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창세기

[창 1:2] 성령님께서 운행하시다 _ 하용조 목사

'코이네' 2024. 2. 6. 21:23

성령님께서 운행하시다 

본문 창 1:2

설교 : 하용조 목사 



창세기는 감탄사로 시작됩니다. 좋은 것을 보면 우리는 말을 하지 못하고 감탄을 하게 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니 ..’ 이것이 창세기 1장 1절입니다. 

성경은 지식이나 정보, 교훈을 위해 쓰여진 교과서가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구원을 주기 위해 기록된 책입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감격과 기쁨과 축복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책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 1절은 설명이 아니라 선언으로 시작됩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따지고 논쟁하면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논쟁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경배하면 하나님이 보입니다. 그분은 예배의 대상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에게 무릎꿇고 나아가 기도하며 찬양하며 죄를 고백할 때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 1절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믿고 고백할것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는 자에게 창세기는 문을 엽니다. 자기를 공개하기 시작합니다.

창조무대에 주인공으로 나타나신 성령하나님

1절에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하는 웅장한 선언을 한 후 구체적으로 창조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2절에 나와 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더라

창세기는 잘못 발을 들여 놓으면 논쟁으로 끝나고 맙니다. ‘과학적이다, 아니다, 진화론이다’라고 논쟁을 하게 되면 창세기의 진정한 의도는 어느새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게 됩니다. 

2절을 보면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만드시고 어떻게 형성하셨는가에 대해 말씀하실 것이라는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위에 있을 때 하나님의 신이 수면위에 운행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 아니라 세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즉 성부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인 성자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성령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성령하나님이 창조의 무대에 주인공으로 나오고 있는 사실을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 혼자 일하지 않으셨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세 분이 함께 일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가리켜 ‘엘로힘’이라는 복수형을 씁니다. 하나님을 가리켜 ‘하나님의 사회’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인류에 사회를 주신 것도 하나님이 사회속에 계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골로새서 1장 17절을 보면 ‘예수님’이 창조의 현장에 계셨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창세기 자체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골로새서에 오면 바로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셨다고 확실하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창조전에 계셨던 분이시고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조사역에 같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부하나님과 성자하나님만 동참한 것은 아닙니다. 2절을 보면 성령 하나님도 천지창조사역에 직접 개입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상상력으로 결코 헤아릴 수 없는 우주의 광활함

‘땅이 혼돈하고... ’ 땅은 지구를 의미합니다. 최초의 지구상태를 세가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혼돈, 공허, 흑암’이라고 했습니다. 

보통 천문학자들이 추측하기를 은하계는 1천억개의 별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1천억개인지, 1천5백억개인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인간의 계산법으로는 계산할 수 없고 한계를 지을 수 없을 만큼 무한합니다. 

사실 하늘위에 별이 얼마나 있는지는 하나님외에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것은 우리의 머리카락을 세려는 어리석음과 같습니다. 

과연 이 우주는 끝이나 한계가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지으신 이 우주만물은 인간의 상상력이 미처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크고 엄청난 것입니다. 

제가 안식년때마다 즐기는 것은 하늘의 별을 보는 것입니다. 시골에 가서 보면 바로 내 머리위에 별이 떨어질 듯이 보입니다. 그 많은 별들은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이 창조의 위대함을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과학의 잣대로는 모두 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과학의 잣대는 하나님의 창조보다 더 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 8편에는 이렇게 시편으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우리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위에 두셨나이다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그렇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감탄사 외에는 없습니다. 창조의 끝에는 감탄사가 있을 뿐입니다. 과학으로나 학문으로 하나님의 창조를 다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을 시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입술로 설명할 수 없고 마음으로는 창조를 느낄 수 없습니다. 

무인우주선을 보내거나 사람이 있는 우주선을 달나라에 보내어 전송되어 온 달표면 사진에는 아무 생명체도 없었습니다. 화학요소와 물질과 원자와 분자로 구성된 거대한 물체에 불과했습니다. 분화구 같은 것이 있었지만 생명이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먼지만 있는 곳이었습니다. 최근에는 좀더 과학이 발달되어서 탐사선을 화성, 토성, 목성까지 보내서 사진을 찍어온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곳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생명은 빛과 물같은 요소들이 있어야만 존재합니다. 그런데 지구도 다른 모든 별들처럼 생명이 없었습니다. 물도 빛도 생명도 없는 하나의 물질이었습니다. 분자와 원자로 구성된 일정한 화학요소들, 수소라든지 이런 물질일 뿐이었습니다. 

지구의 모습을 세 단어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혼돈을 너무 철학적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카오스’니 ‘코스모스’니 생각하다보면 본래의 뜻이 모두 사라집니다. 그저 혼돈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혼돈이라는 말이 ‘공허’라는 말과 함께 있습니다. 영어로 설명하면 ‘형태가 없다’는 말입니다. 형태가 없기 때문에 질서가 없고 자연 물질 그대로 있는 것 뿐입니다. 지구의 최초의 모습은 지금의 달처럼 생명이 없이 물질만 있었습니다. 

지구의 모습은 혼돈과 공허였습니다. 어두움만 있었습니다. 

이 지구상에 생명체가 있기 전에는 무질서였습니다. 그저 물질일 뿐인 혼돈과 아무 것도 없는 공허한 어두움만이 있었습니다. 달나라를 상상해 보십시오. 밤이 되면 캄캄한 어두움이 달을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지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요즘 컴퓨터를 배우고 있습니다. 디스켓은 구입해서 바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먼저 포맷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입력을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디스켓을 포맷해야 사용할 수 있는 것처럼 지구도 생명이 없을 때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깔려 있는 하나의 물질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 호흡이 지구를 감싸

흑암과 혼돈과 공허가 있는 달나라와 같은 지구에 ‘하나님의 신’이 찾아왔습니다. 성령님이 찾아와서 지구를 감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은 바로 ‘루하흐’인 바람입니다. 바람이 부는 것입니다. 성령의 기운이 지구를 돌았다는 것입니다. ‘루하흐’는 ‘바람, 숨, 호흡’등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 즉 호흡이 공허하고 흑암이 있고 혼돈이 있는 지구를 돌고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신이 운행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움직였다’ 혹은 ‘흔들었다, 진동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신이 운행했다는 말은 물체의 위에서 영향력이나 기운을 내리 쏟았다는 말입니다. 

이 뜻을 조금 더 원어적으로 이해해보면 암탉이 계란을 품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계란을 그저 품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온도안에서 굴리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령님께서 이 지구를 감싸고 하나님의 생명을 집어 넣은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창조입니다. 

생명이 있어야 생명을 줄 수 있습니다. 찬송가가 생명을 만들어 줄 수 없습니다. 생명은 생명이 있는 분으로부터 옵니다. 

고아원에서 자란 어떤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부모를 본 일이 없이 외롭게 자랐습니다. 그가 커서 ‘나에게는 부모가 없다’라고 말합니다. 

그는 부모를 잃어버렸을 뿐이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는 부모가 있었습니다. 인간은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돌에서 나오거나 계란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인간에게서 태어납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이지만 마리아의 몸을 빌어서 나왔습니다. 그분이 예수입니다. 

여러분, 
이 우주에 1천억개의 별들이 있는데 그중에서 생명이 있는 별은 지구 밖에 없습니다. 가까운 달이나 다른 별에는 왜 생명이 없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상상하기를 달에는 외계인이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미래에는 우주전쟁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요즘 영화들의 주제가 되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어떤 위성에도 생명체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생명은 물이 있어야 존재합니다. ’수면에 운행하다’라는 '말과 물과 물위를 나눈다는 말'을 기억하십시오. 성경에서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수많은 별들중에 하나님의 생명이 지구라는 별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성령님이 지구주변을 운행하신 것입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입니다. 생명의 근원은 하나님입니다. 이 생명을 만드신 하나님의 신인 성령님이 땅과 하늘을 만들고 동물과 빛을 만들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셔

창세기에는 논쟁이 없습니다. 믿음 뿐입니다. 지구를 하나의 계란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어미닭이 계란을 품고 있듯이 성령님이 지구를 품고 생명을 잉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신비스럽고 엄청난 사실입니까? 

이것은 마치 생명이 어머니의 태속에서 자라나는 것과 같습니다. 수정된지 몇개월 되지 않아서 아이의 심장은 뛰고 오장육부가 만들어지기 시작합니다. 뇌가 그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합니다. 

저는 낙태에 대한 것을 열심히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태아는 6개월이 지나면 완전히 사람의 형태가 이루어집니다. 낙태는 살인입니다. 그것은 생명입니다. 산 사람과 똑같습니다. 

저는 우리나라 나이법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서양나이는 태어난 후부터 계산 하지만 우리나라는 임신하면서부터 계산합니다. 그 아이가 태 속에서 숨쉬고 자라다가 어느날 태어납니다. 이것이 바로 창조입니다. 어린아이가 태어나듯이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신 것입니다. 그러다가 3절에서 빛이 있으라고 할 때 아이가 ‘으앙’하고 태어나듯이 빛이 있게 된 것입니다.

죽은 영혼 살리는 생명의 영

우리는 2절의 말씀에서 더 깊은 진리를 묵상하게 됩니다. 첫

째는 성령님의 역사와 능력입니다. 창세기는 과학적으로, 합리적으로 접근하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천지창조는 성령님이 하셨습니다. 성령님이 지구를 품고 생명을 불어넣어주셨기 때문에 우주에 존재하는 어떤 별에도 생명이 없지만 지구에는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 생명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성령님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입니다. 성령을 받는 자마다 생명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났을 때 성령의 생명의 영이 부활시키셨습니다. 

여러분 안에도 생명의 영이 들어가게 되면 죽었던 사람이 살아나게 될 것이며, 죽은 영혼이 다시 거듭나고 부활될 줄 믿습니다. 

이분이 성령님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성령님은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성령님은 바로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성령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오시면 우리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시며, 죽었던 우리를 살게 하시며, 기쁨이 있게 하시며, 감사와 감격이 넘치는 살아있는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우리들의 신앙이 미온적인 이유는 성령님의 능력이 우리안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1장 2절에 나타난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가득차 있던 이 지구에 성령이 임함으로 생명력이 생기고 놀라운 창조의 역사가 생겼던 것처럼 성령님이 여러분안에 임하시면 생명이 임하고 능력이 임할줄 믿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이 성령님에 관심이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성령님을 마음속에 모시고 성령님의 창조의 능력을 현실에서 다시 발견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대부분의 많은 크리스천들은 너무나 비참하게 살고 있습니다. 모두 ‘예수믿는 것이 다 그렇고 그런거지 별게 있는가?’라며 자기 수준으로 끌어 내립니다. 하나님을 자신과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은 위대하신 분입니다. 지금 살고 있는 나의 영적 정도가 신앙의 전부가 아닙니다. 내가 살고 있는 신앙은 아주 밑바닥일 수 있고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성령과 생명은 따분한 것이 아닙니다. 감사와 감격, 기쁨, 확신입니다. 고난, 위기, 아픔, 어떤 실망과 죽음도 모두 이겨낼 수 있는 성령님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능력이 오늘 여러분에게도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이 메시지에서 묵상할 수 있는 또 하나는 성령과 말씀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움직일 때 창조의 말씀나와

이제 성령님께서 모든 것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가라사대’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즉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운행하시고 말씀이 있었습니다.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들어도 능력과 기적과 감동이 없는 이유는 성령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이 운행하시고 ‘빛이 있으라’하시면 빛이 생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님이 운행함이 없이 말하는 것은 여러분의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신비스러운 두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령님이 운행하심으로 생명이 들어가고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하시니 빛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이 성경을 읽을 때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성령님이 계셔야 합니다. 성령님이 없이 인간의 이성과 경험과 생각, 상식으로 하나님께 접근하한다면 그것은 지식이상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겸손하게 무릎끓고 성령님을 받아들이고 성령님이 운행하심을 사모하고 성령의 운행하심이 내 영혼을 감싸고 있었을 때 말씀을 듣거나 읽거나 묵상하면 그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우리의 영과 혼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며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통찰하는 놀라운 역사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때 귀신들이 떠나갑니다.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성령님이 운행하심으로 나를 변화시키는 능력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성령과 말씀이라는 두가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말씀은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1절부터 3절까지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1절에서는 하나님을 2절에서는 성령님을, 3절에서는 예수님을 발견합니다. 

이것이 창조입니다. 

이렇게 해서 인간은 만들어진 것입니다. 

연구한다고 아기가 태어나지 않습니다. 묵상한다고 아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결혼해야 아기가 태어납니다. 똑똑하고 박사학위가 있다고 혹은 부자라고 애기낳는 것이 아니라 결혼을 해야 아기를 낳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진리란 그런 것입니다. 진리는 지식안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느니라’ 

저는 이 사실을 믿습니다. 성령님이 흑암과 공허와 혼돈속에 있는 지구를 운행함으로 말미암아 지구에 생명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성령이 움직일때 말씀이 나온 것입니다. 그 말씀이 능력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이 말씀과 성령이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