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히브리서

[히 12:1] 예수를 바라보자 _ 전병금 목사

'코이네' 2024. 3. 23. 12:04

예수를 바라보자

12:13

강남교회/전병금 목사

 

 

() 프랜시스는 젊었을 때에 성() 다미안 교회에서 기도하다가 환상 중에 예수님의 얼굴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온전한 삶의 변화를 체험하게 되었고 거룩한 성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합니다.

모라비안 교회를 세운 진젠돌프 백작도 젊은 시절 어느 미술관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의 초상을 보는 중에 신령한 주님의 얼굴을 보게 되는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뒤에 그는 복음 전도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19세기 대설교가였던 스펄전 목사도 소년 시절 "땅 끝에 있는 백성들아 나를 바라보고 구원을 얻으라"고 하는 음성을 듣고 난 후 새사람이 되어서 유명한 설교가가 되었습니다. 이 스펄전 목사에게 하루는 젊은 신학생 한 명이 찾아와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 목사님도 낙망하신 일이 있습니까?" 그러자 스펄전 목사는 다음과 같이 놀라운 답변을 했습니다. "적어도 지난 20년 동안은 낙망해 본 적이 없네. 나는 그 동안 하나의 중요한 원리를 내 삶에 적용하고 있었지. 그 원리란 계속해서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라네. 나는 하루도 주님을 생각하지 않고 지나쳐 버린 일이 없네. 그때 이래로 나는 낙망을 모르고 살아왔지." 스펄전 목사가 유명한 설교가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예수만을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이 기록되어진 배경은 주후 49년 글라우디오 칙령(18:2) 이 후 기독교가 무서운 박해를 받던 때의 일입니다. 이 박해는 곧 끝날 것 같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핍박이 심해져만 갔습 니다. 연이어 주후 64년에 등장한 네로의 박해는 정말 견딜 수 없는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그 당시 로마의 박해자들은 그리스도인들만 발견되면 사형에 처했습니다. 그것도 산채로 화형에 처하거나 맹수에게 던지는 잔인한 방법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죽였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처음에는 기도하며 신앙의 힘으로 그 박해를 견뎌갔으나 박해의 도가 심해지면서 지치고 피곤하여 신앙을 포기하는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교회를 버리고 떠나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기독교가 이 땅에서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있을 때 무명의 교회 지도자가 히브리서를 써서 믿음의 경주를 포기하지 말 것을 강권하였고 당시 교인들은 이 글을 회람하여 읽게 되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당시처럼 무서운 박해가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사단의 전술 전략은 더욱 교묘해져서 현대인들은 박해가 아니라 안락한 삶 때문에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고 있습니다. 물질 만능주의에 사로잡힌 현대인들은 늘 눈에 보이는 것만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신앙의 눈은 이미 감겨버렸고 그저 오늘 하루를 편하고 즐겁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게 여겨질 뿐입니다. 이런 불신앙의 시대에 하나님은 오늘의 말씀으로 우리를 깨우치고 계십니다.

 

1. 믿음의 선배들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훌륭한 믿음의 선배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별히 주기철 목사님과 같은 분은 우리에게 영원히 기억될 신앙의 위인입니다. 일제의 억압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일제는 우리의 문화유산을 모두 없애버리고 우리의 민족정신을 앗아가기 위한 전략의 일환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하였습니다. 이 때 주기철 목사님은 무서운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며 싸우다가 그만 비참하게 평양 감옥에서 순교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오늘의 한국 교회의 성장은 주기철 목사님과 같은 분들의 순교의 피로 얻게 된 열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1절에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2장의 서두에 나오는 "이러므로"라는 접속사는 11장의 말씀과 12장의 말씀을 연결시켜 줍니다. 1139절에 나타나는 "이 사람들이"11장에 나타나는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을 지시하고 있는 말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는 구약의 위대한 믿음의 선구자들이 마치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습니다. 여기에 기록된 사람들은 비록 삶의 여건과 개인적인 기질은 서로 달랐지만 모두 하나님을 향한 굳건한 믿음을 지닌 사람들이었습니다. 특별히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이전의 사람으로서 아벨과 에녹과 노아가 등장합니다. 실로 아브라함 이전의 구약의 많은 인물 중에서 이 세 사람은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아벨은 하나님께 참된 제사를 드린 사람입니다. 그는 형 가인의 시기로 말미암아 살해당하여 인류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또 에녹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경험하는 죽음을 맛보지 않고 승천한 최초의 인물입니다. 그리고 노아와 그의 가족은 하나님의 홍수 심판때 유일하게 구원받았습니다. 최초의 예배자요 순교자인 아벨, 또 죽음을 맛보지 않은 사람 에녹, 그리고 홍수에서 구원받은 사람 노아... 이들이 이처럼 하나님의 엄청난 복을 받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바로 믿음으로 인해 그들이 복의 사람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믿음의 사람들은 놀랍고 신비한 하늘의 복과 상급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은 이처럼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이 우리의 신앙의 경주를 지켜보고 있다고 전합니다.

이 말은 신앙의 선배들의 믿음의 전통이 끊어지지 않고 오늘 우리에게 전해져 오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 말 안에는 그들의 신앙을 본받아 오늘 우리들도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는 당부가 숨겨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12:1) 경주해야 하는 것입니다.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는 마치 경주자가 경기에 앞서 거추장스러운 옷을 벗어버리는 것처럼 신앙의 경주에서 장애가 되는 죄를 벗어버리라는 말씀입니다. 위대한 믿음의 선배 아벨, 에녹, 노아와 같이 우리를 얽어매는 죄와 세상의 유혹을 뿌리쳐야 합니다. 이와 같이 모든 죄의 유혹을 뿌리쳐 버리고 믿음의 선배들의 신앙의 본을 받아 믿음으로 이 세상을 이겨나갈 때 언젠가 우리도 믿음의 후배들에게 귀감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믿음의 선배들에게는 자랑거리가 되어야 하며 장차 우리 다음에 올 믿음의 후배들에게는 좋은 본보기가 되어야 합니다. 아름다운 신앙의 전통이 이렇게 계속해서 물려져야 합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주 불려졌습니다. 아버지의 하나님이 바로 아들의 하나님이었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신앙이 바로 아들의 신앙으로 물려내려 갔던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의 전통을 후대에 내려주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믿음의 아버지에게는 반드시 믿음의 자녀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들은 우리의 자녀들에게 그리고 우리의 후배들에게 믿음의 어버이, 믿음의 선배가 되고 있습니까? 2. 우리는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훌륭한 믿음의 선배들의 본을 받는 것은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매우 유익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믿음의 사람들에게서도 허물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는 아브라함에게서도 허물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아내를 두 번씩이나 누이로 속여 자신은 위기에서 벗어나려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여 자신의 시종이었던 엘리에셀을 후손으로 삼으려고도 했으며 아내 사라의 여종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얻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믿음의 선배들이더라도 허물은 발견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지막 시선이 믿음의 선배들에게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마지막 시선은 늘 완전하시고 흠이 없으신 예수에게로 고정되어야만 합니다. 우리들의 믿음의 경주의 최종 목표는 예수입니다. 오직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는 예수뿐입니다. "예수를 바라보자"(2)는 본문의 "바라본다"는 동사는 마치 사냥꾼이 사냥감을 응시하듯 또한 화가가 그 모델을 주시하듯 곁눈질하지 않고 오직 목표만을 뚜렷이 바라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3)는 말씀의 "생각하라"는 동사는 마치 천문학자가 밤하늘의 별들을 세밀하게 관찰하듯이 "깊이 숙고하고 철저히 계산하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만을 바라보고 생각하는 일은 대충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최선을 다해 집중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진정 우리가 주어진 믿음의 여정을 경주하고 후에 승리하기 위해서는 이처럼 최선을 다해 예수만을 바라보고 생각해야만 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경주자라 하더라도 우리는 악한 본성을 지녔기 때문에 때론 죄의 유혹에 우리의 마음이 약해지고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바로 이 때 우리는 주님이 겪으신 고난을 생각해야 합니다.

초대 교회 당시 기독교인들은 유대교의 박해와 함께 로마 정권으로부터 가해지는 핍박으로 인해 그들의 생명은 마치 꺼져가는 등불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무자비한 핍박으로 인해 신앙을 저버리는 사람들도 속출하였습니다. 하지만 십자가의 예수만을 바라보며 끝까지 자신의 신앙을 지켜갔던 수많은 순교자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순교자의 본을 받아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나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 영원한 승리자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정신과 의사인 빅터 프랭클(Victor. E. Frankle)"죽음의 수용소"라는 책에 의하면 독일군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는 유대인중 많은 사람이 1944년 성탄절에서 1945년 정초까지 약 2주 동안에 죽었다고 합니다. 사인(死因)은 질병이나 고문이 아니었습니다. 1944년 수용소의 유대인들은 크리스마스 이전에 석방될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해 성탄은 가족들과 함께 보낼 것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탄절이 지났는데도 전혀 석방될 기미를 보이지 않자 너무 절망한 나머지 마지막 살 기력을 잃어버리고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라볼 희망이 사라지고 살아야 할 이유를 잃어버리자 그 어려운 고통의 시간 속에서도 견뎌왔던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된 것입니다. 그로부터 4개월 후에 독일은 전쟁에서 패하고 수용소에 갇혀 있던 유대인들은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만일 그들이 희망을 잃어버리지 않고 4개월만 참았더라면 그들은 모두 살 수 있었고 해방을 맛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참 소망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살아야 할 진정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자는 쓰러지지 않습니다. 마침내는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위대한 신앙의 승리자로 우뚝 서게 될 것입니다.

 

3. 우리는 끝까지 절망하지 말고 믿음의 경주를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3절에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에 기록된 것처럼 초대 교회 성도들은 피곤하고 낙심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무서운 박해로 인해 늘 죽음을 생각하며 살아가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 믿음을 지켜가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믿음의 경주를 계속할 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강권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자기를 거역한 인간들의 죄악을 다 참으시며 오히려 용서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 아무리 심하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만큼 괴롭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자존심이 아무리 상처를 입었다 하여도 옷벗기우고 뺨을 맞고 침뱉음을 당한 예수님처럼 모욕을 당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가 때로 외로움으로 힘들어 하지만 모든 사람들 심지어 자신의 제자들마저 떠나버리고 홀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외로움만큼은 아닙니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처럼 고난을 당하고 모욕을 입고 외롭게 죽으신 것은 바로 우리를 위함입니다. 그 분을 생각할 때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넉넉히 이기고도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으로 인해 신앙의 경주를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우리를 더욱더 온전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으며 우리의 아픔을 이미 다 체험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인내로서 믿음의 경주를 이어가야 합니다.

인생과 마찬가지로 믿음의 경주 또한 단거리 경주가 아닙니다. 오랫동안 많은 어려움을 견디며 이겨내야 하는 마라톤 경주와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덕목은 바로 인내입니다.

 

영국의 수상까지 지낸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경은, 어렸을 때, 그가 태어난 고장에 있는 공립학교에 다녔습니다. 당시 윈스턴 처칠은 학교 성적이 중간에도 미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말썽꾸러기 학생으로 유명했습니다. 만일 그의 아버지가 그 고장의 지주인 랜돌프 처칠만 아니었으면, 윈스턴 처칠은 졸업은 커녕, 일찌감치 퇴학당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던 윈스턴 처칠은 공립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거쳐, 영국 군대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군대에서 자신의 가치를 발휘하기 시작한 윈스턴 처칠은, 결국 67세에 영국의 수상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윈스턴 처칠의 뛰어난 지도력과 감동적인 연설은, 세계 제2차 대전 내내, 영국 국민에게는 물론, 연합군으로 참전한 전세계 국민들에게 커다란 용기를 부어주었습니다. 세월이 흘러서, 윈스턴 처칠이 말썽만 피웠던 모교에서 졸업식 연설을 부탁했을 때, 윈스턴 처칠은 어린 학생들 앞에서, 그의 생애에서 가장 짧은, 그리고 가장 진지한 연설을 했습니다. "학생 여러분, 무슨 일이 있어도 포기하지 마십시오. 끝까지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절대로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렇습니다.

인생이라는 마라톤에서 승리하는 비결은 인내입니다. 인내하는 사람, 포기하지 않는 사람만이 마지막 승리를 맛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의 경주에서 승리하는 비결 또한 인내입니다. 많은 박해와 어려움 속에서도 고난의 길을 앞서 가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인내하는 사람이 결국 신앙의 경주에서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라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8:35) 그러므로 주님의 그 사랑을 믿고 의지하며 인내하는 사람은 결국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비록 어려운 일이 닥쳐온다 할지라도 우리는 인내하며 믿음의 경주를 계속해야만 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여정을 지켜보는 신앙의 증인들이 있으며 우리의 아픔을 함께 하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선배들 앞에 그리고 주님 앞에 부끄럽지 않게 위대한 믿음의 사람으로 섭시다. 결코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맙시다. 믿음의 주요,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만을 바라봅시다.