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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철강회사 '패코'의 설립자 백영중의 성공원리는 '초심'

'코이네' 2014. 11. 15. 20:29

'패코'의 백영중 50달러 종자돈으로 이룬 ‘철강왕’의 꿈

 

미국 경량철골 시장의 60%를 차지하며 업계 선두를 달리고 있는 철강회사'패코'는 한국인 백영중씨가 설립했다. 엔지니어 출신의 그가 '패코'를 촉망받는 기업으로 발돋움시킬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특허품 '주름잡이빔' 덕분이었다. 철판에 주름을 잡으면 강도는 두 세배 더 세지고 무게는 줄어드는 원리를 이용한 것으로, 생산원가도 대폭 줄일 수 있어 1979년 개발된 당시 시장 잠식은 시간문제처럼 보였다. 그러나 보수적인 철강 업계에서 동양인이 개발한 신제품을 호락호락 받아 줄리 없었다. 경쟁업체에선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주름잡이빔은 얇아서 못쓴다.'는 흑색선전을 퍼트렸고 남아있던 거래처들마저 모두 등을 돌렸다. 기존 제품을 모두 포기하고 오로지 주름잡이빔에만 매달려 온 그는 창업 이래 가장 큰 위기를 맞게 되었다.

 

'주름잡이빔은 단순한 아이디어일 뿐인가? 결국 내 인생은 실패인가?'

 

깊은 절망 속에 2년여의 시간을 보낸 어느 날, 그는 미국에서 처음 사업을 일구던 때를 떠올렸다. 사무실도 직원도 없이 홀홀 단신이던 그때, 그는 한국인에 대한 노골적인 불신과 차별에 맞서 더욱 심기일전 했다.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다는 각오로 1,500대나 되는 트럭을 일일이 관리하여 배달 시간을 어김없이 지켜 냈고, 그러한 열정과 성실함을 인정받아 불신의 벽을 넘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때를 생각하며 그는 다시 마음을 잡았다.

“내 힘으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다. 적당한 때에 필요한 사람들을 만나게 하신 것도, 좋은 상품을 개발한 것도 모두 하나님의 인도하심 덕분이야.”

그는 불가능한 상황에서 자신을 이끄셨던 하나님을 의뢰하며 초심으로 돌아갔다.

우선 수십 업체에 무료 실험을 의뢰하고 품질로 끈질기게 설득해 나갔다. 유통 시스템을 빈틈없이 정비해 작은 물량이라도 약속 시간을 어김없이 지켰고, 설계 변경 요청에는 '그것뿐 아니라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제작하겠다'고 응했다.

 

또 고객들이 주문을 할 때면 '3개월 후 가격이 하락할 예정'이라든지 '원자재 가격의 상승으로 제품 가격도 상승할 예정'이라는 식으로 시장 상황을 정확하게 알려 주었고, 자신의 이윤보다는 고객들의 입장에서 합리적인 가격을 제시했다. 자신의 아픈 경험을 토대로, 파산한 기업체에는 대금 독촉보다는 먼저 따뜻한 위로를 건넸다. 언젠가는 다시 고객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결국 그는 '저 사람은 말하는 것은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라는 신뢰를 얻게 되었고, 재기에 성공해 서부 시장에 이어 동부 시장 개척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는 26세이던 1956년 미국으로 건너왔다. 오레곤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했으나 졸업 후 인디애나 공대 토목공학과를 다시 다녔다. 당장 먹고 살 일이 중요한 그로서는 미국에서나 고국에 돌아가 도움이 될 수 있는 분야를 찾아야 했다.

 

졸업 후 첫 사회생활은 오하이오 주의 벤워트카운티 기술공무원이었다. 영주권이 없는 그가 공무원으로 취직할 수 있었던 데는 대학 은사의 도움이 컸다. 3년간의 기술공무원으로 경력과 미국 생활 기반을 다진 그는 1962년 LA 소재의 슐레스틸이라는 철강회사에 엔지니어로 입사한다.

 

마침 베트남 전쟁이 일어나서 철강수요가 늘어났을 때 그가 개발한 조립식 철강 구조물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런 성공은 그가 소수민족에게는 잘 주어지지 않던 ‘영업’ 활동을 미 주류사회를 대상으로 벌일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제품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제가 판매를 담당하는 것이 당연해졌기 때문에 회사에서도 어쩔 수 없이 용인했습니다.”

 

그의 나이가 마흔 중반에 이른 1974년. 그는 안정된 직장생활을 그만둔다. 패코스틸이라는 자신의 회사를 갖기는 했지만 본격적인 가동에는 어려움이 컸다. 일본 업체로부터 철강 제품을 위탁 받아 이를 미국 회사에 판매하는 사업이었는데 첫 거래를 트기가 쉽지 않았다. 백 회장은 한 달치 물량을 해당 회사 창고에 넣어주는 배짱을 통해서 비로소 믿음을 얻을 수 있었다.이후 그의 제품이 알차다는 평판이 퍼지면서 3개월 만에 120만 달러를 파는 성공으로 이어졌다. 3년 후인 1977년에는 미국 서부 7개 주 전체 시장의 50퍼센트를 장악하는 고속성장을 이룬다.

 

그는 성공의 비결은 ‘고객 전부주의’에서 찾는다. “당시만 해도 좋은 물건만 많이 만들면 자연히 팔린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물건을 팔겠다는 생각보다 고객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충분히 생각한 뒤에 물건을 팔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는 항상 물건을 적시에 배달함으로써 고객과의 약속을 지켰다. 패코스틸의 성공에 어려움이 없지는 않았다. 패코를 통해 미국 시장에 제품을 판매하던 일본의 스미토모가 직접 물건을 공급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는 차별화 된 지식과 기술로 스미토모의 공세를 막기 위해 ‘주름잡이 빔’을 개발한다. 이것은 H빔의 가운데 철판에 주름을 잡아 강도를 높인 제품으로 그가 남을 위해서가 아닌 자신만을 위해서 특허를 얻은 첫 제품이다.

 

패코는 지금 아칸소 공장을 비롯해 미국 전역에 8개 물류기지를 갖고 있다. 연간 판매량은 30만 개로 매출액이 1억 달러가 넘는다. 백 회장은 1999년 미국의 대표적인 회계법인 언스트앤영이 주관하고 CNN과 「USA투데이」, 시티은행, 나스닥이 공동으로 후원해 매년 미국 기업인에게 주는 상을 받아 ‘올해의 기업인’으로 선정됐다. 단돈 50달러를 들고 간 젊은 청년이 비로소 미국 주류사회로부터 인정받은 것이다.

 

 



 

 

by 코이네자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