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창세기

[창 45:1] 우리의 배신 하나님은 사랑

'코이네' 2023. 5. 20. 11:37

우리의 배신, 하나님은 사랑

본문 : 45:1-15

 

 

 

저희 아버님의 형제는 단 두 분이셨습니다. 고모님이 세 분 계셨으나 일찍 돌아가셔서, 저는 그분들을 뵙지 못했습니다. 형제가 두 분뿐이라서 그랬는지, 두 분간의 우애는 정말 두터웠습니다. 두 분의 나이 차가 두 살밖에 안 되는데도, 제 기억엔 한 번도 다투시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가끔 두 분이 술상을 마주 대하고 앉아서 정담을 나누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어떤 때는 한 나절씩이나 말씀을 나누곤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처럼 두 분이 정답게 말씀을 나누는 모습이 그렇게 보기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때로는, 두 분 사이에 갈등을 일으킬만한 문제가 있기도 했습니다만, 그런 문제가 두 분 간의 형제애를 갈라놓지 못했습니다. 큰아버지가 아버님과 상의하지 않고 선산 일부를 팔았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아버지는 아예 문제삼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두 분 사이엔 어떤 문제가 발생해도 결코 문제가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요셉과 그의 형들 사이에는, 처음부터 갈등 요인이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다, 아버지 야곱이 요셉만을 편애한 까닭에, 형들이 그를 시기했던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요셉은 여러 번 형들에게 형들이 자기를 향하여 절하더라는 이야기를 함으로써 형들의 미움을 샀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는 애굽으로 팔려 가는 신세가 되었던 것입니다.

형들이 요셉을 죽이려고 했으니, 그들 사이는 씻을 수 없는 원수 관계라 할 수 있습니다. 비록 르우벤과 유다의 배려로 살아남기는 했지만, 애굽에서 겪은 그의 고난과 역경은 그 형들을 더욱 미워할 만한, 그런 요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살펴본 말씀을 볼 때에, 전혀 뜻밖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요셉은 그 형들한테 얼마든지 복수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정반대로 행했던 것입니다. 형들에게 복수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는 형들을 안심시키면서 극진히 환대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그 뜻을 깨달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가 형들에게 한 말을 통해서,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형들은, 자기들이 팔아먹은 요셉이 애굽의 총리라는 것을 알았을 때, ‘이제 우린 죽게 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이때, 요셉은 그 형들에게 형들이 나를 팔아 넘겼다고 해서 걱정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위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은 나를 애굽으로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셨다고 하면서, “우리 식구들을 구하시려고, 하나님께서 미리 나를 보내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형들에게 아버지를 모셔오라고 부탁한 다음, 형제들을 껴안고 목놓아 울었습니다.

그러니까, 요셉은 지금까지 자신이 겪은 모든 고난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고난은 통하여, 하나님은 자신과 그 가족들에게 은혜를 베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그런 믿음과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까닭에, 형들이 자기에게 행한 죄를 용서할 수가 있었습니다.

요셉의 화해 선언은, 그와 그 형제들을 하나되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형들의 가슴에 도사리고 있던 죄의식을 떨쳐 버리게 했습니다. 또한, 요셉의 이야기를 듣는 우리들에게는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 관계에서 있을 수 있는 갈등의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풀어야 할지, 그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의 본문인 창세기 451-15절의 말씀은 창세기의 중심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성경 전체가 뜻하고 있는 주제를 제시해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용서하고 사랑함으로써 하나되어 평화를 이루어 살도록,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누군가가 먼저 평화를 선언하고 사랑을 베풀 때에, 서로에게 은혜가 되고 기쁨이 됩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는 감동을 줍니다. 반면에, 이기심과 증오는 사람 사이를 갈라놓습니다. 형제간에 서로 원수가 되게 하고, 우리가 사는 이 사회와 국가를 어둡고 삭막하게 만들어놓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사회에서, 바로 그런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요셉과 같은 인물을 많이 필요로 하는 사회입니다. 그런데, 다름 아닌 바로 우리가 요셉의 역할을 감당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떻습니까? 요셉이 자신의 형들에게 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는 우리에게 피해를 주거나 억울하게 한 사람에게 화해와 용서를 선언하고 있습니까? 자신이 겪고 있는 고난을, 그 누구 때문이라고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 바로 저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요셉을 따라가려면, 지금보다 더욱 성숙한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아직도 우리의 신앙은 덜 성숙하고 부족한 것이 많은 까닭에,

 

1.우리에게 피해 입힌 사람을 용서하며 사랑하는 일에 익숙하지 못합니다.

 

물론, 서로가 다 가해자이고, 서로가 다 피해자입니다. 가해자가 따로 있거나, 피해자가 따로 있지 않습니다. 누구는 여전히 악마이고, 어떤 사람은 언제나 천사인 것만은 아닙니다. 천사가 악마로 변한 것이 사탄의 괴수 루시퍼라 하지 않습니까?

그런고로, 우리는 서로 상대방을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상대방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을 경우, 나도 또한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서울의 어느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내외가 다 박사인 어느 가정의 이야기입니다.

이들 부부가 예수 믿기 전에는 자주 부부싸움을 했는데, 그 남편은 한번 싸웠다 하면 아주 끝장을 보는 사람이었습니다. 부인이 용서를 빌 때까지, 남편은 싸움을 끝내려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남편이 예수 믿은 지, 3년째가 되는 어느 날, 이들 부부는 몇 마디 말다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남편이 먼저 용서를 빌고 나섰습니다. “여보, 그만하오. 내가 잘못했소. 미안하오하고 말입니다.

그 부인은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사흘 동안이나 울었다고 합니다. 결혼생활 20년 만에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까닭에, 어떻게 해서라도 자기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애쓰던 사람이었는데, 예수 믿고 그처럼 달라졌던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믿고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아직도 우리 중에는, 타인의 잘못을 용서하거나, 자신이 먼저 용서 비는 것을, 아주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잘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눈이 얼마나 밝은 지, 그리고 그의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 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심판하신다면, 우리는 결코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께 반역했으나,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를 얻게 되었다(11:30)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반역하기를 밥먹듯이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다시금 이스라엘을 용서하고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나오게 된 것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때문입니다. 우리가 결코 잘나서 이 자리에 나오게 된 게 아닙니다. 우리가 지은 과거의 모든 죄를 예수님의 피로 깨끗이 씻어준 덕분에, 오늘 우리는 이 자리에 나올 수 있었습니다.

뱀이 서로 상대방의 꼬리를 물고늘어지듯이, 우리가 서로의 잘못을 물고늘어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결과는, 뻔한 일입니다. 피차 망할 뿐입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겨룬다면, 그 결과는 또 어떻겠습니까? 그야 백전백패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우리를 무조건 용서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 그리고, 은혜를 베풀며 살아야 합니다. 요셉은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형들에게 잔치를 베풀며 곡식을 풍성하게 주었습니다. 요셉은 인간적으로만 승리할 게 아니라, 믿음과 인격적인 면에서도 형들을 이겼습니다.

하건만, 우리는 이 승리의 기쁨과 평화를 자주 경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상적으로만 이기려고 하는 까닭에, 계속 불편한 관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불행합니다. 은혜를 모르거나 감사하지 못하는 마음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과 원한 관계를 맺고 미워하면서 살 때, 어찌 그런 마음에서 감사와 찬양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입에 들어가는 음식이 사람을 더럽히는 게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말이 사람을 더럽힌다(15:11)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더러운 말이 바로 그 사람 자신을 더럽힌다고 했습니다. 요컨대, 더러운 말을 하는 그 사람 자신이 불행해지게 됩니다.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면서 살아야, 은혜가 되는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 욕심이 그 은혜의 생활을 방해합니다. 욕심을 품으면, 그 욕심이 서로의 관계를 깨뜨리거나 악화시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마15:18에서 입에서 나오는 말은 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데, 이것이 그 말하는 사람을 더럽힌다고 하셨습니다.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말, 중상과 같은 악한 생각은 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19)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서로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셉의 경우를 교훈 삼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실제로 요셉만큼 그렇게 억울한 경험을 하기란 흔치 않은 일입니다. 그토록 억울하고 분한 일을 겪고서도, 그런 궁지에 빠뜨린 형들을 용서하고 있는 요셉, 그는 결코 바보라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취할 수 있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떤 자세를 가지고 살아야 하겠습니까?

 

2.하나님과 요셉의 용서를 배워서, 우리도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며 아끼는 좋은 관계를 이뤄가야 합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최후의 만찬을 그린 유명한 화가입니다.

그가 그 그림을 구상하면서 가룟 유다를 어떻게 그릴까 생각하다가, 자기가 제일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의 얼굴을 그려서 가룟 유다를 삼았습니다.

그 다음에는 예수님의 얼굴을 그리려고 했는데, 아무리 노력을 해도 그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이유가 무엇인가를 오랫동안 생각하다, 자기가 미워해서 가룟 유다의 모델로 삼은 그 친구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사과를 했습니다. “내가 실상은 당신의 얼굴을 가롯 유다의 얼굴로 그렸는데, 나머지 그림이 그려지지를 않아서 이렇게 회개하는 마음으로 왔다오.” 그러면서, 그는 그 친구에게 자기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진심으로 빌었습니다.

그 후에, 그는 너그럽게 용서하는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모습을 그리니, 제대로 잘 그릴 수가 있었습니다. 바로 그 그림이, 그 유명한 최후의 만찬'인 것입니다. 남을 미워하고 시기할 때에, 악한 사람의 모습은 잘 그릴 수 있었으나, 거룩한 예수님의 모습을 그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마음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거룩한 예수의 모습을 잘 그릴 수 있는 마음입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그 마음에 미움이나 원망을 품으면 결코 행복해 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끗한 마음을 갖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미움과 원망, 불평과 시기가 그 마음에서 사라질 수 있도록, 우리의 형제들을 용서해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더욱 크신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 그리고 풍성한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도 그 은혜와 사랑을 체험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그토록 배반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면서, 요셉처럼 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