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은 오규근, 경기도 평택군(현재 평택시) 포승면의 농가에서 태어난 그는 생후 3일 만에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건강하게 태어난 아이였지만 듣도 보도 못한 희귀한 병마가 찾아왔다. 경기를 일으키는 아이를 달래려던 어머니는 기겁을 하고 말았다. 팔과 다리에서 우드득 소리가 나더니 아이가 자지러지듯 울음을 토해낸 것이다. 마땅히 달려가볼 만한 병원도 없는 촌이었지만 치료를 받는 다고 해도 고칠 수 없는 병이라는 것을 아이가 크면서 부모는 알게됐다.
아이는 작은 충격에도 몸 안의 모든 뼈들이 부러지는 병을 앓았다. 병명도 알 수 없었다. 아이는 방 밖 출입도 할 수 없었다. 늘 누워 있어야만 했다. 학교에도 다닐 수 없었고 시골 아이들이 갖는 흙내음 물씬한 추억거리도 가질 수 없었다. 부모들조차 자식이 놀림거리가 되는 게 싫어서 나들이를 말렸다.
"열여덟 살 때까지 뼈가 부러지는 증상은 계속됐습니다. 열 살을 넘기면서 1년에 서너 차례씩 부러지던 뼈가 한두 차례 정도로 줄었지만 봄, 가을이면 뼈가 부러져 꼼짝달싹도 못하는 일이 계속됐습니다. 당연히 발육은 멈췄죠. 그 때까지 방에서 창으로 내다본 세상이 내가 아는 모든 것이었습니다."
기독교인이었던 부모들조차 손님이 오면 그를 골방에서 나오지 못하게했다. 그런데 엉뚱한 일이 벌어졌다. 그가 스물한 살이 되던 70년의 어느 가을날이었다. 어머니가 그에게 작은 종이쪽지를 건네 주며 혀를 찼다. 그것은 입대를 위한 신체검사 통지서였다. 말도 안 되는 일이 사무착오로 발생한 것이었지만 그는 한편으로 기쁜 마음도 들었다. 나도 사람은 사람인가 보구나 하는.
"통지서를 받은 지 10여 일 후에 아버지가 빌려온 자전거 뒷좌석에 타서 평택경찰서로 가게 됐어요. 그것이 제가 처음 본 세상이었습니다. 그때 버스도 처음 타봤죠. 그런데 승객들이 모두 나를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만해도 장애인은 집에만 틀어박혀 있어야 했으니까요. 신기한 듯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그 때는 무슨 뜻인지 몰랐죠."
차라리 세상을 못 봤다면 마음의 상처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우연히 세상을 보게 되고 나선 실의에 빠졌다. 차라리 죽어 버렸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동안 마음에 생긴 상처 때문에 침울한 나날을 보내던 그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억울했다. 원하지도 않은 뼈가 부러지는 고통을 참아가며 살아왔는데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다는 오기가 생겼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뭔가를 생각하기 시작했죠. 성치 않은 몸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더 괴롭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글을 쓸 수는 있다는 결론을 내렸죠."
그는 그후 10년간 혼자 글을 썼다. 소설가가 될 생각이었다. 학교라곤 문턱도 밟아보지 못했던 그이지만 동생이 학교를 다니면서 가져온 교과서 따위를 어깨 너머로 익혀 글은 읽고 쓸 줄 알았다. 그렇게 시작된 독서 습관은 정상적인 아이들에 비해 더 악착같았다. 동생이 다니던 학교에 있는 문고판 서적들을 모두 다 읽을 정도였다. 그것이 소설가를 꿈꾸게 된 동기이기도 했다.
그는 스물아홉 살 되던 해까지 10년간 꼬박 각 신문의 신춘문예에 투고했다. 뼈가 부러지는 증상이 멈추고 나선 집안 일도 도와가며 저녁시간을 이용해 소설 습작을 했다.
"서른 살 때까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생이라면 차라리 농약을 먹고 죽어버리자고 생각했습니다. 소설가가 되겠다는 생각은 필사적이었어요. 그러나 스물아홉 살이 되던해에 집어치우고 말았습니다. 너무나 힘든 일이었던 거죠." 소설을 포기할 때 그의 심경은 너무나 참담한 것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괴감 때문에 몸져눕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일어 설 수 있었다. 기독교적인 가정분위기가 그의 마음 속에 남아 있었고 그런 그에게 예수님은 그의 마음의 눈을 뜨게 해 주신 것이다. 절망 속에서 주님게 자신의 짐을 내려 놓은 그에게 주님은 그에게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셨다. "우여곡절 끝에 세상에서 내가 할 일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여러가지 제약이 따랐습니다. 일단은 정보도 없었고 우표 값도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기독교 방송을 듣다가 편지를 보내기로 작정했습니다."
그가 기독교 방송에 보낸 편지는 전파를 타고 전국 곳곳에 퍼졌다. 그 후 그의 뜻에 감동한 사람들로부터 편지가 왔다. 어떤 사람들은 편지봉투와 편지지, 우표 등을 보내왔다. 그들이 없었다면, 그는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한다는 자괴감으로 세상을 등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어디에나 음지의 사람들을 돌보고자 하는 따뜻한 마음이 있게 마련이다. 그는 그들을 `우표회원'이라고 부른다.
그의 아내 윤선자 씨(31)도 그런 사람들 중의 한 명이었다. 서울서 직장생활을 하던 윤씨는 그의 `우표회원'이 되었다가 결혼에 이르렀다. 학창시절부터 용돈을 아껴 우표를 사서 보내주곤 하던 윤씨는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그를 도왔다. 그리고 그를 안 지 7년 만에 중대한 결심을 했다. 변함 없는 `큰 사랑'을 실천하는 그의 팔과 다리가 돼주자는 생각이었다. 부모와 가족들에게 조차 알리지 않고 몰래 그의 단칸방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 때가 89년이었다.
"8년 만에 친정 식구들이 우리 집으로 왕래를 시작했습니다. 기독교인인 남동생이 가끔 와서 매형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볼 때면 눈물이 핑 돕니다."
윤씨의 사랑도 오아볼로 씨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혼자선 외출도 할 수 없는 그의 손발이 되어 8년동안을 한결같이 그를 돌봐주었다. 결혼생활은 꿈도 꾸지 않았던 오아볼로 씨에게 무엇보다 큰 힘이 된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아내의 도움을 받아가며 지금까지 띄운 편지는 30만 통이 넘는다. 그 중에서 단 한 통이라도 실의에 빠진 사람에게 재활의 힘이 되었다면 얼마나 보람 있는 일이겠는가. 그의 편지를 받은 사람들 중에 새로운 용기를 얻고 답장을 보내주는 사람들도 있다. 그의 컴퓨터 옆 작은 탁자 밑에는 수백 통의 답장이 쌓여 있다. 거기에는 재소자 번호가 적혀있는 편지가 있는가 하면 힘겹게 써내려가느라 글씨가 삐뚤빼뚤한 장애인의 편지도 있다. 집배원이 한 번에 가져오는 우편물이 보통 수십 통에 이른다.
"편지를 띄우는 일을 계속해오면서 `문서가정복음'이라는 전도지도 발행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함께 장애인 등 이 사회에서 소외받는 사람들이 서로 정보를 나누고,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소식을 싣고 있습니다."
정상인도 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을 15년 동안이나 해오면서 그는 저절로 삶이 고마워졌다. 살아 있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그러나 갈수록 사람들의 도움이 더 필요해진다. 편지를 보낼 곳이 늘어나고 전도지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큰 도움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고 용기를 잃은 사람들이 새 삶의 의욕을 가질 수 있도록 편지를 보낼 수 있게 우표 몇 장이라도 보내주십사 하는 겁니다. 그 후의 일은 그 사람들의 몫이지만 용기를 북돋워주고 차별 없이 대해주어야 하는 게 정상인들의 의무일 겁니다." 거듭나기 위해 본명 대신 신약성서의 고린도 전서 3장6절에 나오는 착한 일 하는 사람의 이름, 아볼로를 쓰기 시작한 그는 오늘도 서울 은평구 응암동 주택가의 한 작은 다세대 주택 2층 작은 방에서 자신의 험난하고 참담했던 삶의 체험을 적어 소외되고 좌절한 사람들에게 편지를 쓴다. 그 편지는 또 어떤 체념한 자의 사위어가는 삶에 의욕의 불씨를 당기게 될 것이다.
by 코이네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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