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요한일서 4:7-11
들어가는 말
미국의 어느 목사님이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문장>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문장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시라”(16)
하나님는 사랑이십니다. 사도 요한은 본문에서 그 사랑이 예수님을 통해 나타났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4:9)
<다락방>이라는 책자를 발행하던 분이 하루는 아주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꿈 속에서 그분은 방송국에서 마이크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전 세계인이 듣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꼭 들려주어야 할 말을 해야 할 시간입니다. 지구 최후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방송입니다. 시간은 지나가는 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몰랐습니다. 주어진 5분이 다 지나갑니다. 단 1분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그 마지막 순간에 떠오르는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용납하십니다.
교회에 다니고 있지만, 그리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씀에 동의하지만, 영혼 깊이 하나님의 그 사랑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아직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믿음의 연약하기 때문에 그리고 믿음의 부족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의 조명 가운데 십자가의 사랑을 만난 때,우리는 그 사랑을 경험합니다.물론 우리는 부분적으로 맛보고 경험합니다. 우리는 평생 그 사랑을 알아가고 그 사랑으로 살아가는 법도 배웁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는 다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사랑의 높이와 깊이와 넓이를 우리는 다 측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사랑에 관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1. 하나님은 사랑의 근원이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자기자신을 우리에게 알려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자신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이것을 계시라고 합니다. 자연만물과 역사와 양심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주십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생은 영적으로 눈이 어둡고 귀가 어두워서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습니다. 범죄하여 타락한 인생은 희미하게 나마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능력 조차 미신과 불신앙으로 눌러버리고 없애버립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에는 하나님에 관한 문답이 있습니다.
문4: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답: 하나님은 영이시며,그의 존재하심과 지혜와 권능과 거룩하심과 공의와 선하심과 진실하심이 무한하시고 영원하시며 변함이 없으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진선미의 근원이십니다. 하나님은 참되시고 선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사랑이시요 사랑의 근원이십니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랑은 하나님은 본성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성품의 본바탕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어지시고 은혜로우시고 오래 참으십니다. 그 사랑이 무한하고 풍성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벧후 3:9).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찬송 제목이 됩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 하늘로서 내리사
우리 맘에 항상 계셔 온전하게 합소서
나의 주는 자비하사 사랑 무한하시니
두려워서 떠는 자를 구원하여 줍소서(55장)
404장 1절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 위에
죄 범한 영혼 구하려 그 아들 보내사
화목제로 삼으시고 죄 용서 하셨네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며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하나님은 사랑의 근원이십니다. 하나님나라는 영워토록 그 사랑을 노래하는 나라입니다.
2.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입니다(7-8).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사랑의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사랑을 아는 사람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사랑의 빚을 진 사람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는 사람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다일 공동체라는 것이 있습니다. 다양성 속의 일치라는 의미입니다. 집없고 밥을 먹지 못하는 분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일을 해오고 있습니다. 그 공동체에서 여러 해 동안 몸담고 있는 형제의 말이, 그 공동체가 일을 시작했을 때 성 프란시스와 푸꼬의 정신을 본받는 자세로 출발했다고 합니다. 성 프란시스에 관해서는 아시리라 믿습니다. 푸꼬라는 분에 관해 잠시 말씀드립니다.
샤를르 드 푸꼬는 우리가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카톨릭 교회에는 잘 알려진 분입니다. 그는 사하라 사막의 성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샤를르는 1858년 9월 15일 태어났습니다. 그는 여섯살 때 어머니를 잃었고 이어 아버지도 잃었습니다. 아버지는 중한 폐병으로 돌아 가셨습니다. 그는 16세부터 26세 까지 불가지론자로 살았습니다.(오늘의 샤를르 드 푸꼬,분도,17쪽).
그는 사촌 누님의 실천적 신앙을 통해서 기독교 신앙을 만납니다. 그 사촌 누님은 착한 마음씨,부드러움 그리고 침묵을 소유한 분이었습니다. 여러 달 동안 푸꼬는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하나님,만일 당신이 계시다면,당신을 알게 해주십시요”
회개한 푸꼬는 하나님 사랑과 사람 사랑을 위해 헌신합니다. 그는 1888년 11월에서 1889년 1월까지 성지에 갑니다. 1월 6일과 그 후 몇일 동안 나사렛을 방문합니다. 이것은 그에게 큰 변화를 가져옵니다.
그는 아주 작고 단순한 수도 가족을 꿈꿉니다. 한 신부가 예수님에 대해 이런 말을 해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얼마나 맨 끝자리를 차지하셨던지 아무도 결코 그 자리를 뺏을 수 없었소” 이것은 푸꼬의 마음에 영원히 새겨진 말이 되었습니다.
1897년 그는 한 수도원을 떠나면서 두 가지 서원을 합니다(종신 순결,종신 청빈). “이 청빈의 서원으로 나는 내 소유로나 내 사용으로나 가난한 직공이 가질 수 있는 것 이상을 결코 가지고 않기로 약속합니다.”
그는 새벽 새벽 두시에 일어나 아침 8시까지 기도드렸습니다. 그는 수도복을 입지 않고 일꾼들의 작업복을 입었습니다. 그는 후에 이런 결심을 합니다:“오늘 저녁에 순교해야 할 것처럼 오늘을 살자”
1904년 7월 푸꼬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나는 그날 그날 하나님이 주시는 순간마다 그븐의 뜻을 행하기로 노력하며 살아 간다”
1914.8.24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븐이 원하는 것을 원하는 것이고, 그분의 뜻이 모든 것에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것”이다.
푸꼬에 의하면,복음을 전하기를 열망하는 자는 우선 그것을 생활함으로써 전하기 시작해야 한다.
“형제와 자매들은 살아있는 전도가 되어야 하나니, 그들은 각자가 복음생활의 본보기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을 봄으로써 사람들은 기독교적 생활이 어떤 것이며 복음이 어떤 것이고 예수가 어떤 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야 한다”(권고,28조)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요일 3:14)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3:17)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의 모습으로 낮아지셨고 가장 낮은 자리를 스스로 취하셨으며 십자가의 죽음까지 감당함으로써 그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사랑은 우리를 강권합니다. 이 사랑을 체험한 사람은 그 사랑의 전달자가 됩니다. 그 사랑의 증인이 됩니다. 그 사랑을 온 몸으로 살아 가고자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입니다.
3. 하나님의 사랑의 절정은 십자가에 나타난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로 말미암아 살게 해주신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한 속죄제물이 되셨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최종적으로 증명하였습니다.
그 이상의 증거는 이제 없습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요일 3:1)
사도 요한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셨는지를 생각하여 보라고 말합니다.
죤 스토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탁월한 저서에서 십자가의 의미를 우선 네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1)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주님의 죽음은 자발적인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죽음은 우리를 위한 죽음이요,우리에게 은혜를 베풀기 위한 죽음이었습니다.
선한 목자이신 주님을 양들을 위해 그의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최후의 만찬이 있던 다락방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2)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기위해 죽으셨습니다.
벧전 3:18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주님께서는 화목제물로 죽으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3) 주님은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먼저 제거되어야 하는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죄입니다.
먼저 죄가 제거되어야 합니다.
성경대로 주님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사도들은 한 목소리로 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주님은 그의 피로 우리를 우리 죄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4) 주님은 우리의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죽음은 인간의 불순종에 대한 심판으로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죄 때문에 영적으로 죽었고 육신도 죽을 수 밖에 없으나,
주님께서 나 대신 나의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이 놀라운 십자가의 복음을 믿으십니까?
이 복음이 믿어질 때 우리는 자유함을 얻습니다.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의 죽음이 나 위한 죽으심인 줄 깨닫고 믿을 때
우리 각 사람은 영적인 자유와 해방을 경험합니다. 죄의 사슬이 끊어집니다.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새창조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맺는 말> 우리의 신앙생활은 십자가에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십자가 아래 계속 머물러야 합니다.
십자가 아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하는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십자가 아래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십자가 아래서 나를 발견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십자가 아래서 이웃을 발견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십자가 아래서 고난의 의미를 깨닫는 사람이 신자입니다.
십자가 아래서 원수까지 용서하고 사랑하는 능력을 경험하는 사람이 주님의 제자입니다.
십자가 아래서 우리는 온유와 겸손을 배웁니다. 너그러움과 용납을 배웁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사랑하는 법을 배웁니다.
그 몸의 지체들을 돌보는 섬김을 배웁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십자가 공동체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의 우리의 능력입니다.
새해에는 우리 모두 십자가 아래서 사는 법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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