그것은 모험을 예측한 모험을 동반할 수 밖에 없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사랑의 행위가 아니였습니까. 하나님의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아들로 하여금 피를 흘리고 있는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아버지 하나님. 그러나 사랑하는 아들의 희생을 통해서 더 많은 인류가 그 피로 죄 씻음을 받고 그 안에 새로운 생명에 되어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될 수 많은 지구촌의 인류를 바라보시는 그 분의 애틋한 사랑이 십자가의 모험을 가능하게 만들지 않았습니까.

 



by 코이네자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