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요한123

[요일 4:7]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코이네' 2024. 9. 24. 21:20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본문 : 요한일4:7-8

 

 

설교자들에게 있어서 한결같은 고민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무엇을 설교할 것인가?" 입니다. 한 주일의 설교가 끝나면 계속해서 다음 주일의 설교를 걱정하고 준비해야 하는 것이 끝없는 설교자의 생활인 것입니다. 설교란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를 해석하고 선포하는 것인 까닭에 '지금'이라고 하는 시간성과 '여기'라고 하는 공간성을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설교의 내용과 강조점이 시대와 설교자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을 보아도 사도 바울은 믿음을 강조하였고, 요한은 사랑을 강조하였으며 베드로는 소망을 특히 강조하여 설교하였습니다. 믿음을 강조한 바울의 경우에도 데살로니가 서신에서는 예수의 재림을, 로마서에서는 믿음을, 고린도전서에서는 사랑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에 있어서 일제시대의 설교는 대체적으로 타계적인 내용의 설교가 많았습니다. 일본 침략자들에 의해서 압제와 고난을 겪고 있는 백성을 위로하고 삶의 의미를 북돋아주는 말씀의 내용은 아무래도 내세를 바라보게 하는 타계적일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당시에 가장많이 불리운 찬송은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라는 찬송가였습니다. 괴롬과 죄만 있는 곳 내 어이 여기 살리까 빛나고 높은 저곳을 날마다 바라봅니다. 이렇게 하늘나라를 갈구하는 찬송가에서 큰 위로와 힘을 얻었던 것이며 전도의 내용도 예수 - 천당이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살고있는 세상은 그때와 같이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압박자는 물러가고 독립된 주권국가가 되었으며 근대화의 물결을 타고 산업과 경제가 옛날에 비해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여 왔습니다. 눈에 보이는 물량적인 면과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많은 향상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얻어진 것이 많이 있지만 동시에 아름답고 귀한 많은 것들을 잃어버린 것도 사실입니다. 그중에서도 외래 풍조의 하나인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의 모방으로 서로간에 믿고 도우며 살던 이웃 사촌의 미풍양속이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서로 믿지 못하는 불신사회, 상부 상조하며 살아야 할 이웃을 상실한 현대에 있어서 교회 예배당에서는 어떤 내용의 설교가 외쳐져야할 것입니까? 매우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은 설교를 어떻게 하느냐? 하는 설교의 기술이나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설교의 내용, 즉 어떤 내용이 담긴 멧시지를 이 백성에게 설교할 것인가가 문제인 것입니다.

몇해 전에 어떤 교계 잡지에서 "무엇을 설교할 것인가?" 를 특집으로꾸민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에 여러 사람들이 의견을 기사화한 것이 있었는데 거기에 보면은 어떤 이는 한국 교회의 비젼을 설교하겠다고 했고, 어떤 분은 화해를 또는 사회 정의, 자유, 사회 봉사나 교회 갱신을 설교하겠다고들 하였습니다.

이와 동일한 질문을 지금 나에게 묻는다고 하면 서슴지 않고 "사랑"을 설교하겠다고 나는 대답할 것입니다. 이웃을 상실한 외톨배기 현대인들,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여 사는 이 불신 사회에서 무엇을 설교해야 하겠습니까? 여기에 서로가 용서하고 화해하고 도우며 사는 초대교회의 원색적인 사랑이 절실히 요청되는 것입니다. 데카르트 이후 처음이라고 하는 불란서의 자랑스러운 철학자 벧그송은 이 폐쇄된 현대 사회의 특징을 평하기를 "사랑할 줄도 잊었지만 사랑받을 줄도 잊어버린 사회"라고 말하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사회를 향하여 교회의 멧세지는 "사랑"을 소리높이 외치면서 "사랑"을 조용히 실천하는 일이라고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소리높이 외치고 조용히 실천해야 할 성서적인 사랑은 어떤 것입니까?

 

1. 기독교의 사랑은 관념적인 것이 아닌 구체적 사랑입니다.

기독교는 뜬구름 위에 있는 것같은 관념과 이론의 종교가 아니라 생활 현장에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삶의 종교요, 사랑의 종교입니다. 어리석은 생각 같습니다만 나는 우리 말의 "사람, 산다, 사랑"이라는 세단어는 같은 어원에서 유래한 것만 같이 생각이 되어집니다. 사람은 사랑하면서 살아야 하는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이라고 하는 것도 인류애나 동포애라고 하는 막연한 사랑이 아니라 "소자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을 대접하는 지극히 구체적인 사랑이 바로 예수님이 사시고 가르쳐주신 사랑이라고 믿습니다.

어떤 분은 예수님의 도성인신(道成人身)을 의미하는 Incarnation이라는 신학 용어를 '구체화' 라고 번역해서 사용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구체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세상의 대부분의 다른 성현들처럼 사랑을 입으로만 가르쳐 주신 것이 아니라 몸소 생활로 통해서 그리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으로서 실천하셨습니다. 병자를 보시고는 민망히 여겨 고쳐 주셨습니다. 어린 아이를 보시고는 안아서 머리를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귀신 들려 고생하는 이를 보시고는 귀신을 내쫓아 주셨고 고독한 사람에게는 대화의 상대가 되어주셨습니다. 최후의 만찬석상에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 몸소 사랑의 본을 보여 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몬테피오는 사랑을 정의하기를 "사랑이란 첫째 그 사람이 잘되기를 원하는 것. 둘째 그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 셋째 그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8).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사랑입니다.

 

2. 기독교의 사랑은 받아서 또 주는 사랑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20:35) 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받는 것만이 복인줄 압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원리는 받는 것만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고 받는 신진대사와 수수관계의 원리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물이 받아들이기만 하고 흘려 보내지 않아서 생긴 고인물은 썩고 마는 법입니다. 깨끗한 물을 받아서 흘려보내는 일의 반복에서 언제나 맑고 깨끗한 하천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렴 속에는 주고 나면 없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주고 나면 또 새로운 것으로 채워지는 것이 자연의 법칙입니다. 공기가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 그 자리가 또 새로운 공기로 메꾸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교훈 중에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주리라"(6:38)고 하셨습니다. 사랑의 원리가 그러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웃에게 나누어준 다음에 오는 기쁨과 충족감은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값진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의 사랑 가운데 어머니의 사랑이 가장 고귀하다고 합니다. 그 어머니의 사랑은 철저하게 주는 사랑인 것입니다. 줌으로써 기뻐하고 보람을 느끼는 것이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사랑에는 수고가 뒤따릅니다. 참 사랑한다면 수고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마음과 이기심이 공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기막히는 고통을 참으신 것은 인류을 사랑하사 자신을 주시려는 뜨거운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진정으로 깨닫는 사람은 또한 이 사상을 남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완성시켜 나아가는 것입니다.

"사랑은 산울림"이 라는 작자 미상의 시가 있습니다. 그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랑은 산울림 아! 하면 아! 하고 어! 하면 어! 하고 야호! 하면 야호! 하고 대답하며 다시 되돌아 온다오 내가 한 사람을 사랑하면 한 사람이 날 사랑하고 내가 열 사람을 사랑하면 열 사람이 날 사랑하고 내가 만인을 사랑하면 그 만인이 날 살아하게 된다오 사랑은 산울림"

 

3. 기독교의 사랑은 거짓이 없는 순수한 사랑입니다.

로마서 129절에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요즘 유명 메이커의 제품에도 불순물을 섞어파는 예가 있어서 사회의 지탄을 받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사랑"은 다른 것이 섞여서는 안되고 다른 목적으로 이용이 되어서도 안됩니다. 사랑은 사랑만으로 최고의 가치를 지닌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 내에서도 사랑이라는 미명의 탈을 쓴 위선이 횡행할 때가 있습니다. 여기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의 거짓은 위선자를 뜻하며 이 위선자의 원어는 가면을 쓰고 무대에서 연기하는 배우를 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의 뜻은 사랑은 결코 연극일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사랑의 거짓처럼 가증한 것은 없습니다. 거짓 사랑은 미움보다도 더 악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그 말에 이어서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고 하였습니다. 진실한 사랑은 단순한 감정에 이끌리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엄숙한 윤리적 원리가 잠재하여 받아들이며 거부하는 것이라야 합니다. 크리스챤들에게 있어서 받아들일 것은 선이요, 거부할 것은 악입니다. 성서학자 벵겔은 "악을 미워하지 않는 자는 참으로 선을 살아는 자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거짓이 없는 사랑, 연극이 아닌 사랑, 이것이 현대에 있어서 가장 아쉽게 요청되는 사랑입니다.

사랑을 가장 많이 말하는 교회 내에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사랑이 메마르고 있지나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서로 사랑합시다. 거짓이 없는 진실한 사랑으로 서로 간에 훈훈한 대화가 오고 갔으면 합니다. 이 사랑을 방해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어떤 것이건 그것을 제거하는 수고가 뒤따라야 하겠습니다. 우리 사회에 사랑 대신에 미움이나 원망, 시기, 질투가 마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면 서슴지 말고 뉘우치고 회개하며 그것을 떨쳐버러야 합니다.

사랑은 허다한 형제의 허물을 가려 줍니다. 형제의 결함을 사랑으로 메꾸어 가면서 삭막한 이 세상에서 거짓이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합시다.

'혹은 우상 앞에 꿇어 복을 받기 원하며 쓸데없이 하늘 보고 사랑 요구하도다

먼저 믿는 사람들 예수 사랑 가지고 나타내지 않으면 저희 원망 받겠네

예수 사랑 가지고 예수 사랑 가지고 나타내지 않으면 저희 원망 받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