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는 생활입니다
본문 : 창세기 32: 21-33: 4
설교 : 김창인 목사(광성교회)
살아 있는 사람에게 생활은 해도 좋고 안 해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살아 있는 사람이 생활을 안 해도 된다면 그 사람은 죽은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에게는 싫든지 좋든지 생활을 꼭 해야 합니다. 기도는 생활이라 제목을 정한 것은 예수 믿는 사람에게 기도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것이 아니라 기도는 생활이기 때문에 꼭해야 한다는 뜻에서입니다. 산 사람에게는 생활이 있는 것처럼 믿음이 살아 움직이는 사람은 기도하지 않고는 살아 있을 수 없습니다. 기도 안 하는 사람은 믿음이 죽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제목으로 "기도는 생활입니다"라고 했습니다.
I.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기도(21절-32절)
마가복음 10장 46절에 바디매오라고 하는 사람이 등장하는데 그 사람은 굉장히 불행한 사람입니다. 불행이란 불행은 모두 짊어지고 더 이상 불행해 질 것이 없습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를 잘 믿었습니다. 잘 믿고 기도 열심히 하고 그래서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사람의 불행을 생각해 보면 첫째로 그가 태어날 때부터 소경이었습니다. 소경으로 살아왔습니다. 캄캄한 암흑세계를 살아왔고 앞으로 그렇게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얼마나 불행합니까? 그런데도 그는 예수를 변함 없이 믿었고 기도생활을 많이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두 번째 불행은 거지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가난은 얼마나 서러운지 모릅니다. 돈이 필요해 믿을만한 친구를 찾아갔습니다. 저 친구 같으면 나에게 꾸어 주겠지. 자기가 없으면 꾸어서라도 나에게 주겠지 라는 생각에서 믿고 갔는데 돈이 있으면서도 나의 가난한 형편을 보고 없다는 겁니다. 거절을 당하고 돌아서면서 얼마나 창피한지 죽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그런 일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가난이 그렇게 서러운 줄을 모릅니다. 바디매오는 가난이라는 말도 붙일 수 없는 거지입니다. 철이 바뀌어도 갈아입을 옷 한 벌 없는 거지. 그런데도 그가 예수를 잘 믿고 기도 생활 많이 했다 그런 뜻입니다. 세 번째 불행은 가족이 없습니다. 얼마나 불행합니까? 어떤 형제라도 있으면 굶어도 같이 굶고 먹어도 같이 먹고 잠이라도 같이 자면서 서로 위로해 주고 격려해 주면 힘을 얻을텐데 아무도 없습니다. 불행이란 불행은 모두 가지고 믿는 사람입니다.
여리고 성문 밖에서 구걸을 하고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쫓아갑니다. 그때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얼마나 간절히 주님을 찾고 기도하는지 모릅니다. 이때 예수님의 뒤를 따라 다니며 은혜 받았다고 하는 예수쟁이들을 보십시오. 불쌍하게 예수님을 찾는 바디매오에게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그래야 되지 않습니까? 함께 주님을 찾아야 되지 않습니까? 함께 기도해주어야 하는데 오히려 시끄럽다는 겁니다. 잠잠 하라는 겁니다. 이런 멸시 천대를 받으면서도 바디매오는 그 사람들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나의 상대는 너희가 아니라 예수 뿐 이라는 자세였습니다. 너희가 무슨 소리를 하든지 나는 예수님만 상대한다. 이런 자세로 더욱 심히 소리 질렀습니다. 예수님이 발걸음을 멈추시고 직접 불러도 되는데 야단치는 사람을 통해서 저를 부르도록 하셨습니다. 응답이 오는데 직접 오지 않고 엉뚱한 사람을 통해 오는 겁니다. 지금까지 야단치던 사람들이 뭐라 그럽니까?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주께서 너를 부르신다고 전해줍니다. 이 사람들이 언제 안심하라고 친절을 베풀었습니까? 언제 위로하고 격려해 주었습니까? 기도 응답 받기까지는 멸시와 천대를 많이 받으나 기도 응답을 받으면 주위환경의 변화가 일어난다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 달려나갔을 때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고 묻습니다. 주님이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을 몰라서 묻습니까? 그 뜻은 기도는 그렇게 하는 법이 아니다는 뜻입니다. 이때 소경이 주여 보기를 원합니다.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눈을 번쩍 뜨고 보았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주님이 다 아시지만 물으신 것은 막연하게 기도하지 말고 구체적으로 하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배울 점이 많습니다. 기도는 단순해야 합니다. 제목을 한가지만 정하고 끝까지 주님을 붙들라는 겁니다. 바디매오에게는 소원도 많았을 것입니다. 아직까지 결혼을 못했으니 결혼을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가진 것이 없어서 온갖 멸시와 천대를 받았으니 재산도 무척 갖고싶은 소원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급한 것은 눈을 뜨는 겁니다. 나머지는 다음 문제입니다. 근본문제를 들으신 주님은 네 믿음대로 되라 하시니 소원 성취했다는 것입니다. 너무도 감격한 바디매오는 길에서 예수님을 쫓으면서 온갖 시중은 다 들었습니다.
이 소경을 보십시오. 그런 불행 중에서도 믿음을 지키며 열심히 기도했더니 엄청난 변화가 일어납니다. 육신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마음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생활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주위 환경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기도는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내용은 에서와 야곱 쌍둥이 형제의 이야기입니다. 이 쌍둥이 형제가 칼부림하면서 싸웠습니다. 이유는 장자의 축복을 놓고서 싸운겁니다. 장자의 축복은 동생 야곱이 받았습니다. 외삼촌집으로 천리길을 도망가서 거기서 20년을 보내며 결혼을 하고 재산도 제법 모았습니다. 그러나 형님이 무서워서 어머니가 세상 떠났을 때도 고향에 가지를 못했습니다. 20년만에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하나님의 허락을 받고 모든 것을 정리한 후에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얼마나 그립던 길입니까? 하나님이 가라 하시는 하나님의 길이요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는 길입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그 머나먼 길을 가면서도 1시간을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서도 기도 안 하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의 길을 가면서도 기도하지 않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기도할 제목을 주고 또 계기를 만들어 기도를 시킵니다. 이제는 원한이 풀어졌겠지 라고 생각했던 형에게서 소식이 왔습니다. 그런데 20년 동안 칼을 갈고 있었습니다. 자기 개인재산으로 키운 군사400명을 거느리고 한 칼에 죽이겠다 달려오는데 막다른 골목에 이른 처지였습니다. 이미 자기 아내와 아들딸들과 재산을 모두 얍복강을 건너 보냈는지라 도망을 갈 수도 없고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이제는 기도 외에 할 일이 없었습니다. 엎드려 기도하기 시작했는데 밤을 꼬박 새웁니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이 기도를 시키신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냥 보내어 형과 겨루도록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게 하신 겁니다. 신자는 막다른 골목에 왔다고 생각되면 하나님께서 기도하라고 시키신 줄을 알아야합니다. 그래서 이틀밤을 새우면서 천사와 씨름을 하였습니다. 씨름은 이겨도 좋고 져도 좋은 겁니까? 죽기 아니면 살기로 하는 것이 씨름입니다. 기도는 씨름하듯이 해야된다는 뜻입니다. 야곱이 승리했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이제부터는 야곱의 이름을 가지고 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름은 지금까지로 만족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라고 고쳐 주셨습니다. 이제부터 야곱은 이스라엘로 살아갑니다. 이름이 바뀌었다는 것은 사람이 바뀌었다. 또는 사람이 새로워졌다는 뜻입니다. 도둑놈이 회개하고 목사가 되어 보십시오. 도둑놈과 목사는 전혀 딴 사람이 아닙니까? 이름이 바뀌었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변화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변화가 제힘으로 되었습니까? 훈련받아서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도를 통해서 이런 변화의 역사가 있었던 겁니다. 야곱은 이때 이름을 바꾸고 변화의 역사를 체험하고 얍복강을 건너가는 길이 아닙니까? 내가 먼저 변화되고 보니 형님도 어느새 변화돼 있었습니다. 이제는 죽었구나 하는 공포와 불안의 분위기는 승리의 축제 분위기가 될 만큼 주위 환경의 변화가 일어났다고 하는 사실을 또한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처럼 기도는 모든 것을 변화시킵니다.
II. 순종하게 하는 기도(33장 1절-3절)
여호와의 말씀이 요나에게 임했습니다. 즉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망한다고 외치라는 겁니다. 요나는 몹시 마땅치 아니했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하시기 까닭에 재앙을 내리신다고 하여도 결국 내리지 아니 하신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내 체면이 뭐가 되느냐 하는 겁니다. 그런가 하면 원수의 나라가 망하기를 바랄 뿐 회개하고 구원 얻는 것을 원치 아니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의 뜻을 앞세운 꼴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쯤 되면 요나가 하나님께 기도 할 리가 만무합니다. 그는 기도할 필요도 없이 다시스로 도망을 치고 있었습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수 없다는 교훈입니다. 지중해에서 풍랑을 만난 그는 형통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잘 될 것은 없습니다. 결국 그는 남에게 큰 손해를 입히고 자신은 바다에 던짐을 받는가 하면 큰 물고기에 삼킨바가 되었습니다. 그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고 끝장을 맞게 되었습니다. 자기의 힘으로 살길은 전혀 없었습니다. 이제 살길은 하나님의 도우심뿐임을 깨닫고 회개하며 기도하기를 시작하였습니다. 이때부터 문제가 풀리기를 시작했습니다. 제 자리로 돌아온 큰 물고기는 요나를 토해냈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한 요나는 죽을 고생만 하고 원점으로 되돌아왔습니다. 불순종의 결과였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니느웨로 가서 외쳤고 성공하였습니다. 기도가 그를 살렸고 기도가 그로 하여금 순종케 하였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가 보기로 합시다. 야곱은"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라고 명하시는 길을 갈 때에도 고난과 역경과 난관에 봉착할 수 있습니다. 형 에서가 400명 군사를 거느리고 온다는 소식을 듣고 얍복 강가에서 머뭇거렸습니다.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아니했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수가 없었습니다. 말씀을 순종했다가는 죽는 길밖에 없었습니다. 형 에서의 칼을 피할 길이 없기에 너무도 난감했습니다. 이런 경우에 처자식도 도움이 되지 못했고 그 많은 재산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때 비로소 그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과 일대일의 담판이었습니다. 기도 외에는 할 일이 없었습니다. 그는 기도를 통해서 힘을 얻었고 두려움과 공포도 사라졌습니다. 그는 담대하게 얍복강을 건넜습니다. 문제를 피한 것이 아니라 문제에 뛰어들었고 문제와 정면으로 부딪쳤습니다. 즉 주저함 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계속적으로 순종하였습니다. 순종에서 살길이 열렸고 성공의 길도 열렸습니다. 순종은 기도에서 비롯됨을 명심해야 합니다. 기도는 생활이요 사색이나 이론이 아닙니다. 오직 기도만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합니다. 기도 많이 하시고 힘을 얻어 순종의 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순종하면 됩니다. 그러나 순종치 않고 되는 일은 없습니다.
III. 화해하게 하는 기도(33장 4절)
한번은 예수께서 화해에 대하여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5:23-24)고 하셨습니다. 형제 화목이 제사보다 낫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예배 이전에 형제 화목을 먼저 하라는 뜻입니다. 화목이 이처럼 크고 중요하고 복된 일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33장 4절에 보면 죽으면 죽으리라하고 달려오는 에서의 앞으로 나갔습니다. 이것은 순종을 의미합니다. 이제 죽이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달려오던 형, 한칼에 죽일 듯이 원한에 사무친 형이 오자마자 동생을 끌어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얼마나 우는지 형이 울고 동생이 울고 20년 동안 맺혔던 한이 풀어지는 순간입니다. 20년 동안의 원수가 풀어지는 순간입니다. 이제는 화해하는 순간입니다. 눈물에는 거짓이 없고 진실합니다. 그러므로 눈물의 회개는 참회개요 눈물의 사랑은 참사랑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눈물의 화해는 참 화해입니다. 이처럼 형제간의 화해는 기도의 결과입니다. 기도 없이 화해는 없습니다. 20년 동안에도 원한을 풀지 못하고 살아온 형제가 아닙니까? 단 두 형제요 그 이외에 어느 살붙이가 없는데도 화해를 못한 것은 기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형제를 화목케 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기도는 모든 것을 변화시킵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케 합니다. 그 이유는 기도를 통해서 힘을 얻기 때문입니다. 또 기도는 원수지간에 화해를 시킵니다. 가는 곳마다 원수 맺고 사는 사람은 가장 미련한 사람입니다. 원수를 푸는 생활이 지혜롭습니다. 절대로 죽기 전에는 풀어지지 아니하리라 생각한 형님의 마음이 눈 녹듯 녹아졌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녹여주셨고 하나님이 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원수를 맺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원수 맺었던 것도 풀고 화해하는 생활을 합니다. 기도는 생활입니다. 기도는 모든 것을 변화시키고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순종케 하고 기도는 원수를 풀고 화해하는 생활을 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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